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갈림 길- (2)
"네? 데려오라고 하셨다니.... 무슨 말입니까?"
세렌은 깜짝 놀라며 도미니아에게 물어보았고 도미니아는 한 것 거드름
을 피우며 대답했다.
"사실 우리 명예로우시며 훌륭하신 마틴스 백작 님께서는 전부터 한가지
고민하고 계시는 것이 있으셨다. 대대로 백작 님의 가문에서는 훌륭한
학자는 물론 뛰어난 기사도 배출하고 있었지. 지금은 돌아가신 백작 님
의 두 동생 분들도 클라스라인 법국의 위대한 패러딘이었다. 하지만...."
도미니아는 말하기가 조금 껄끄러운 듯 약간 뜸을 들이며 말했고 이때
세렌은 일의 진상을 약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백작 님에겐 두 분의 아드님이 계시는데 두 분다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셨을 뿐 몸까지 약하셔서 검에는 관심조차 없으시다. 그래서 가문의
명성이 떨어질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백작 님께서는 검에 재능을 가
진 아이를 양자로 삼고 싶으신 것이지. 그리고 수소문 끝에 적당한 인
물로 네가 선택된 것이고."
"놀라운... 말씀이 시군요. 게다가 어떻게 저의 이름과 가족관계, 거기
에다 사는 곳까지 알게되셨는지......."
세렌은 자신을 양자로 삼겠다는 말도 충격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대륙에
수많은 대상자 중에 고아가 되어버린 자신을 찾아내고 또 어떻게 찾아
왔는지가 더욱 신기했다.
"뭐, 물론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나이트 길드에 의뢰했다."
"나이트 길드?"
도미니아는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림직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정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퇴물기사들의 집단인 나이트 길드 말이다. 각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켜
기사단에서 쫓겨난 난봉꾼들이 뭉쳐서 만든 조직이지. 물론 기분은 나쁘
지만 그래도 그 녀석들이 어쨌든 간에 정보엔 가장 능통하니까..... 그런
데 자네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물론 강제는 아니다. 네가 명예스런 그리드 가문이 되겠다는 것을 포
기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장 결정하라는 것도 아니지."
혹시 지금 당장 결정하라고 재촉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고 있던 세렌
은 다행이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석 달쯤 후에 다시 오겠다. 여기서 클라스라인의 백작 님 저택가지 왕
복하려면 그 정도는 필요하니까."
말을 타고 서두르면 클라스라인의 수도까지 보름이면 족히 왕복할 수 있
지만 도미니아의 왕복이란 개념은 보통과는 조금 틀린 듯 했다.
도미니아가 클라스라인으로 돌아가고 세렌은 2층의 자신의 방으로 돌
아가며 이 커다란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니냐. 세렌, 네게 이런 마을은 너무 좁지. 너도
이젠 날개를 펼칠 때가 온 거다.-
장로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세렌에겐 그렇게 간단히 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4년 뒤면 에리나도 스피리스트에서 수행을 마치고 정식으로
정령사(summoner)가 되어서 마을로 돌아올 테고 그때가 되어서 오빠인
자신이 마을에 없다면 그녀가 크게 실망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리
드 가문에다가 임시로라도 에리나를 양녀로 받아달라고 말 할 수는 있겠
지만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는 이상 함부로 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혼자 남는 킬츠도 문제다.'
10년을 친형제처럼 지내온 킬츠를 남기고 떠나는 것도 문제였다. 그 동
안 세렌이 언제나 제멋 대로인 킬츠를 계속 상대 해주다보니 지금은 마
치 형이 동생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책임의식이 생겨나 있어서 그냥 두
고 떠나기엔 어딘가 기분이 꺼림직 했다.
하지만 만약 그리드 가문의 양자가 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성공
의 기회였다. 그리드 가문은 클라스라인에 속한 귀족 가문이기 때문에
본국 사람만 될 수 있는 영광의 신전기사단인 패러딘에 들어갈 수도 있
기 때문이었다. 드라킬스 공국의 기사단인 드래곤 나이트. 천사성국의
기사단인 엔젤나이트와 함께 대륙 3대 기사단으로 불리는 성기사단에 들
어간다는 것은 곧 대륙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사가 되는 일이었다.
