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3화 (3/166)

제 1장. -갈림 길- (3)

세렌은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 그 거대한 나비가 있다고  상상하며. 비

록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으로선 만약 그런 괴

물도 무찌를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진다면 어떤 적이 언제 나타난다  하더

라고 당당히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

다.

그렇게 세렌이 산에서 혼자 무거운 마음으로 수련을 하고있을 무렵. 킬

츠는 장로의 집 2층 방에 있는 자신의 침대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누가 침대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안 된

다고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킬츠도 아니었지

만 정작 움직이고 싶어도 격렬한 가슴의 통증이 킬츠를 한번 더  생각하

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도 싫어하고 책 읽

는 것도 역시 무척 싫어하는 킬츠가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책이름은 '대륙의 희귀한 동물 도감' 으로 다리가 수  십 개 달린 머리

카락 정도로 얇은 벌레에서부터 대륙에  단 다섯 마리만 산다고  알려져

있는 그랜드 드래곤(grand dragon)까지 다양하고 신비한 것들이 많이 나

와 있었다.

그러나 킬츠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머리카락  정도로 얇은 벌레도, 길이

가 천 세션(약 80m)을  넘어가는 최강의 생물인  그랜드 드래곤도 아닌

바로 '사피라키루이'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나비였다.

도감에 의하면 이 나비는 성충의 크기가 두 날개를  합쳐서 100세션(약

8M)이 넘어가는 초거대 곤충으로 정확한 서식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주로 꽃이 많이 피는 동부의 산악 지방에서 극히 소수가 살고있다고  나

와 있었다. 무엇을 먹고사는 지도  불명인 이 나비의 특이한  점은 야광

성분을 가진 다채로운 색깔의 날개 가루로서.  이것은 극히 드문 화장품

과 장식품의 원료로 시세에  따라 한 줌에 수만 바클(barcle.화폐단위)을

호가하는 귀족 전유의 귀중품이었다.

"진짜 그런 나비가 있었구나. 난 또 어느 사악한 마도사가 마계에서 소

환한 마수인줄만 알았지. 아니.... 마수였다면  내가  이겼을 리도 없겠지

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킬츠는 악몽 같은 그날의 밤을   떠올렸다. 그 사

피라키루이라는 나비한테 한번 받쳐서 갈비뼈가 나날아간 상태로  나비

의 날개를 검으로 찢어놓았고 중심을  잃고 황홀할 정도로 날개  가루를

뿌리며 파닥거리던 나비의 머리에다가 온 힘을 다해 검을 깊숙하게 꼽아

넣었었다. 그리고 나서 안심하고는  쓰러지려고 했는데 저  멀리 의식을

잃고 먼저 쓰러져있는 세렌이 너무나 마음에 걸리는 나머지 가슴을 격렬

하게 진동하는 엄청난 고통을 잠시 잊고,  목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비릿

한 핏물마저 도로 삼키며 세렌을 업고 마을까지 왔던 그 공포의 밤이 생

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미쳤지.... 그런 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물론 지금도 여전히 세렌에게는  많이 실망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큰 아량을 베풀어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킬츠였지

만 오히려 세렌은 매일 아무 말 없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는 해가 질

때가 되서야 먼지투성이로 돌아왔다. 그것도 평소와는 달리 말조차 붙이

기 힘들 정도의 무거운 표정으로.

'뭘 잘못 먹었나.....'

이 이상한 행동이 곧 마을을  떠나 귀족의 양자가 되려고 하는  세렌의

마음이 혹시라도  변하고 있는 징조이기를 바라는 킬츠였으나 세렌은 결

코 한번 정한 일에 절대 마음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그 희망은 별로 실

현 가능성이 적었다.

"하지만..... 세렌보다도 내가 먼저 죽을 뻔했어. 정말 더  강해져야 하는

데..... 아무래도 그 무거운 대검은 버려야겠다."

킬츠는 그날 밤 세렌의 검이 얼마나 부드럽게 자신의 뜻대로  베어지는

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가벼운 듯  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그

엄청난 무게의 대검보다는 훨씬  다루기 쉬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 킬츠 몸은 좀 어떠냐?"

