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8화 (18/166)

제 2장. -가시의 길- (13)

"난 어려서 파산한 가문을 이어받아, 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빌리러 다녔고 쓸모 없이 값만 비싼 장식품들을 팔아 치우고  다녔

으며 최소한으로 줄인 하인들은  직접 관리하고 통솔했지,  할만한 일은

내 동생들이나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났

고, 많은 일을 겪었지만,  모두들 제대로 된  인간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말이다...... 솔직한 평가인데, 너희들이 저 잘랐다고 떠들어대는

'진짜' 귀족들 보다 훨씬 제대로 되었어.  여러 가지의 면에서. 그리고.....

정말 제대로 된 생각과 사고, 그리고 능력을 지난  사람도 하나 알게 되

었지."

"말할 것도 없어."

"당연하지."

"세렌이다."

"그래. 바로 세렌이다. 난 이 자리에서 말하는데. 결코 패러딘 나이트가

되어서도 썩어빠진 귀족들이나 그런 귀족들을 가만 냅두며 호의호식하는

이 나라의 국왕, 즉 법왕을 위해서 일 하지 않겠다. 오직 세렌의 뜻에 복

종하겠어. '복종' 하니까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사실 저 녀석은  내 미래

를 맡겨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우리 가문을 다시

세운다 하더라도, 만약 무능력한 법왕의 밑에서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가문을 세우는 것을 포기하겠어.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게 훨씬

더 낳지."

다운크람의 강렬한 의지가 담긴 말에 모두들 눈에 빛을 내며 그를 바라

보았다. 모두들 사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클라스

라인의 구조와 귀족들의 생각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었고 예전부터  고생

하며, 혹은 이제부터 그  고생과 불 합리를 깨달으며  지낸 그들은 서로

공통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렵고 중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 진정한 대답을 말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오늘, 그들을 위해 죽음에 가

까운 위기에 빠져가며 모두에게 잘못됨을 외쳤던 세렌이라면, 아마도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껏 바라보고 다시 볼 수 없는 그대.

흐르듯 떠나가고 다시 올 수 없는 그대.

잊으려 잊으려도 잊을 수 없는 그대.

슬픔에 잠겨가도 빠져날 수 없는 이 곳.

조금씩 도망가도 잡을 수 없는 마음.

날 보는가, 슬픔에 보는가, 잊어도 보는가.

대륙을 반으로 가른 그라디스 산맥 같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우리 사이에 있고.

날 보는가, 슬픔에 보는가, 잊어도 보는가.

대륙을 고립시킨 나타스의 저주의 회오리 같은 .

벗어날 수 없는 감옥 속에 나는 묶여있고.

날 보는가, 슬픔에 보는가, 잊어도 보는가.

영원히 혼자가 된 운명의 키퍼들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대는 보이지 않고.

마음 것 바라보고 다시 볼 수 없는 그대.

흐르듯 떠나가고 다시올 수 없는 그대.

잊으려 잊으려도 잊을 수 없는 그대.

슬픔에 잠겨가도 빠져날 수 없는 이곳.

조금씩 도망가도 잡을 수 없는 마음.

'노래가..........'

여섯 명의 수련 생들과의 대련직후 쓰러져버린 세렌은 모두가 잠든  고

요와 침묵의 깊은 밤, 누군가의 노랫소리에 잠이 깨었다.

이곳에서 처음 잠을 잔 그날에도 들려와서 잠에서 깨었던 기억이  있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때는 너무 잠결이라  그냥 대충 넘어갔지만 오늘

은 어떻게 보면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기절해 있다가 제정신을  차

린 것이라서 정신이 말끔했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결코 루벨의 걸걸하고  시원한 음성도, 카젯의

빠르고 재치 있는 음성도, 펠린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성도, 다운크람의

딱딱하고 절도 있는 음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과 우울함에 가득 찬

무척 어둡고 애잔한 울림을 담고 있는 고요한 목소리였다.

세렌은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반복되며 흘러나오는 은은한 선율을 조용

히 감상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애잔한 가사가 어우러진 슬픈 노래였다.

세렌도 마을 사람들이 이 노래를  가끔 부르는 것을 들었었는데  그것은

대륙 동부에 널리 퍼져있는 이별의 노래로, 사랑하는 남자가 드라킬스에

사신으로 떠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게 된 자치도시연합의 한 처녀의 애절

한 사연을 음유시인들이 노래로 만든 것이었다.

