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15)
"................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키사르는 붉게 충혈 된 눈을 감으며 감정에 파묻힌 슬픔과 절망의 목소
리로 마지막 말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모두도 침울한 표정
으로 조금씩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 포기한 거냐?"
잠시 시간이 지나고, 세렌은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동자로 키사르를 바
라보며 질책하는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타키니가 파스펠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텐
데!"
순간 키사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세렌을 바라보았다. 슬픔, 원망,
괴로움이 가득 차 잇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너만 괴롭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거야. 왜 포기하지? 원래는 아무 것
도 끝나지 않았는데, 네가 포기한 그 순간에 바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거다!"
"하지만 나는 타키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패러딘 나이트가 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너는 타키니를 그
곳에서 구해 올 수가 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돈은 문제가 안돼. 패러딘
나이트가 시종을 하나 몸소 고른다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설사 너
의 아버지라 할 지라도."
"하지만 그러려면 5년의 수련을 마쳐야 하는데."
"하지만 그 5년의 수행을 마치면 네게 길이 생기는 거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타키니와 함께 살 수 있는 바로 그 길이!"
"...................."
"지금 이 고통의 길을 참아내고 무사히 건너가면 되는 거야. 모든 희망
은 그곳에서부터 있어."
"아............."
"네가 포기한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끝났지만, 네가 다시 희망을 가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다. 왜 그걸 모르지?"
"그래! 지금부터 하면 되는 거야!"
"포기할 필요는 없어!"
"타키니는 반드시 살아서 너를 기다릴 꺼야."
"음, 원래부터 무기력 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군. 난 무기력한 사람을 가
장 싫어 하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상관없지. 지금부터라도 돌아
오면 되니까.........."
세렌은 키사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강렬하게 소리쳤고 옆에 있던
나머지 네 사람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리고 결국 붉게 충혈된 키사르
의 눈은 천천히 감기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러내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세렌... 모두들..... 고마워.... 내가 너무 한심했었
던 것 같다.."
"바로 그거야. 내일부터라도 열심히 수련을 해서 꼭 패러딘 나이트가
되면 되는 거야."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마음을 되찾은 키사르를 바라보며 세렌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루벨도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하하하..... 이제 진정한 패러딘 나이트가 한 명 더 생기게 되었군."
"맞아 루벨. 그런데.........."
역시 미소를 짓고 있던 펠린이 루벨의 말에 수긍을 하다가 갑자기 심각
한 표정을 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 키사르의 벌점이 몇 점이지?"
"48점. 그리고 오늘 일주일간 아무 것도 안 했다며 특수 벌점 25점이
추가되었지. 합이 73점이다."
".................... 5점 남았군."
재빨리 끝낸 다운크람의 정확한 계산에 카젯이 인상을 찡그리며 위험하
다는 듯 말했고 펠린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키사르를 바라보았다. 그러
나 금새 눈물을 닦고 평상시의 안정을 되찾은 키사르는 평소의 낮은, 그
러나 결코 어둡거나 차갑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것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이제부터 결코 벌점을 받을 생각은 없
으니까."
다음날, 키사르의 담당 신관인 마일프 신관은 지난 일주일처럼 한숨을
내쉬며 수련장으로 나왔다. 어쩌다가 담당을 맡은 수련 생이 행위무능력
자라서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당인 자신은 단 한번도 신
성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원래 신성마법을 터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 패러딘나이트 선발전이 열리기 하루 전날까지 밤을 세워가며 열심히
라프나 여신에게 기도를 하고 신성마법을 연습했는데 그런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수련관에 와보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서 수련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키
사르가, 오늘은 오히려 수련 전에 준비운동까지 하며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신관, 오늘 좀 놀라겠군."
다운크람이 어리둥절 하는 키사르의 신관을 바라보며 작게 한마디했다.
그러나 그 신관은 곧 키사르의 진짜 사정은 모른 체 정말로 오직 그에게
라프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오오..... 생명의 빛의 여신 라프나 님이시여..... 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의 축복 있기를.~~~~"
제 정신을 되찾은 키사르는 주위 사람을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실력을
소유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세렌과 비슷한 키에 조금 더 말라 보이는 몸
매를 가지고 있었고 조금은 싸늘한 표정에 역시 말이 없는 타입이었는데
첫째 수련이 끝나고 일주일동안 했던 기사전문지식(국내역사, 세계역사,
인물 등)공부 시간에 배운 모든 것을 키사르는 상식으로알고 있었고 카
젯이 아직 절반도 완벽하게 외우지 못한 78가지의 패러딘나이트의 기사
도를 한시간만에 외워버렸다. 카젯은 경악을 하며 키사르를 바라보며 어
떻게 한 거냐고 집요하게 질문했으나 키사르는 '넌 나의 지식습득 능력
을 평생동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일축해 버렸다.
"휴......... 키사르 녀석............ 가만히 있을 땐 밉지나 않았는데, 다운크람
이 한 명 더 생긴 기분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수련 실로 가는 도중 카젯은 한숨을 내쉬며 루
벨에게 푸념을 했다. 그러나 루벨도
"사실을 말했는데 뭘 그래."
라고 말하며 카젯에게 2단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키사르는 자신의 말대로 단 1점의 벌점도 얻지 않았다. 그의 휴페리온
을 휘두르는 솜씨는 일품이었고 승마법도 역시 귀족의 자제답게 기본은
잡혀 있었다. 17조를 담당하고 있는 패러딘 나이트 NO. 41인 다펠람 공
도 왜 저런 기본이 갖추어진 녀석이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
에 대해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의 수행은 안정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의 정통귀
족연합(?)의 방해나 간섭도 없었다. 그날 이후 파울프는 3일 동안이나
수련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 충격이 매우 켰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세렌은 곧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클라스라인 법국
과 세디아 황국, 자치도시 연합의 혼합 국경지방, 즉 세렌의 진정한 고향
인 언덕마을의 근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흑마법의 결계가 발동
하여 그곳으로 라프나 신전의 신관들도 조사를 위해 파견 됐다는 소식이
었다. 세렌이 수행을 시작한지 보름째 되는 날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