그때 쿠슬리가 문을 열고  반갑게 들어왔다. 만약 이 40대 초반의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킬츠는 무덤 속에서 조금씩 썩

어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꼼짝도 못하니까 정말 죽겠어요. 부러진 갈비뼈들은 언제 다 붙지요?"

"다 죽어가던 놈이 입만 살아났구나. 걱정 마라. 전설의 약초 전문가인

이 쿠슬리가 한 달만 기다리면 완벽하게 회복시켜 줄 테니까."

"한 달이나요!"

"왜. 싫어? 싫으면 한번 날뛰어봐. 그땐 일년을 기다려도 모자랄 테니."

"............. 가만히 있을 께요."

쿠슬리가 한 것 힘주어 으름장을 놓자 킬츠는 정색하며 읽던 책을  덮었

다. 한 달도 충분히 괴로운 시간인데 일년이라면 아마 지신은 화석이 되

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말이다. 난 오늘부터 며칠간 도시에 좀 들려야겠다. 네 붕대도

마련해야 하고 여기선 구할 수 없는 몇 가지 약초도 사와야 하거든."

"그럼 그 동안 내 상처는 어떻게 하라고........."

킬츠가 울상으로 쿠슬리에게 묻자 쿠슬리는 걱정  말라는 듯 크게 웃으

며 킬츠에게  다가왔다.

"하하.... 걱정 마라. 카름이 와서 네 상처를 돌봐 줄 테니까."

"예? 아저씨 딸 카름이요! 하지만 그 아인 장님이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그 아이는  최소한 나만큼은 약초를  다룰 줄 안단

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다룰 약초는 또 어떻게 구분한단 말이에요.........."

"약초는 각각 고유의 독특한 향이 있지.  내가  카름에게  약초를 가르

칠 때 그 아이는 향으로 모든 것을 배웠다.  카름은 약초를 눈으로 보지

않아도 향으로 알 수 있어"

킬츠는 워낙 하고 싶은 말을 감추지 않기 때문에 전혀  거리낌없이 카

름에 눈에 대해서 말하는형편이었다. 그러나 쿠슬리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딸을 특별히 병자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카름은 눈만 안보이고 기침병이 조금 있을 뿐이지 그밖엔 전

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어쨌든 몸 조심히  다루고 있어라. 지금은  봄이라서 괜찮지만 여름이

되면 상처가 곪을 수도 있어."

"뭐, 조심할 께요."

"그래. 그리고 이것은 네가 잡은  나비의 날개 가루를 모은 거다.  이거

상당히 비싼 것이거든. 이번 경비로  조금은 빼서 쓸 테니까  그렇게 알

고."

쿠슬리는 품에서 주먹만한 가죽 주머니 두 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았다. 굳이 킬츠가 부탁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사피라키루이의

날개 가루가 고가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쿠슬리는  사피라키루이

의 시체를 땅에 묻기 전에 미리 날개를 깨끗이 긁어서 가루를 모아 두었

었다.

"뭐, 좀 더 가져가셔도 상관없어요."

"괜찮다. 너한테 쓸모가 없다면 차라리 소중한 사람에게 주지 그러니."

"아저씨도.......... 저한텐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래? 그거 기쁘구나. 하지만 내가 가져간 양도 적지는 않으니까."

"그러면 됐어요. 그냥 가세요."

"그렇다고.... 이 무정한 녀석."

쿠슬리는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킬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

다. 아무래도 쿠슬리는 킬츠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듯 했다. 평소

에 별로 말이 없고 자주 마을을 떠나있는 쿠슬리 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

를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아이들에겐,  특히 킬츠와

세렌에게는 말도 잘 붙이고 친절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의  남자였

다.

"앗! 환자를 때리다니!"

"환자도 환자 나름이지. 그럼 조심하고 있어라."

쿠슬리는 모르는 척 넉살좋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킬츠도 쿠슬

리의 뒤에다 혀를 쏙 내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웃으며 나가는 쿠슬리의 진짜 속마음은 오히려 울고싶은 심정이

었다. 요즘 근방에 이상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 도시까지 가는 길이 위험

할 듯 했고 말은 믿음직하게 했지만 사실 그가 없이 혼자서  킬츠를 맡

게되는 카름을 생각하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카름이 왜 혼자냐........  마을  사람들이 있는데. 길을 떠나는  내가 더

위험하지. 음......... 그래도 역시 마음이 안 놓이는군.'

