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는 제드의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그야말로 깽판을 쳤다.
지구와 흡사한 중력, 물과 대기와 흙이 있고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 그 모든 정보를 깡그리 무시하고 기계 슈트를 입고 내리자마자 주변을 때리고 부쉈다.
제드가 떨어진 산악지대를 좌표로 설정한 다비드는 내리자마자 그 주변을 초토화했다. 다행인 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다비드가 기계 슈트로 주변을 부술 때 가까운 마을에서는 몬스터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휴전이 선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인지라 마을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몇 없는 병사들이 다비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기계 슈트를 걸친 다비드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능력자 부대까지 파견되었지만 작정하고 공격하는 다비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건 도대체 뭐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건 처음 봅니다. 불을 뿜는 드래곤도 아니고, 갑옷 같은 것을 입었는데 팔다리에서는 공격형 능력이 뿜어져 나옵니다.”
다비드가 사람을 발견하고는 기계 슈트의 헬멧을 벗었을 때,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군가는 신이 있다면 저런 외모가 아닐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큰 소리로 소통을 시도했으나 다비드의 입에서 나온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언어학자를 불렀지만 다비드의 언어는 정체불명의 것이었다.
다비드는 뇌파 기계를 삽입했기에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삭스 제라드.”
그래서 다비드는 제드의 이름만 말했다. 그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 허둥지둥거릴 때마다 미사일을 발사했다.
“아이삭스 제라드!”
언어학자와 부대원들은 화가 오를 대로 오른 미남자의 미사일을 피하며 소리 질렀다.
“그게 누군데!”
“몰라. 알아봐!”
“아이삭스 제라드가 누구야?”
“모릅니다. 아이삭스 제라드 아시나요?”
“왕족 이름인가?”
웅성웅성. 정체불명의 미남자가 애타게 부르는 ‘아이삭스 제라드’를 찾기 위해 한동안 부대는 들썩거렸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아이삭스 제라드는 능력자 부대의 치유자였다. 그리하여 높으신 분이 직접 제드의 집까지 찾아왔다.
사안이 급박하기도 했고, 인력도 부족했기에 제드는 달리는 마차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의 잡혀 온 것이나 다름없어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금발에 사람인지 아닌지 모를 아름다운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른단 말입니까?”
그 높으신 분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갑옷을 입고 이능력을 뿜으며, 폭발하는 돌멩이를 쏘아대면서요.”
“일주일 만에 벌써 두 개의 산이 재가 되었고, 인근 마을 사람들은 대피했다. 156명의 병사들이 중상을 입었어. 그리고 그는 지금 왕성이 있는 도심으로 전진 중이지.”
부대장은 얼마 전 휴전을 선포했던 적국의 공격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와 능력자들을 수족처럼 다루며 우리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다.”
제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다비드 같았다.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 미지수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은 벌써 한참 지났고, 그는 지구에서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 남자는 우리 말을 전혀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어. 그와 무슨 사이지? 그는 누구인가?”
이곳은 왕권 국가다. 대답을 잘못 한다면 당장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드는 바른 자세로 입을 열었다.
“저는 2년 전쯤 실종되었고, 지구라는 행성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지구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아마 저를 만나러 온 것 같습니다.”
제드의 말을 들은 그는 수염을 씰룩이며 고집스러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미 제드에 대해 조사했던 그는 제드의 허무맹랑한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행성. 제드의 기록서에서 보았다. 우주라는 곳에 여러 행성이 있고, 우리와 비슷한 생물체 또한 있다고 했다. 사람 모양을 한 무생물 로봇, 하늘을 날아다니는 철갑으로 된 요새 모양의 이동 수단.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는 제드를 만나기 전 그가 어떤 미치광이의 행색을 하고 있어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제드는 야성적이고 키가 크고 몸이 좋았다. 표정은 우직하고 눈빛은 살아 있다. 상상했던 미치광이의 모습이 아니었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갑옷과 무기를 입은 미남자. 그의 뒤에 있던 철갑으로 된 요새. 그를 수비하는 뚝딱거리는 몬스터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가 왜 자네를 찾는 것인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알 것도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다비드는 제드가 이곳에 오기 전 자신에게 집착하는 낌새가 있었다.
