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4화 (14/166)

제 2장. -가시의 길- (9)

완전히 어둡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하늘.

온몸을 짓누르듯 압박해오는 무거운  대기.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탁하고 습한 공기. 킬츠는 그 모든 고통들을 기이하게 뒤틀린 나무에 몸

을 기대 쉬며 힘겹게 참아내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곳. 킬츠는  데스나이트를 피해

도망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3일 동안 너무도 뼈저리게 공포와 두려움이

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3일. 그들의 사정 따위는 전혀 고려해 주

지 않고 사방에서 덮쳐왔던 그 수많은 마수들을 마침 기절해 있던  루디

가 정신을 차리고 마법으로 처치하지 못했다면 이미 그곳에 있던 세  명

모두다 흔적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질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위기를 넘겼다 하더라도 마수들의 맹렬한 속도와 숫자는 곧 루디의 마법

을 초월했고 루디의 알마스가 떨어진 지금,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의 감

정이 킬츠의 전신을 휘감아 삼켜버리려 하고 있었다.

'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숲의 깊은 곳에 숨어들은 그들은 숲 안에 있는 작은 나무에 몸을 기대

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디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

고 이미 피곤함에 지친 카름은  킬츠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소울아이의 능력을 잃어

버린 지금, 그녀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가련한 눈먼 소녀에 불과했다.

아무리 세상에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재산은 반드시 부질없이 날아가

버린다 하여도, 대체 어떤  재산을 얻을 수 있기에  이런 죽음에 근접한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킬츠는 운명의 신인 데스튼을 원망 할  수밖

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데스튼의 뜻에 의해 무한의 생명을 지닌 키퍼가

되기도 하는데, 어떤 이들은 데스튼의 뜻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다.

"아..... 카름은 잠들었구나. 나도 졸린 데, 3일  동안 정말 한숨도 못 잤

어...... 킬츠, 듣고 있니?"

루디의 힘없는 목소리에 킬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에게도,

킬츠에게도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루디

는 약간의 빛이 남아있는 졸린 눈동자로 어둡지만 그 건너편에는 반드시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떠 있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

다.

"휴..... 난 이제 내 알마스를 모두 소비했어. 킬츠, 넌 알마스가 뭔지 아

냐?"

킬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루디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가르쳐 주마. 알마스란 것은 말이다, 인간의 체내에 있는 무

수한 가능성의 에너지를 말하는 거야."

루디는 말을 하면서 조금은 기운이  나는지 힘없이 축 처져 있던  말의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알마스지. 마

법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마력은 인간의 체내에선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계에 무한히 차있는 마력과 자신의 알마스를 교환해야만 인간은  마법

을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보통 인간의 알마스로는 가장 낮은 하위마력

과도 교환할 수가 없지. 물론 명상 같은 수행을 통해서 알마스를 증가시

킬 수는 있지만 그건 아주  적은 양이야. 그야말로 타고나야만  되는 거

다."

거기까지 말한 루디는 조금 힘이 들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킬츠는 루디가 그 상태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를 바랬으나 잠시 후에 고개를 든 루디는 킬츠의 기대를 저버리고

여전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봬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다섯 가지 능력 중에서 알마스만

큼은 A클래스로 판명되었다. 알마스, 알마스로 마력을 교환하는  효율성,

교환한 마력을 빨리 마법화  시킬 수 있는 속도,  전개된 마법의 위력을

조정할 수 있는 조정력, 그리고 상위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운용력. 바로

이 다섯 가지가 마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능력인데 E클래스가

보통 사람의 능력이고 D클래스는 초급,  C클래스는 중급, B클래스는 고

급, 그리고 A클래스는 최고급이지. 난 알마스가  A클래스고 효율성은 C

클래스, 속도도 C클래스, 그리고 조정력과  운용력은 D클래스였다. 마도

사 분들도 매우 좋은 능력을 지녔다고  하셨어. 왜냐하면 알마스를 제외

하고는 수련으로 등급을 높일 수 있거든.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루디는 졸린 듯 점점 감겨오는 눈꺼풀을 그대로 내버려두었고 점점  목

소리는 작아졌다.

