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27화 (27/166)

제 2장. -가시의 길- (23)

"공주 님과 저는 오늘 첫 대면이지요?"

"그래."

미네아 공주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고 세렌은 빳빳한 눈빛으로  공주

를 바라보았다.

"그럼, 방금 전 제게 하신 말씀은  정말로 부탁입니까? 아니면 명령입

니까?"

"당연히 부탁이야. 하지만 서리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미네아 공주가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보며 세렌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아니요, 거절합니다."

"!"

순간 미네아 공주의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며 놀람과 분노의  표정

이 그 빈자리를 메워들었다. 설마 세렌이  거절하리라 곤 상상하지 못했

는지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무험하다! 감히 공주 님의 부탁을!"

세렌이 가볍게 공주의 막가는 부탁을 거절해 버리자 뒤에 서있던  나

이트 마드리스는 심한 분노를 터트리며 발끈했다. 그러나 세렌은 담담하

기만 했다.

"패러딘 나이트는 라프나 여신 님의  신전기사, 특별히 레이디를 수행

해야할 의무는 없습니다. 게다가 미네아 공주 님은 오늘 처음 만난 것입

니다. 저는 적어도 제가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서로 오래 지내보고 마음

속으로 깊이 흠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말도 안돼! 내 부탁을 거절하다니..."

미네아 공주는 거의 폭발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단히 자존심

에 손상이 간 모양이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계속해서 세렌을 쏘아보았고

바득바득 이까지 갈고 있었다. 그러나 미네아  공주의 군을 정면으로 마

주보면서도 세렌의 의연한 태도에 변화는 없었다.

"흥...... 그렇게 자신이 대단한지 아나본데.....   아직 넌 패러딘 나이트

도 아니잖아! 고작해야 수행성적이 조금 좋을 뿐이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세렌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당당하게 말했고  미네아 공주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며 상기되었다.

"으으.... 좋아! 자신의 실력을 깨 닳게 해주지! 나이트 마드리드 님!"

"네! 공주 님."

"오늘 저희의 수행을 맡으셨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저 건방진 견습과 대련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에게.... 이렇

게 무례하게 대하는 자에게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력을   일깨워 주는

거예요!"

미네아 공주는 흥분된 목소리로 막 소리치며 마드리드에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는 세렌 뒤의 다섯 명은  전부 다 황당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카젯과 펠린처럼 직접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놀라는 사람과 루

벨이나 다운크람, 키사르처럼 속으로 놀라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

나이트  마드리드도 공주의 명령을 듣고 조금  당황했으나 자신의 지금

처지는 공주의 명령을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생

각해도 저 세렌이라는 견습 패러딘 나이트는  도를 벗어나 보일 정도로

건방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  세렌이 자신의 위치만 믿고

마구 행동하고 생각 없이 말을 하는 미네아 공주를 보며 속으로 무척 분

노를 하고있다는 사실까지 마드리드가 파악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나이트 마드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네아 공주 님."

"좋아요. 자 어때 견습 패러딘 나이트 씨?   설마 대련을 피하지는 않

겠지? 만약 대련을 피하거나 패배한다면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순순

히 나만의 나이트가 되는 거야."

세렌은 속에서 부글거리는  뜨거운 것들이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공주는, 모든 면에  있어

서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강압적이었고 일을   일방적인 명령으로, 일방

적인 자신의 뜻으로 전부 처리하려 했다. 남의 기분이나 감정 등은 하나

도 생각하지 않은 체, 그것은 세렌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문자그대로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지만 세렌은 최후의  인내심으로

한계까지  자신을 지탱하며 약간 떨리며  격양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다.

"좋습.... 니다. 대련을 하겠습니다."

다시 1층 수련관 안으로 들어온  세렌의 일행과 미네아 공주의  일행

은 텅 빈 넓은 수련과  안에서 서로 대치하듯 갈라져서  자리를 잡았다.

미네아 공주는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라는 듯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

게 서 있었고 미레나 공주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

다. 이미 그녀가 말리기엔 상황이 너무나 커져 있었다.

"이거 세렌이 정말 분노했나본데, 표정이 완전히 굳었어."

세렌이 연습용 휴페리온을 들고 나이트 다운크람과 대치하고 있는  모

습을 보며, 루벨은한숨을 내쉬며 그 큰 거구의 어깨를 들썩했다.

"저런.... 세렌의 모습은 오랜만인데. 왜, 있었잖아.   3년쯤 전에 그 정

통귀족 어쩌고 하던 놈들 사건 때......"

카젯이 기억난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다운크람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음, 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지만 1대 6의 결투는  조금 미련했었지.  마지막에  파울프가 세렌

의 강렬한 기운에 눌려 힘을 못썼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당시의 상황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있었던 다운크람은  그렇기에

더욱 당시의 세렌의 모습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짓눌릴

정도의 매섭게 주위를 휘감던 세렌의 압박감과 분위기를.

"누가...... 이길까?"

조용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펠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

자 키사르는 예의 냉철하고 감정이 희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친절

히(?) 말해주었다.

"나이트 마드리스는 제 89회  패러딘 나이트  선발전에서  합격. 당시

성적이 총 벌점 41점, 마지막 선발 시험에선 전체 7위로 통과.  전형적이

고 우수한 패러딘 나이트다. 올해 나이 47세, 그 동안 피의 사막에서  20

회가 넘는 마물 토벌 전에 참가해서 공적을 올린 것과 프로겐  지방에서

해적과의 전쟁에서 전과를 올린 것  등, 풍부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  지

금은 수도 내 치안담당관으로 있다."

"엑..... 대단한 사람이네?"