장로의 집을 나가면서 쿠슬리는 오랜만에 허리춤에다 찬 그의 칼을  만

지며 그 감촉을 되살렸다. 전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피를 부르며 날카롭

게 자랐던 칼이었지만 지금은 제발 누구의 피도 부르지 않고 무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쿠슬리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혼자 남기고  가는 카름이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장로님도 계시니까.........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쿠슬리는 마을을 벗어났지만 길을 가면서도 고개가  자

꾸 마을 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세심한 쿠슬리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

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세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개념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목숨을  바쳐서 까지 배려를 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내 라면 어김없이 실천했다. 비록 그가  지금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혼자서 수련을 하고있는 도중이라고는 하지만 쿠슬리가  살

것이 있어서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세렌은 혼자  남은

카름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혼자 있는  카름을 오랜만에 만나기도 하고

또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말하기 위해 수련을 끝낸 후 저녁 시간이 되자

세렌은 쿠슬리의 집으로 향했다.

쿠슬리의 집에 도착한 세렌은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문을 두드리자 '들

어오세요' 하는 맑고 조금은  작게 느껴지는 소녀의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려왔다.

세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짙은 약초의 향기가 물씬 풍기며  세

렌의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향기는 아니

었고 오히려 머릿속이 상쾌하게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카름은 거실의 사방에 둘러있는 찬장의 약초들을  만지고있었다. 한 손

에 바구니를 든 채로 찬장을 열고   약초 병을 꺼내어 조금씩 바구니에

담는 모습이 장님의 행동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미안해요. 약초를 좀 챙기느라 신경을 못썼군요. 세렌이 맞지요?"

잠시 후 카름은 필요한 약초를 다 꺼내었는지 거실 한가운데  있는 테

이블에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세렌이 서있는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뭘, 카름이 하던 일을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그런데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세렌이 거실로 들어오며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카름은 테이블에  있는

의자를 세렌에 권하며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땀 냄새를 느꼈거든요.. 우리 마을에서 그렇게 땀을 흘리고 무엇인가를

할 사람은 킬츠와 세렌밖에 없는데 지금  킬츠는 아파서 누워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렌일 수밖에 없지요."

"땀 냄새로.... 나라는 걸 알아낸 거야?"

"그래요."

누구에게나 경어를 사용하는 이 착한 소녀의 신기한 특이한 능력과  명

석한 머리에 세렌은 마음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시각이 불능이기 때문에

다른 감각인 청각이나 후각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지만 이  소

녀는 그런 감각뿐만 아니라 생각도 아주 깊었다.

'킬츠와는 전혀 다르군.'

"그런데 우리 집엔 왜 왔지요? 어디 아파요?"

"아니. 그냥 신세진 쿠슬리 씨한테 고마워서 들린 거야. 네  얼굴도 오랜

만에 볼까 했고."

"같은 마을에 사는데요 뭘. 그리고  아버지는 도시에  물건을  사실  게

있다고 오전에 마을을 떠나셨어요."

"그래? 음..... 그러면 킬츠의 몸은 누가 돌보지?"

세렌이 쿠슬리의 집에  들린 진짜 목적은  바로 킬츠였다.  며칠 수련을

하다보니 이제는 조금 주위가 제대로 보여서 그 동안 고맙다고 말  한마

디 못한 킬츠에게 세렌은  매우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수련을 그만두고 쿠슬리가 마을에 없는 동안 자신이 킬츠의 병간호를 하

기 위해 카름에게 약초를 받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카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일부터 제가 킬츠의 상처를 치료하기로  했어요. 아버지한테 부탁 받

았거든요."

"........... 카름 네가 킬츠의 병간호를 하려고?"

"그래요."

세렌은 카름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카름에게 자신이 킬츠

의 병간호를 한다고 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 수 없군. 그냥 고맙다고 말로만 하는 수밖에.'

