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0화 (30/166)

제 2장. -가시의 길- (26)

근 3년 가까이 계속된 데스 워리어의 추격전은 그들의 현재 목적이  바

로 킬츠 일행을 전멸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질렸어........ 저 녀석들, 우리가 그렇게 싫은가? 이제 그만 떨어져 나갈

때도 된 것 같은데 오히려 요즘은 추격의 강도가 더 강해졌으니..."

임시로 쉬고있던 바위언덕 아래의 움푹 들어간 구릉에서 루디는 짜증스

럽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는 킬츠가 자신의 검

으로 대충 잘라주어 겨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직길드의 마법사라

는 것을 나타내는 청색의 구슬문양이 들어간 로브도 이미 그 고풍스럽고

중후한 분위기를 상실해 버린  지 오래였다. 너덜너덜해진  옷감과 검게

때가 타고 색이 바랜 모습은 거의 부랑자의 누더기를 연상시켰다.

"쉽게 결계 안에서 보내주지 않으려는  건가... 아무튼 데스나이트 들도

필사적이야. 루디형의 화염 주문으로 숲에 불을 질렀지만 아마 그것으로

도 많은 시간을 벌지는 못해. 시간이 없어......."

바닥에 널 부러진 체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킬츠는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면 어두운  하늘 저편으로

희미하게 태양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이미 그들에게 낮과 밤의  개념이라

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데스 워리어들은  낮이라고 몸을 사리지 않았고

밤이라고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밤, 낮으로 쉴새없이  달리고,

틈이 생기면 휴식을 취하는 불안정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킬츠와  루디였

다.

킬츠는 이미 데스워리어에 대한 맹렬한 적의는  상실하고 있었다. 물론

보이는 데로 죽이기는 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거나 승산이 없다  싶으면

감정을 살려 무모하게 덤비지 않고, 정당히 싸우며 틈을 보아  내빼었다.

카름을 살해한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덧없이 죽음을 당한 카름을  위해서

라도 최소한 이곳 결계안 공간에서  만큼은 자신의 성질을 절제해야  했

다. 그래야만 이곳에서 살아남아 고이 간직해온 카름의 머리카락을 제대

로 된 땅에다가 묻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름의 몸은 어느 어두운

절벽 아래에서 썩어갔음이 틀림없었고 잘린 머리는 별 수 없이 도주도중

어느 언덕에다 묻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들고 다니기엔 여러 가지로 무

리가 있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래도 약간의 머리카락을 잘라  품안에

고이 간직해 두고 있었다.

"결계의 끝까지 대략  1억 2000만 세션(약 960km)정도  남았다. 하루에

천 세션씩 이동한다면 12일 정도 걸리는 거리다."

바위언덕 위에서 멀리 지평선을 보고있던 크라다겜은 잠시 후 소리  없

이 내려와 킬츠와 루디에게 딱딱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시간동안 데스워리어들의 공세는 거의  전력을 다한

강력한 것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숲의 불길을 피해

이곳을 포위하려 움직이고 있겠지."

"즉, 한시라도 빨리 이동해야 한다는 말이네?"

킬츠가 민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약  보름 후면 이 지

긋지긋한 결계 안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사실이 킬츠의 기운을  충만하

게 충전 시켜주고 있었다.

"맞다. 그런데...."

"응?"

"지금의 너의 감정, 그것은 희망인가?"

"그.. 그럴 테지? 아마...."

"좋은 감정.... 나도 힘을 채워놔야만 한다."

"그, 그야... 물론이지."

"그럼, 부탁한다 킬츠."

그리고 크라다겜은 천천히 킬츠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

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특별한 감정들을  더욱 자세하게 음미하기 위

해서. 크라다겜은 킬츠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몸을 숙였다.

"정말 도망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놈들인데, 크크크.... 정말 재미있어."

낮과 밤을 가릴 수 없는 어둡고 음산한  하늘, 기괴하게 비틀리고 변형

되 버린 나무들. 군데군데에 대기하고 있는 강인한 데스 워리어들.  실로

배경과 인물이 조화를 이룬 살벌한 광경이었다.

"내가 설마 크라다겜을 상대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크라드

레피(kradrepih)?"

거대한 근육과 터져 나올 듯 위압적인 살기. 데스나이트의 파일팽과 맞

먹을 크기의 무시무시한 검은 광택의 칼을 한 손에 들고있는 회색  피부

의 강인한 전사. 바로 그가 데스 워리어의 마스터인 크라다렛(kradarret)

이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마족 중에서 가장 약한 마음

을 가진 어리석은 종족. 태어날 때부터  파리카알 군주에게 살육과 파괴

의 감정을 이식 받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무능력한 놈들이지. 그러니

인간 따위를 돕고있는 지금. 자네와의 승부는 이미 뻔한 게아닌가?"

어깨장식이 길게 나온 어두운 색조의  특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있는

회색 피부의 한 마족이 데스워리어 마스터인 크라다렛의 뒤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크라다렛과 비교했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체구. 그

러나 그는 마계의 3대 전투집단  중 하나인 데스 위자드를 이끌고  있는

데스 위자드의 마스터인 크라드레피였다.

"어쨌든 늦었군. 이제 크라이막스인데 말이야. 크크크...."

"아니, 재미있는 것을 손에 넣어서 말이야. 그것 좀 손보느라 시간이 걸

렸지. 그것보다 다크휴먼 녀석들.... 인간  주제에 신기하게도 마계의 3대

군대와 전부 계약을 맺었단 말이야? 물론 무척 비인간적인 놈들이긴  하

지만....... 재미없게 감정도 없고."

