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28화 (28/166)

제 2장. -가시의 길- (24)

'이 공격을 단 한번만이라도 흘릴 수 있다면.........'

나이트 마드리스의 휴페리온과 정면으로 부딪칠 때마다 세렌은  양팔이

저려오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세렌의 검술은 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 보내고 난 빈틈을 노려서 공격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평소의 수비적인 검술이건, 지금의 공격적인 검

술이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트 마드리스의 휴페리온은 맞부딪치는

순간에 바로 거두어지고 다시 연속으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맞부딪

치는 순간, 검 날을 비껴서 상대의 검을 바깥쪽으로 흘리는 세렌의 검술

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소모적인 충격 전은 오래 끌수록 세렌에게 불리하기만  했

다. 우선 힘과 속도를 비교했을 때  나이트 마드리스보다는 세렌이 약간

떨어졌고 체력과 경험으로 볼 때도 마드리스가 한 수 위였다. 오직 세렌

은 대련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더욱 날카롭게 집중될 뿐이

었다.

'희생이 없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결국 결심이 선 세렌은 자신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베어오는 마

드리스의 휴페리온에 자신의 휴페리온을 맞부딪쳤다.  그러나 이번엔 애

초부터 검 날의 방향이 비스듬하게 비껴져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공격

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래로 흘리며 위력을 중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드리스 정도의  속도와 힘이 담긴  휴페리온을 상대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 지는 의문이었다.  자칫하면 세렌의 목이 부

러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한번의 공격으로 끝을 낸다!'

그리고 두 개의 휴페리온은 허공에서 서로 교차했고 마드리스의 휴페리

온은 강렬한 쇳소리와 불꽃을튀기며 방향이  아래로 바뀌었다. 물론 기

세도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마드리스의 얼굴에 아차, 하는 놀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로 방향이 바뀐 마드리스의 휴페리온은 그대로 세렌의 옆구

리를 직격했다. 아무리 힘이 중화되었고 날을 세우지 않은 연습검이었기

는 했지만 가볍게 세렌의 피부를 찢고 갈비뼈에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무방비 상태의 마드리스의 왼쪽 어깨를 휴페리온으로 밀

어 치듯 강하게 가격했다.

"커억!"

마드리스는 짧은 비명과 함께 세렌의 옆구리에 박힌 자신의 휴페리온마

저 놓치며 50세션정도 뒤로 날아가 바닥에  쓰려지고 말았다. 그러자 세

렌의 옆구리에 박힌 마드리스의 휴페리온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고  세

렌의 옆구리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세렌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

다.

상처는 세렌이 훨씬 심각했지만 대련은 먼저 쓰러진 자가 패배하는  것

이었다. 마드리스는 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허무한 눈으

로 듯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렌은 조금씩 비틀거리며 천천히 미네아 공주가 서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상처에선 피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온몸이 피로에 지

쳐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세렌의 표정은 태연했다.  대련을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분노를 참고있는 굳은 표정이었다.

"운이.... 좋았던 거야!"

이윽고 자신의 앞에 우뚝 선 세렌을 바라보며 미네아 공주는  발악하든

억지의 말을 내뱉었다. 방금 전 세렌의 놀라운 실력과 과감한 판단을 정

확히 파악하지 못한 그녀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물론 파악을 했다 하

더라도 미네아 공주라면 같은 말을 했겠지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으으......."

낮은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세렌의 강한 위압감에  짓눌려버

린 미네아 공주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분한 표정으로 신음소리만  내

고 있었다.

"공주 님, 남의 마음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은, 지위도, 권력도, 돈도 아닙니다."

"그.... 그럼 뭔데....."

그리고 그런 불쌍한 공주의 표정을  바라보며 세렌은 표정을 원래대로

풀며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 것 아니지요. 오직 한가지, 자신의 마음뿐입니다."

세렌은 마치 어른이 떼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미네아  공주

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자신의 동료들

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공주 님.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지

요."

그러자 저쪽에선 루벨이 그 커다란 덩치로 재빨리 달려와 세렌을  부축

하며 돌아갔다. 나머지 펠린, 카젯, 다운크람, 키사르도 힐끔 공주의 일행

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세렌과  루벨을 따라 수련과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신관 호나즌도 세렌의 상처가 걱정됐는지 가볍게 인사하며  그들

을 따라나섰다.

이제 넓은 수련관 안의 텅  빈 공간에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클라스라인 법국의 첫 째 공주와 겨우 몸을 일으켜  욱신거

리는 어깨를 만지고있는 패러딘 나이트 한 명과, 움직임 없이 가만히 제

자리에 서서,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푹 빠져버린 한

소녀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핫하하...... 그래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 오셨구먼."

"휴, 그렇지요, 나도 일격을 당하고 쓰러질 땐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법왕청 안의 기사전용 티 룸(tea room)에서 나이트  마드리스는 자신의

친구이자 수많은 전장을 함께 헤쳐온  전우인 패러딘 나이트 NO8의 나

이트 퀵셀트에게 견습 패러딘 나이트의 수련관에서 일어났었던 일을  상

세하게 말해주었다.

나이트 퀵셀트는 제 88회 패러딘 나이트의 출신으로 그 동안의  혁혁한

공과 수훈, 그리고 호탕한  성격으로 클라스라인 내에서  유명하고 인기

높은 노 기사였다. 올해 나이 59세로 88기 패러딘 나이트 중에선 유일하

게 현역으로 활동하는 정정한 실력자였다. 지금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화이트 나이트와 크루세이더의 훈련 담당관을 맡고 있었다.

"이거, 이번엔 만만치 않은 신인들이 패러딘 나이트에 들어오겠어. 하하

하... 이제 늙은이는 설자리가 없겠는데? 하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야. 솔직히 90회 패러딘 나이트 선발선의 수석 패러딘 나이트였던

나이트 라피르제타 같은 인재를 귀족들의 모함 때문에 잃어버렸던  일이

얼마나 가슴에 후회를 남겼던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로니온 공 말씀이군요."

나이트 마드리스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고 나이트 퀵셀트는 단

호한 목소리로 말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귀중한  인재들을 귀족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할 생각은 없네. 그들은 지금 이  클라스라인이 평화로운지 알고 있지만

실제론 어느 때 보다도 위험한 상황이 곧 다가올 것이란 말일세. 그때를

위해서라도 91회의 선발 자 들은 우리가  지켜 줘야해. 그것이 은퇴하기

전에 조국 클라스라인을  위해 우리가 해야할  마지막 사명이  아니겠는

가."

"물론입니다. 퀵셀트 님.  이제 2년만 기다리면  상황이 나아질 겁니다.

그들은 무척 훌륭한 청년들이었느니 말입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다행이야....."

퀵셀트는 시종들이 가져온  마첼차를 음미하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오후의 태양 빛을 가득 머금은 아름다운 클라스라인의 모습이 그

곳에 펼쳐져 있었다. 설사 그것의 속엔 셀 수  없을 정도의 끔직한 부정

이 숨어있으며 또한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타락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반드시 지켜야할 그들의 터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천년 이상

을 굳건히 지켜온 그들의 선조 들이 남긴 마지막 긍지의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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