언젠가는 킬츠에게 도움을 줄 날이 올  테니 꼭 지금 빚을 갚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세렌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킬츠 그때 날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넌 정말 용감한 녀석이야."

"아? 뭐... 괜찮아."

요즘 언제나 같이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는 휙 하니 나가버리는 세

렌이 오늘은 갑자기 방을 나서기 전에 킬츠에게 정중히 고개까지 숙여가

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덕분에 아침부터 깜짝 놀란 킬츠는 방

금 세렌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요즘 저 녀석의 머릿속이 매우 복잡한 것 같아. 음.......... 이거 왠지 불

안한데.'

대체 요즘 세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킬츠의 안 돌아가는 머리로

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원인 모를

불안함만 느낄 뿐.

세렌과 킬츠가 처음 만난 것은 11년 전 자치도시 셀타스에 자유기사 레

닉스가 가족을 데리고 도시의 수비대로 들어온 그날이었다.

그들 가족은 잠시동안 킬츠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살았는데 그

여관을 무척 좋아했던 레닉스의 부인인 미나츄 덕분에 여관 2층 맨 끝에

있는 침대가 네 개 있는 방은 그들의 집이  되었다. 보통 기사라면 절대

여관에서, 게다가 여관의 방 한 칸에서 한동안 산다던가 하는 일은 기사

의 명예를 걸고라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레닉스는 자유기사였

기 때문에  그런 자잘한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유기사는 보통

기사와 달리 섬기는 군주도 없고 특별한 계율도 없이 오직 자치도시  연

합의 평화를 수호하는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가 없이 자란 킬츠는 그들 가족을 바라보며 그 가족의  아이들인

세렌과 에리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들은  언제나 예절바르게 행동했고

어린아이 임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적당한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레닉스는 도시에서 가장 강한 검사임에 틀림없었고 그의  부인

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미나츄는 아름답고 자상한 여자였다.

킬츠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고 어머니는 여관  일에 바빠

서 킬츠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강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킬츠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후 약 1년 동안 킬츠는 의도적으로 세렌을 피해 다녔다. 가끔 만나도

그들 사이엔 몇 마디의 가식적인 말들이  오갈 뿐이었다. 바로 드라킬스

의 군대가 마을을 공격해온 그날까지.

레닉스도, 미나츄도, 그리고 킬츠의 어머니인 린나도 드라킬스의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그날. 겨우  목숨을 건져 도시에서 빠져  나온 킬츠와

세렌 그리고 에리나는 도시를 빠져 나와 먼길을 도망치며 어느 산길에서

배고픔과 피로함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지금 언덕 마을의 장로에게 도움

을 받았었다.

그리고 장로에게 구조된 그날까지 세렌과 킬츠는 진실 된 슬픔과  진정

한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었었다.

"그땐 진짜 고통스러웠었지.......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웠어요?"

잠시 옛 생각에 멍해져서는 혼잣말에  열중하선 킬츠도 그 순간만큼은

으악 소리를 지르며 언제서부터 인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바

라보는 한 소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카......카름! 카름이지?"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놀란 목소리로 말해도 소용없어요. 난  분명히

노크까지 다 했는데 방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기에 들어 온 거예요."

"하........ 그, 그래?"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던 킬츠는 결국 자신이 옛날  생

각에 너무 깊이 빠져서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단정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렌은 오늘도 산으로 수련을  갔나보지요? 이 방엔 희미하게 세렌의

향기가 남아있어요."

"그래. 그리고 당연히 이 방은 내 방이자 세렌의 방이니까 여기에 그 녀

석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그것보다 너 그 존댓말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너는 나보다 한 살 더 만치 않아."

"하지만 이건 내가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경애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예의 에요. 비록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물의

형태와 색의 다채로움에 대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예의 말이에요."

"으... 어려워...... 그러니까...... 네가 볼 수  없는 세계가 너무 좋아서 넌

그 모든 것에게 존대를 붙인다는 그 소리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 보단....  상체를 약간만 들어봐요."

카름은 킬츠에게 다가와서는 가슴의  붕대를 푸르고 조심스레 전에  붙

인 약초들을 떼어낸 다음 새로 가져온 약초들을 잘 포개어 붙였다. 그리

고 다시 조심스레  새로운 붕대를 가슴에 감았다.