노래는 세렌의 정면에 있는 반대편 침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쪽에

있는 침대는 바로 키사르의 침대였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마치 세상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바

로 그 키사르의 목소리였다.  결코 잠꼬대나 몽유병의  증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깊게 베어있는 진실로 아

름다운 노래였다.

'키사르가 대체 왜 저런 노래를........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  하다. 패러

딘 나이트의 수행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세렌은 조용히 키사르의 노래를 감상하며 본격적인 잠의 문을 열어  들

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이대로 키사르가 감점이  꽉 차서

퇴출 되기 전에 반드시 그의  숨겨진 사정을 알아내리라고 굳게  다짐을

했다.

'이상한데......'

아침의 자유 휴페리온 수련을 가장 먼저 마친 세렌은 사나름의 신정 마

법을 받으며 다른 조 원들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별로 말이 없었던 그

들이었는데 언제나 시끌시끌하던 카젯마저도 온 정신을 수련에 집중하며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뭐........ 수련에 집중하기로 다짐한 건가......'

루벨과 카젯, 펠린과 다운크람의 그런 행동은  오전 수련을 마치고 오후

수련에 들어가서도 계속 되었고 키사르를 제외한 17조의 그 누구도 오늘

의 수련에서 감점을 받지 않았다.

모든 수련이 마치고 저녁의 자유시간이 되자 세렌은 피곤한 몸을  이끌

고 자신의 침대에 몸을 던지러 방으로  돌아갔다. 물론 담당신관들이 최

대한의 신성마법으로 지친 몸을 회복  시켜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게다가  정신적인 피곤함까지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침대에 몸을 던지러 방문을 연  순간, 이미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는 17조의 네 사람이 방으로 들어온 세렌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에....... 뭐지?"

세렌이 조금 의아해 하며 모두에게  묻자 다운크람이 대표로 입을  열며

신중하고 진실 된 목소리로 세렌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우리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뭐 하려고?"

"지금 수련에서 돌아오는 너를  기다렸다는 의미가 아니야.  우리의 삶

속에 너라는 인간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거다."

약간 고차원 적인 다운크람의 말에 명석한 세렌은 상황을 금방 눈치 채

었다. 무엇보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지하고, 기대에 차 있으며 무엇인가를 바라는 눈빛. 세렌은 그것이  바

로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자신의 균형에 맞지 않는  위치에 서 있다. 그 위치

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생각은 다

르지. 게다가 시아가 좁고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우리

를 베타 적으로 대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

서 높은 지휘에 도달하더라도  그들의 그런 태도는  아마도 변함없겠지.

아니, 오히려 더욱 심해질걸. 게다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 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고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다운크람."

"그래. 너도 절실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 라

는 인간을 중심으로 뭉치려 하는 거야."

"나를 중심으로?"

"그래. 모두에게 당당히 말 할 수 있는 너의 그 진실함과  생각.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완벽하게 일치해. 너  같은 인간이라면 서로 진실

한 친구이자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 우리

는 너 의 말을 따르겠어. 너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아...... 아니..."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너무나도 엄청난 말에  세렌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개성적이고 당당한  그들이 자신의

말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말을 따르겠

다는 말 자체가 문제였다.

패러딘 나이트는 오직 패러딘 나이트의 기사도와 라프나 여신을 국가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클라스라인의 국왕인 법왕의 명령만 따를 수 있었기

때문에 세렌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라던가, -패러딘  나

이트가 법왕의 명령 외에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서는 안 된다-와 같은

반박의 말을 몇 마디하고 싶었으나 그를 바라보는 네 사람의 눈빛이  이

미 결심으로 굳어졌으며 기대에 가득 찬 상태라서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는 못 했다.

"하지만.............."

"하지만?"

머뭇거리는 세렌을 모두들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세렌은 별수 없

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시작했다.

"아니, 고맙다, 모두들. 나를 이렇게 믿어 준다니. 너희들의 그 마음, 내

가 손에 검을 쥘 수 없게될 그날까지, 그리고  그 후의 시간들까지 가져

가 영원히 놓지 않겠다."

"좋았어!"

세렌의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며 소리쳤고 세렌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모두를 향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생활을 하면서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꼈어. 대륙에 이름을 떨칠 큰 인물이 되려고 다짐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마틴스 가문에서 양자의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난 거리낌없이  승낙했

지.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이런 상황의  나로선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

야 한다는 것만이 절실하게 느껴질 뿐이다. 너희나, 나나 마찬가지로. 가

문이나 혈통 같은 것들이 인간의 능력을 전부 결정해 버린다는 그런  생

각들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돼.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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