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의 길-1화 (1/166)

제 1장. -갈림 길- (1)

세피르트 섬에서부터 나비들이 날아오는 봄철이  되자  로케스트 언덕

은 먼 곳에서  바다를 건너온 배고프고 지친 그들을 반가운 손님으로 맞

이하기라도 하듯, 수많은 원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가득 피어 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비들이 언덕을 향해 어디에서 그렇게  날아오는지 이

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봄을 몰고 오는 나비들이  언덕의  꽃봉

오리를 불렀고 또 봄을 시작하는  언덕의 꽃들이 나비를 불렀기에  자연

스레 매년 봄마다 나비들이 이곳 로케스트 언덕을 찾아온다고 믿고 있었

다. 게다가 그만큼 언덕의 꽃들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킬츠, 그렇게 마구 휘두르면  어렵게 이곳까지 찾아오신 아름다운  봄

의 귀부인들께서 놀라 달아나시잖아. 힘 자랑은  하지 않아도 네가 힘이

강하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으니까 이제는 좀 생각을 하면서  휘둘러

라."

세렌은 어지간히도 무거워 보이는 대검을 들고는  자신의 앞에서 힘겹

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작을 소년인  킬츠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더 부드러운  말투로  충고해 주고  싶었으나 워낙

한심해 보이는 모습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네 모습은 네가  검을 든 것이 아니라 검이 너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정말 한심해 보여."

"남이 검을 들건 검에 들리건 뭔 상관이야. 오늘은 반드시 널 이겨보고

야 말겠어."

"마음대로....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억지로 검을 치켜든 킬츠를 세렌은  고개

를 저으며 바라보았다.

"시.. 시끄러!"

"시끄럽긴. 엄연한 사실이야."

킬츠와 세렌이 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년 전인 그들이  14세가 되

던 해였다. 16년 전 성의력 648년부터  시작되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

는 드라킬스 공국의 산노지방 점령전쟁의 피해자인 세렌과 킬츠를  맡아

길러준 마을의 장노는 둘에게 동시에 검을 가르쳐 주었으나 1년이  지난

지금 둘의 검술은 누가 보아도 커다란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세렌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듯 검의 기교와 강약의 조절을 훌륭하게

익히고 있었으나 킬츠는 그렇지 못했다. 키는  그렇게 작지 않았지만 왜

소한 체구의 킬츠는 오기만은 남달라서 어른들도 조금은 힘겨워할  묵직

한 대검을 마을 창고에서 잘  도 찾아내서는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검에  강약 조절은 말할 것도 없고

장로가 가르쳐준 검의 기초들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곧 세렌은 다시 킬츠를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만들고는 가볍게  심호

흡을 하였다.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세렌의  기술은 숙련된  검사의  그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물론 아직은 검에 힘이 실

려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킬츠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자. 이제 그만 하자.  점심때가 다됐어. 게다가  오늘은 장로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으니까."

세렌은 자신의 검을 익숙한 자세로  검 집에 넣으며  풀밭에 주저앉은

킬츠에게 손을 내 밀었다. 그러나 킬츠는 시선을 내리고는 세렌에게  대

답하지 않으며 그대로 숨만 헐떡였다.

'이 녀석 또 삐쳤군. 난들 어쩌나........ 그냥 내버려둬야지.'

세렌은 한숨을 내쉬며 킬츠에게 내민 손을 거두었다.

"그럼..... 땀 좀 식히고 내려와라. 난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세렌은 몸을 돌려 킬츠를  내버려 둔 체  언덕을  내려가 버렸다. 킬츠

가 한번 삐치면 그것이 기본으로 하루 이상 가기 때문에 10년을  형제처

럼 함께 지낸 세렌도 어쩔 수 없었다.

'쳇........'

세렌이 로케스트언덕을 내려가고 잠시 후 가쁘게 차 오르던 숨이 고르게

안정되자 킬츠는 가만히 오른손에  쥐고있는 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길이가 10세션(80cm정도) 정도이고 폭이 한 뼘  가까이 되는 전형적

인 대검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가 이 검을 만들 때 무슨 한눈을 팔았는

지는 몰라도 쓸데없이 무거워 보였고 군데군데 녹이 쓸었으며 날은 무디

어져 있었다.

'쓸모 없는 검......... 지금 내 모습이 이런 걸까.'

킬츠는 검을 옆으로 던지고는 풀밭으로  몸을  던졌다. 푸른 하늘  속엔

투명한 구름들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싱그러운

풀 냄새와 짙은 꽃향기가 가슴을 가득 채워왔다.

"하아....... 좋군."

