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갈림 길- (4)
"바다에서 막 올라온 싱싱한 생선이 한 바구니에 10바키!"
"거기 아저씨 좀 보고 가세요!"
"싸게 팔아요!"
'으...... 시끄럽구만.'
북적거리는 도시의 거리는 도무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쿠
슬리였다. 실제로 이런 시장에 들어서면 분위기에 휩쓸려 막상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붕대는 샀는데.... 약초는 저번에 어디서 구했더라..... 도무지 시끄러워
서 감을 못 잡겠군."
여기 저기서 이 물건이 좋다, 저 물건을 사라 등등 온갖 잡소리들은 이
미 쿠슬리의 정신을 침범하여 마구 헤집어 놓고 있었다.
이 도시는 언덕 마을 남서쪽에 떨어져 있는 북부 자치도시 연합의 중추
인 파울드라는 곳으로 드라킬스라는 거대한 파도를 막아 내고있는 북부
자치도시 연합 최후의 방파제이자 요새였다. 이미 연합의 병력중 대부분
은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언제 시작될지 모를 드라킬스의 공격에 대비
하여 수비와 정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오히려 도시의 시장과 사람들을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있었다. 생필품 외에 여러 가지 무기나 전쟁도구
들이 시장의 한 부분을 차지했고 길거리를 서성거리는 용병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필시 연합에 고용되어 드라킬스와의 전쟁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대륙의 강국들은 대부분 용병을 고용하는 일이 없어서 그
들이 활약하는 곳은 대부분 이 자치도시 연합이었다. 물론 미지수의 실
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쟁에 잔뼈가 굵은 그들이 있었기에 자치
도시 연합은 막강 드라킬스 공국의 줄기찬 공격에도 멸망하지 않고 아직
까지 버티고 있었다.
"여! 이런곳에서 뭐하시나 쿠슬리?"
여전히 시끄러운 시장이었지만 순간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쿠슬리의 귀에 들어왔다. 그것을 매우 명쾌하며 정다운 목소리였다.
"로니온? 자넨가! 이런. 정말 뜻밖이군."
"그건 마찬가지야. 나도 이런 곳에서 나이트 길드의 유명한 전 드라킬
스 지부장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목소리의 주인은 쿠슬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40대 중반의 활기찬
얼굴을 한 남자로 훤칠한 키와 흑발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쿠슬리에게로 다가왔다.
"옛 일인걸. 지금은 평범한 약초 채집 가 일 뿐이야. 그런데 나이트 길드
의 '현' 북부 자치도시 연합 지부장인 자네가 이런 곳에 웬 일이지?"
쿠슬리는 '현' 이라는 발음을 강하게 하며 로니온이라고 하는 남자를 바
라보았다. 정식 명칭이 로니온 반 라피르제타라고 하는 그는 너무 강한
나머지 주변에 수많은 화이트 나이트들과 견습 기사들이 모여들어 큰 세
력을 이루었기 때문에 주변 귀족들의 미움을 사 결국 더러운 계략에 휘
말려 클라스라인 법국에서 쫓겨난 전 성기사였다. 평소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놀라운 검술 실력에 매료되어있던 많은 화이트 나이트와 견습 기
사들이 그가 클라스라인을 버리고 나올 때 같이 따라 나올 정도로 훌륭
한 인물이었다. 나이트 길드의 인원들은 대부분 그 정체가 베일에 가려
져 있었지만 로니온만큼은 한때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 임 만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엔 장소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 시장을 벗어나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역시 떠들썩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사람이 몇 명 있었으나 최소한 방금 전의 시장보다는 훨씬 조용
한 분위기였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맥주 두 잔을 시킨 그들은 곧 이야기를 시작
했다.
"자네와 술을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군. 16년 만인가?"
"글세. 그건 그렇고 이 도시는 여전히 활기차군. 전쟁의 두려움을 못 느
끼나보지?"
"오히려 전쟁 때문에 활기 차다고 할 수 있어. 한 몫 잡으려고 각지에서
찾아온 상인들과 용병들이 넘치거든. 나도 이 도시의 시장의 부탁으로
방금 쓸만한 용병들을 구하려던 참이었지."
"그런데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잡담이나 하고 있어?"
"어때. 어차피 그저 그런 뜨내기들만 모여들었는걸."
"하하하... 그건 그래. 자네 눈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가 이런 곳에 용
병이나 하러 올 리가 없지."
