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가시의 길- (3)
"안돼.... 안돼....."
불길에 휩쓸리는 마을을 바라보는 루디는 이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멍한 눈동자를 깜박이며 절망의 탄성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이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장로님
은! 으으......"
떨리는 눈동자로 불길에 휩쓸려 가는 마을을 바라보는 킬츠는 곧 그
불길이 점점 확산되어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왼
쪽엔 루디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리고 있었고
뒤에는 카름이 어찌할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킬츠!"
카름이 위급한 목소리로 킬츠를 불렀다. 그러자 킬츠는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카름...... 일단..... 피해야겠다.... 루디형.... 어서 일어나. 빨리 도망가
지 않으면 우리도 위험해......"
그러나 킬츠의 그 말에 루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주저앉
아 넋이 나간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루디형!"
"사라진다.... 사라진다..... 우리 집이..... 우리마을이...."
"이런! 정신차려!"
킬츠는 점점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며 억지로 루디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그대로 붙잡은 상태로 루디를 질질 끌며 마을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카름도 재빨리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라진다.....내 고향이..... 내 가 살았던 고향이.... 모든 것이..... 다..
.
끝났어......"
"조용히 해 형! 끝나긴 뭐가 끝나! 아직 우린 살아있다고!"
루디는 킬츠에게 끌려가면서도 힘없는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고 킬
츠는 온힘을 다해 달리며 눈을 부릅떴다.
킬츠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로가 자신을 깨우고 루디가 마을로 돌
아온다는 말에 속으로 즐거워하며 로케스트언덕에 올랐었다. 하지만 지
금은 마치 거짓말 같이 상상도 못 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며 킬츠를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갔고 정신은 이미 지탱할
힘을 잃고 절망이란 바다에 침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과 마을 이 불타고 마을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하더라
도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킬츠에겐 남아 있었다. 때문에
지금은 오로지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달릴 뿐.
'잠깐.....'
그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킬츠의 뒤를 쫓아 달리고 있던 카름은 이미
주위의 기운이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
금은 서서히 확실하게 주변의 기운들이 어둡고 무거운 것으로 바뀌어 가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카름이 살아오며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완전한 다른 공간의 느낌이었다.
"킬츠! 주위를 느껴봐요! 무언가 바뀌고 있어요! 너무나 어둡고 너무
나 무겁게...... 꺄악!"
그때 순간적으로 카름이 있던 곳의 땅이 하늘로 솟구치며 그녀를 넘
어지게 했고 뒤를 돌아본 킬츠도 땅의 흔들림에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
다.
곳곳의 땅들이 엄청난 굉음과 진동을 남기며 하늘로 솟구치거나 기이
하게 뒤틀리기 시작했고 사방은 흩날리는 모래들과 먼지들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크윽..... 이거 왜이래.... 커억...... 거기다 이 압박은.... 으윽...... 숨
을
못 쉴 정도로..... 엄청나. 으...."
주위의 먼지를 헤치며 어렵게 카름이 쓰러진 곧 까지 걸어온 킬츠였
지만 쓰러져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카름에게 괜찮은지 물어보기
도 전에 갑자기 엄습하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카름과 루디 역시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그리고 그때 마을 쪽에서 엄청난 기세로 사방을 향해 어둠이 뻗쳐갔고
곧바로 주위는 완벽한 어둠으로 덮여버렸다. 그러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려던 킬츠는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주위엔 굉음이 계속 들리며 지형이 바뀌고 있었고 음산한 어둠
의 바람은 그 시끄러운 소리들을 헤치며 주위를 가득 메워오고 있었다.
세렌이 클라스라인의 수도인 세인트룸에 도착한 것은 언덕마을을 떠
난 지 22일째가 되는 날의 점심때쯤이었다. 그 동안 진력이 날 정도의
마차 여행이었지만 세렌은 불평 하나 없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조용
히 시간을 보냈었다. 여행 초반은 대부분 귀족의 예법을 배우기 위한 책
들을 읽으며 보냈으나 나중엔 400년 전 드라킬스의 전략관인 리웬시퍼크
의 저서이자 세렌의 애독서이기도 한 '지상병력의 효과적인 운영 법'을
열 번 정도 읽으며 보냈다. 어렸을 때 쿠슬리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했었
던 수많은 전략교본 중 하나인 그 책은 세렌의 판단에 가장 깊고 세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보병으로는 창병을 상대하고 창병으로는 기마
병을, 기마병으론 보병을 상대한다는 식의 무책임한 내용이 담겨있는
흔한 전략교본이 아니라 적과 대치했을 때의 효과적인 대처 법, 아군의
숫자와 적군의 숫자, 그리고 전장의 지형에 따라 군대를 분산하여 적을
혼란시키거나 밀집시켜서 화력을 집중하는 타이밍, 유리한 장소로 적을
유인하는 방법이나 적절한 매복 등 각종 실전의 전략들이 자세하게 기술
되어 있었다.
예전에 쿠슬리는 세렌의 부탁대로 그런 책들을 도시에서 사다가 주기는
했지만 항상 그 책은 읽어도 나중에 써먹을 곳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
다. 물론 당시는 세렌도 그 말에 반쯤은 동의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
지만도 않았다. 만약 그가 성기사의 수행을 통과한다면 기본적으로 클라
스라인의 보병인 '크루세이더'를 1000명까지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생
기게 되었고 후에 전략담당관이나 성기사단장의 지휘에 오른다면 클라스
라인의 통치자인 법왕의 명령에 따라선 나라의 전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쥘 수도 있었다.