자신을 만나러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것일까. 제드의 가슴이 둥둥거리며 낮게 울렸다. 기대감과 약간의 설렘이었다.
아니면 배신감에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일단 도착하면 그 남자부터 어떻게 좀 해 보게. 진정할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부숴 대고 있어. 자네 이름만 불러 대서 부대원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야.”
“알겠습니다.”
자신만 부르짖다니. 다비드는 자신을 보면 아마 화부터 내지 않을까. 그의 성격상 독이 바짝 올랐겠지. 다비드의 파탄 난 성격이 떠오르자 제드는 자신이 멀쩡하지 못할 수도 있겠거니 했다.
제드는 마지막 다비드의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처절하게 일그러지던 표정.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화가 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제드가 본 다비드의 마지막 표정에는 평소 남에게 보여 주던 가면 같은 웃음이나, 제드 앞에서만 보여 주던 진실 된 웃음 한 조각 없었다.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제드는 덜컹거리는 마차의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다비드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전쟁보다 심각하군….”
마차는 심각하게 덜컹거렸다. 다비드가 있는 곳으로 향할수록 폭발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작은 창으로 비친 하늘은 연기로 자욱했고, 매캐한 냄새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전쟁은 다수와 다수가 싸우는 것이었지만, 다비드는 오직 혼자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상대한다고 하기에는 전쟁만큼이나 폭발하는 소리가 컸다.
사상자가 아직까지 없다고 했기에 작은 난동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폭발 소리에 제드는 이제야 심각함을 느꼈다.
“어서 가세나.”
마차가 멈추고 부대장이 서둘러 제드를 재촉했다. 도착한 곳은 전쟁을 했던 국경지대와 정반대인 곳이었다.
제드가 발견된 산지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다비드가 어디에 도심이 있는지 알고 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향하는 위치가 정확했고 잘못하면 반역으로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많은 능력자와 병사가 다비드와 대치 중이었고, 소란스러웠기에 제드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저 멀리서 다비드가 제드를 부르는 소리는 처참했다.
제드는 그 부름에 병사들의 뒷모습을 향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앞에 있네.”
부대장은 제드가 저 미치광이를 말려 주어 더 이상의 인력 낭비를 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소리쳐 길을 열고, 제드의 등을 밀어 맹수의 입속으로 들이밀었다.
다비드의 기계 슈트에서는 쉼 없이 레이저건과 미사일이 뿜어져 나왔고, 능력자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공격형 능력자가 다비드에게 천둥 같은 얼음 조각을 내리꽂았다.
“다비드!”
제드가 깜짝 놀라 다비드를 부르자 그가 돌아보았다. 다비드는 몸에 얼음 조각이 꽂히는 것을 막지도 않고 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대한 얼음 조각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다비드의 몸에 박혔다.
눈이 마주치자 소란스러운 주위가 일순 멈춘 것마냥 흐려졌다. 드넓은 공간에 마치 둘만 남은 것 같다. 수척해진 다비드는 어깨와 몸통에 얼음 조각이 꽂힌 채로 멀뚱히 제드를 보고 서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 뽀얗고 흠결 없던 피부는 지나치게 창백했다. 한눈에 봐도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다. 파란 눈이 포식자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던 과거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어깨만큼 길어 바람에 휘날렸다. 창백한 얼굴에는 피가 점점이 튀어 지옥에서 온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제드?”
딱딱히 얼어붙어 있던 다비드는 마치 가면극을 하는 광대처럼 부자연스럽게 입술을 올렸다. 피 튀긴 얼굴로 어깨와 배를 얼음 조각에 꿰뚫린 채 웃는 모습에 제드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다비드는 제드를 보자 새빨갛기만 하던 세상이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비드의 움직임이 멎자 주위가 싸늘해졌다. ‘저 사람이 아이삭스 제라드인가 봐’ 하는 수군거림과 ‘지금 공격할까’의 망설임 사이 이상한 기류였다.
우물쭈물하는 부대원 사이에서 제드가 다비드를 향해 뛰쳐나갔다. 얼음 조각은 능력자가 힘을 풀기 전까지는 그대로 다비드에게 꽂혀 있을 것이었다.
