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갈림 길- (5)
킬츠가 정신을 잃은 지 3일째. 세렌은 그 동안 무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수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킬츠를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붙잡아야만 했
다. 게다가 그 발광하는 힘이 엄청나서 세렌은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
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장로님이 올라와 킬츠의 머리를 잡고 중얼거렸
고 그제야 킬츠는 발작을 멈추고 잠잠해 졌다..
'대체..... 언제쯤 제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려나.'
세렌은 킬츠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장
로는 반드시 깨어난다고 했지만 왠지 지금의 킬츠의 모습을 보면 그 말
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퍽!
순간 갑자기 킬츠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고 세렌은 거기에 머리를 정
면으로 부딪치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으악! 아니... 다시 발작인가?"
세렌은 급히 일어나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킬츠를 재빨리 잡아 침대로
눕혔다. 그리고는 모든 힘을 대해 킬츠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꾹 잡아 눌
렀다.
"뭐. 뭐 하는 거야! 징그러워! 어서 비켜!"
그러나 킬츠는 제정신으로 깨어나 있는 상태였다. 어렴풋이정신을 차리
고 평소대로 벌떡 몸을 일으킨 자신을 세렌이 다시 침대로 찍어 눕히고
못 움직이게 누르자 킬츠는 깜짝 놀라며 발버둥 쳤다.
"어..... 깨어 난 건가?"
"웬 헛소리야! 그럼 당연히 깨어난 거지...."
세렌인 멋 적어 하며 몸을 비키자 킬츠는 그런 세렌을 바라보며 이상하
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분명히 점심때였었는데...... 바깥이 어둡다니...... 설마 내가 아
침과 점심을 둘 다 굶은 채로 잠들어 버린 건가? 그러고 보니 배가 몹시
고픈데......."
"분명, 배는 고프겠지. 넌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잠시 후, 세렌에게 상황설명을 모두 들은 킬츠는 정신이 혼미해 지는
듯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왜, 왜 그래....."
"배, 배가 고파서..... 정신이 혼미해 진다..... 뭐해! 빨리 먹을 걸 갔
다 줘!"
"그.. 그러지 뭐."
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1층으로 내려갔고 킬츠는 배고픔을 참으며 계속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어제 밥을 너무 많이 먹어 체 했단 말이에요?"
"3일치 밀린 식사를 하려니 무리가 좀 있었을 뿐이야....."
카름은 붕대를 갈고 새 약초를 붙여주며 킬츠에게 핀잔을 주었다.
"보통 그런걸 보고 미련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도 난 굶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야."
킬츠는 배를 문지르며 변명하듯 중얼거렸지만 카름이 보기엔 정말 단순
한 인간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이런 단순한 점이 이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니까.....'
카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런 단순한 생각이
킬츠가 그녀가 보는 세계를 보기 위한 수련을 시작하여 결국 성공할 수
있게된 원동력임에 틀림없었다.
킬츠는 아직 그 능력에 적응이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장로가 소울아
이라고 말해준 그 능력은 개개인마다 능력에 차이가 나는데 킬츠는 오직
생명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카름의 능력에 비 할 바는 아니었
지만 단 4일만에 소울아이를 얻은 것은 정말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주위의 사람들을 느낄 수 있으니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큰일인데....."
하지만 킬츠는 별로 기쁘지 않은 듯 그다지 즐거워하지는 기색은 아니
었다. 그 뒤로 킬츠는 열흘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덕분에 아침마
다 잠이 부족한 듯 초췌한 눈으로 카름을 만나야만 했다. 카름은 빙긋
웃는 얼굴로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킬츠는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아 언제나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쿠슬리가 도시에서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도착한 그
는 오자마자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장로님! 저 왔습니다."
"아! 돌아오셨군요 쿠슬리 씨."
"어서 오게 쿠슬리. 별일 없었나?"
마침 응접실에서 체스를 두고있던 세렌과 장로는 쿠슬리를 반갑게 맞이
했고 곧 쿠슬리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물론이지요 장로님. 세렌 너도 오랜만이구나. 장로님과 체스를 두고
있나보지?"
"네."
"음.... 보아하니 네가 흑색 말을 하고 있나본데 거의 이겨가는구나. 음,
장로님도 실력이 많이 녹스셨나 보군."