복잡한 생각들 속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곧 날아갈 듯 상쾌해졌고  무거

운 것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이 답답했던 가슴은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

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검을 배우기 시작한 그날부터  킬츠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

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

가 대륙을 떠돌던 용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킬츠는 분명

검술실력만은 별로 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과는 비교가 되

지 않는 능력을 가진 세렌의 아버지인 자유기사 레닉스보다는.

나라는 더 많은 영토를 원하고 새로운 영토는  전쟁을 필요로 한다. 그

리고 전쟁은 피를 원한다는 자연스런  법칙 때문에 지금 대륙에는 수많

은 전쟁과 전란, 그리고 피의 향연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세렌의 아버지이자 자치도시 연합의 기사단인 자유기사의 단장  이였던

레닉스는 13년 전 가족들과  함께 산노지방의 자치도시인 셀타스에 머물

고 있었는데 드라킬스공국의 제6차 산노지방 점령전쟁에서 셀타스를  지

키다가 결국 전사를 했다.

산노지방은 대륙 북쪽의 중앙에  위치한  비옥한 토지의 곳으로 38개의

자치도시들이  서로 연합하여 북부 자치도시 연합을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대륙의 서북쪽의 광대한 산악지역을 기반으로 하고있던  드라킬

스 공국이 모자라는 식량문제 때문에  비옥한 산노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성의력 609년에 일으킨 전쟁이었다.

드라킬스는 성의력 114년에 대륙 서북쪽의 '드라필'  지방에 세력을 나

누고 있던 국가 넷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공국으로 토파즈, 마노, 루비의

세 가문이 켈도스 가문을 국왕으로 받들어 광대한 영토를 분활 하여  지

배하고 있었다. 덕분에 드라킬스는 네 나라의  군대를 거느린 사상 최대

의 군사국가가 되었고 그 막강한 군사력으로 300년 이상을 영토  확장전

쟁을 하여 지금의 영토를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기름진 평야를 대량으로 보유하고있는 동쪽의 산노지방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드라킬스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자치도시 연합은 드라

킬스와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들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스카이  드

래곤을 다루는 용기사들의 집단인 '드래곤 나이트'  기사단을 앞세운 드

라킬스의 총공세를 막아내기엔 무리였다. 국경에 위치한 세 개의 도시가

보름만에 점령당했고 곧 북부 자치도시 연합은 산노지방 동쪽의 일부 도

시들을  제외하고는 드라킬스에게 무릎을 굽혔다.

세렌의 아버지 레닉스가 지키고 있던 자치도시  셀타스도 당연히 드라

킬스의 공격을 받았고 레닉스는 드래곤나이트를 상대하다가 상대의 창을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래도 그는 생전에 실제로 드래곤나이트

셋을 쓰러트린 최강의 자유기사로써 물론 자유기사라는 것이 일류  기사

단의 실력을 갖춘 집단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드래곤 나이트 킬러 레닉

스' 라고 하면 드라필 지방과 산노지방 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였다.  심지어 산노지방의 동북쪽에 위치한 세디아  황국의 뛰어난 실력

과 비밀스럽기로 유명한  황실 친위기사단 '임페리얼  나이트'에서 그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혈통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킬츠는 풀밭에 누운 그대로 눈을 감으며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복

잡한 심정과 가라앉은 마음이 여지없이 킬츠를 우울하게 만들어갔다.

잠시 후 콧등이 간질거리는 것이 날다  지친 나비 한 마리가 잠시  쉬기

위해 킬츠의 콧등에 앉은 듯  했다. 살짝 눈을  떠보니 크고  흰 깨끗한

날개가 매력적인 우아한 나비 한 마리가 그곳에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쳇.... 귀찮게 시리.'

킬츠는 마음속으로 짜증이 났지만  고개를  흔들어 날려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숨까지 죽이며 더욱 가만히 있었다.

'뭐........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

눈을 감으면 생생히 되살아나는 오래된 그 기억. 세렌은  10년  전의 피

비린내 나는 참상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정답고 활기차던  도시

의 사람들이 강철 색의 갑옷을 입은 드라킬스의 병사들에게 무참히 학살

당하는 모습도, 그의  아버지가  드래곤 나이트의 긴 은색  창에 가슴이

관통 당하는 장면도, 그리고  어머니를 선홍빛  화염으로 산화 시켜버린

회색 비늘을 가진 그 비룡의 위압적인 비행도 모두 생각 할 때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났다.

무감각한 킬츠가 철이 안 들어서 자주 고집을 부리는 모습도 세렌에겐

부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자신은 도저히 잠시도  잊을 수 없는 모습들이

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언제나 더욱 강해

지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세렌은 손바닥이 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어설픈 공격 정도는 완벽히 흘린 줄 알았는데.'

