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20)
"결계의 형태는 비스듬한 구의 모양으로 땅 속까지 완전하게 결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의 가로지름은 약 5만 세션(약 4km)입니다 하지
만....."
라프나 신전의 다크 핵사곤 조사단의 총 지휘자인 신관 마믈렌은 조사
가 끝나자 대 신관에게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을 알
기 위해 치러진 희생은 실로 경악할 정도였다.
"..... 결계 내부는 완전한 마계의 형태로 엄청난 공간이 압축되어 있습
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실제크기의 10배에서 15배가 아닐지......"
"그러면 가로, 세로 50만 세션이 넘는 공간이 저 결계 안에 있다는 말
입니까?"
대 신관은 놀란 표정으로 결계를 바라보았다. 높이가 만 세션은 되 보
이는 어두운 공간, 실로 무서운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네, 대 신관 님. 그리고 조사를 위해 저희 신관 10명과 스피리스트의
정령사 50여명, 데스튼의 수련신관이 50명 결계 내부로 들어갔었습니다
만.... 결계 안은 수많은 마물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사
단 중 단........ 여섯 명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으음......"
보고를 들은 라프나 신전의 대 신관 마젠타의 얼굴은 점점 어둡게 변해
가기만 했다. 전에 신전에서 금서들을 도난 당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최
악의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대 신관의 마음은 더
욱 무거워져만 갔다.
'대체..... 이런 결계를 왜 만들었을까....'
성의전쟁 이후 다크휴먼의 본거지에서 압수된 금서들은 대부분 해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원래 하게 되어있는 소각처분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해석을 하려고 600년 이상을 보관해오던 라프나 신전이었는데,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역시 해석을 하지 못했고 그런 사이에 다크휴먼들의 잔당이
야습을 해와 신전의 금서들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다크휴
먼의 잔당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야습을 해왔던 괴한들이 사용했
던 마법이나 복장, 그리고 나이트 길드의 정보에 의해 신전 측은 사건을
일으킨 것이 다크휴먼의 짓 일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마계와 흡사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결계, 단순히 마계의 마수들을 소환
하여 풀어놓을 작정이었을까? 아니면 대체........... 생각하면 할수록 대 신
관의 머리 속은 복잡하게 엉켜들어가기만 했다. 결계를 발동한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금
드라킬스와 자치도시 연합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
약 드라킬스가 자치도시 연합을 완전히 정복하여 결계가 쳐진 이곳을 군
사적으로 봉쇄해 버린다면 신전 측으로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드라
킬스는 3대 신전의 발언권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대륙에서 유일한 국
가였다.
결계는 너무나도 위압적이고 거대하게 대륙의 일부분을뒤덮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일까.... 대 신관은 철저한 조사를 명령하면
서도 한편으로는 이 결계를 인간의 힘 의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불
길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오늘은 언니와 함께 견습 패러딘 나이트의 수련관에 구경
다녀 올 께요."
성의력 667년의 어느 봄날. 갑작스런 침입에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던
법왕 파우킨저 3세와 네 명의 시녀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크기가 거의 작은 호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한 개인 욕조에서 아
침부터 반라의 젊은 시녀 네 명의 시중을 받고있던 법왕은 아무런 예고
없이 욕실의 문을 활짝 열어제치며 들어온 자신의 둘째딸, 미네아 공주
를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법왕의 몸을 정성 것 주무르고 있
던 네 명의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허락하실 거죠?"
미네아 공주는 당당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눈을 반쯤 뜨며 법왕을 바라
보았다. 무척 당돌하고 직선적인 태도였다.
"미리..... 온다고 말하지 그랬느냐... 이렇게 갑자기."
"어머, 딸 보기에 조금은 민망하신가 보지요? 천하의 아바마마께서."
"아니...... 아니다. 내 딸이 나를 찾아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그렇지요?"
"그래... 하지만 너와 네 언니는 이 나라의 공주인데 그렇게 함부로 성
밖으로 나섰다간..."
"뭐라고요! 안 된다는 겨예요!"
"아.... 아니..... 누가 안 된다고 했느냐...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법왕은 쩔쩔매다가 결국은 딸의 부탁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법왕이라도 매섭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자신의 딸에겐 더 없이 약하기
만 했다.
법왕 파우킨저 3세에겐 두 명의 공주와 한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두 공
주는 지금은 죽은 왕비가 낳은 것이었고 왕자는 왕비가 죽고 나서 새로
얻은 첩실이 낳은 것이었다. 법왕은 왕비가 둘째 공주를 출산하고는 세
상을 떠나자 신하들의 끈질긴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 왕비를 맞아들
이지 않았다. 첩실을 몇 명 두기는 했지만.