"허허.... 내 실력이 녹슨 게 아니라 이 녀석의 실력이 뛰어난 게지."
장로가 웃으며 말을 내려놓았고 쿠슬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하긴 세렌이 워낙 총명하니까... 그런데 세렌, 내가 장로님
과 할말이 있는데 잠시 2층에 올라가 있어주지 않겠니?"
"........ 알겠습니다."
그러자 세렌은 살짝 인사하며 2층으로 올라갔고 쿠슬리는 세렌이 앉아있
던 의자에 앉으며 조용히 장로에게 말했다.
"이번에 파울드에 다녀왔는데... 여러 가지 낌새가 안 좋았습니다."
"말해보게."
장로는 체스 판을 테이블 아래로 치웠고 쿠슬리는 잠시 후 침착하게 말
을 시작했다.
"다크휴먼이.....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그들이 클라스
라인 법국 안에 있는 라프나 여신의 신전에서 금지된 책들을 훔쳐 달아
났고 또 알아 본 바에 의하면 페이오드 왕국의 수뇌부는 이미 그들에게
대부분이 점령되었다 합니다."
"정말인가.... 그러고 보니 요즘 커다란 마력이 대량으로 지저계에서 방
출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큰일이군."
장로의 표정이 굳어지며 얼굴이 어두워 졌다. 그리고 마주보는 쿠슬리
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아마 장
로님이 계시는 이 곳을 그냥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이네.... 일이 급하게 되었어. 세렌도 곧 클라스라인으로 떠날 테고
마을의 아이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킬츠가 문제로군. 아참,
자네가 없는 사이 그 녀석은 소울아이를 얻었네."
"네? 지금 .. 뭐라고 하셨습니까. 킬츠가 소울아이를 얻었다고요?"
장로의 말에 쿠슬리는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장로에게 말했고 장로는 즐거운 듯 웃으며 다시 대답했다.
"그렇다네. 자네 딸에게 자극 받고 혼자 수련하다가 덜컥 얻어버렸지.
대단한 녀석이야.... 자네가 좀 가르쳐볼 생각 없나?"
"세상에.... 그런 엄청난 녀석을 제가 어찌 가르친단 말입니까."
"그래도 자네의 검은 킬츠의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일세."
그러자 쿠슬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킬츠에게
검을 가르쳐줄 선생을 구한 뒤였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아니오. 그 녀석을 가르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이미 구해놓
고 왔지요. 엄청난 녀석을 말입니다. 그는 저처럼 잔기술로 검을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울아이를 가진 사람을 가르친다니.... 로니온 녀석, 당
치도 않은 제자를 두게 되었군......."
쿠슬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2층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
는 치밀한 세렌과 모든 것에 전혀 숨김이 없는 킬츠. 누가 봐도 둘 중에
서 세렌이 세상에 살아가기 적합하고 크게 성장할 것이라 여기겠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킬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킬츠를 대하면 다른 누구
나 에게 대하는 것처럼 마음을 긴장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편안할 수 있었다. 화가 나면 즉석에서 그것을 쏟아내며 마음에 들지 않
으면 꿍 하니 가만있고. 기쁘면 정말 즐겁게 웃는 킬츠의 모습에 쿠슬리
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깊은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치밀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킬츠를 제외하고는 다른 그런 사람을 본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킬츠에게 맞는 스승이라.... 그거 정말 잘됐군. 로니온이라....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지."
"물론이지요. 그럼, 전 킬츠에게 올라가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해줘야 하는 법이니까요."
마틴스 백작가문에서 세렌을 양자로 삼고싶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던
도미니아는 자신이 마을을 떠날 때 했던 말과는 달리 다녀간지 두 달여
만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까지 동원하여 마을로 다시 찾아왔다. 이
유는 견습 패러딘 선발전이 곧 시작하기 때문에 세렌이 거기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렌은 양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도미니아는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며 세렌에게 어서 짐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킬츠에게 말은 하고 떠나야 할 텐데..."
그때 킬츠는 가슴의 상처를 다 회복하고 그 동안 움직이지 못 했던 한을
모조리 풀어 버리려는 듯 마을 주변의 언덕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정확히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마음 것 달려야만 한 달 동안
가슴속에 묵은 때가 벗겨질 듯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로케스트 언덕의 정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편히 앉아 마을
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에 푹 쌓여있는 마을
역시 한없이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킬츠는 최근 세렌이 밤마다 가끔 몰래 일어나 침대 밑에 있는 운반용
상자에다가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서 담아두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울아
이를 얻은 그날부터 쉽게 잠들지 못했던 킬츠였기 때문에 그런 세렌의
행동을 참든 척 하며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다.
