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5)
"베링...... 600여 년만에 다시 보게 되는군.... 전에는 대륙의 기사들에게
밀리던데 이번엔 환경이 마계와 흡사하니까 기운이 넘쳐 보이는구나."
그 공포의 마수, 베링들은 루디의 주위로 일제히 달려들었고 루디는
재빨리 한 팔을 옆으로 쭉 펼치며 강렬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섯의 화염과 하나의 바람! 나의 주위를 휩쓸어라! 인페르노 윈
드!(inferno wind)"
그러자 달려오는 베링들의 주위에 강력한 불길이 솟구쳤고 그 불길들은
루디가 서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회오리 치며 질풍같이 회전과 함
께 주위를 휩쓸었다. 상당히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킬츠는 온몸으
로 그 화염의 엄청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카름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화염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고 루디를 제외한 그곳
의 모든 것들은 약간의 검은 재를 남기고는 회오리치던 화염과 함께 전
부 사라져 버렸다. 루디는 옆으로 펼쳤던 손을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더 이상의 몬스터들은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상위 마력을 운용해 보는군.역시 잘만 쓰면 체계 마법도 고
대어 마법 과 비슷하게 쓸 수 있어."
"루디형!"
킬츠는 화염이 사라지자 다시 카름과 함께 루디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
다. 그리고 루디에게 도착한 킬츠는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와. 역시 매직길드에서 수련을 하더니 대단해 졌어!"
킬츠는 놀란 얼굴로 흥분하여 말했고 아직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카름도
루디가 무사하다는 말에 환한 얼굴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을 대하는 루디의 표정은 처음 보는 낮선 사람의 것인 양 딱딱할 뿐
이었다.
"음.... 네가 킬츠고 저쪽은 카름인가 보군."
"엥? 뭐라고?"
루디의 말에 킬츠와 카름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고 루디는 그들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루디가 아니다. 나는
펠리치오 칼림이라는 사람이지. 아니, 그 펠리치오 칼림의 정신체라고 보
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 그건 조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래? 그러면 많이 이상한 이야기라고 해두지..... 어쨌든 이야기는 성
의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들어보고 판단해라. 나, 펠리치오는
왜곡되지 않은 완벽한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을 펠리치오라고 밝힌 루디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세계력 900년이었지. 지금은 성의력을 쓰지만 대륙에
봉인이 걸리기 전까지는 세계력을 사용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난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매직 길드로 보내졌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30년
이상을 살았지. 그 곳은 지루한 곳이었다. 언제나 명상과 마법 서적을 읽
을 뿐. 왜냐하면 그때는 특별한 마법의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
다. 소환 마법이나 정령마법, 고대어 마법은 이미 법칙이 완벽히 정해져
있었지만 그 것들은 특별한 인간들에게만 주어지는 힘이었다. 그래서 난
비교적 익히기 쉽고 사용이 간단한 원소 마법에 빠져들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딴 건 그만두고 먼저 어떻게 루디
형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게 되는지 부 터 설명해 봐요."
조금 딱딱하고 독특한 말투를 들으며 킬츠는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펠리치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펠리치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숨
을 내쉬었다.
"그래그래.... 너무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려니까 내가 좀 흥분 했나
보군..... 고작 정신체인 주제에 말이야. 알았다. 우선 요점만 정확히 알려
주마."
펠리치오는 바로 성의전쟁 이전에 현재 다섯 개의 마법체계중 하나인
원소마법의 체계를 정리한 대 마도사로 매직길드에서 원소 마법의 모든
체계를 정립하고 매직길드에서 마법의 최고 능력에 극에 달한 자에게 주
어지는 프레신저의 칭호를 받은 뒤 매직길드를 떠난 것은 성의전쟁이 일
어나기 12년 전인 세계력 944년이었다. 당시 그가 매직길드를 떠난 이유
는 스피리스트의 신전에서 당시 마법계의 최고 실력자에게 자문을 요청
했기 때문이었다.
"매직길드에서 스피리스트의 신전이 있는 드라킬스의 테른 산맥까지는
마차로 8개월이 걸렸단다."
스피리스트의 신전에 도착한 펠리치오는 바로 신전의 대 신관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계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분노, 절망, 공포의 세 가지 정신정령의 출현으로 그것은 인간
의 정신에 잠입하여 분노나 절망, 공포의 감정을 흡수하여 축적을 하다
가 인간이 그 감정의 극에 달했을 때 그 감정들을 방대한 마력으로 바꾸
어 방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령의 계약의식인 피리스티아를 치
르고있던 세 명의 정령사에게 강제로 침입한 이들 세 정령을 과연 어떻
게 하면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을 지가 바로 신전의 심각한 문제였다.