"인간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감정이 풍부해야지. 그래야 죽이는 즐거움

이 있어. 크크크...."

"물론. 그래서 짜증나는 놈들이야. 그런데 목적을 알 수가 없어."

크라드레피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하자 크라다렛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 뭐, 이유야  어때. 이렇게 지상에  나왔으니 어쨌든 고마울

뿐이지.... 즐겁잖아? 이건 완전히  축제라구. 아니지, 아직 아닌가?  피의

축제가 벌어지기까지는......."

"어쨌든, 난 그 다크휴먼들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다. 그러니 크라다겜

과 인간들을 결단낼 때 이것을 대신 가져가 봐. 크라다겜은 몰라도 인간

한테는 조금 쓸모가.... 아니지. 재미가 있을 테니."

크라드레피는 망토를 펄럭이며 뒤를 돌아섰다. 그리고 희미하게 사라지

기 시작했는데 그가 사라진 자리엔 한 사람 형상의 모양을 한  무엇인가

가 서있었다. 그것은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으며 긴 머리카락과 흰 피

부를 가진 인간 소녀의 모습이었다.

"크크크크.... 하하하하! 재미있는걸 만들었는데! 역시  크라드레피야! 하

하하...."

그것을 본 크라다렛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앞에서 대기중인 수많은

데스워리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미 루디가 질러놓은 숲의 불길은 데

스 위자드들에 의해서 전부 사라져 있었다.

"자! 불은 꺼졌다. 전사들이어! 우리는 원래 파괴를 위해 태어난 몸. 이

제는 그 숙명을 지켜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달려드는 데스워리어들. 이미 상대를 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

었다. 오로지 최소한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몇몇의

데스워리어들만 베어버릴 뿐.

"셋의 화염  나의 바람!  불꽃의 바람이어  불어와라! 화이어  윈드(fire

wind)!"

루디는 달리면서 마법을 사용했다. 보통 마법사라면  정신을 집중할 수

없어서 이동도중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테지만 이미 루디에

게 그런 문제는 남아있지 않았다. 살기 위해. 걷건 달리건, 그 어느 때라

도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몇몇의 데스워리어들이 불어오는 화염의 바람에 휩쓸려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그것은 일시적인 효과일 뿐. 아무리 네 개의 원소를 조합한 마법

이라도 다수를 상대로 펼친 이상 생명까지 위협할 수는 없었다. 단지, 달

리는 동안 추격할 수 없게 약간의 시간을 벌뿐이었다.

가장 선두에선 크라다겜이 질풍같이 고속으로 달리며  하나, 둘씩 데스

워리어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한번에 50명쯤 덤빈다면 모를까, 크라다

겜에게 소수의 데스워리어들은 그저 무력한 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50명, 아니 현재는 300여명  이상의 적들에게 포위되지 않

도록 루디가 후방의 추격자들에게 자신의 화염 원소 마법의 정수를 쏟아

붇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디를 노리고 양옆의 빽빽한 숲 사이에서 달

려드는 몸집 작은 마수나 억지로 매복하고있던 소수의 데스  워리어들은

킬츠가 상대해주고 있었다.

마지막 보름에서 그런 식으로 추격을 따돌리고 잠시 휴식하고 다시  추

격을 따돌리고 하는 것을 계속 반복한지도  이미 열흘이 지나갔다. 킬츠

와 루디는 누적된 피로와 체력저하로 거의 한계의 상황에 닿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의 일념. 바로 이곳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 막판 버틸 수 있는  힘을 내주고 있었다. 루디의  알마스가 다

떨어지면 킬츠가 몇 배의 힘을  발휘하며 루디의 적까지 전부  커버했고

루디가 약간이라도 알마스가 회복되면 그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

여 최대한의 적들을 상대했다.

"마법 좋고! 근데.... 헉헉......... 죽겠네........ 달리면서 마법 쓰는  것은 매

직길드의 마도사 할아버지들도 불가능한 기술일 꺼야......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루디는 달리면서 뒤를 향해 사용한 마법으로 추격하는  데스워리어들을

날려버리고는 잠시 멈추어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체

력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질주를 한 루디였다.

그러자 킬츠도 일단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도 호흡을 가다

듬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

져 있었다. 추격하는 데스워리어의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데...... 소리가 안 들려."

"헉헉.... 하-압...... 그래? 그럼 이제야 추격을 포기한 건가?"

루디는 이제 거의 진정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추격하던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

다.

"소울아이를 사용해도 주위에 위협적인 다른 생물은 거의  없어.... 아무

리 어둡다 해도 이제는 상당히 적응 됐으니 어느 정도 먼 거리라면 어렴

풋이는 보이고......"

킬츠는 루디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뒤를 바라보았다.

루디는 벌써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이제

는 거의 어둠에 적응된 킬츠의  두 눈에 무엇인가가 희미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어...."

"나도, 보인다. 마수인가? 아니면 데스워리어....."

둘은 순식간에 긴장 상태로  바뀌며 뒤로 펼쳐진 좁은  길을 응시했다.

무엇인가가 그곳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1000세션, 800세

션, 600세션... 그것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육안으로 형

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500세션 애로 거리가 좁혀지자 킬츠와 루

디는 자신들에게로 다가오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서서히 파악할 수 있었

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흙으로 더럽혀진  검고 긴 머리카락과 힘없

이 감긴 눈, 생기 없는 흰 얼굴, 작은 체구를 가진 인간 소녀의 모습이었

다.

그리고 곧 킬츠와 루디의 얼굴은 경악의 놀란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은 바로 3년 전 데스워리어에게 목이  베어져 죽임을 당한, 착하고

아름다웠던 장님소녀인 카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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