그들은 금방 나온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즐거운 듯 본격적으로 말
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일 국의 재상이
라도 극비로 다룰 중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아무래도 드라킬스는 북부 자치도시 연합을 완전히 점령한 뒤 이곳
을 거점 삼아 대륙 전역에 손을 뻗을 것 같다. 이미 그 녀석들의 군대가
10만을 넘어섰어. 그것은 천사성국과 페이오드. 클라스라인의 전 병력을
합친 것에 절반 가까이 되는 숫자이지."
"내가 있었던 14년 전만 해도 병사가 7만은 족히 넘었었으니 까 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천사성국이나 클라스라인을 쉽게 공격할 수
는 없을 거야. 지금 까진 드래곤 나이트의 압도적인 기동력과 공격력으
로 선제를 잡을 수 있었지만. 엔젤나이트만 하더라도 드래곤 나이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테니까. 클라스라인의 패러딘과 화이트 나이트들
도 만만치는 않을 테고 페이오드의 리플레이크 기사단도 보통이 아니니
까."
"물론. 그리고 또 문제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로니온은 활기차 보이는 성격과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근심 섞인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크휴먼. 그 인간 같지 않은 녀석들이 심상치 않을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다크휴먼! 그 타천사의 추종자들이 이번엔 또 어떤 경악할 일을 하려
고?"
"글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클라스라인의 라프나 신전에 그
녀석들이 침입했던 모양이야. 신전에서 오래 전부터 압수해온 몇 권의
금서들이 도난 당했다 하더군. 성기사들도여럿 죽었고."
다크휴먼이란 성의전쟁의 원흉인 타락천사 나타스를 숭배하는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성의전쟁이후 대륙각지에서 비밀스럽게 테러활동을 전개하
고 있는 대륙의 공적이다. 특히 그들만이 명맥을 잇고있는 네크로맨서와
다크 위자드, 리치 등의 마법사들이 자랑하는 불멸의 흑마법으로 만들어
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좀비나 고스트의 기습은 대륙 최강국이라
불리는 드라킬스 공국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
마침내 성의력 480년. 보다못한 천사성국이 페이오드 왕국과 클라스라
인 법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다크휴먼의 토벌에 나섰고 당시 수
많은 어둠의 마법사들을 영원한 어둠 속으로 묻어버렸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다크휴먼은 영원하다' 라고 저주(?)를 남기며 사
라진 그들의 바램처럼 그들은 대륙 각지에 구석구석 숨어들었고 결국 수
백년 동안 대륙에서 악명 높았던 리치(lich) 코페즈리를 잡은 것으로 만
족하고 천사성국은 다크휴먼 토벌대를 거두어 들였다.
그 후 100년이 넘게 시간이 지났고 지금 다크휴먼이라는 집단은 대륙에
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크휴먼 토벌 당시 목숨을 잃은
수 없이 많은 각국 병사들과 기사들의 처참한 죽음을 쉽게 잊을 수 없었
기 때문에 다크휴먼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에겐 곧 공포의 상징이었다.
쿠슬리는 커다란 컵에 반쯤 남은 맥주를 단숨에 삼키고는 불안한 눈빛
으로 빈 컵을 바라보았다. 전부터 생명의 빛의 여신인 라프나의 신전이
세계 각지에서 압수한 금서들은 상당한 숫자였다. 게다가 신관들이 별로
위험성이 없는 책들을 일부러 압수했을 리도 없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할
듯 했다.
클라스라인의 귀족 가문에 양자로 가는 세렌에게 어떤 위험이 될지 모르
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렌을 생각 하니까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
이 쿠슬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음. 그건 그렇고 자네 요즘 할 일이 없나본데. 용병 따위나 구하러 다
니지 말고 이번 기회에 내 부탁 좀 들어줘."
"뭐...... 난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길드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할 일이 없긴 한데. 무슨 부탁?"
"우리 마을에 킬츠라고 하는 꼬마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 검 실력이 형
편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날 새벽까지 눈을 감고 수련을 했던 킬츠는 결국 아무런 수확을 거두
지 못하고 밀려오는 졸음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침에 세렌이 나
가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또다시 눈을 감고 수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런, 깜박 졸아 버렸다. 조금만 더 했으면 뭔가 보일 것도 같았
는데.......'
