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29화 (29/166)

제 2장. -가시의 길- (25)

"................"

그것은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분명 들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검에  복부

를 관통 당한 데스 워리어의  쓰러지기 전까지의 잠깐 동안의  침묵. 그

지나가는 시간동안 킬츠의 마음엔  데스워리어의 침묵의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

다크 핵사곤의 결계내 공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치 어느새 3년. 킬

츠는 충격적이었던 카름의 죽음을 자신의 깊은 곳에 묻어둔 체, 더욱 좁

아진 생존의 길을 쉴새 없이 달려가야만 했다.

원체 좁았던 결계 내공간에서의 생존의 길을 더욱 좁게 만든 것은 바

로 데스워리어 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무장을  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의

무기만 사용할 뿐이었다. 사납게 발달된 근육과 드러난 회색 빛의  피부.

언제나 자신의 상대만 바라보는 섬뜩한 보랏빛의 눈동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실력이었다. 직립을  하고있으며 손을 자

유로이 사용하는 인간형의 생명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강한 힘과 속도, 어

떠한 망설임도 끼어 들지 않은 순수한 파괴를 위한 몸놀림. 그것은 전투

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숫자였다.

데스나이트들이 결계 안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숫자는 대략 30여명이었

다. 그러나 현재까지 데스나이트 마스터 크라다겜과 킬츠, 루디가 쓰러트

린 데스워리어의 숫자만 해도 100여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을

추격하고 있는 데스워리어 집단의 숫자 역시  대략 100여명이었다. 그렇

기 때문에 데스나이트의 실력이 데스워리어보다 한 단계 위라고  하더라

도 위험 면에선 후자가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마계의 상징적인 기단. 그  숫자는모두 합하더라도 100

여기가 안 된다. 그러나  데스워리어는 실전의 전투집단. 내가  파악하는

그들의 규모만 해도 5000여명 이상이다."

데스 워리어에 대한 크라다겜의 말은 카젯과 루벨에게 절망적으로 작용

했다. 그러나 절망만 하며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쫓기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편해지려는 욕망보다는 생존하려는  욕망이

더 강했다. 그것은 살아 남고자 하는 오기였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인 다

크 핵사곤의 결계 내에서 탈출하려는 계획은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었

다.

"킬츠! 세 녀석 다 해치웠어?"

"물론이야."

"하지만, 크라다겜의 말로는 곧 추격대의 본대가 따라 붙을  거래. 내가

이 숲에 불을 지를 테니까 먼저 크라다겜과 합류해있어."

전열에서 멀찌감치 달리며 길을 확보하고 있던 크라다겜을 지원하고 있

던 루벨은 후방에서 추격하는 세 명의 데스나이트를 막아내던  킬츠에게

로 되돌아 왔다. 한껏 더러워지고 군데군데  보풀이 일어날 때로 일어난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있는 루벨이었지만 행동은 여느 전사 못지 않게 민

첩했다. 지난 3년간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성장이었다. 그리고  마법의

사용은 여느 경험 많은 중견마도사 보다도 능숙히 사용했고 불필요한 낭

비 없이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그것은 역시  앞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 하지만 조심해 루디형."

킬츠는 루디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한참 앞에서 길을 가로막는  마수와

데스나이트를 베고있는 크라다겜에게로 달려갔다. 3년 전이라면 결코 남

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전부 짊어졌을 킬츠였으나 이미 3년

의 시간은 킬츠와 루디 두 사람 사이에 서로 완벽한 신뢰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즉, 킬츠는 루디가 자신의 목적에 어김없이 일을 성공할 것을 믿

고 있었던 것이었다.

킬츠가 전방으로 달려가자 루디는 입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을 씨익  지

으며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집단으로 통 구이나 되 버려라... 망할 데스나이트 들아!"

루디는 소리치며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셋의 화염과  하나의 바람!   퍼부어져 불태워라! 화이어   셔터!(FIRE

SHATTER)"

그러자 하늘로 치켜올린 루디의 두 손에서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

들을 향해 수많은 불덩어리의 조각들이 퍼지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에

맞은 수십 그루의 기형나무들은 곧 화염에 휩싸여서 맹렬히 타오르기 시

작했다.

"빨리 빨리 펴져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게............"

루디는 점점 주위로 번지며 뜨겁게 타오르는 나무들을 보며 초조한  표

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만 더 이동하면 결계의 바깥쪽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위치에 그들은 도달해 있었다.

그래도 아직 전력으로 보름 이상은 이동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지난 3년과 비교할 때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긴 시간같이 느껴지는 루디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지금 죽는다면 지

난 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압박감 때문이기도 했으며 최근  들

어 추격과 습격에 전력을 쏟고 있는 데스 워리어와 각종 마수들의  공격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보다 배 이상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목욕도 하고싶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고 싶고, 맘  편하게 잠

도 자고싶고, 인간다운 음식도  먹어보고 싶단 말이다! 이제,  이제 겨우

보름 남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악을 질러버렸다. 어째서  지금까지 자신이 미치

지 않았을까. 그것이 무척 신기한 루디였다.