조금 전까지 겨뤘던 킬츠의 검에는  분명 그 어떤  날카로움도 기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검을 서로 교차할 때의 중압감만은 예

상외의 것이었다. 킬츠의 그 무디고  무거운 검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오기가 빚어낸 놀라운 성과인지에 대해서 세렌은 아마 전자 쪽이라고 생

각했다. 킬츠가 조금 힘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결코 특별히 뛰어

난 것은 아니었다.

4년 전 매직길드에 마법을 배우러 떠난 두 살 위인 촌장의 손자 '루디'

가 당시의 킬츠와의 완력싸움 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 녀석은 빨리 철들어야 할텐데......'

아무튼 킬츠와는 10년을 세렌과 지내왔고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당시의

고통을 공유하고있는 유일한 사이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서로 정신적

으로 의지하고 있는 친구였다.

마을에 그들 또래의 아이는 단 현재 단 한 명으로 약초 상을 하는 쿠슬

리 씨의 딸인 카름이라는 여자아이로써  아주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서

장님이 되어버린 소녀였다. 사실 마을에 그들  또래는 장노의 아들인 루

디와 세렌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에리나가 더 있었지만 각각 4년 전에

매직길드와 스피리스트의 신전으로 수행에 들어갔다.

'에리나는 잘 있을까.... 안 본지도 퍽 오래됐는데.'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 발랄했던 동생을 떠올리며  세렌은 얼굴에 미

소를 지었다. 그가 웃을 수 있는 몇 안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

기 때문이었다.

로케스트 언덕을 내려와 조금 더  걷자 세렌의 마을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10년 전부터 세렌과  킬츠의 새로운 고향이  되어버린  이 마

을은 위치 상으로 보면 산노지방의 동쪽으로 세디아 황국의  남쪽국경에

맞닿아 있는 구릉지대에 위치했으며 동쪽은 셀크만 해라고 불리는  바다

였다. 남쪽으로는 클라스라인 법국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왕래는 거의 없었다.

마을은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규모가 작아서  아직까지 특별한  이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냥 편의상 언덕마을 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주변

에 많은  언덕이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마을이 세워진 자리도 낮은 언

덕이었다. 거기에 마을의 생계수단 역시 언덕에서 철마다 피어나는 각종

약초들과 싱싱한 나물로써 자치도시 연합의 여러 도시의 시장에서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어이! 세렌! 오랜만이다.."

세렌이 마을로 들어가 장로의 집으로 걷고 있을 때 약초상인  쿠슬리가

집 앞에서 약초를 다듬으며 세렌을  불렀다. 그는 얼마 전  약초를 캐러

마을을 떠나서 한동안 볼 수 없었는데 오늘에야 마을에 돌아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쿠슬리 씨. 그 동안 좋은 약초 많이 캐셨어요?"

"뭐 그저 그렇지. 요즘은 근처 언덕에 약초의 씨가 말라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옆에 있는 광주리에 하나 가득 차있는 약초를  바라

보며 세렌은 10년 동안 약초와  살아왔다는 쿠슬리의 약초 캐는  실력을

실감했다.

"그래도 쿠슬리 싸라면 어디서라도  약초 한 뿌리  못 캐실 리가  없지

요."

"물론 우리 카름을 위해서라면 어디 사막에서라도 캐올 수 있지."

쿠슬리는 조금 슬픈 듯 한 어조로 자신 있게 말했다.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 눈이 멀어버린 카름은 쿠슬리의 유일한 혈육으로 조용하고  내성적

인 착한 소녀였다.

"그 녀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기침병까지 생기다니....... 하지만 내가 반

드시 고쳐 줄 꺼다. 반드시........"

"그럼요. 쿠슬리 씨의 약초 다루는 솜씨라면  카름의 기침병 따위는 곧

씻은 듯이 사라질 겁니다.."

"그래, 고맙다...... 아! 그런데 좀 전에  마을에 사람이 찾아왔어. 장로님

의 집을 찾더라고.  훌륭한 옷을 입고 있던데, 아마도 도시에서 온 사람

같다."

"그래요? 음...... 알겠습니다."

마을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워낙  조용한  마을이라

별로 사람의 왕래가 적었고 무엇보다  다른 도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행 시에 휴식을 위하여 머무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지? 장로님을 찾아올 사람이라면.'

장로의 집으로 가면서 세렌은 마을을  찾아왔다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

다. 장로의 집을 찾았다니까 장로의  집에서 살고있는 세렌은 곧  알 수

있겠지만 솟구치는 호기심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렌은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장로의 집에 도착했고 잠시  집

옆에 세워져 있는 훌륭한 말 한 마리를 응시 하다가 곧 문을 열어 집으

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장로님."