첫째 공주인 미레나는 올해 18세로 죽은 왕비를 닮아 금실같이 고운 긴
머리카락과 기품 있고 아름다운 얼굴, 착하고 세심한 성품과 가녀린 몸
으로 인해 실로 공주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둘째 공주인 미네아는 한 살 위인 언니와는 성격이 정 반대였
다. 법왕의 그것과 같은 청록색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등에 닿지 않도
록 짧게 자르고 다녔으며 언제나 생기에 넘치는 얼굴에 빛나는 눈동자
를 가지고 있었다. 밝고 활동적인 것까지는 좋지만 극히 제멋대로 에다
가 막무가내로 나가는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곤
란하게 하고 있었다.
법왕에게 허락을 받아낸 미네아 공주는 곧 가볍고 경쾌한 걸음으로 미
레나 공주의 별궁으로 행했다. 그녀의 별궁은 법왕청의 본 성에서 우측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하게 세워져있었다.
금세 미레나의 별궁에 도착한 미네아는 주인의 세심한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별궁의 하녀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방문에도 크게 놀라거나 허둥거리지 않았다. 평소에 언
제나 아무 거리낌없이 법왕청의 내부를 돌아다니는 그녀의 성격을 모두
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층으로 구성된 별궁 안은 소박하고 섬세한 내부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
며져 있었다. 그리고 미레나 공주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뤼민스 꽃의 청
아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집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언제 들어오더라도
그때마다 기분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원래는 돌아가신 그녀들의
어머니, 레자르나 왕비가 생전에 거처하던 별궁이 바로 이곳이었다.
"언니! 언니! 기뻐해 줘. 아바마마에게 허락을 받아냈어. 견습 패러딘
나이트 수련관에 구경 가는 거 말이야."
미레나 공주는 별궁 2층의 베란다에서 뤼민스 꽃의 잎으로 만든 차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발견한 미네아 공주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달려오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과 책을 테
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잘됐구나. 언제나 곡 한번 견습 패러딘 나이트의 모습을 보고싶다 하
더니."
"물론이야 언니. 그런데 언니도 함께 간다고 말씀 드렸어. 우리, 같이
구경가자."
"어, 나도? 하지만 나는 별로........"
그다지 활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미레나 공주는 미네아의 부탁을 거절하
려고 말을 꺼냈으나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의 간절히 애원하듯 반짝
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별로..... 가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같이 가는 거야?"
미네아 공주가 기뻐하며 소리치자 미레나 공주는 별 수 없다는 듯 향긋
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정말 네 부탁엔 못 당하겠구나."
"고마워 언니. 그러면 어서 준비하고 있어. 난 1층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께."
미네아 공주는 1층으로 내려갔고 미레나 공주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미레나 공주가 클라스라인의 증표중 하나인 푸른 잎사귀가 수
놓아진 아름다운 비취색의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고는 1층으로 내려왔고
두 자매는정답게 별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문 밖의 정원엔 화려한 왕실의 마차가 대기되어 있었고
갑옷까지 완벽히 갖춰 입은 청년 중년의 패러딘 나이트 한 명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패러딘 나이트 NO43 마드리스가 두 분 공주 님께 인사드립니다."
"영광입니다 기사 님. 클라스라인의 공주, 미레나라고 합니다."
"..........미네아입니다."
나이트 마드리스의 인사에 미레나 공주도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잡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미네아 공주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했다. 그
러나 상황을 금세 눈치채고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아바마마가 보내신 것이겠지.... 언니와 둘 이서만 편하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법왕께선 두 분 공주 님의 호위를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자 어서 마
차에 오르세요."
"그럼..."
나이트 마드리스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고 두 공주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에스코트 해 주었다. 미레나 공주는 살풋 웃으며 마차에 올랐지만
미네아 공주는 투덜거리며 내키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다음에는 아바마마에게 말씀드리지 않고 몰래 다녀와야겠어...거추장스
럽게 이런 호위를 붙이시다니....'
"무슨 생각해 미네아?"
"아, 아니..... 그냥....... 견습 패러딘 나이트들은 어떨까 하고......."
미레나 공주의 질문에 미네아 공주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하지
만 과정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무척 즐거운 일
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말
한 대로 희미하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기대고는 창 밖을 바라보며
곧 볼 수 있을 패러딘 나이트들의 늠름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검과 방패, 목숨을 건 기사도를 추구하며 군주에게 충성하고 레이디에게
자신의 온 정렬을 바치는 강한 기사들의 세계, 그것은 미네아 공주가 가
장 동경하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기대....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