세렌은 당연히 그리드 가문의 양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마음
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다.
'분명히 킬츠가 발악하며 날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니까... 타인 때문에 흔들릴 수 없는 것.'
그때 누군가 집안이 흔들리도록 쿵쿵거리며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을 전혀 감추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 버리는 킬츠의 화 가
났을 때의 발소리가 바로 그렇다는 것을, 세렌은 잘 알고 있었다.
"세렌!"
쾅 소리와 함께 킬츠가 문을 박차며 방으로 들어왔다. 벌써 장로에게 사
정을 전부 들은 듯 화가나 읽으러진 얼굴로 킬츠는 세렌에게 소리쳤다.
"뭐! 클라스라인 법국의 귀족 가문에서 너를 양자로 받아들이려 한다
고! 대체 뭔 소리야! 장로님이 헛소리한 것이겠지?"
절대 장로가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으면서도 마치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듯한 소리에 세렌은 가볍게 웃으며 침착한 표정
으로 대답했다.
"장로님께 다 들었어?"
"그게 사실이야?"
"그래. 오늘 사람이 왔었어. 나를 그리드 가문에서 양자로 받아들이려
한 대. 사실이야."
"정말이구나......."
킬츠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괴로운 감정들이 가득 담겨져 있는 표정에
다 떨리는 목소리를 더해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그리드 가문에 양자로 갈 꺼야."
세렌이 담담하게 대답했고 그러자 킬츠는 흥분과 분노가 가득 담겨있는
격한 억양으로 크게 소리쳤다.
"아무리 귀족이 좋다지만! 그래도 이 마을을 떠나는 게 어디 있어!"
"..........."
어떻게 보면 억지 같은 그런 말이 오히려 세렌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마을을 떠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세렌에게 있어선 가장 커다란
부담 중에 하나였다.
"물론........ 나도 이 마을이 정말 좋아. 조용하고, 아름답고, 언제나 평
화로운 마을이니까."
세렌은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바깥은 슬
픈 듯 고요해 보이는 자신의 언덕 마을. 바로 그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함께 굳어갈 듯한 기분이 세렌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부추겼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런 귀족의 양자 따위는 개나줘 버려!"
"너무 조용하고 너무 평화로운 것. 바로 그게 문제야. 난 더 넓은 세
계에서 크게 살고 싶어. 하지만 이 마을은 나를 언제까지나 계속 될 듯
한 평화로움에 동화시키지. 난 그렇게 이 마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
아."
"그.. 그런.... 으........"
킬츠는 세렌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 하고 한동안 신음소리를 내다
가 갑자기 휙 돌아서며 문밖으로 달려갔다.
"그래! 너 맘대로 해!"
세렌은 방을 뛰쳐나가는 킬츠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창문 밖을 바라보았
고 곧 집을 뛰쳐나와 언덕 쪽으로 달려가는 킬츠의 뒷모습이 그의 눈
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새 태양은 산너머로 모습을 감추려 하고있었다.
세렌은 당황하며 창 밖으로 크게 소리쳤다.
"킬츠! 밤의 언덕은 위험해! 어서 돌아와!"
그러자 갑자기 달리던 킬츠가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며 악을 쓰
듯 외쳤다.
"절대 안 돌아가!"