"오 그래 세렌. 어서 오너라."

거실에 있던 장로는 웃으며 세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언제나 와 같은

반응이었지만 집안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킬츠는 로케스트 언덕에서 조금 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거실의 의자에 앉아있는 화려한 옷의 남자를 바라보며 세렌이 묻자  장

로는 잠시 머뭇하다가 대답했다.

"아. 그래 먼저  소개를 해야 갰구나. 이분은 클라스라인 법국의  마틴

스 백작 님이 보내신........"

"소개라면 제가하지요. 난  클라스라인 법국의  법왕청에서 그랜드저지

(grand judge)의 직분을 책임지시는 마틴스 백작 님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 도미니아 뤼센이라고 한다. 네가 세렌인가?"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거만스럽

게 세렌을 불렀다. 단정히 정돈된 검은머리가  깔끔해 보이는 젊은 청년

이였으나 세렌의 눈에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가식적인  외양과 근거

를 알 수 없는 건방진 거만함이 넘쳐흐르는 내면이 보이는 듯 했다.

"예. 제가 세렌입니다만."

남자의 앞자리에 앉은 세렌은 가만히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이런 류 의 사람과 함께 앉아본 일은 이번이 처음 이었기 때문에 세렌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단..... 우리 백작 님을 네가 알고있나? 모른다면 이야기가 조금 힘들

어 질텐데."

"물론 마틴스 백작 님이라면 저도  알고있습니다. 클라스라인에서 오랫

동안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백작가문의 마틴스 백작 님이 아닙니까."

"정확히 알고있군. 혹시 이런 시골의 구석에 박혀있는 이름도 없는  작

은 마을사람 이라서 우리  백작 님을  혹시 모르는  것이 아닌가  걱정

했지."

'............ 킬츠가 같이 오지 않은 것 이 다행이군.'

만약 킬츠가 이 남자의 건방진 소리를 들었다면 금세  그 무거운 대검

을 뽑아들고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짜증나는 사람이다.'

세렌은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뤼센 씨.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기에 이런 작은 마을까지 오

셨습니까."

"물론 네게 볼일이 있지 그런데 그전에 먼저 확인 해볼 것이 하나   있

다. 바로 네가 자유기사단장 레닉스공의 장남인 세렌 랜드게일이 확실한

가?"

"물론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일단 검을 뽑아라. 마침 검이 있으니까 잘됐군."

"네?"

도미니아는 갑자기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더니 다짜고짜 일어나서  세렌

을 향해 베어 들어갔다.

"앗!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렌은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도미니아의  검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잘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세렌의 신경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잔소리 말고 검을 뽑아라!"

"....별수 없군요. 하지만 왜....."

세렌은 검을 빼어들고 도미니아의 검에 응수했다.  강한 금속성의 소리

가 검과 검 사이에서 퍼져 나왔고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집안에  가

득 감돌았다.

세렌은 확실히 자신이 힘에서 밀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도미니아라는 사람은 정식으로 검을 배운 적이 없는지 공격이 매우 단조

로웠고 세렌은 간단히 그 공격을 흘리며 막아낼 수 있었다.

"음... 실력이 제법 있는 것 같군."

세렌을 향해 한참을 검을 휘두르다가 도미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검 집에 집어넣었다.

"이제 끝났습니까? 대체 왜 공격을......"

세렌도 긴장을 조금 늦추며 검을 집어넣자  도미니아는 다시 의자에 앉

으며 무신경하게 말했다.

"동생도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에리나라고 하는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만 4년 전에

장로님이 알아봐 주셔서 스피리스트의 신전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세렌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유일한 혈육인 여 동생 에리나를 마

지막으로 본 것 역시 에리나가 마을을 떠난  바로 4년 전의 그날이었다.

4년 전. 장노가 자신의 손자 루디가 매직길드로 수행을 떠나는 김에 에

리나의 장래를 위해서 스피리스트의  신전에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하자

에리나는 고맙다며 단번에 승낙했다. 세렌은 말리려 했으나 그것이 에리

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동생을 자신의 곁에 언제까지

나 잡아두려는 이기심을 버리고 역시 동의했다. 물론 킬츠가  대단히 화

를 내며 며칠동안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결국 에리나가 떠나는 날에  에리

나를 붙잡고 몸조심하라고 신신 당부하던 킬츠의 모습이 세렌의  머릿속

엔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래?.. 뭐 그렇군. 백작 님은 두 아이를  전부 데려 오라 하셨지만 스

피리스트의 신전으로 가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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