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9화 (9/166)

제 2장. -가시의 길- (4)

백작은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노년의 얼굴로 품위와 위엄이  몸

에 배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작은 방의 한 가운데에 있는 안락의

자에 앉아서 책을 펼쳐놓고 있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온 세렌을 보고는 책

을 덮으며 조용히 세렌을 불렀다.

"네가 세렌이로구나. 총명하고 의지  있는  모습이로구나.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도미니아, 자네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게."

"알겠습니다."

도미니아는 꾸벅 인사하며 문밖으로  나갔고 세렌은 마음속에서  가득

차 넘치려고 하는 긴장들을 조용히 억제하며 백작의 앞으로 걸어갔다.

"저는 세렌. 세렌 그란드라라고 합니다 백작 님."

세렌이 깊이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자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세렌 마틴스'란다. 하하하......."

세렌은 아, 하고 속으로 짧은 탄성을 질렀고 마틴스 백작은 말을 계속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레닉스...... 라고 하는  자유기사의 이야기는 10년  전에 알게 되었다.

자유기사 단장으로 훌륭한 실력을  지닌 뛰어난 기사였다고  들었지. 그

악명 높은 드래곤 나이트를 세 명이나 쓰러트린 강한 기사라고 말이야."

마틴스 백작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도미니아에게 들었을 테지만, 내게는 늦게 본  자식들이 두 명

있단다. 둘 다 남자인데 안타깝게도 이 아비를 닮아 몸이 허약하지. 그러

나 우리가문은 매 대 마다 성기사를 배출한 무인의 가문이다. 백작의 직

위도 선조께서 성의 전쟁 때  세우신 공으로 하사 받은  것이지. 나보다

먼저 죽은 내 동생 두 명도 패러딘 나이트였었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

을 위하여 이번에 너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네. 알고있습니다."

"그래..... 좋구나. 이렇게 직접 너를 보니 희망이 생기는 것 같구나. 자,

일단 오늘은 피곤할 텐데 방에 가서 푹 쉬거라. 그리고 패러딘 나이트의

선발전이 다음주에 시작한단다. 자세한 것은 도미니아가 말해줄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래, 가보거라."

세렌은 다시 인사를 하고 백작의 방을  나왔다. 백작은 생각보다는 인

자하고 부드러운 사람인 듯  했다. 상상했던 것처럼  깐깐하지도 않았고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누구처럼 심하게 거만하지도 않았다.

"오오... 나왔구나. 뭐..... 특별히 내가  할말은 없지만 오늘은 방에 가서

쉬는 게 좋겠지. 패러딘 나이트 선발전에 대해서는 내일 설명해 주마. 나

도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거든."

도미니아는 자신도 무척 피곤하다는 듯 몇 마디 말하고는 먼저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러자 곧 시녀가 올라와서는 세렌을 방으로 안내하였고

잠시 후 세렌은 저택 3층의 가장 안쪽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목욕물을 받아놓았습니다.혹시 부족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도련님."

세렌을 안내한 시녀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고  세렌은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마틴스 백작의 방보다는 작았지만

충분히 커다란 방이었고 왼쪽 구석에 있는 침대는 세 명이 자도  충분할

정도로 거대했다.

옷장에는 화려한 옷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치수도 세렌에게 딱 맞는

것들뿐이었다.. 방 한편에는 개인이 사용하는 욕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

고 고급스런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지런히 방안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테

이블 위에는 세렌이  가져온 짐들이 놓여 있었다.

세렌은 테이블의 짐들을 벽장 안에  정리해  놓고 옷을 벗어 테이블에

개어놓은 후 욕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은 적당한 방정도의 크기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욕조에는 더운 김

이 올라오는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아...... 이런 것인가....."

욕조에 몸을 담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세렌은 몸의 피로와 긴장이  확

풀리며 온몸이 나긋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서야 세

렌은 자신이 이 커다란 저택에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  할

수 있었다. 커다란 집과 커다란 방. 언제나 자신이 해왔던 온 갓  일상적

인 일들은 하인들이 전부 대신해 주었고 자신은 그들이 해놓은 모든  것

들을 그저 편하게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

는 삶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이 앞으로 살아 가야할 귀족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왜 기사에게 종자와 시종들이 필요한 지 알겠군.....'

세렌은 욕조에 푹 몸을 담근 상태 그대로  픽 웃음을 지으며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며 자신은오직 군주에게 충성하며 전투만  하는

기사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렌의 표정은 침

울해 지며 어둡게 변해갔다. 욕조에 가득 담긴 뜨겁고 좋은 향기가 나는

물들은 오히려 세렌의 기분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셨는데.......'

킬츠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침울하고 어두운 하늘이었다. 그것

은 해가 거의 지려하는 초저녁의 어두움도 아니었고 완전히  해가 진 늦

은 밤의 어두움도 아닌, 그렇다고 해가 막 뜨려하는 새벽의 어두움도 아

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어두움이 아니면서도 달이  없는 깊은 밤의 완전

한 어두움보다도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그런 어두움이었다.

