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7화 (17/166)

제 2장. -가시의 길- (12)

파울프를 쓰러트린 세렌은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아직 그의 눈빛은 또렷이 살아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귀족이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것은 남을 멋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은 결코 아니야.  누구는 태어나고

싶어서 평민이나 천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인가? 누구는 태어나기 전부

터 너무나 위대한 나머지 귀족의 집에서 태어난 것인가? 다들 똑같은 인

간이다. 너희가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아서 이렇게 다

른 사람을 업신여기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라프나 여신의 뜻에 따

라 정의를 수호할 패러딘 나이트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는  것

이다! 명심해..... 인간의 가치는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야......."

마치 목에 결려있던 온갖 체증들을  단번에 토해내듯이 세렌은 주위의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세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 하면서도 고요

했고 그곳에 모인 수련 생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렇게 소리친 세렌은 눈을 감고  정신을 잃으며 허물어지듯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모든 힘을 다 사용했기 때문인지 모든 힘이 빠져있는 인

형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조금전의 열변을 토하던 세렌의 모습은 결코 인형의 그것이  아

니었다. 압도적이고 강렬한 눈빛과  패기와 열정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소년의 목소리, 그리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창백해진 그의 얼굴은 그곳의 모두를 한순간에 자신으로 몰입시켰다. 그

곳에 있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휴우...... 대단한 연설이군. 내 속이 다 시원하네. 하지만 상태가 위급한

데..... 신관 님을  빨리 불러야겠어."

이미 자신들의 주위에 있던 포위망을 밀어 제치고 자유의 몸이 된 루벨

과 카젯, 그리고 다운크람은 재빨리 뛰어와  쓰러진 세렌을 부축해 일으

켰다. 그리고 아무 의식이 없는  세렌을 바라본 카젯이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루벨과 내가 세렌을 방으로 옮겨 놓을 테니까, 카젯 너는 빨리 되도록

이면 쓸만한 신관을 데리고 와."

"음..... 한번 열리면 끝없이 독설을 뱉어내는 '공포의 입'에서 설마 부탁

의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카젯이다운크람을 보며 능청을 떨자 다운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젯

을 노려보았다.

"잔 말 하지마. 세렌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혹시 잘못 되기라도  하면

전적으로 너에게 책임을 묻겠어."

"아.... 알았어. 잽싸게 한 분 데려오지."

카젯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 닳고는 주위의 수련 생들을  제치며

재빨리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세렌을  들쳐업

은 루벨도 수련 생들을 해산시키며 길을 내고 있는 다운크람의 뒤를  따

라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오늘밤에 푹 쉬고 나면 내일  아침쯤엔 아마 평상 시

대로 깨어날 거예요. 상처는 그리 깊지 않고 아마 정신적으로 무리를 했

던 것 같으니까 앞으로의 수련에 전혀 지장은 없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나름 신관 님."

세렌이 다른 수련 생들과 대련이 붙어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들은 세렌의

담당신관 사나름은 곧바로 17번 조의 방으로 달려왔다. 세렌의 담당신관

이자 라프나 신전의 중역인 '원 신관'(태어날 때부터 신전에 맡겨져 어렸

을 때부터 수행을 쌓은 신관)인 그는 수련관 3층의  자신의 개인 방에서

취침전의 기도를 드리던 도중이었는데 자신의 방으로 달려온 카젯의  말

을 듣고는 곧바로 잠옷차림으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감사는 요, 펠린 님. 이게 저의  일입니다. 그것보다 펠린 님의 상처는

깊으니까 내일은 쉬셔도 좋습니다. 그런 경우는 감점을 하지 않습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수련을 쌓아야 저도 강해지지요."

사나름이 세렌에게 신성마법을 사용하고는 부드러운 웃는 얼굴로  17번

조의 수련 생들에게 말하자 한 명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침대에 누어있던펠린이 일어나 대표로 사나름 신관에게 감사

의 뜻을 전하자 사나름 신관은 고개를 저으며 더욱 부드러운 웃음과  함

께 말했다.

"그럼 모두들 편안한 밤 보내세요. 라프나  님의 빛의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사나름 신관이 방을 나가자 세렌의 침대에 옆에 서있던 루벨, 카젯,  그

리고 펠린은 사나름을 배웅한 다운크람과 함께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키사르는 일지감치

자려는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테이블에 둘

러앉은 네 명은 그런 키사르를 무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난 오늘 일은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로 다 들었어. 아무래도 내

게 휴페리온을 맞춘 것도 계획적이었던 것 같다."

펠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카젯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흐우.. 오늘 일은 정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문제야. 세렌이 있

었기에 망정이지............."

"그래, 잘못하면 우리 세 명, 아니  펠린까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몰락

한 귀족의 가주인 내 처지도 그 녀석들의 눈에는 '가짜'로 보였나 보군."

"먼저 말을 하겠지만, 우리는 사정은 달라도 서로 공통된 몇 가지의 문

제를 가지고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정상적인 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벨이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하자  다운크람도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래.... 맞아. 나도 이렇게 편하게 보여도 속으론 무척 고민 했다구. 양

자인 내 처지에 대해서 말이야. 난 귀족의 껍질은  쓸 수 있어도 알맹인

바꾸지 못해."

"카젯, 너에게도 고민이 있었단 말이야? 이거 참 불가사의하군."

"다운크람..........."

"자자, 그만해. 나도 마찬가지야. 카젯  저 녀석이랑 자치도시 파울드에

서 설쳐댈 때는 세상  괴로운지 몰랐었다. 며칠씩 굶더라도,  뒷골목에서

잠을 자더라도 세상이 마냥 즐거웠었지. 하지만 지금 현실을 깨 닳고 보

니 그게 아니다. 이렇게 무시 받고, 자존심이 상한 적은 처음이야."

언제나 듬직하고 웃는 얼굴의 루벨이 평소와 다른 분에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그는  지금 평소의 온화했던  자신의 얼굴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서자라고 구박받으며 살아왔어........... 패러딘 나이트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난, 지금 내가  오히려 절반의 귀족의 피를 이

어 받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마치 선택받은 인간인 양  거만하고 꼴사

납지. 자신들이 재능에 가득 차 있다고 믿어.... 썩어가고 있는 주제에. 말

이야."

다운크람은 이를 갈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불 합리에 대한 분노와 고통

에 가득 차 있는 얼굴들.  그리고 다운크람은 지금 모두가  원하고 있을

말을 자신이 꺼내기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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