"난 그때부터 스피리스트의 신전에 머물며 정신정령의 처리방법을 연구
하기 시작했지. 사실은 감정을 마력으로 바꾸는 그 정령들의 능력에 호
기심이 생겨서 시작 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인간은 직접 마력을 발
생시킬 수 없고 오직 마력과의 교환매개체인 알마스를 가지고 그것을 이
용할 뿐이어서 그때는 혹시 그 정령의 능력을 사용하면 새로운 마력의
원천을 얻지 않을까 했었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동안 쉬지 않고 연구했지만 결국 정신정령을 이용
하기는커녕 안전한 처리방법도 알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은 흘렀고 결국 문제의 성의전쟁이 일어나 버렸다.
당연히 타천사 나타스의 어둠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스피리스트의 신
전에서도 수많은 정령사들을 전쟁에 파견했고 스피리스트의 계율에 따라
몸을 아끼지 않았던그들은 대부분이 전쟁이 끝나도 다시 돌아올 수 없
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절망의 정령을 가졌던 사린이라는
이름의 여성 정령사의 연인도 성의전쟁에 참가해서 역시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던 것이었다. 정신정령을 가진 세 명의 정령사들은 드라킬스
북서쪽의 해안 가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격리되어 살고 있었는데 그 소
식을 들은 사린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절망의 정령을 폭주시켜 버렸다. 그
리고 그녀가 격리되어 있던 해안 가의 작은 도시는 그날 이후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흔적조차 남지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본체를 잃은 정신정령
들은 또다시 근처 에 있는 마을까지 이동하여 새로운 인간의 몸 속에 강
제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때가 성의력 3년. 내 나이 70세가 되던
해였지. 난...... 대륙을 위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니, 뭉개
져 버린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내려야만 했던 결정이었다."
당시 펠리치오는 이미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후였다. 젊은 나이에
원소마법을 정리하여 체계마법을 만든 그가 10년이 넘게 정신정령의 처
리방법에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자존심이 강한 그로써는 견
디기 힘든 굴욕이었다.
결국 그는 매직길드에 억지로 허가 서를 받아내고는 금지된 마법인 하
르키트(HARKITT)를 사용하여 자신의 정신을 셋으로 나누어 3대 정신
정령에다 봉인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정신정령의 소유자가 큰 충격을 받
고 폭주하려 하면 봉인되어있던 펠리치오가 소유자의 정신을 안정시킬
때까지 점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제 좀 알겠나? 이 루디라는 소년의 몸 속엔 절망의 정령이 존재하고
있다. 방금 전에 너의 마을이 불에 타고있을 때 이 루디가 끔직한 절망
을 느끼고 폭주하려 했기 때문에 내가 봉인에서 풀려 이 녀석의 정신을
점령한 것이다."
"말도 안돼... 그러면 지금 루디형은 어디에 있고요?"
"무의식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다. 얼마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
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봉인이 되겠지."
펠리치오는 말을 마치고는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킬츠와 카름에게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
다.
"그런데..... 이곳은 보통 세상과는 느낌이 다르구나. 어두운 마력이 가득
차 있어서 마법을 사용하기는 쉽지만... 우리가 살던 원천계는 아닌 것
같다. 공간이 넓게 퍼져있고, 게다가 천천히 계속 확장되어 가는구나. 아
무래도 누군가가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듯 한데....... 그것도 아주 지독한
것으로 말이다."
"금지된 마법이요?"
킬츠가 의아해 하며 말하자 펠리치오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
다.
"다크 핵사곤이라는 결계의 마법인데..... 고대어 마법의 하나란다. 지상
에 마법의 결계를 쳐서 마계의 대기를 소환하여 결국엔 결계안을 마계
화 기키는 마법이지. 게다가 결계 안의 공간을 자꾸 확대시키기 때문에...
이 세계의 균형을 일그러뜨리지. 목적은 마계의 힘을 빌리기 위한 것인
데..... 그렇기 때문에 매직길드에서 일찍이 사용을 금지 시켰었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의 알마스를 가지고는 도저히 얻지 못할 마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소수의 어둠의 마법사들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서 도전해 왔었
다. 하지만 설마 완성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럼......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간단하지. 다크핵사곤은 그 안에 퍼져있는 마계의 대기만 못 빠져나가
게 하는 결계이기 때문에 걸어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이미 이곳의 공간은 엄청나게 팽창해 벼린 것 같다. 대기의 흐름을 보
면 알 수 있는데...... 실제 크기가 가로 세로 10테션정도 (1테션=10000세
션 즉 800m 정도) 라 해도 이곳에선 아마 수천 테션을 넘었을 거다. 어
쩌면 이 대륙보다 더 크게 팽창되었을 지도 모르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킬츠가 절망이 가득 담긴 얼굴로 소리치자 펠리치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 몇 년 정도 걷다보면 결계의 끝이 보일 것이다."