미리 세렌에게 나가면서 장로에게 아침밥은 필요 없다 말하라고 얘기해
두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별
다른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너무 막막하다. 저절로 사물의 파장을 느끼기를 기다리다간 대체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어. 뭔가 방법을 찾아야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련에 발전이 없으니까 킬츠는 여러 가지로 방
법을 생각해 내었다. 정신을 정면의 한 공간으로 집중해 보기도 하고
다시 정신을 사방으로 분산해 보았다. 한번에 여러 곳에다 정신을 집중
하기도 하였고 그것을 또 사방으로 분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은 킬츠 자신이 어디에다가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 뭐야 이건.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혼란스러워......'
"똑, 똑...... 들어갑니다."
순간 킬츠의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 문이 열렸고 그 곳에 엄청나게 강
렬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주위를 흡수하기도 하고 주위를 흔들어 놓기도
하는 그런 존재가 그의 정신 안에서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킬츠의 혼
란한 정신에 공간이 뒤섞이기 시작했고 곧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다.
"으악!"
"앗! 왜 그래요?"
킬츠는 자신의 정신에 엄습해 오는 강렬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
며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자 약초 바구니를 가지고 세렌의 방에 들어왔
던 카름은 갑작스런 킬츠의 비명에 깜짝 놀라며 그가 누워있는 침대로
달려왔다.
"으아아------- 으악!"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상처가 아파요? 킬츠! 정신 차려요!"
갑작스러운 정신의 변화에 킬츠는 심한 거부감과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
했고 그런 초점 없는 눈으로 몸부림치는 킬츠를 보며 카름은 당황해 어
쩔 줄 몰라했다. 계속되는 비명과 몸부림에 아래층에 있던 장로가 급하
게 올라왔고 금새 상황을 파악한 장로는 킬츠의 몸을 붙잡고 있는 카름
을 옆으로 비키게 했다.
"음.... 어제부터 좀 이상하다 했더니만... 오늘은아침밥을 안 먹겠다고
했을 정도이니 미리 눈치 챘어야 했을 것을. 카름, 조금 옆으로 비켜나
있어라."
"예? 아.. 알겠습니다."
카름이 장로의 온화한 목소리에 주춤하며 비켜서자 장로는 킬츠에게 가
까이 다가와 그 모습을 자세히 들어다 보았다. 가슴의 상처도 잊은 듯
마구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킬츠는 눈동자는 이미 사물을 보고있지 않
았고 부옇게 초점을 잃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러다간 굳어 가는 뼈가 다시 떨어지겠구나. 어쩔 수
없지."
장로는 조용히 킬츠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데인 폰 디슈텔. 심연의 그림자여, 정신과, 정신과, 정신의 가장 완벽
한 휴식으로 이 자를 심연의 가장 깊고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인도할지
니, 나의 이름은 메본데저너. 피와 생명의 환원을 통한 너와의 계약자이
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흐름을 멈춘 듯 침묵했고 킬츠는 서서히 경련을 멈
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카름이 짤막하게 탄식소리를 내었다.
"아..... 방금 그곳의 틈새가 벌어지고... 엄청난 힘이...... 그, 그건....."
"그렇지.... 너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나
보구나. 그렇다면 놀랄 만도 하지."
장로는 그제야 킬츠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뒤를 돌아 카름을 바라보았
다. 카름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조금은 두려워하는 눈치였
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너를 따라서 본실의 세계를 보려고 했나
보구나."
"저는 단지.... 어제 킬츠에게 저에게 보이는 세계에 대해 조금 말했을
뿐인데....."
"뭐.... 나도 녀석이 하루만에 자신과 본질의 세계와의 경계를 흔들어 놓
았다는 것이 신기하구나. 하지만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본질
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큰 무리가 따르지. 하지만 걱
정 마라. 그래서 지금은 깊이 잠재워 놓았으니까."
"그, 그런 건가요."
"그래. 지금은 미안 하지만 킬츠를 부탁한다. 시간이 지나면 정상적인
능력을 가지게 될 거다. 그것보다 하도 발작해서 뼈가 다시 떨어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장로는 카름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부드럽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
리고 카름은 잠시 멍하니 장로가 킬츠의 머리에 손을 대었던 곳을 느껴
보았다. 아직도 그 주위엔 불안한 기운이 맴돌며 주변의 파장을 흐려놓
고 있었다. 그 정도로 방금 전 킬츠에게 작용했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카름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장로님이 킬츠에게 해 될 일을 하실 리가 없잖아. 걱정 안 해도 괜찮
을 거야.'
