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14)
"좋았어!"
"맞아, 보란 듯이 성공해서 당당하게 말하는 거야."
"우리는 너희들 정통귀족들 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이야."
"정통귀족? 펠린......... 그건 너무 예의바른 표현 아니야?"
펠린의 말에 다운크람이 이의를 가하며 말했다.
" '정통귀족 이라고 자칭하는 놈들' 이라고 말해야지."
다운크람의 말에 모두들 자신에 찬 미소를 지었고 온몸에 생기가 불붙
듯 타올랐다. 그런 그들을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렌은 순간 방안
에 그들과 정 반대의 표정을 짓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어젯
밤의 일이 생각난 세렌은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쑥스러운 듯 말을 꺼내
기 시작했다.
"흠..... 그러면 말이지. 첫 번째로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
데 말이야......."
"오오! 최초의 명령이로군!"
"뭔데?"
"그게 말이야............ 저기 침대에 걸터앉아 반쯤 죽어있는 키사르의 숨
겨진 사연을 알아 낼 수 있도록 내게 협조해 줘."
세렌은 방의 구석의 침대에 혼자 멍하니 앉아서 바닥에 가까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키사르를보며 말했고 모두들 키사르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숨겨진 사연이라..... 재밌겠는데."
"그런데 멋대로 그래도 돼?"
루벨과 카젯이 번갈아 가며 말하자 세렌은 살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부탁한다."
그러자 모두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포위하듯 키사르의 침대로 다가갔
고 멍하니 있던 키사르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가운데에 서있는 세렌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너무나도 차갑고 섬짓 한 목소리에 세렌은 잠시 주춤했으나 곧 자신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키사르에게 말을 꺼냈다.
"어젯밤에 너의 노래를 들었다."
"..............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니, 너의 그 노래를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넌 대체 왜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있는 거지? 그래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
고의 기사단인 패러딘 나이트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야."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키사르는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고 그런 키사르의 단호한 태도에도 불
구하고 세렌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참견을 해야겠어. 우리가 수행을 시작한 그날부터, 너는 우리와
한 방을 쓰게 되었지. 문제는 적어도 너같이 무기력한 사람이 방안에 있
다는 것만으로 이미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주었단 말이다.
설마 부정은 못하겠지. 너 같은 사람이 주위에 얼마나 피해를 입히는지."
"정말인가?"
"물론이야. 그러니까 빛을 감는 셈치고 너의 사정을 들려주었으면 좋겠
다. 물론 네가 난 원래부터 이런 놈이라고 잡아떼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이 없지만 적어도 어젯밤에 그런 노래를 불렀으면서 설마 그런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
"...................."
키사르는 다시 입을 다물고 더욱 고개를 숙이며 잠시동안 침묵을 지켰
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키사르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 자세 그대
로, 키사르의 입에서 조용히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난 누구처럼 법왕청의 그랜드저지를 맡고 있는 대 귀족의 가문도 아
닌, 그렇다고 누구처럼 몰락한 귀족의 가문도 아닌 평범한 귀족가문인
루켄비쉬타 가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순간 다운크람이 발끈하며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키사르는 무시해 버리
고 여전히 어둡고 차가운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검술 교본을 보며 혼자 검을 수련했고 많은 책들을 보며 어린 시
절을 보냈다.
내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 돌아가셨지. 하지만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서재에 있던 수많은 전략과 전술의 서적들
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난 차츰 무엇인가 내
게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그 무엇인가를 갈구했지. 그것은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약간의 관심과 사랑이었다. 하인들은 나를
오직 작은 주인님이라 부르며 인간의 대화를 나누길 꺼려했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긴 별 란 자신의 취미활동을 즐기느라 내게 관
심조차 주지 않았지. 난 원했다. 계속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속으
로 갈망했지.
우리 아버지의 별 란 취미는 바로 어린 소년들을 고문하는 것이었다.