부글거리는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 눈살을 찌푸리며 침울해진 킬츠는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그대로 오랫동안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킬츠는 마을로 들어오는 한 대의 마차를 볼 수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이끌며 두 명의 마부가 있는 매우 화려한 장식
의 마차였다.
'벌써 세 달이 된 건가... 이상한데.... 너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
다...'
킬츠는 눈을 감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세렌은 아마도 마을을 떠나
클라스라인의 귀족가문으로 양자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평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화려한 옷에 편안한 생활,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와 명예. 그것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귀족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것이
다. 하지만, 킬츠는 그런 세계를 향해 가려하는 세렌에게 알 수 없는 배
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질투심이 아닌 안타까움이었
다. 자신과 자신이 자라난 마을을 뒤로하고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단 한
명의 친구에 대한 가슴 아픈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마을에 도착한 마차는 한동안 떠나지 않고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미리
짐까지 다 챙겨 논 세렌이 마을을 바로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마
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킬츠는 팔 베개를 하고 뒤로 누우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오히려 그 전보다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는 주위의 미약한 생명들의 기운
이 킬츠의 기분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기다리지 마라 세렌... 난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시간이 없다며 자꾸 재촉하는 도미니아에게 계속 양해를 구하며 세렌
은 킬츠가 마을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점심때가 지나서도 킬츠는 마
을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점심때도 지났는데 네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군. 정말 한 시가 급
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도미니아가 마지막 경고인 양 세렌에게 말했고 세렌은 별 수 없이 알았
다고 말하며 자신의 물건을 챙겨둔 상자를 마차로 옮겨다 놓기 시작했
다.
"장로님, 그 동안 저를 키워주신 것 정말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 뵐 께요."
마차로 올라타기 전에 세렌이 장로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하자
장로는 세렌의 등을 토닥여 주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니. 네가 건강히 자라 주어서 나는 정말 기쁠
뿐이다. 앞으로 그곳에 가서도 건강히 잘 지내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쿠슬리 씨, 그 동안 정말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지었습니다."
"뭘. 그 동안 너와 킬츠가 있어서 이 마을이 아직까지도 화석이 되지
않은 거란다. 그래도 킬츠녀석.... 정말 안 나타나려나."
쿠슬리가 신경이 쓰이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세렌은 마을 동쪽
의로케스트 언덕을 조용히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괜찮습니다. 킬츠는 제게 많이 실망한 모양이니까요.... 제가 떠난 뒤
에 그 녀석을 잘 부탁합니다."
"그래. 그건 걱정 마라."
쿠슬리는 고개를 끄덕하며 세렌의 어깨를 두드렸고 세렌도 웃으며 쿠슬
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렌은 마차로 올라가며 소리쳤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세렌이 마차에 올라 타가 도미니아는 곧 마부에게 출발하라고 말했고
곧 마차는 방향을 돌려 마을을 벗어나 마을 밖의 외길을 따라 빠른 속
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 마을을 떠나는 구나......... 하지만 돌아오겠어. 달라진 나의 모
습으로.'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갔고 세렌은 자신의 정면에 앉아서 책을 펼쳐
읽고 있는 도미니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기부터 클라스라인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음... 아마 한 달 정도 걸린다. 하지만 이 마차의 말은 품종이 훌륭해서
별 일 없이 이대로 간다면 20일 정도면 백작 님의 저택에 도착 할 거
다."
도미니아는 책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며 귀찮은 듯 신경질 적으로 대답
했다. 조금 전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던 모
양이었다.
클라스라인까지 20일. 하지만 원래 같으면 그 날자 에서 타국의 국경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2. 3 일 정도를 더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곳 산노지방
은 그 어떤 국가의 지배도 받고 있지 않는 자유의 땅 이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은 필요가 없었다.
산노지방의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욕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대단히 강
했다. 기름지고 넓은 평원을 가진 덕분에 오랫동안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그들은 언제나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그 때문에 또한 수 없이 많
은 피를 흘려 왔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용감한 전사는 많이 있었지만 그
들을 하나로 모을 위대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
의 전쟁 이전까지 천년 이상을 당시의 강대국들에 지배를 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 왔었다.