카름은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는 마치
죽은 듯 자고있는 킬츠에게 다가갔다. 가슴의 붕대가 방금 전의 발작으
로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지만 다행이 뼈에 손상은 없는 듯 했고 상처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 정말 다행이다."
카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흐트러진 붕대를 풀러낸 뒤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닦아내며 다시 약초를 붙이고 새 붕대를 감았다.
치료를 다 하고 카름은 잠시 숨을 돌리며 누워있는 킬츠를 물끄러미 응
시했다. 눈이 보이면서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아를 알게 되자 그것을 가
지고 싶어하는 소년의 끝없는 혈기가 카름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있었다.
매사에 태평하고 제 멋에 사는 녀석이었지만 한 번 붙잡으면 비록 성공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대 그냥은 놓지 않는 끈기를 가진 것이 바로킬
츠라는 고집불통의 소년임을 절실히 느끼는 카름이었다.
'킬츠......재미있는 사람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
'소울아이'(soul eye)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본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감각이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오로지 빛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사물에 반사된 빛을 감지하고 자신이 그 사물을 보고
있다고 느낄 뿐. 그러므로 그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
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사에게는 좋은 눈 보다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살기를 느끼는 감각이다. 이 것은 소울아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조
금 막연하게 느낀다는 단점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소울아이를 얻었고 내가 아직까지 단 한 번의 패
배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바로 소울아이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소울아이는 본질의 세계에서 생물의 정신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무리가 있다. 소울아이를 지닌 사람들은 각자 그 능
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생물의 정신력을 느낄 뿐이지만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고 정령사들은 아직 물질화 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방대한 소울아이의
세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소울아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
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른다.
-나이트 오브 티엣타-
샤블 크라이담
성의력 675년 피스니스의 개인 집무실에서
"갑자기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제 저녁만 해도 수련까지 한다며 쌩쌩했
는데."
저녁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세렌은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킬츠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장로에게 물었다.
"바로 그 수련 때문에 킬츠가 이지경이 되었단다. 이 녀석, 정말 잠시
도 사고를 치지 않을 때가 없어."
저녁때가 되어서 세렌이 집으로 돌아오자 카름이 집으로 돌아간 뒤로
킬츠의 침대 옆에 앉아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던 장로는 깊이
한 숨을 내쉬며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내려가 볼 테니 네가 킬츠를 잘 좀 봐주거라. 또 갑자기 발
작을 일으키면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고 나를 불러라."
"발작이라니...... 어쨌든 알겠습니다."
장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세렌은 장로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서 킬
츠를 바라보았다. 킬츠의 표정은 매우 일그러져 있었고 이마에선 식은땀
마저 흐르고 있었다. 세렌은 킬츠의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아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하고있었기에 시작한지 이틀만에 정신
을 잃고 발작까지 한다는 말인가. 그에 눈에는 그저 눈감고 인상쓰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은 매우 위험한 수련이라고 생각하니 저절
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녀석.... 악몽이라도 꾸고있나? 인상이 왜이리 험악해......'
빛이 없는 곳.
아무런 사물도, 어떠한 생명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히 어둠
속에 잠겨있는 곳. 완전한 비어있음, 혹시 무엇인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증명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세계. 그것은 공포와 불안. 두려움의
압박감으로 킬츠의 모든 것을 맹렬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만져보면.... 무엇이라도 알 수 있을 텐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적막한 세상이 오랫동안 흘러갔고 킬츠의 두려움은 계속 증폭되
었다. 무엇인가 느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킬츠를 필사적으로 몸부림치
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순간부턴가 킬츠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 없는 이 곳에서 찬란하게 주위에 파장을 흔들어 놓는 자기 자신을.
그러자 그 한 번의 느낌에 완전히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
왔다.
'하아....... 나다. 나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나 이외에 다른 것은 없는가?'
다시 불안한 마음이 킬츠를 휘감았다. 엄청난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넘
쳐 나왔다. 자신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을 느끼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자
신을 느끼지 못 했을 때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신을 느끼고 난
후, 자신을 증명해줄 다른 무엇인가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자신의 앞에 무엇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
다. 녹색과 청색으로 빛나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녹색은 편안하고 다정한
느낌, 그리고 청색은 조금은 우울한, 슬픈 듯 한 느낌이었다.
'평온함과, 아픔이 함께 있어..... 넌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