"난 아직 원소를 한번에 세  개밖에 조합할 수 없어.... 더  많은 원소를

조합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운용력을 높여서 더 높은 상위마력과  교환

해야 되는데..... 수련을 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말하고 루디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끝내 잠들어 버렸다.

역시 지난 3일간의 고생은 마법사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리한 일 이었다.

그나마 A클래스의 알마스가 있었기에  3일 동안 수많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킬츠는 자신도 서서히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들면 너

무나도 편할 것 같은 유혹이 킬츠의  눈꺼풀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하지

만 킬츠는 잠 들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자신마저 잠들어 버린다면 모두가

자는 사이에 그대로 마수의 먹이가 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카름은 무

력하고, 루디는 이제 더  이상의 마법은 무리였기 때문에  지금 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킬츠밖에 없었다. 비록  애초부터 마수에게 대항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지 마라.. 지금은 오지 마라... 지금은 오지 마라...'

킬츠는 사라지려고 하는 의식의 끝자락을 힘겹게 붙잡으며 속으로 끊임

없이 주문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만약 지금 이곳에 가장 약한 베링 같은 마수가 한 마리라도 나타나 그

들을 발견한 다면 그것은 곳  죽음이었다. 그 야수의 양손에  나있는 세

개의 긴 손톱은 너무나 잘 발달된 살육의 무기였다. 그러나 지금의 킬츠

에겐 대항할 수 있는 그  어떤 무기도 없었다. 예전에  사용했던 무겁고

무디었던 대검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자신의 지식과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인간은 그 무엇보다 약한  존재라

던 장로의 말이 킬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무기는 없었지

만 그에겐 아직 머리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절대  검 같은 무기처럼 잊

어먹고 챙기지 못할 염려가 없는 안전한 도구였다.

'문제는 내 머리란 도구가 그야말로 바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도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킬츠는 기운  빠

진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것을 어디다  사용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도구를 어떻게 든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킬츠의 눈에 얼마 떨

어지지 않은 수풀의 어둠 속에 번득이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발견되었다.

목표를 관통 할 듯한 살의에 가득 찬 회색의  찢어진 눈동자. 바로 그것

은 마수 베링의 눈동자였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킬츠는 기대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눈동자가 있

는 곳으로 다가갔다. 물론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 속엔 루디와 카

름을 베링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할 배려가  무의식 속에 깔려있었다. 베

링도 킬츠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천천히 수풀을 헤집고 나와 킬츠의 동작

을 노려보았다. 피곤에 지쳐 도망 다니던 먹이 감이 오히려 자신에게 조

금씩 다가오자 베링은 조금 생각하는 듯  바로 공격을 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코 그냥 놓아줄 마음은 없는 듯 킬츠의 동작에서 단 한번도 눈

을 떼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킬츠는 지금 자신이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만큼, 절망에 빠진 만큼 속에서 뜨거운 오기

가 타오르는 것 역시 느낄 수가 있었다.

'포기 할 수 없다..... 내 소중한 것들을......... 절대로.'

베링은 이제 완전히 킬츠의 동작이 허세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길고 사

나운 송곳니를 번득이며 킬츠에게 달려들었다. 맹렬하고 빠른 움직임. 그

러나 그 베링의 공격을 끝까지 보고있던 킬츠는 간발의 차로 몸을  옆으

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링의 공격은 단발이 아니었다. 베링은  연이어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며 옆으로 몸을 피한 킬츠를 공격해 갔고 역시 킬츠는  그

공격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최후의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다. 베

링의 손톱에 긁혀 잔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갔지만 그것은 결코  치명적

인 상처는 아니었다.

'오래 버틸 수 없다... 단 한번의 기회..... 실패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킬츠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그와 비례하여 새롭게

생기는 상처들은 더욱 깊게 생겨났다. 그러나 킬츠의 눈은 이곳 다크 헥

사곤 안의 어두운 공간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베링의 공격을 약간 크게 피했다고  느낀 킬츠는 연이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 베어오는 베링의  오른쪽 손톱을 확인하였다.  그리곤 재빨리

베링의 오른손이 완벽히 올라오기 전에 몸을 날리듯 베링에게  파고들어

몸을 솟구치며 베링의 오른손  등의 앞부분을 머리로  강타했다. 그러자

원래 공격하려던 베링의 힘에 킬츠의 힘이 더해져 베링의 손목은 안쪽으

로 원을 그렸고 그 길고 날카로운 손톱은 자신의 왼쪽 머리를 베며 절반

쯤 파고들어 깊숙이 박혔다.