성의전쟁이 끝난 성의력 1년부터 지금까지 대륙은 전쟁의 도가니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전란이 계속되어 오고 있었다. 20
개국 이상이었던 나라들은 서로 전쟁을 거듭하여 현재 대륙 북서쪽과
중앙에 걸쳐 광범위한 영토를 차지하고있는 드라킬스 공국, 그 존재만으
로도 신앙의 대상인 천사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륙 서남부의 천사성국, 성의 전쟁 때의 다섯 영웅 중
한 명인 어쓰 워리어(earth warrior) 제노바가 전쟁 후 동료들과 그를 따
르는 민중을 모아 대륙 중앙에 건국한 페이오드 왕국, 그리고 한때 천
사성국의 고유영토를 제외한 대륙 전역을 통치하에 두었던 비밀스러운
국가인 세디아 황국, 그리고 생명의 빛을 관장하는 여신 라프나를 섬기
며 대륙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클라스라인 법국이 유일하게 대륙에 남
아있는 다섯 국가였다.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전쟁과 개척으로 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 대륙 전체에 상당부분 이상이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너무나
완벽한 자연의 조화로 전부터 인간의 침입을 거부했던 안개의 숲 과 같
은 지역이 그러했고 성의 전쟁의 후유증으로서 수많은 마수들이 숨어살
고 있는 곳들이 대륙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 물론 운명의 신 데스튼의
수호를 받고 있는 인간 이외의 종족이 사는 구역도 특별히 위험함을 떠
나서 출입을 삼가 하고 있었다. 그런 구역은 성의 전쟁 때 이 종족들과
계약을 맺고 막강한 능력을 가지게된 '키퍼(keeper)'가 수호하고 있기 때
문에 이들 키퍼의 성질을 잘못 건드렸다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소문
이 널리 퍼져있었다. 언덕 마을 주변도 조금은 위험한 지역에 속했는데
이유는 그 근방에 야생 늑대의 서식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밤마다 근처를 떼지어 배회하며 다른 야생동물이나 소수의 인간을
공격하곤 하지만 인간의 마을을 습격해오는 경우는 드물어 그다지 큰 공
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늑대 밥이 되고 싶어! 어서 돌아와!"
주위에 있는 언덕과 산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이 바로 언
덕마을 이었다. 특히 마을과 연결된 길이 나있는 곳을 제외하면 전부 야
생의 자연 그대로였다. 세렌은 달려나가 버린 킬츠를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 돌아다니며 혹시나 킬츠가 늑대에게 공격을 받으면 어쩌나 생각했
다. 아무리 칼을 들고있는 인간이 늑대보다 강할 수 있다 해도 그건 어
디까지나 늑대가 한 마리일 경우고 늑대 수 십 마리가 떼지어공격한다
면 실력 있는 기사라 해도 상대하기 힘들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킬츠는
기사는 둘째치고 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철없는 소년이었다.
'아마.... 킬츠는 로케스트 언덕으로 갔겠지. 그곳을 매우 좋아하니까.'
수많은 산과 언덕을 모두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 이어서 세렌은 마음
속 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로케스트 언덕으로 달려갔다. 꽃과 나비가
유난하게 많아서 로케스트라고 이름 붙인 그 언덕을 킬츠는 무척 좋아하
고 있었다. 잠시 후 세렌이 로케스트 언덕에 도착하자 어두워서 잘 보이
지는 않지만 언덕의 중턱에 사람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킬츠
였다.
"킬츠 어서 내려와! 이 부근엔 밤에 늑대가 나오잖아!"
"뭔 상관! 곧 귀족이 될 귀한 도련님께서 나 따위 천 한 시골마을의 아
이에게 관심이나 있어?"
이미 저녁 노을도 모습을 감추어 주위는 희미한 달빛과 반짝이는 별들
에게 의지해야할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주위엔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고 덕분에 마음이 다급해진 세렌은 언덕을 달려
올라가며 킬츠에게 소리쳤다.
"잔소리 말고 어서 마을로 돌아가자! 밤의 이곳은 정말 위험해!"
"싫어!"
세렌이 올라오는 것을 눈치챈 킬츠는 재빨리 자신도 언덕의 정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킬츠도 지금 시간은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알
고는 있었지만 이미 오기가 발동한 후 라서 무시해 버리고 있었다.
언덕 위로 도망가는 킬츠를 보며 세렌은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달렸다.
어서 킬츠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영 마을로 돌아
갈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순간 언덕의 정상 쪽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이 세렌의 눈에 들어
왔다. 마치 새벽에 동쪽의 바다에서 처음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
순간처럼.
"킬츠! 앞을 봐!"
"무조건 싫어!..... 아니, 뭐?"
세렌이 소리치자 고개를 숙이고 정상에 가까이 달리고있던 킬츠는 좌우
로 고개를 저으며 소리치다가 순간 세렌의 외침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
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눈이 부실 듯 강렬한 빛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윽!"
그 순간 세렌은 언덕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날개 한 쌍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빛의 날개를.
"나.......나.....나비!!!"
몸통 부분이 어른의 키 정도의 길이인 종류를 알 수 없는 나비 한 마리
가 바로 그곳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환상적으로 다채롭게 빛나는 한
쌍의 날개는 단 한 장만으로 집 하나를 다 덮을 만큼 거대했다.