마차가 세인트룸에 도착하자 쿠슬리는 성문을 지키는 크루세이더들에
게 몇 장의 서류와 신분증을 보여주었고 정지했던 마차는 잠시 후 다시
바퀴를 굴리며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안의 집들은 일 국의 수도답게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군데군데에 들어서 있는 거대한 저택들은 귀족들의 권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깨끗한 흰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가
끔 가다가는 흰색의 바탕에 조금 더 어두운 흰색의 클라스라인의 상징인
셀렉타크(SELLECTACK:빛나는 매) 문양이 들어간 갑옷을 입고 방패와
검을 장비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저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화이트 나이트들이다. 3년의 수행을 마친
클라스라인의 정식 기사단이지. 하지만 실력이 된다면 평민이건 타지
사람이건 상관하지 않고 될 수 있기 때문에 지휘가 그렇게 높은 것은 아
니다. 지금 보이는 저들은 시내를 순찰하는 것이지."
도미니아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설
명 해 주었다. 세렌도 그들의 다부진 체격과 날렵한 걸음걸이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도미니아는 마차의 창 밖에서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물론 저들의 실력은 뛰어나다. 누가 뭐라 해도 클라스라인의 정식 기
사단이니까. 하지만 저들의 실력도 패러딘 나이트와는 비교가 안 된다.
패러딘 나이트는 생명의 빛의 여신인 라프나 님의 신전 직속 기사단으로
클라스라인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래 신전기사단이기 때문에 라프
나 님을 섬기며 정의를 수호하는 법왕청을 운용하는 클라스라인 법국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 거기에 오히려 패러딘 나이트들이 클라스라인의 정
치적, 군사적의 대부분의 권한을 쥐고있는 실정이니까. 게다가 패러딘 나
이트가 되기 위해선 가문도 엄격하게 따지기 때문에 오직 클라스라인의
귀족의 성을 가진 16세 미만의 소년들만 패러딘 나이트가 되는 선발전에
참가할 수 있지. 게다가 그 수행은 14년에 한번씩 5년 동안 치러지며
한번에 단 16명을 선발하기 때문에 정말 선택받은 사람만 될 수 있지.
그리고 만약 수행을 통과한 사람이 16명이 안 된다 하더라도 더 추가 선
출은 없어. 실력이 안 되면 패러딘 나이트가 될 수 없으니까."
도미니아의 말에 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가에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도미니아의 말 그대로 세렌은 명예와 신성의 상징인 패러딘
나이트가 되 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화이트 나이트가 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보통 평민들에겐 화이트 나이트가 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임엔 틀림없겠지만.
마차는 성안의 큰길을 따라 한참을 지나왔으나 도무지 멈출 기색을 보
이지 않았다. 성안으로 들어와서 매우 느리게 마차를 몰고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온 거리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
차는 아직까지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인트룸은 정말 거대한 도시군 요. 성문을 지나고 나서 상당히 오래
왔는데 아직까지도 백작 님의 저택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클라스라인의 수도니까. 무엇보다 농업과 상업
이 안정되어있고 군사력도 탄탄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수도가 거대
하게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이 나라에 소속된 대부분의 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도미니아가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고 있을 때 마차는 드
디어 그 자리에 멈춰 섰고 도미니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렸고 세렌도 짐을 챙기며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도미니아는 짐은 하
인에게 맞기라고 하며 세렌의 행동을 저지했고 별 수없이 세렌은 그냥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
마차에서 내린 세렌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덕마을의 전 영토보다
도 더 넓은 대지에 세워져있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웅장한 저택이었
다.
5층으로 되어있는 최고급 여관보다 더욱 큰 저택건물과 마차를 100대는
세워둘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정원. 거기에 정확한 크기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마구간 등이 세렌의 눈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상상은 했지만..... 엄청나다.'
곧 저택에서 하인들 여러 명이 나와 세렌의 짐을 챙겨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고 마구간에서도 사람들이 달려나와 마차를 몰고 마구간으로 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럼 들어가자 세렌. 백작 님이 기다리고 계시겠군."
도미니아는 세렌을 데리고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걸어가는 데만 해도 약간의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은 정원이었다.
수많은 나무들과 몇 개의 작은 인공의 호수들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들어
서 있는, 그야말로 정원이라고 할만한 장소였다.
저택으로 들어가자 바로 나타나는 거대한 홀이 세렌을 압박해왔다. 성
대한 파티를 열어도 충분할 듯한 공간이었는데 그곳에 하인들이 좌우 일
렬로 죽 늘어서서 세렌을 맞이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치 합창하듯 입을 맞춰나오는 인사소리에 세렌은 속으로 경악하며
자신도 인사를 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도
미니아가 그의 그런 행동을 저지했다.
"저들은 이 저택의 미천한 하인일 뿐이다. 허리 숙여 인사할 필요는 없
어."
도미니아의 말에 세렌은 속으로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겉
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인사하려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세렌과 도미니아는 한참동안 하인들의 사이를 지나 홀의 가장 끝에 있
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각 층마다 연결되어 있었는데 도미
니아는 가장 위층인 5층까지 올라갔고 세렌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에 마틴스 백작 님이 계신다. 요즘은 몸이 안 좋으셔서 저택에서
쉬시고 계시지. 백작 님께는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기 바란다."
5층에 올라와 중앙에 있는 방 문 앞에 도착한 도미니아는 미리 세렌에
게 주의를 주며 잠시 헛기침을 한 후 문에다 노크를 했다."
"집사인 도미니아입니다. 세렌 군을 데리고 왔습니다."
"............ 들어오게."
한참 뒤에 방안에서 대답이 들려왔고 도미니아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렌도 같이 따라들어 갔는데 방안은 화려한 조각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방의 크기가 전에 킬츠와 같이 쓰던 자신의 방에 열
배는 되어 보였다. 심지어 방 사이사이로 몇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