하지만 산노지방의 사람들에겐 그들이 살고있는 평원과도 같은 넓은 마
음과 강인한 끈기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언젠가 찾아
올 기회를 기다리며 상업 도시라는 명분 하에 조용히 힘을 축적해 두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대륙 전체를 강타한 성의 전쟁이 일어났고 성의
전쟁이 끝난 후 주변 국가의 혼란한 틈을 타 드디어 산노지방의 모든 상
업도시들은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서로 도시간에 연합을 맺으며 성의
력 3년, 자치도시 연합을 결성했다.
그 다음해엔 역시 지배국가들의 압정을 피해 산노지방을 떠났던 사람
들이 안개의 숲 남쪽에 있는 광대한 사막 지역에서 역시 독립을 선언.
역시 남부 자치도시 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세렌에게 산노지방의 피는 흐르고 있지 않았다. 자유기사였던
그의 아버지 레닉스는 원래 페이오드 왕국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도 페
이오드의 왕국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산노지방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라왔다... 난 지금
고향을 떠나는 거야...'
세렌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누가 뭐라도 언
덕 마을과 산노지방을 떠나는 그의 기분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러나 새
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희망 역시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대륙에 이름을
남길 그의 미래를 위한 기대가 지금의 우울한 기분을 조용히 달래주었
다.
어느새 마차 밖이 어두워 졌고 도미니아는 몇 시간만 더가면자치도시
연합의 도시에 도착해 그곳의 여관에서 묵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최고급의 특급 여관에 예약을 해 놓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
내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자네는 그런 여
관에서 자본 일이 없었겠군. 하긴 그런 변방의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나
가본 일이 없었을 테니까............."
도미니아는 한 것 거드름을 피우며 세렌에게 빈정대었다. 그리고 세렌
은 그런 도미니아에게 고개만 끄덕거리며 무시해 버렸다. 일일이 상대하
려면 피곤해 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세렌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음. 그것 그렇고 이제 너무 어두워졌군. 등잔이라도 켜야겠는데.. 어
디....."
도미니아는 혼자 실컷 말을 늘여 놓다가 잠시 후 마차 안이 너무 어두
워 진 것을 깨 닳고 의자 뒤쪽에 짐을 넣어 둔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갑
자기 의아해 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 짐 속에서 빛이 나오는데?"
"네?"
도미니아를 무시하고 있던 세렌은 방금 전의 그 말까지는 무시 할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세렌은
자신의 짐을 담아둔 나무로 된 상자에서 정말로 반짝이는 빛이 새어 나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 뭐지?'
의아해 하는 도미니아를 뒤로하고 세렌은 상자에 다가가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자 안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몇 권의 책과 옷가지들, 그
리고 아버지의 유품인 자유기사의 문양인 나는 매가 새겨진 단검 등 그
가 정리 해 놓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상자의 오른쪽 구석에 자
신이 넣은 기억이 없는 작은 가죽 주머니가 놓여 있었고 반짝이는 빛은
그 가죽주머니의 겉에 묻어있는 약간의 가루에서 나오고 있었다.
'난... 이런걸 넣지 않았는데.... 아! 이건?'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주머니의 모습이 세렌의 머릿속에 맴돌았고
순간 머릿속에 무엇인가 스쳐지나가자 그는 재빨리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안엔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빛나는 가루들이 가
득 채워져 있었다.
"아니! 자네 그거 어디서 났나! 그것은 대륙에서 가장 희귀한 곤충이라
는 사피라키루이의 날개가루! 한줌에 5만 바클은 할 텐데! 대단하군, 그
렇게나 많이 있다니...."
도미니아는 단박에 가루의 정체를 알아 맞추고는 호들갑을 떨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5만 바클이면 작은 저택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정말 대단해..... 알고 보니 자네 정말 부자였군 그래!"
"킬츠....."
"뭐?"
그러나 지금의 세렌에겐 시끄러운 도미니아의 호들갑도, 5만 바클이라
는 가루의 가격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직 따뜻하고 부드
러운 기분들이 가슴속에 가득 차 오르고 있을 뿐.
'킬츠....... 고맙다.... 하지만 나도...... 마지막으로 너에게 인사를 하고 싶
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