킬츠는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고 심호흡을  하며 기침을 콜록거렸다.

숨이 막히는 눅눅한 공기가 폐에 가득 들어오는 느낌이 무척 괴로웠지만

그것보다도 온 옴의 신경을 압박하는 주위의 형체 없는 기운들이 킬츠의

고통스런 무력감과 피로감을 가중시켜 주었다.

"콜록.... 콜록....."

뒤에서 킬츠의 기침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없는 기침소리가 들

려왔고 킬츠가 뒤를 돌아보자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소녀가  몸

을 반쯤 일으킨 상태로 괴로운 듯 연신 콜록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어둡

기는 했지만 사물을 분간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킬츠는 곧 그 소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카름이구나.'

킬츠는 가름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

래도 그녀 역시 이곳의 눅눅한 공기와 괴로운 압박감으로  고통스러워하

는 모습이었다.

킬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엔 잎이  없는 나무들

이 어둡게 변색되어 기이한 모양으로 비틀려져  있었다. 원래 그런 나무

인지 아니면 후에 그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킬츠가 기절한

장소는 바로 그의 마을과 통하는 평범한 길이었으므로 갑자기 새로운 나

무들이 순식간에 자라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전에 있던 나무들이  변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킬츠! 루디오빠! 거기... 누구 없나요? 이곳은.... 대체  어디지요?  주변

의 기운들이 너무 어둡고 너무 무거워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요...."

기침을 멈춘 카름이 주위로 고개를  돌리며 불안하게 소리치자 킬츠는

카름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켜 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카름."

그러자 카름의 얼굴을 점령하고 있던  긴장의 표정들이 본래의 편안한

얼굴을 돌려주며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아아....... 킬츠, 킬츠로군 요. 정말 다행이에요."

카름은 환하게 웃으며 킬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킬츠의

정면이 아닌 약간 왼쪽을 향하고 있었다.

"카름...... 이쪽이야."

"아....... 미안해요. 하지만 이곳은  너무 주변의 기운이  강렬해서...... 내

감각이 주변의 사물을 느끼려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어요.  전......... 지금

그냥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보통 장님일 뿐이에요........"

카름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 이러면 킬츠에게 부담만 될 뿐인데....."

"아, 아니야! 카름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내겐  큰 의지가  된다

고......  걱정할 것 없어..... 그런데 정말 카름의  소울아이가 기능을 완전

히 상실 한 거야?"

"소울아이?........ 아, 그걸 말하는 것이군요.  네. 지금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요."

카름의 말을 들은 킬츠는 자신의 소울아이도 기능을상실했는지  알아보

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역시  킬츠의 소울아이도 주위의 무

겁고 어두운 기운이 꽉  차있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오히려 그 어

둡고 무거운 기운을 느낀 소울아이가 킬츠의 신경을 건드려 평소보다 더

욱 강력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였다.

"으으........ 너무 하는군. 정말 아무쓸모가 없게 되었어."

쓸모 없게 된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린 소울아이였다.

킬츠는 눈이 보이니까 상관없었지만 오직 소울아이로 세상을 느끼던  카

름에겐 이곳에서 보통 느낄  압박감보다 몇 배는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벌써 카름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지어있었다.

"카름에겐 부담이 클텐데...... 괜찮아?"

"아니... 아니에요. 견딜 수 있을 정도 에요. 그것보다....... 주위에 루디오

빠는 없나요?"

카름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킬츠도 그제야 루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디 갔지...... 이런데서 사라지면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때 갑자기 오른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주위의 공기가 후끈하

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킬츠는  바로 카름의 손을 이끌며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기이한 모양의 나무들을 헤치며 조금 달려가자 주변에 어두운 색의  바

위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곳의 한 가운데에 마법사의 복장을 입고있

는 한 사람이 서있었고 그 사람의 주위엔 십 여 마리의 괴물들이 으르렁

거리며 그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분명히 루디의 모습이었다.

이미 루디의 주위엔 여러 마리의 괴물들의 검게 탄 시체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그것은 흑갈색의 피부에 크기는 인간의 1.5배정도 되는 직립하고

있는 사나운 늑대의 형상을 하고있는 몬스터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대

륙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긍지 높은 라이컨슬로프나 대륙 북부에 서식하

는 커다란 늑대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상대를 관통할 듯 살의의

의지에 번득이는 회색 눈동자와 길게 찢어진 입에  삐죽하게 나온 10cm

가 넘어가는 날이 선 단검과 같은 송곳니, 털이  없는 피부에 조각 같이

발달된 근육, 그리고 웬만한 검보다 더욱 길고 날카롭게  난 세 개의 손

톱은 실로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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