제드가 달려오자 다비드를 엄호하던 로봇이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다비드는 재빨리 로봇을 무장해제 시켰다.
“움직이지 말아라. 상처 벌어진다.”
“제드, 맞아요?”
“머리에도 맞은 거냐.”
다비드는 이상한 표정으로 꿈꾸는 것이 아닌지 잠시 제드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걱정스럽게 미간을 구기는 것도, 괜찮냐고 묻는 입술도, 머리도 다친 거냐며 매만지는 손길도.
내가 드디어 미쳐서 환영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기에는 가까이 다가온 제드가 너무나 선명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머리를 만지는 거칠고 큰 손이 느껴지자 여태껏 내내 느꼈던 분노나 짜증, 절망, 가학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우습게도 북받치듯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얼음 능력자가 제드를 공격하려 손을 들었다. 그보다 빠르게 다비드의 슈트에서 소형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아악!”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능력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방어능력자는 다비드의 기계 슈트의 위력을 모두 막아 내지 못했다.
우르르 공격하는 대신 부대장의 명령으로 능력자들은 뒤로 물러났다. 로봇과 공격형 안드로이드가 제드와 다비드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돌며 수비했다.
능력자의 힘이 풀린 것인지 다비드의 몸에 박혀 있던 얼음 조각이 사라졌다.
다비드의 입에서 쿨럭, 하고 피가 튀었다. 제드는 다친 곳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황금빛 능력을 개방했다.
“많이 아프냐.”
“아파….”
다비드는 웃으며 몸을 떨어 댔다. ‘아파요. 아파’ 하면서 웃는 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다비드는 치유하는 제드의 몸을 끌어안았다. 제드는 불편했지만 그를 내버려 두고 치유에 전념했다.
“왜 날 두고 갔어요.”
“너도 보지 않았냐. 내 뜻이 아니었다.”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말해 봤자 제드는 무섭지 않았다. 끌어안은 다비드의 몸은 답답했지만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다비드는 제드를 안고 더듬더듬 그의 등을 매만졌다.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제드는 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집중했다. 몸에 닿는 다비드가 반가웠지만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제드는 전쟁 중 심각한 상처를 항상 보는 치유자였고 다비드의 상처는 제드의 능력으로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다비드를 보자마자, 그의 가슴이 꿰뚫리자 제드는 자신이 다친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무방비하게 제 품에 안겨 있는 다비드가 가여웠다.
마음을 흔드는 존재에 제드는 생각보다 다비드가 더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잊고 있다가 그를 보고야 깨달았다.
“또 사라지지 말아요.”
제드는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비드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가 애처롭게 자신을 부둥켜안고 덜덜 떨며 우는 것이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제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제드는 다비드가 횡설수설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다양한 감정이 피어났다.
“나도 보고 싶었다.”
무릎 꿇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던 제드가 그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다비드는 더욱 들러붙었다. 힘이 센 것은 변함이 없었다.
“얼굴 잊겠다.”
제드의 말에 다비드가 품에서 떨어져 제드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이었지만 처연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눈가가 붉어져 제드를 잡아먹을 것처럼 얼굴을 바짝 당겼다.
“제드 얼굴이 잘 안 보여요. 나 울어요?”
“그래.”
아름다운 얼굴이 바짝 당겨져 오니 깜짝 놀랐다. 제드가 조금 뒤로 물러나자 다비드가 얼굴을 구기고 제드의 품에 안겨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물러나지 말아요. 다리 끊어 버릴 거니까.”
“알았다.”
다비드는 진심인데도 제드는 등을 두드리며 그를 달랬다. 다비드는 지금 당장 그의 다리를 끊어서 기계 다리로 교체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기술자가 없어 불가능했기에 아쉽다고 생각했다.
제드는 그제야 많은 부대원들이 자신과 다비드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는 중재하고 싶었지만 떨어지려 하지 않는 다비드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 * *
다비드가 싹 밀어 놓은 폐허가 된 곳에 급하게 막사가 마련되었다. 몇십 분 만에 만들어진 것치고는 튼튼하고, 안에는 넓은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었다.
