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3화 (13/166)

제 2장. -가시의 길- (8)

"저 녀석 처음에 휴페리온을 받아 들더니 바로 바닥에 내려놓았어. 1크

락 내내 저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더군. 짜증나는 귀족  도련님이야.

최소한 귀족으로써의 자존심도  없는 정말 타락한  귀족의 대표적이  예

지."

다운크람은 신경질이 잔뜩 난 표정으로 심한 독설을 계속 퍼부어  대었

다. 펠린이 옆에서 본인이 들을까봐 불안한 표정으로 다운크람에게 그만

하라고 몇 마디 했지만 오히려 다운크람은 펠린에게 상관없다고  말하며

더욱 큰 목소리로 말을이어갔다.

"살아가는데 의지가 없는 녀석은  그야말로 살 필요가  없는 녀석이야.

오히려 자신의 영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물을 위해 농민을 수탈하

는 썩은 귀족들이 더 낳은  편이지. 최소한 그런 녀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노력을 하거든. 내가 제일 증오하는  인간이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야."

"미안하군. 16일만 기다려."

"뭐!"

다운크람의 말에 침묵을 지키며 걸어오고 있던 키사르가 나지막하게 반

응을 했다. 그러자 그 말의 속뜻을 금방 파악한 다운크람은 순간 흥분하

며 키사르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올려 쥐며 격 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자식! 그러면 여기에  뭐 하러 온 거야!  퇴출 당하고 나서 화이트

나이트라도 되려고! 아니면 곱게 집으로 돌아가 패러딘 나이트에 도전을

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려고!"

"............... 내가 무능력자로 보이는가?"

"당연하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귀족  전체가 평민들에게  욕먹는 거

야!"

화가 극에 달한 다운크람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키사르는 교묘하게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남 신경 쓰지 말고  네가 가문을 일으켜서 떨어진

귀족의 명예를 다시 세우는 게 좋겠지."

키사르는 말을 마치고는 어이없어 하는 다운크람을 제치고 선두에 걷고

있던 세렌과 루벨까지 지나서 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나있는 복도를 지

나갔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잠시 후 다운크람은 열에 받친 목소리로 휙 하니 소리쳤고 펠린이 다가

와 그를 진정시키며 다시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자. 너무 그러지 마. 저 녀석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물론.... 하지만 정말 신경질 나는 녀석이다."

"음. 귀족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래 저렇게 될 소지가 좀  있지.

굶어 죽을 염려가 없으니까 말이야."

"맞아. 자치도시에서 저렇게 하다간 굶어 죽거나 맞아 죽기 십상이지."

키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벨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하자  카젯도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하구나. 저 녀석....... '

세렌도 키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누

구나 되고싶어서 안달인 패러딘 나이트의 자리를 무시해 버리고 있는 진

의를 알 수 없는 태도와 차갑게 느껴지는 어두운 성격 등이 세렌의 머릿

속에 깊이 인식되었다.

'킬츠와 전혀 다른 타입이군.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리고  어젯밤

의 그 노래... 그것도 저 녀석이 불렀던 것 같은데...'

"뭔 생각 하냐 세렌."

"아, 아니....... 좀 차가운 녀석이구나 하고....."

자신의 생각 속에 빠져들어 가고있던 세렌에게 옆에서 걷고있던 루벨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고 정신이 든 세렌은 몇 마디의 말로 얼버무려  버렸

다.

식당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클라스라인의  동쪽바다에

서 잡은 싱싱한 수산물과 최고급 밀가루로 만든 흰  빵. 쿨드(소의 일종,

육질이 부드러워 고급으로 손꼽힘)고기와  하루에 여섯 번씩 물을  줘야

한다는 최고급 민트인 라우임을 섞어서 만든  수프, 그리고 최고급인 클

라스라인의 심프케 분지의 627년 산 와인을 곁들인 최고급의 아침식사였

다.

"이 나라의 귀족가문에 양자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식사 예법을 배웠지

만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걸."

카젯이 식사도중 꿀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잔에 따라져 있던

와인을 마셔버리고 나서 즐거운 듯 한마디했고 다운크람도 수프를  마시

던 도중 천천히 입을 열어 카젯의 말에 응수했다.

"먹을 걸 보면 머릿속이 하얗게 흐려지는 사람을 세상은 식충이라고 말

하지."

"호, 그거 걸작이군 내가 많이 먹는다고 뭐라 그러더니 좋은 별명이 하

나 더 생겼네."

다운크람의 말에 루벨도 한마디 덧붙여  말하자 카젯은 역시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운크람과 루벨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이 녀석들이...... 다운크람, 그러는 너야말로 이런 식사를 하는 게 무척

오랜만일텐데?"