끊임없이 달려드는 마수들을 단칼에 끊임없이 베어  넘기며, 중간 중간

매복해있던 데스 워리어들도 가대한 데스나이트의 전용병기, 파일팽으로

두 조각, 혹은 네  조각으로 갈라버리며 크라다겜은  거침없이 전방으로

질주했다.

전에는 마계의 데스나이트 마스터였고 지금은 마치 운명의 신 데스튼에

게 버림받은 듯 막강한 고생길을 걷고있는 인간들을 지켜주는 수호자 역

할을 하고있는 크라다겜은 수호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전에는  그저 욕망과 본능뿐인 살육과

파괴였으나 지금의 살육과 파괴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

다. 자신에게 인간의 감정을 공급해 주던  마계 군주와의 연결이 끊어진

지금, 인간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크라다겜은 킬츠, 루디와  함

께 지내면서 조금씩 인간을 닮아 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더욱 절실

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감정들. 물론 자신

이 직접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고 킬츠나 루디의 감정을 먹으면서 자연스

럽게 축적된 것들이었는데,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풍부한 감정과

솔직히 그 감정을 드러내는 킬츠와 괴로움, 절망을 극한으로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킬츠에게 농담을 던지는 루디의 모습을 보며 새로

운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가 본능에 지배당할 때 살육과 파괴에서 느꼈던  격

렬한 쾌감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담담하고 잔잔한 즐거움. 소박하

고 아련한 즐거움.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즐거움이었다.

전방에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이는대여섯 마리의 덩치 큰 마수들이  포

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세 마리는  크라다겜의 파일팽에 의해 형체

가 뭉그러지며 터져 버렸고 나머지 세 마리는 동시에 몸통이 가로로  두

동강 나버렸다. 단 두 번의 움직임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주위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 쌓인  넓지 않은 사잇길이었기 때문에

적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장점인 '다수' 라는 점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

했다. 쉽게 사면을 포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후방의 추격자들은  킬츠

가 적절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3년 동안 믿음직한 실력으로 성장한 킬츠

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크라다겜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후

방을 맡길 수 있었다. 킬츠는 동시에  데스워리어를 다섯까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라다겜은 변화하는 킬츠의 모습에 무척 관심을  가졌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실력뿐만 아니라 육체가 성장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

을 땐 자신의 가슴에도 오지 않던 작은 키의 모습이었는데 3년 동안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쑥쑥 자라  지금은 거의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키로

자라있었다. 상처투성이가된 몸에는  어느새 균형 잡힌  강인한 근육이

생겨 있었다. 얼굴은 아직 어려 보였지만, 실력마저 어리진 않았다.

크라다겜은 자신의 어릴 때의  모습을 기억해 보았다.  그것은 700년도

더되는 옛날의 일이었다.

마족은 대략 1000년 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데 마계나 지상계나  시

간의 흐름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그것은 지상에서도 적용되는  일이었

다.

마족은 태어나서 20년 정도의 성장기를  거쳐서 성체의 모습과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대로 모습을 900년 이상 유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20년의성장기와 700년의 성인기를 지내면서 킬츠나 루디가 말하던 소위

'추억' 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죽이며, 오직  파괴하

며......... 그렇게 지내왔던 700년이었다.

그때 좁은 나무 사이에서 좌우로 두 명의 데스워리어 들이 크고 날카로

운 마계의 칼을 치켜들고 기습해왔다. 그러나 크라다겜은 무심하게도 왼

쪽의 데스워리어의 배를 발로 차버렸다. 크라다겜의 힘과 돌격해오던 데

스워리어의 속도가 맞물려 그 데스워리어의 배를 검은 피를 튀기며 터져

버렸고 크라다겜은 바로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등에 부딪치기 직전의 데

스워리어의 검을 오른팔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있던 파일팽

으로 무방비의 데스워리어를 순간적으로 두 동강 내버렸다. 사방으로 검

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크라다겜은 다시 정면으로 돌진해 달려갔다. 좁은 투구의 사이로 먼 곳

의 하늘이 들어왔다.

어둡고 음침한 하늘, 그것은 그가 평생  보아왔던 하늘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같은 하늘이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의 하

늘은 저 어둠을 넘어서 눈부신 태양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인간들이

성의전쟁이라고 불렀던 전쟁 때 한 번 본적이 있던 하늘. 그때는 껄끄럽

고 불쾌한 짜증스런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이 그때의 하

늘을, 지금의 하늘을 다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지, 그런 이

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그때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문득 그렇게 생

각하는 크라다겜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가장 커다란 증

거중 하나이기도 했다.

"크라다겜! 뒤는 루디형에게 맞기고 왔어.  이제 포위망이 느슨해질 꺼

야."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킬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인가 들으

면 기분이 즐거워지는 목소리.  색다른 목소리. 크라다겜은 투구  속에서

웃고있는 자신의 얼굴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이 다크 핵사곤의 결계를

벗어난다면, 이제 거추장스럽기만 한 이  투구를 벗어버리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면 더욱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나면 잠시 휴식을 하기로 한다."

"그래? 그거 다행인데, 크라다겜. 난 이제 많이 지쳤다구."

"..............그래서 휴식을 하는 것이다."

크라다겜은 여전히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무뚝뚝하

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말속엔  킬츠를 염려하는 지극히 인간다운

감정이 깊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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