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21화 (21/166)

제 2장. -가시의 길- (16)

보는 이의 마음을 짓누르는 결계의 어두운 하늘. 호흡을 곤란하게 하는

탁하고 무거운 대기, 그러나 킬츠는 이 다크헥사곤의 결계공간 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인간의 적응능력이  다른 종족에

비해 남달리 뛰어나서 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다크나

이트 크라다겜의 존재였다.

그는 처음 킬츠와 일행을 구해준 뒤로 말없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때때

로 습격해오는 마물들을 막아주었고  서쪽으로 향하는 정확한  방향으로

그들을 인도했으며 먹을 수 있는 마물들을 사냥하여 가져다주었다.

"마계의 마수들 중에서 자신의 살에 독을  품지 않은 것은 단 한  종류

뿐 이다. 바로 '만달카스' 라고 불리는 이 것이지."

데스나이트 크라다겜과의 만남  이후, 우연히 발견하여  잠시 휴식처로

삼고있던 천연 동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쉬고있던 킬츠들에게 크라다

겜은 말없이 어딘 가로 나가더니 곧 10세션(80CM) 정도  되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지고 있는 괴상한 '새 같은' 마수를 잡아오며 딱딱하고  메마른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동굴의 벽에  죽은 듯 기대어 있던

루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서운 속도로 불의  원

소 마법을 사용하여 만달카스라는 그 새 모양의 마수를 단번에 구어  버

렸고. 만달카스는 역겨운, 그러나 분명히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익어갔다.

"앗 뜨거!"

잠시 후 킬츠와 루디는 채 식지도 않은 고기를 떼어먹으려다가  결국은

손을 데고 말았다.

"으억!"

"기이한........ 맛이군......."

그러나 결국 고기를 씹어 삼킨  그 둘의 얼굴은 곧 심각하게  일그러져

갔고 아직도 한참 남은 고기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곳에

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맛이 있고 없

음을 따질 수는 없었다. 양이 충분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3일 이상을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인상을 쓰며 고기를

씹을 수밖에 없던 킬츠는 고기의 군데군데를 조금씩 떼어먹다가  그래도

가장 맛이 덜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마물의 등 부위의 고기를  떼어다가

동굴 안쪽에 누워있는 카름에게로 가져갔다.

"카름, 이거 먹어봐. 맛이 좀 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쿠슬리

씨가 만들었던 약초구이 스페셜보다는 먹을 만 해."

킬츠가 어설프게 농담을 섞어가며 카름에게 고기를 권하자 카름은 말없

이 웃으며 킬츠가 손에 쥐어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원체 몸이 약했

던 카름은 인간에겐 극히 힘겨운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재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게다가 눈도 보이지  않아서 그녀의 고생은 더욱

극심했다.

"확실히....... 콜록.. 콜록.... 약초처럼 쓰지는 않군요. 콜록... 콜록...."

여자아이의 비위로는 극히 견디기 힘든 맛이었지만카름은  콜록거리며

아무 불평 없이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그녀의 기침병은 조금

씩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환경도 안 좋은 이곳에

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히 무척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며 조용히 참고있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킬츠가 보기에 너무나 안쓰

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이 더욱 부끄러웠다.

자신의 고통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카름과 데스나이트의 도움에 의존하

고 있는 자신의 모습, 아마도 지금  데스나이트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채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조금.... 기운이 나면, 내가 인간의 감정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

다. 나는 인간의 감정이 없이는 3일을 버틸 수 없다."

묵묵히 인간들의 식사를 지켜보고 있던 크라다겜은 그들의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킬츠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이 결계의 영역에

서 누구보다도 막강한 힘을 가진 데스 나이트였지만 인간이 없이는 단 3

일도 견디지 못했던 것이었다.

크라다겜의 말에 킬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있는 아주 약간의 빛을 흡수하여 검은빛의 광택을 내고 있는 갑옷과  투

구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위압적인 모습, 그러나 인간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특이한 마족. 킬츠는 살의와 파괴의  마음을 잃어버린 마족의 모습

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알 수 없는 독특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정이었다.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놀라운 실력을 지닌 공포의 데스나

이트 마스터이면서도 킬츠들을 보호하고 있는 그 모습에서 킬츠는  안쓰

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크라다겜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들의 목숨은

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크라다겜. 그건 밖으로 나가 먹. 어."

킬츠는 묘하게 말에다 힘을 주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킬츠 특유의 존

대 없는 말투였지만 이 데스나이트를 대할 때는 말의 억양만큼은 어설프

게나마 존대를 갖추어 흘러나왔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강해서인지, 아니

면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어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데스나이트 마스터 크라다겜은 분명히 존대를 받을만한 자연스러운 분위

기가 있는 것이었다.

"근심, 고통, 망설임..... 훌륭한 감정이다."

킬츠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온 크라다겜은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

에 서있는 킬츠에게로 다가가 전처럼  소년의 몸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몸을 숙여 킬츠의 머리에 맞추면서 빠른  식

사(?)를 마쳤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대상에게 데스나이

트로써는 최대한의 예의를 지킨 셈이었는데,  그런 크라다겜을 바라보던

킬츠는 잠시 후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 크라다겜."

"왜 그러지?"

다시 몸을 일으킨 크라다겜이 동작을  멈추고 킬츠를 바라보자 킬츠도

다시 고개를 들어 크라다겜의 검은 투구사이로 빛나는 보랏빛의  눈동자

를 바라보았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줄 수는 없나?"

"검?"

"응. 검."

"............... 데스나이트의 검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인가?"