"........................"

베링은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머리에서  시커먼 피를 뿜으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적의 힘을 이용한 킬츠의 완벽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만

약 베링의 품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킬츠의 몸이 먼

저 베링의 세 개의 손톱에 의하여 4등분이 되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헉.... 헉...."

'성공.... 이다. 역시 머리를 쓰니까 되는 군.'

킬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고도 계속해서 피를 쏟고있는 한  마

리의 베링을 바라보았다. 한 마리........ 킬츠는 완전히 몸이 풀려 그 자리

에 주저앉으려던 참이었으나 순간적으로 주위에서 자신을 압박해오는 막

강한 살기를 감지했다. 순간  킬츠의 소울아이가 주위의  어두운 대기를

뚫고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는데 킬츠는 설마.....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많은 베링들이 그의 주위를  크게 원을 그리며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렇다면 내가 쓰러트린 이 녀석은 우리를 시험해 보기 위한 미

끼?'

보이지 않는 베링들은 계속하여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영악

한 놈들....' 이라는 생각이 킬츠의 머릿속에 고통스럽게 맴돌았고 이제는

육안으로도 몇 마리의 번득이는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젠 머리를 쓰고 자시고도....'

방금 전 베링과의  싸움에서 순간적으로 온몸의 근육을 본능적으로 폭

발시켜 속도를 내었던 킬츠였다. 더 이상 근육들이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오기가 남아있고 의지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미 한계의

힘을 초과해 버려 멈춰버린 근육들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 죽음?

순간 '파악' 하는 대기를 가를  듯이 날카롭고 강렬한 소리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그곳을 울려 펴졌고 그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던 베링의

무리 중 세 마리의 몸이 가로 절반으로 갈라지며 검은 피를 사방에 뿌려

대었다.

"크아악!!!"

"쿠에엑!!!"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에 베링들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질러대었고  세

마리의 베링이 쓰러진 곳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애초부터 검은빛

의 금속으로 만들어 진 듯 어두운 광택이 빛나고 있는 흑색 갑옷의 기사

가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기묘한 모

양의 투구 사이로 날카로운 보라색의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베링들을 소리도 없이  움직이며 20세션(1세

션=8cm)가까이 되는 거대한 대검으로  가볍게 베어버렸다. 바람을 가를

듯한 빠른 속도에 엄청난 검의 무게가 더해진 놀라운 기세로 기사의  검

은 주위를 휩쓸었다. 토막이 나며 죽어 가는 베링과 같이 주위의 나무들

도 함께 베어질 정도였다.

킬츠는 놀란 눈동자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어떤  기교나 편법이

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힘과 속도의 검술.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주

위를 휩쓸었고 베링들은 그것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이 속수 무책으

로 베어져 갔다.

'머.... 멋지다. 그런데......'

킬츠는 그 광경에 감탄하면서도 그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기사의  모습

이 어디선가 본 듯 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생각을 하

던 킬츠에게 곧 기억의 파편은 완성된 조각을 맞춰내었다.

"데스나이트!"

킬츠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분명히 3일전 루

디의 정신에 살고 있다던  펠리치오라던 인간이 데스나이트라고  불렀던

그 기사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서 걷고있던 등

과 허리에 두 개의 검을 장비하고 있던 바로 그 기사였다.

킬츠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들이 회오리치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

체 무엇을 위해 데스나이트가  자신을 노리는 마수를  해치운단 말인가.

쉽사리 결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비관적인 결론으로 생각이 정리된 것은  데스나이트가 이미 주위의 수

십 마리의 베링들을 전부 휩쓸어버린 후, 자신에게로 다가올 때였다.

킬츠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사.  하지만 그래도 수 십  마리의 베링보다는

한 명의 데스나이트가 상대하기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킬츠의  최후

의 오기를 지탱시켜 주었다.

"하아아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