"그걸 대답이라고 해요!"
"방법이 그것 하나인 걸 어쩌겠냐. 그리고 또 주의할 것은 이미 이곳은
마계화 되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것들도 나온다. 큰일 났군."
펠리치오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지며 정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주변
이 어두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가가 다가
오고 있었다.
킬츠는 펠리치오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그
러자 서서히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바로 검은 갑옷을 입은 30여명의
사람이었다.
"뭐지요? 저들은......"
킬츠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펠리치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고 펠리치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이 대답했다.
"데스 나이트...... 마계를 지배하는 다섯의 이블 로드(evil load) 중 하나
인 파괴의 군주 '파리카알'(faricaal)을 섬기는 죽음의 기사들이다. 오로지
파괴와 살육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마족이지. 너희는
모르겠지만....... 저 마족들은 성의전쟁 때 단 백 여명이 지상으로 나왔었
다."
"어.... 어땠는데요?"
"클라스라인의 화이트나이트 1만기를 전멸시켰지. 그리고 그들을 이끌
던 패러딘 나이트 다섯이 데스 나이트의 대장에게 목숨을 잃었었다. 한
마디로 저 녀석들은 백병전에선 무적이야..... 까닥 하단 우리 모두 여기
서 목숨을 잃겠구나......"
"그럼 어떻게 해요!"
"가운데서 혼자 조금 앞으로 나와 걷고 있는 저 자가 대장 같으니.... 이
아이의 마법 전개력이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모험을 해봐야겠다. 이
런....... 또 한번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게 되는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척척 거리는 갑옷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데
스 나이트들을 바라보며 펠리치오는 심호흡과 함께 눈을 감았다.
"내가 이 마법을 사용하면 더 이상 이 녀석의 정신을 제어하고 있을 수
가 없다. 그러면 네가 이 녀석과 저 눈먼 여자아이를 데리고 빨리 뒤쪽
으로 도망가거라. 아무리 이곳이 마계화 되었다해도 하늘을 자세히 보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보일 테니 방향을 잡고 이곳을 탈출해라. 젊은 아
이들이 이런 곳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어선 안 되지."
"아... 알겠습니다."
킬츠는 침을 삼키며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펠리치오는 눈을 감으며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나의 불과 하나의 바람 그리고 다섯의 정신! 목표를 파괴하라! 데스
토리 마인드!"
그러자 순간 펠리치오의 정면에 번쩍 하는 빛이 생겨나 사방을 비추며
데스나이트 들에게로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대열
의 가장 앞에 서있는 데스나이트에게 흡수되어 버렸고 그는 갑자기 괴성
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고 날뛰기 시작했다.
"크아악!"
"일단...... 성공인가? 이 녀석의 알마스도 제법이군. "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펠리치오는 미소와 함께
정신을 잃고 뒤로 쓰러져 버렸고 킬츠는 재빨리 쓰러진 그를 들쳐업고
카름의 손을 잡아 이끌며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들
은 도망가는 킬츠를 보고는 빠르게 검을 뽑아들고 쫓으려 하였으나 그때
펠리치오의 마법을 맞아 날뛰던 데스나이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 데스나이트는 다른 데스나이트와는 달리 양 허리에 두 개의 검은 장
검을 차고 있었고 등에도 하나의 커다란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등에서 커다란 대검을 빼내어 들고는 무차별로 같
은 데스나이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 들은 갑자기 자신들
을 베어오는 대검을 막으려고 그들의 검을 세워 들었으나 이미 그 대검
은 여러 번의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전열에 서있던 다섯 명의 데스나이
트들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후 열의 데스나이트들은 순식간에 옆으로 퍼져서 대검의
데스나이트를 포위했다. 엄청난 살기가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대상에게
로 집중되었고 곧바로 전원의 협공이시작되었다. 그러나 먼저 포위된
데스나이트의 대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속도로 사방을 휩쓸었
고 순식간에 십 여명의 데스나이트들이 아직도 생생한 살기의 보랏빛 눈
동자를 감지도 못한 체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같은 데스나이트였지만
아무도 대검의 데스나이트를 막아내지 못하고 하나씩, 또는 여러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