카젯이 혀를 내두르며 신음소리를 내었고 키사르는 잠시 생각을  하다

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세렌은 현재 수련 3년째의  견습 패러딘 나이트. 아직  갑옷 착용 후

수련을 하지도 않았으며 경력만  따지면 압도적으로 나이트  마드리스에

게 떨어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세렌의 패배가 확정적이지, 하지만....."

"하지만?"

다운크람이 말끝을 흐린 키사르에게 계속 이어질 말을 물어보았고  키

사르는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입

을 열었다.

"하지만, 난 세렌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말하면 잔소리! 당연하지."

카젯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쳤고 모두들 무표정한 키사르를  바라

보며 자신 있는 웃음을 지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때 자리에 앉아서  갑옷을 벗던 나이트  마드리스가 자신의  갑옷을

모두 벗고 연습용 휴페리온까지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렌

과 마주 보도록 수련관의 정  중앙으로 걸어왔다.  아무런 흔들림  없고

무게가 잡힌 중후한 움직임이었다.

"그럼...... 저, 신관 호나즌의 중재 하에 이번 대련을 시작합니다."

미네아 공주의 일행을 안내하고 있었던 신관 호나즌이 조금은  떨떠름

한 표정으로 대련의 시작을 선언했다. 세렌은  아직 패러딘 나이트가 아

니었으나 어쨌든 클라스라인의 기사들이  서로 공식적인 대련을  하려면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라프나 신전의 신관의 중재가 필요했다.

나이트 마드리스는 정확한 자세로 휴페리온을 세워들으며 자세를  잡

았고 세렌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조금 휴페리온을 비껴 잡았다.

".......... 시작!"

신관 호나즌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왼손을 치켜들었고 드디어  문

제의 대련은 시작되었다. 중견의 패러딘 나이트와 수련 3년 차의 견습패

러딘 나이트의 역사상 그 의례가 없는 진귀한 대련의 시작이었다.

"하아압!"

대련이 시작되자 나이트 마드리스는 먼저 기합을 내지르며  세렌에게

로 육박해갔다. 대단히 빠른 속도도, 그렇다고 강렬한 기세도 아니었으나

빈틈없고 예리한 돌격이었다. 딱딱해진 세렌의 표정에서 핏기 마저 빼앗

아갈 정도였다.

'완벽한 자세와 움직임..... 역시 패러딘 나이트다.'

세렌은 자신의 휴페리온을 밀어 들 듯 올리며 나이트 마드리스의  공

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바로 예전에 언덕마을의 장로에게서 배웠던 상대

의 공격을 흘리는 기술을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검에 움직임을 주기

도 전에, 나이트 마드리스의 휴페리온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이어서

연이은 공격으로 퍼부어졌다. 세렌은 이를 악물며 막아내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흘릴 기회를 주지 않는 힘있고 빠른 연속공격이었다.

'이것이 대륙 3대 기사단의 실력....'

세렌은 조금씩 뒷걸음치며 상대의 공격을  뼈에 새겨질 정도로 맛보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카젯의  공격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였고 루벨의

공격보다는 약간 약한 힘이 그의 휴페리온에 실려있었다. 물론 속도와

힘, 이 두 가지가 다 조화되어있다는  점에서  나이트 마드리스의 공격

은 대단했으나 항상  카젯이나 루벨과 대련을  했던 세렌이었기에  어느

정도 파악하고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적당히 빈틈을 노려 공격할 생각을  없었다. 저 뒤에서 오만

한 눈으로 자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증오스런 한 인간 때문에  속이

무척이나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압!"

계속 수세를 취하던 세렌은 순간  갑자기 온힘을 다해 정면으로  검을

부디 치며 공격적으로 변화하며 나이트  마드리스를 몰아붙였다. 대단히

격렬하게 세렌의 휴페리온은 공격적으로 바뀌었고 나이트 마드리스는갑

작스런 세렌의 반전에 허를  찔린 듯 주춤하며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피해내었다. 그러나 노련한 중견의 패러딘 나이트답게 곧 안정을

되찾았고 적극적으로 세렌의 공격에 맞대응 해갔다.

"제법인데?"

마드리스는 세렌의 공격에 담겨있는 수많은 변화를 파악하고는  진심

으로 감탄하며 더욱 자신의 휴페리온을 정교하게 운용하기 시작했다. 처

음엔 약간 상대를 얕보는 봐주며 겨루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세렌

의 매서운 공격을 보고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마드리스였

다.

세렌이 휴페리온을 대각선으로 내려 벨 듯 하다가 중간에 방향을 바꾸

어 찌르기로 변환하고 내려꽂듯이 찔러오자 마드리스는 자신의 휴페리온

의 넓적한 면 부분으로 그 찌르기를 튕겨 내었고 재빨리 검을 가로로 휘

둘렀다. 세렌은 막아내기엔 시간이  없음을 느끼고 재빨리 뒤로 몸을 피

했으나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고 곧 가슴에 긴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날을 갈지 않은  연습용 휴페리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리한

검에 베인 듯 상처부위의 옷에 피가 스며들었다.

"당한 거야?"

"아니, 좀더 지켜봐."

그들의 대련을 보고있던 펠린이 깜짝 놀라며 말하자 평소와는 극히 다

른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련을 응시하는 카젯이 나지막하게  대답

했다.

좀 전의 역습으로 기선을 빼앗긴  세렌이었으나 카젯의 말대로 재빨리

자세를 수습, 완전한 공격의 주도권을 마드리스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이은 소모적인 검의 교차가 계속되었고 강렬한 불꽃이 두  휴

페리온의 사이에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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