"으아아!!! 괴물나비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은 킬츠의 비명이 언덕을 울렸고 순간 나
비는 강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치솟았다. 그러자
그 날개의 풍압을 감당하지 못한 킬츠는 몸의 중심을 잃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아악!"
"킬츠!"
한참을 굴러 떨어지던 킬츠를 세렌이 달려와 받쳐주었고 그제야 킬츠는
굴러 떨어지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괜찮아 킬츠? 정신 차려!"
"으으.... 비켜 세렌. 너한테 도움 받기 싫어."
"말하는 것 보니까 괜찮은 것 같구나. 그러면 조용히 좀 해봐."
"뭐?"
"저거 안 보여? 공격당하면 끝장이야."
세렌이 하늘 한 가운데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거대한 나비를 가리
키며 말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괴물 체
가 바로 지금 그들의 머리 위에 날고있는 것이었다.
"괴물나비..... 저게 인간을 해칠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 피해!"
이미 나비는 그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비록 그들에
게 나비의 기분을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것이 마치 무척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순간 세렌은 킬츠를 안고 옆으로 몸을 날렸으나 나비의 속도가 너무 엄
청나서 세렌이 완전히 피하기도 전에 나비의 몸통이 세렌의 등에 정확히
부딪쳤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세렌은 킬츠를 안은 체 강렬하게 지면에
부딪쳤다. 이윽고 엄청난 고통이 세렌의 등에 엄습해 왔고 곧 울컥하며
입에서 피가 가득 흘러내렸다.
자신을 머리위로 무엇인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 킬츠는 곧
그것이 자신을 안고있는 세렌의 입에서 떨어지는 피 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난 킬츠는 세렌을 부축해 일으키며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나비는 하늘의 한 가운데서 몸을 돌리며 다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세렌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킬츠의 눈에는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처
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몸 어딘가가 크게다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빨리 장로에게 세렌을 보였으면 좋겠지만 상황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
다. 하늘을 날며 엄청나게 빠른 저 괴물나비를 상대로 세렌을 부축하며
도망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 어디 한번 붙어보자. 이 자식아! 누가 겁먹었는지 알아. 덤벼!"
세렌을 옆에 눕혀놓은 킬츠는 세렌의 검을 뽑아들고는 세렌을 눕혀놓은
반대쪽으로 달리며 날아오는 나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나비는 괘도
를 킬츠가 달리는 곳으로 바꾸며 더욱 빠르게 날아왔다.
"좋아. 받아라!"
킬츠는 즉각 달리는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날아오는 나비를 향해 타이
밍을 맞춰 세로 일직선으로 검을 베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나비는 그 거대한 몸집으로 킬츠에게 부딪쳐 버렸다. 신음소리도 못 낼
정도의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킬츠는 곧바로 수십 세션을 뒤로 날아가
쓰러져 버렸다. 역시 세렌처럼 그의 입에도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진 듯 나비와 부딪힌 가슴에 신경이 끊어
질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크윽.... 이걸로 끝난 줄 알았어! 난 세렌처럼 약골이 아니야. 다시 덤
벼!"
킬츠는 힘겹게 일어나서는 다시 발악하듯 소리쳤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세렌을 저대로 놔두고는 절대 그냥 쓰러질 수 없
었다.
킬츠의 눈앞이 가물거리며 동시에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나비는
그런 킬츠의 개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름다운 거대한 두 장
의 날개로 유연하고 빠른 날개 짓을 하며 동시에 주위에 빛나는 가루들
을 뿌려대면서 다시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는 나비의 빛나는 날
개가루로 반짝거리며 마치 지금의 밤하늘과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
다.
'와라.... 다시는....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
킬츠의 기합소리가 온 언덕에 가득 메아리 쳤고 나비의 날개가루들이
사방으로 날리며 화려한 광경으로 펼쳐졌다.
장로의 집 2층의 자신의 침대에서 세렌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눈에 보
인 것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쿠슬리 씨의 뒷모습과 그 옆에서 걱
정스러운 얼굴로 서있는 장로의 옆모습이었다. 그들은 둘 다 세렌의 옆
에 있는 킬츠의 침대를 향하고 있었다.
