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17)
인간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언제나 자신 가까이 놓아두어야 안심이 되
는 종족이다. 그것이 자신을 안심시키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
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 몰래 가져갈 수 없다는 심리적인 안심에서 비
롯된 행동으로 다분히 심리적인 것이었다.
킬츠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그를 잠에서 깨운 것은 바로 자신의
소울아이였다.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고는 킬츠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
이었다. 킬츠는 이상함을 느끼며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되는 크라다겜의 수련에 그는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루디는 자신의 옆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마을이 불타버리고,
힘든 이곳의 생활에 여러 가지 충격을 받은 그였지만 신기할 정도로 금
새 자신을 회복하고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루디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절망의 정령을 소유하고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곳은 이
미 쑥대밭이 되어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루디는 요즘 과도한 알마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두 달쯤 전 동
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게 흐르는 냇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그때까
지 마수 만달카스의 비린내나는 피에 의존했던 그들의 수분섭취에 획기
적인 청신호였다. 물론 환경이 환경인 만큼 깨끗한 물은 아니었고 그냥
먹으면 구토, 설사, 복통을 일으킬 것만 같은 검은빛의 탁한 물이었다.
그리하여, 루디는 자신의 마법으로 물을 정화시켜 매일 일정량의 식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물론 루디는 신관이 아니기 때문에 정화의 마법을 사
용하지는 못했지만, 약한 화염의 마법으로 물을 증발시켜 통 모양으로
만든 마수의 가죽에가 수증기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디는 끝까지
그 작업을 '정화' 라고 불렀다. 자신은 평소에 신관도 동경했다고 하면서.
'그런데......'
루디의 옆에 누워 있어야할 카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킬츠는 그리
크지 않은 동굴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그 어
디에도 없었다. 무언가 안 좋은 기분이 킬츠의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
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동굴 입구의 왼편에 석상처럼 서있는 데스나이트
크라다겜의 모습이 보였다. 킬츠는 다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크라다겜! 카름 못 봤어?"
그러자 크라다겜은 예의 딱딱하고 낮은 톤의 음성에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볼일이 있다며 언제나 가던 이 앞의 숲으로 갔다. 하지만 아
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전? 얼마나 지난 거야!"
"인간의 시간으로 하면 약 1크락정도."
볼일을 1크락동안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임에 분명했
다. 킬츠는 점점 크게 박동 하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이제는 그의 것
이 된 데스나이트의 검이 등에 잘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고는 재빨리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루디형을 부탁해!"
킬츠의 외침에 크라다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 천만인 이곳
에서, 혼자 나선 킬츠의 생명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크라
다겜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성격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
유는 바로 근처의 위험한 마수들을 이미 그가 처리 해 두었기 때문이었
다.
숲을 전부 뒤졌지만 카름의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바닥에 미세하게 난
카름의 발자국을 찾아내어, 그것을 따라 방향을 옮긴 킬츠는 자신의 소
울아이를 최대한으로 발동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면 기이한 모양
으로 바위들이 산과 협곡을 이루고 있는 위험한 지대가 나오기 때문에
킬츠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 졌다. 카름이 이곳으로 왜 왔는지는 모르겠
지만 그녀에게 이 바위산의 길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이런...... 너무 설쳐대었나........'
카름의 정확한 기운을 알아내기 위해 최대한의 범위 내를 감지하고 있
던 킬츠의 소울아이가 주인이 원하는 대상이 아닌, 다른 생물의 기운을
감지하고 말았다. 바로 몇 달 전 그들을 끈질기게추격해 왔던 늑대 형
상의 지능적이고 흉폭한 마수, 바로 베링의 기운이었다.
'다섯..... 아니, 여섯인가?'
킬츠가 자리를 피할 새도 없이 베링들은 킬츠의 시아에 정면으로 그 흉
폭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숫자는 다섯. 한동안 굶주렸는지, 눈이 붉게 충
혈 되어 있었다. 게다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지막 한 마리는 킬츠가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쪽은 바로 카름의 기운
이 느껴지는 길이었다.