"맞아."

킬츠의 대답에 크라다겜은 잠시 말없이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원한 다면 가르쳐 줄 수 있다. 넌 나의 소중한 것. 네가 너의  몸을 지

킬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금 너에겐 검이 없

다............. 내 검을 쓰겠느냐?"

킬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라다겜은 조용히 양손으로 자신의 두 자루의

검을 천천히 빼어 들었고 먼저 등에 차고있던 투 핸드 소드를  능가하는

엄청난 크기의 검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쪽은 데스나이트의 주력병기인 파일팽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마

족의 강한 힘으로 사용할 뿐. 네겐 맞지 않는다."

"무.... 무거워...... 보이는데."

크라다겜이 등에 차고있던 엄청난 크기의 검을 바라보며 킬츠가 말하자

크라다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인간에겐 무척  무거울 것이다.  이 지상계의  금속이 아니니까.

너는 이 테슬로우를 사용해라. 역시 파일팽과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 졌

지만 크기가 보통이니까 인간이라  하더라도 근육을 단련시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크라다겜은 왼손에 들고있던 파일팽을 다시 등의 검 집에 집어넣고  오

른손에 들고있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있던  보통의 검과 같은 모양을  한

장검을 킬츠에게 내밀었다. 역시 어두운 빛이 나는 검으로 검 집에 기묘

한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데스나이트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검이다.

데스나이트의 검술을 모두 익힌 마족에게 주어지는  것. 물론 넌 마족이

아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나도 이젠 예전의 나의 마음을 잃어버렸으니

까."

크라다겜은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킬츠는 그런  크라다겜이 사실은 속으로 얼

마나 감정의 혼돈을 겪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곳의 서서히

어둠의 에너지를 이겨내고, 최근 그의  '소울아이'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크라다겜."

"난 오직 너의 죽음을 염려할 뿐이다. 너의 감정들은 내게 있어서 생명

과도 같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너의 감정. 보통과 다르구나.....  매우 특

별하게 느껴진다.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그런 감정.... 내게  줄 수 있겠

나? 먹어보고 싶다."

"물론 줄 수 있지. 이것은 즐거움이라는 감정이야. 모르나봐?."

킬츠는 씨익 웃으며 크라다겜을 바라보았고 크라다겜은 다시 킬츠의 머

리에 자신의 머리를 맞추었다.

"...... 이상하다. 이상한 감정. 예전에 내가 사물을 파괴할 때  느꼈던 기

분과도 비슷하지만..... 다르다. 특별하다.인간이란 이런 감정도 생성시킬

수 있는 건가?"

몸을 일으킨 크라다겜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곧 안

정을 되찾았고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킬츠를 바라보며 검을 건네

주었다.

"처음 맛보는 감정, 즐겁다는 것을 느꼈다......... 자. 이제 받아라. 데스나

이트의 검술은 이 검으로 사용해야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검을 건네 받은 킬츠는  한 손으로 받았다가 검을  놓여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보통 검의 크기였지만, 예전에 킬츠가  사용했던 무딘 대검의 무

게와 맞먹는 크기와 맞지 않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도..... 엄청 무겁네요."

"하지만 넌 그 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어떤 방법으로라

도... 우선 너는 데스나이트의 검술을 익히기 전에 몸부터 단련시키는 것

이 좋겠다."

크라다겜의 말에 킬츠는 수긍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자신에겐 너무 힘겨웠던 그 무딘 대검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신으로는

도저히 이 검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힘을  키워야만 했다. 그리고 킬츠에

겐 자신 이외에 지켜야할 사람이 무려 두 명이나  더 있었다. 문제는 그

중 한 명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인간이었지만 나머지 한 명이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반드시 지켜 주어야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카름은 점점 자신의 자제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숨쉬기 어려운 공기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공간. 킬

츠의 말로는 거기에다 절대로 밝아지지도,  그렇다고 더욱 어두워지지도

않는 무시무시한 하늘이 더 있다고 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그

런 하늘을 연상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냥 겉으로 웃어줄 따

름이었다. 조금이라도 킬츠가 마음을 덜 쓰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언제나 모두에게 큰짐이 되고있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

로 일행은 벌써 세 달 동안이나 은신처인 동굴에서 이동하지 않고  있었

다. 킬츠도, 루디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은 점점  기침이

심해지는 그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론 그녀의 목숨뿐만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 질 것이  분명했

다. 언제나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결계 안의 공간에서,  그녀는

달고 다니기가 극히 어려운 혹 덩어리일 뿐이었다.

물론 킬츠와 루디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불명이었으나 카

름은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킬츠.... 루디 오빠.... 자요?"

조금 전,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말없이  누워버리더니 금세 색색거

리며 잠이든 킬츠와 루디를 감지한 카름은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천천히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손으로 더듬으

며 동굴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어딜 가느냐, 인간의 소녀여."

막 동굴을 벗어나려는 카름에게 낮고 딱딱한 음성이 마치 날카로운  비

수같이 들려왔다. 데스나이트 마스터 크라다겜. 카름은 침착하게  마음을

먹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볼일이.... 급해서 그래요 기사 님."

"......... 카름.... 이라고 했던가. 멀리 가지 마라. 이 결계 안 공간에서 힘

없는 인간 소녀보다 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

카름은 조심스레 대답하고는  동굴의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끔씩

돌아다녀 본 적이 있는 길이라서 눈이 안 보이는 그녀지만 어느 정도 익

숙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언제나 갔었던 동굴과 가

까운 수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냥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발 그 어떤 마수라도 빨리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바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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