"어, 잘하네? 안보여도 이렇게 정확히 할 수 있는 거야?"

"물론 정신이 흐트러지면 어렴풋이 라도 사물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

지요. 장님의 한계라고나 할까."

"음... 그거 참 힘들겠다. 난 평소에 사물을  볼 때 눈만  뜨면 다  보였

는데  .......... 눈을 감고도 사물을 보다니...... 넌 정말 대단한 수련을 쌓았

구나."

"그러니까 킬츠는 운명의 신 데스튼에게 감사해야  되요. 물론 나도 감

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특별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을 주신 것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고 있어요."

"그, 그래?

카름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킬츠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눈이 안보이면서 신에게 감사 할 수 있는 건가?'

킬츠는 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카름은 무언가 특이한 소녀라고  생각했

다. 그녀에겐 킬츠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너, 그런데 전혀 모르는 길을 가거나 할  때도 불편하지 않아? 벽에 부

디 친다 던 가, 뭐...."

"어렸을 땐 자주 그랬어요.  집에서 걸어다닐 때도  자꾸 발을 헛디디고

바닥에 넘어 졌었지요. 그때도 소리나 향으로  근처에 있는 사물을 약간

알 수는 있었지만 그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조금씩 시간

이 지나고 어느 순간부턴가 내 주위의 일정한 거리의 공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처음 엔 바로 앞에 있는 물건과의 거리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이 점차 발전해서 이제는 정신을  집중하면 사방 100세션내의 공간

안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알 수 있어요. 아주  멀리 있다 해도 인간

같이 강한 파장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느낄 수 있고요."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킬츠는 잘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풀 한 포기나 작은 돌 조각 한 개일지라도 생물과 무생물을  떠나서 각

각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일정한 힘을 가지고 그 주위에 파장을  형성하

고 있어요. 난 그 힘의 파장을 느낄 수 있는 거지요. 솔직히 무생물의 향

기는 맡기가 어렵거든요. 그럴 땐 정신을  집중해서 주위의 파장을 이해

하면 되는 거 에요."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을 잔득 늘어놓고 카름은 점심때가  되서야 집

으로 돌아갔다. 간단히 말하면 눈을 사용하지  않고도 주위를  볼 수 있

다는 카름의 말이 킬츠의 가슴속에 크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단지 별

다른 호기심이 아닌 우연적인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만약 사피라키루이의 날개가루가 야광이 아니였다면.....'

분명 그날은 달조차 희미하게 보이지  않던 날이라서  사피라키루이의

번쩍거리는 날개가 아니었다면 침묵의암흑 속에서 별다른 저항한번  해

보지 못한 체 고작 나비 한 마리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

게 생각하니 인간의 시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 감각인 지  킬츠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킬츠는 그날 오후부터 눈을 감고 사물을 감지하는 훈련에  돌입

했다. 어차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그 훈련에 킬츠는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가 있었다.

장로에게 부탁해 미리 창문에 커튼을 두껍게 쳐놔서 방은 거의  완벽한

어둠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훈련에  몰입은  됐지만 많은 시

간이 지나도 눈을 감은 킬츠의 세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완벽한 암

흑의 세계. 오로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래된  방의 약간 퀴퀴한 냄새와

가끔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삐걱거리는 지붕의 소리였다.

분명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 바로 옆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그

옆엔 세렌의 침대가 있었다. 방구석엔 낡은 옷장과 서랍이 있었고 문 옆

엔 자신의 대검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그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도 눈을 감고있는 지금 그 정확한 거리와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흐음. 뭐 쉽게 될 거라곤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서서히 배가 고파오자 킬츠는 특유의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장로

가 가져온 밥을 재빨리 먹어치우며 킬츠는 자신의 수련이 오래 될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너 뭐하니.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커튼까지 꽉꽉 닫아놓고."

그리고 잠시 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돌아온 세렌이 잔득  인상을

쓰며 눈을 감고 누워있는 킬츠에게  이상하다는 듯 말하자 킬츠는  조금

신경질이 담긴 목소리로 홱 하니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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