"이 자식들!"
다수로써 강한 상대를 제압하고 소수로 약한 상대를 제압한다. 베링들
의 의도를 깨 닳은 킬츠는 순간 분노를 폭발시키며 다섯 마리의 베링들
에게로 돌격해 들어갔다. 베링들은 설마 이렇게 무모하게 돌격해 올지는
몰랐다는 듯 잠시 주춤하다가 곧 그르릉 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자신
들의 긴 손톱을 세워 들었다.
돌격해 들어가던 킬츠는 재빨리 등에 차고있던 데스나이트의 병기였던,
그러나 지금은 그의 무기가 된 검은 검을 양손으로 뽑아들며 강하게 세
로로 베어 들어갔다. 가운데 있던 두 마리의 베링들은 킬츠의 공격을 막
아내려 자신들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방어했지만 손톱들은 킬츠의
검과 격돌하자마자 너무나도 가볍게 부러져 나갔다. 그들의 손톱도 어지
간히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강력한 살생의 무기였지만, 킬츠의 검과는 강
도가 비교될 수 없었다.
킬츠는 검으로 베링들의 손톱을 부러뜨림과 동시에 방향을 바꾸어 손톱
이 부러진 오른쪽의 베링부터 왼쪽의 베링까지 두 마리의 허리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검붉은 내장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사방으로 튀어나왔고
두 마리의 베링들은 비명한 번 질러보지 못한 체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버렸다. 설마 인간 따위에게 당할 줄은 몰랐다는 억울한 표정으로.
"크아악!"
그러나 주위에 남아있는 세 마리의 베링들은 킬츠의 공격을 넋 놓고 지
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 즉시 협공을 해왔기 때문에 킬츠는 자신의
검으로 벤 두 마리 베링들의 죽음을 기뻐할 새도 없이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수많은 손톱들을 피해야만 했다. 검으로 막아내고 싶었지만 어설프
게 검으로 받아치기엔 그를 향해 날아오는 손톱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
다.
그러나 소울아이까지 사용하여 회피에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킬츠는
완벽하게 베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곧 등과 왼팔 부위가 화끈하
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이윽고 상처를 따라 등과 팔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자신의 핏줄기도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깊
은 상처였다.
"이까짓 상처가지고 내가 기 죽을 줄 알아! 난 이래봬도 데스나이트 마
스터의 제자다!"
킬츠는 욱신거리는 상처의 고통을 참는 것과 동시에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좌측의 두 마리의 베링을 향해 다시 파고들었다. 자신을 노리는
베링이 오른쪽에도 한 마리 있었지만 일단 다수를 해치워야 이길 수 있
을 확률이 높았다.
'난 아직 기술은 못 배웠기 때문에, 효과적인 힘의 사용으로 공격해야만
한다.'
지난 두 달여 동안, 크라다겜은 킬츠에게 오직 근육을 강화시키는 훈련
과,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검에 실어 공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체중을
이동하는 방법과 검의 어느 포인트에 힘을 집중시키는가, 상대의 어느
부위를 공격해야 최다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와 같은 효과적인 힘의
사용 방법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대한 몸의 중심을 앞으로 쏟아서..........'
파고드는 킬츠의 검을 받아치기에는 자신들의 손톱이 약하다는 것을 파
악한 두 마리의 베링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손톱을
세우고는 킬츠에게로 찔러갔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공격이었다.
'무게 중심은 최대한 낮게......'
킬츠는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베링들의 손톱을 바라보며 재빨리 몸을
최대한 숙였다. 거의 바닥에 몸이 닿을 정도였는데 덕분에 베링들의 손
톱은 킬츠의 등을 스치며 빛나가 버렸다.
'죽엇!'