"물론, 하지만 나는 훌륭한 식사를 보면  더욱 머릿속에 지켜야할 식사

예절이 떠오르지. 훌륭한 식사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으윽........."

다운크람의 말에 이번에도 할말을 잃은 카젯은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하

지 못하고 눈으로 복수의 마음을 다짐하며 다운크람을 노려보았다. 물론

입으로는 식사를 계속하면서.

아침식사가 마친 후에 시작되는 패러딘 나이트로써 익혀야할 지식을 배

우는 시간은 예정대로 3크락동안 계속되었는데 먼저 대륙 전체에 통용되

는 13가지의 기사도를암기한 후  문제의 패러딘 나이트 전용의  78가지

기사도를 암기해야만 했다. 물론  외우지 못한다고 당장  벌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기사가 알아야할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에  수련

생 모두들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아.... 24번째가 뭐였더라...... 세렌, 미안하지만  그것만 다시 한번 말해

줄래?"

"라프나신전의 신관들에겐 항상 패러딘 나이트로써의 예를 갖추어 행동

하라."

"아! 맞아.... 바로 그거였어. 그리고 25번째는..... 25번째는......"

"무리야. 카젯, 네 머리로는 하루에 다섯깨씩만 외워도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다운크람............ 휴우......... 미치겠군."

뭔가 한마디 날카롭게 대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머리에 카

젯은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 시간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할 때까지는 서로 잔인한

농담도 주고받으며(주로 카젯이 받았다) 여유 있게 시간을 보냈으나 4크

락 연속의 수행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서로간에 조금씩 알 수 없는  긴장

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이번의 수행은 아침처럼 편한  것만 골라 할  수 없는데...... 큰일이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난 벌써 벌점이 5점......."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정신을 집중해서 최대한의 인내심

을 동원하는 거야. 아무리 포기의 천재라도 노력하면 할 수 있어."

"펠린...... 말은 고맙지만 그 포기의 천재라는 말은 좀 빼줘."

"뭘, 듣기 좋구만."

"넌 빠져 루벨!"

수련 실에 대기 중이던 세렌 일행은 어떻게든 긴장을 풀어(?)보려고 노

력하고 있었으나 결국 1크락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긴장이

압박감이 되어 모두의 몸을 짓누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세렌이 휴페리온

을 받아들고 나서한 한마디가 키사르를 제외한 모두의 긴장을  말끔하게

날려 버렸다.

"자신을 믿어. 목표가 있는 인간은 그 무엇보다 강한 거야."

"목표......"

"목표라...."

모두의 자신에 찬 표정을 바라보며 세렌은 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올

려 베기 천 번을 시작했다.

'이건 장로님이 하셨던 말씀인데.......'

내가 제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위엔 나와  같은 갑옷을 입은 시체들

수 십여 구가 쌓여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그들은 바로 마계의 기사

인 데스나이트. 나, 데스나이트 마스터인 크라다겜의  수하들. 파괴와 살

육만을 목적으로 키워진 전투마족들이다. 그리고 그 모두를 내가 죽여버

린 것이었다.

머릿속이 끔찍할 정도로 아파  왔다.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매우 마계와 흡사한, 그러나 결코  마계의 것은 아닌 어두운

하늘이 나의 밀폐된 투구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왜 데스나이트 들을 살해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이 지상의 원천계로 수하들을 이끌고 나왔었

는데......... 머리가 아파 온다. 분명 인간을 발견하고서 본능이  이끄는 대

로 죽이기 위해 다가갔었는데....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하

지만 분명한 것은 내 마음속에서 끝없이 들 끌던 목적을 알 수 없는 살

의와 파괴의 본능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세상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이런 바람이  내 주위에 불고있었던가? 내

가 이런 생각을 했었던가? 난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지? 마족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살육과 파괴인가? 내가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  이

룩한 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수많은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

는 복잡한 생각들, 여태 것  느껴보지 못한 기분들, 난 갑자기  밀려오는

심각한 허기를 느꼈다. 하지만 나의 입은 음식을 먹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 마족들은 오로지 생명의 감정을 흡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공포, 분노, 욕심, 시기, 색욕..... 주로 인간들의 이런 감정이 우리의 생명

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인과의  계약으로 자연스럽게

공급을 받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충격으로 그 공급이 끊어 진 듯

했다. 위험하다......... 난 어떻게 그 감정을 공급받는지방법을 모른다.

그러던 도중 희미하게 남아있는 누군가의 감정이  느껴졌다. 인간의 감

정..... 줄을 이어 어딘 가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그 희미한 줄을 따라 인간을 찾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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