주로 자치도시 연합 근처에서 전쟁으로 인해 노예 가된 어린 소년들이나
고아들을 사와서 지하실에 있는 감옥에 가두고는 며칠씩 자신의 취미를
즐겼지. 밤새 들려오는 어린 소년의 비명소리가 나의 잠을 설치게 했었
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서부의 도시에 열리는 노예시장에서
한 소년을 사왔지. 난 우연하게 지하실로 끌려가는 그 소년을 바라보았
다. 나와 비슷한 또래에 소년이었는데 너무나 가여울 정도로 여린 체구
에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다리, 길게 상처가 나 있는 양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치 소녀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얼굴
에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가 담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동안 이 집
에 들어와서 죽어간 소년들은 전부 두려움에 질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가지처럼 온 몸을 떨고 있었지. 그러나 그 아이는 달랐다.
그날 밤에 난 단 한마디의 비명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나의 호기심
이 마음껏 소리쳤지. 왜 그 아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일까. 왜 그 아
이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튿날 아버지가 집에서 나간 사이 나는 지하실로 몰래 들어갔지. 그
아이를 보기 위해서.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
그 아이는 어둡고 음산한 감옥의 벽에 죽은 기대어 있었다. 싸늘하고
창백한 얼굴에 투명한 두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등잔을 밝
혔고 그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넌 누구? .......... 아니, 아무라도 상관없어. 부탁이야.... 나를 죽여줘. 이
몸의 팔, 다리의 근육은 전부 끊어져 버렸어. 그래서 내가 이 몸에 완전
히 융화되어 버렸지. 날 짓누르는 너무나도 거대한 고통과 슬픔, 절
망............ 인간의 감정들을 느껴 버렸어.... 아니, 공손해야 되는 건가.....
.
부탁입니다.... 원한다면 내가 즐겁게 해 드릴 수 도 있어요. 도련님. 이래
봬도 난 그것에 능숙하답니다..... 제발...
난 마치 벼락에라도 맞은 듯 내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밀려
나오기 시작한 여러 가지 감정들. 그것이나를 새롭게 만들었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깊은 절망. 죽음을 원하는 투명하고 슬픈 눈동자. 나
는 바로 감옥 안으로 들어왔지. 그 아이는 제대로 걸을 수 도 없기 때문
에 감옥 문을 잠가놓지도 않았었지.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꼭 끌어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아이는 몸을 부들거리며 천천히,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눈에서
도 눈물이 흘렀지. 나보다 더 절실하게 사랑을 바랬던 존재. 나는 그 아
이의 모든 것을 감싸주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바라는 것도 얻을 수 있
을 그런 기분이었지. 난 한 인간에게 빠져버렸다.
"음...... 조숙하구만. 그런데 그거 호....."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키사르의 말을 듣고 있는 도중에 카젯이 고개
를 끄덕이며 한마디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따가운 다운크람의 시선을 느끼고는 금세 입을 다물어버렸다.
말을 시작할 때는 어둡고 차가운 목소리에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로말
하던 키사르였으나 차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서히 당시의 감정이 짖
게 깔려있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그 소년의 이름은 타키니. 그 는 그 후로 몰래 찾아오는 나를 마음의
의지로 삼았고 나는 타키니를 위해 한가지 계획을 세웠지. 아버지에게
말없고 조용한 내 또래의 시종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일 시킬
것은 아니고 말 상태를 하려고 한다니까 아버지는 대뜸 타키니를 내게
주었지. 아무리 고문을 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며 반응이 없으니까 재
미가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타키니를 내 방으로 데려 올 수 있었다. 그
리고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2년의 시간을 그 와 함께 보냈다. 나는 타
키니를 내 몸보다 소중히 아꼈고 타키니도 조금씩 진심으로 나에게 마음
을 열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지.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타키
니는 오래된 지식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난 더욱 즐거웠지. 세상을 사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진정한 생명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성내의 가게에서 타키니에게 줄 물건
을 사고 돌아와보자 집에 타키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온 집안을
뒤지던 내게 아버지가 다가와 말했지. 네가 패러딘 나이트가 되어서 가
문의 명예를 살려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타키니는 다시 노예시장에다
팔아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간 나는............. 내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타키니는 클라스라인의 최남단에 위치한 파스펠이라는
도시로 팔려갔다고 했다. 그곳은 바로 피의 사막에 바로 인접한 도시로
언제나 마물의 공격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루에도 서너 명씩 죽어나
가는 것이 예사인 그런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