이윽고 몸을 죽 펴며 킬츠는 자신의 검을 대각선 위로 올려 베었고 검
은 빠르게 허공을 공격한 두 마리의 베링들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그 조
각 같은 베링의 근육들이 마치 부드러운 과일처럼 단번에 갈라져 갔다.
베링들은 사방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그 피를 대부분 뒤집어쓴 킬츠
는 뒤늦게 자신을 공격해 오는 마지막 베링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네 녀석 혼자 남았군."
카름은 계속하여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쳤지만,
아직 어떤 마물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견되기 위해서 무거운 걸음을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만 있었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텐데...'
카름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얼마 전부터 길은
약간의 오르막에다 돌로 되어 있어서 발바닥이 더욱 아파 왔다. 어서 그
어떤 마수라도 자신을 발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만이 카름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킬츠.... 루디오빠.... 미안해요..... 하지만 짐이 될 수는 없어요.'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카름은 자신에게로 집중된 한 생명의 살기를 강하
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소울아이는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너무나도 강한 그 느낌은 지금의 카름이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르르....."
'배가....... 많이 고픈 것 같구나...... 이제 겨우 끝이네요.'
"크아아악!"
그러나 순간 마수의 끔직한 비명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주변에
가득 퍼졌다. 바로 세 마리의 베링들을 해치우고 단숨에 달려온 킬츠가
카름을 노리던 베링을 뒤에서 기습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늦지.... 않았군...."
"키... 킬츠?"
"하아... 다행. 아.. 앗! 카름! 거기서 더 움직이지마! 조금만 더 뒤로 가
면 절벽이야!"
반가운 표정으로 카름을 바라보던 킬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름의
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황급히 소리치
며 카름의 쪽으로 달려갔다.
"오지... 마요 킬츠."
그러나 반가운 킬츠의 얼굴과는 달리 카름은 침울한 표정으로 킬츠가
달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난..... 여기 있으면 킬츠와 루디오빠에게 짐만 될 뿐 이예요."
"무.. 무슨 소리야! 짐이라니!"
"알고 있어요...... 나 때문에 동굴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내
가 잘 움직이지 못하니까.... 그렇지요?"
울먹이는 카름의 목소리를 들으며 킬츠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물
론 그가 고개를 젓는 것을 카름이 볼 수는 없겠지만.
"아니야! 카름 때문에 못 떠나는 게 아니야. 단지 긴 이동에 필요한 물
과 식량을 모으기 위해 동굴 안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라고! 결코 카름
때문에 출발하지 못 하는 게 아니야!"
"그... 그런...."
"카름.... 너는 지금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모두 위험 할 것이라고 생
각하지만.... 그 반대야. 오히려 네가 있기에 내가 이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지켜야만 하는 카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크라다
겜에게 수련까지 받으며 강해지려고 하는 거야."
"킬츠..."
"자. 어서 이리로 와 카름. 이젠 제발 그런 생각하지마. 세상을......... 너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줘."
킬츠의 떨리는 목소리에 카름은 조금씩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
다. 따뜻한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휘감아 안았다. 그리고 그
녀는 눈물을 닦으며 평소의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킬츠를 바라보았다.
"킬츠..... 미안해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이젠... 이곳에서... 꼭 살아
남아서 킬츠의 힘이 될 께요.... 정말...."
그러나 순간 땅을 울리는 진동이 사방을 휩쓸었고 킬츠와 카름은 균형
을 잃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지진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진
으로 인하여 킬츠와 카름이 서있던 절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안돼! 카름!"
"꺄아악"
카름이 서있던 절벽의 끝 부분은 가장 먼저 무너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
져 내렸고 함께 떨어지는 카름의 비명소리가 절벽을 타고 울려왔다. 그
리고 절망의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킬츠가 서있던 부분도 곧 무
너지며 같이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굉음이 사방을 울렸고 주변에는 뿌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
라 결계 안의 세계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