"으......"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을 느끼고 세렌이 신음하자 쿠슬리 씨와 장로는 세
렌을 돌아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났구나 세렌. 몸은 좀 괜찮으냐?"
"예...... 으윽.. 참을 만 합니다. 장로님.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머릿속에 거대한 나비의 현상이 떠오르며 세렌은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그러자 장로는 옆에 있는 킬츠의 침대를 돌아보
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너와 킬츠가 집을 뛰쳐나가 버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나
는 마을사람들을 모아 너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그때 킬츠가 너를
업고 마을로 돌아 왔다."
"킬츠가.... 말입니까?"
"그래. 마을로 돌아온 그녀석이 광장에 모여있는 우리를 보더니 네가 위
험하다며 소리치고는 그대로 쓰러져버렸지. 너를 업은 상태로 말이다. 그
래서 우리는 먼저 너를 치료했는데 알고 보니까 문제는 킬츠가 더 심각
한 상태였단다. 너도 등이 많이 다쳤지만 킬츠는 갈비뼈 여덟 개가 부러
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을 뻔했단다.. 지금은 겨우 고비를 넘기고
잠들어 있지."
세렌은 자신의 침대에 죽은 듯 누워있는 킬츠를 보며 어제의 일을 기억
해 냈다.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를 피해 킬츠를 안고 옆으로 몸
을 날렸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나비가 등을 스쳐서 엄청난 고통을
느꼈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다음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때 의식을 잃었구나.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킬츠는 그때
별로 다치지 않았었는데......'
잠시 후 킬츠가 그 거대한 나비와 사투를 벌여 죽인 후에 자신을 업고
마을까지 걸어왔다는 스토리가 세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
래도 그것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킬츠가 고생을 하며 자신을 업고
마을로 도망쳐 왔다면 그것을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거대한 나비는 아직 로케스트 언덕 주위를 날고있을 것이 분명했다.
세렌은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장로와 쿠슬리에게 설명하고 로케스트
언덕 근처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쿠슬리 씨는 바로 마을 사
람들을 모아 마을을 나섰고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돌아왔다.
"정말로 엄청나게 거대한 나비가 한 마리 있기는 하더구나. 몸통이 나
보다도 더 큰 나비가. 그런데 죽어 있었어."
"죽어있어요?"
"그래. 한쪽날개가.... 그것도 날개라고 해야되는지 원... 어쨌든 칼에 베
인 듯 길게 찢겨져 있었고 그 나비의 머리엔 네 칼이 박혀 있었다. 뽑아
서 가져왔는데 좀 지저분해서 밖에다 놓아두었다."
쿠슬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킬츠에게로 가서 가슴에 감아놓은 붕대를
풀고 약초를 갈아서 만든 약을 상처부위에 조심스레 발랐다. 그리고 그
럴 때마다 킬츠의 몸이 고통스러운 듯 움찔거리며 흔들리는 것이 세렌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언덕 가득 펼쳐있는 수많은 꽃들 과 풀들도,훈훈하게 스쳐 지나가는
향긋한 봄바람도. 짝을 찾아 울어대는 풀벌레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도 지
금 세렌의 감각을 전혀 자극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렌은 아무리 깊이 생각을 해봐도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 크게 가
슴에 자리잡을 뿐이었다. 로케스트 언덕에서 그 거대한 나비를 처음 보
았을 때 자신은 절대로 그런 괴물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온몸
을 가득 채워왔었다. 당연히 도망치는 것만이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 내렸었다. 그러나 킬츠는 달랐다. 세렌이 정
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킬츠는 이미 도망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 순간에 느꼈을 맞서서 싸울 수 없다는 강
박관념을 버리고 어떻게든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킬츠에겐 있었
던 것이다. 검도 잘 다루지 못하고 고집불통인 킬츠였지만 그래도 그 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세렌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만약 킬츠가 정신을 잃
어 쓰러져 있고 자신이 그 거대한 나비와 대치 하고있는 상황이라면 비
록 한 명이라도 살기 위해, 아니 자신이라도 살기 위해 혼자서 죽어라
도망쳤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빠른 나비라 해도 숲으로 도망치면
그 큰 몸집으론 당연히 숲까지는 쫓아올 수가 없을 테니까.
'당연히 내 판단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난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