제드가 자신을 꽉 끌어안고 놓지 않는 다비드를 품에 달고 있자 부대장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남자끼리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는데, 가까이서 본 미치광이의 얼굴은 희대의 조각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만든 완성품 같았다.
막사 안에는 다비드와 제드, 부대장만 들어올 수 있었다. 다비드를 수비하던 로봇과 안드로이드는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고, 부대원들은 로봇을 경계했다.
부대장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다비드를 향해 말했다.
“나는 다마치스 왕국의 1능력자 부대장 일리 마크보니요.”
“이쪽은 다비드 폴머입니다.”
대꾸도 하지 않는 다비드를 보고는 제드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군. 그는 이곳 말을 알아듣지 못하나 보구만.”
알아들었다. 다비드는 뇌파 기계를 삽입해 다마치스 왕국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반대로 뇌파 기계를 삽입하지 않은 왕국의 사람들은 다비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계를 삽입한 제드 빼고는.
“알아듣습니다. 이곳 말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 말에 잠시 부대장은 자신과 부대원들이 그를 보고 소리 높여 욕한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 자리에 앉으며 여유로운 척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부대장이 의자에 앉자 제드와 다비드가 맞은편에 앉았다. 다비드는 품에서 제드가 멀어지자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부대장의 얼굴이 잠시 경악에 물들었다가 빠르게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주름진 얼굴에 드러난 혐오감까지 지워지지는 못했다.
“그렇군. 다비드 폴머 경. 당신은 무엇을 원해 이 먼 곳까지 온 것입니까.”
“제드 찾으러 왔어요.”
부대장은 그의 말에서 ‘제드’만을 알아들었다. 그가 이곳에 와서 난리를 부린 이유는 앞의 근육질의 치유자 때문인 것 같았다.
보통은 아닌 것 같은 관계에 부대장의 눈이 제드를 흘겼다. 제드는 잠시 말을 골랐다.
“다비드는 저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기에 경은 오자마자 산을 두 개를 태우고, 능력자 156명을 다치게 만들었지. 오늘 다친 병사까지 합치면 그 수가 이백은 넘을 거군.”
부대장은 다비드에게 그의 책임에 대해 물은 것이었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다비드의 성격이었다.
다비드가 비웃듯 입술을 끌어 올리는 것을 보며 부대장은 눈을 흘겼다. 경국지색 미치광이. 겉모습에 속지 말아야 했다.
“죽이지 않은 걸 감사하지 못하네요. 당장 당신이랑 당신의 무능한 부하들을 싸잡아서 죽여 줄까요?”
다비드가 웃으며 말하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대장은 제드를 쳐다보았다.
제드는 어떻게 중재해야 싸움이 나지 않을까 고민했다. 다비드와 일하는 에든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사상자가 없어 다행이라고 합니다. 오해가 있어서 대치를 했다고 합니다.”
다비드의 눈썹이 올라갔다. 제드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깍지 껴 잡은 손을 콱 움켜잡았다.
다비드는 그 자극에 부대장의 머리를 따려고 살짝 들어 올렸던 엉덩이를 의자에 살포시 대었다.
부대장은 다비드의 눈빛이 결코 제드의 말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드의 말과는 다르게 다비드는 이 행성에 오자마자 때려 부쉈고, 부대원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기는커녕 제드의 이름만을 외치며 그들을 공격했다.
다비드가 부대원을 죽이지 않은 것은 제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를 자신의 앞에 대령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부대장의 자리까지 올라온 그는 눈치와 두뇌로 다비드의 의중을 깨달았다.
“오해라고 치고, 이제 어쩔 셈인지 궁금하군. 우리의 왕은 당신을 사형시키길 원하고 있어.”
다마치스의 왕은 성격이 몹시 나빴다. 이번 전쟁도 순전히 그가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낸 것이 8할은 차지했다.
그렇기에 국민들의 원성은 자자했고 그의 신임 또한 바닥에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반역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왕은 다비드의 행태를 보고받고 능력자 부대에게 그의 사살, 또는 잡은 후 사형을 명했다.
듣도 보도 못한 무기로 능력자 부대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보고했는데도 왕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병사가 죽는 것은 그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하하. 제드, 이곳의 왕은 지능이 낮은 순으로 뽑나 봐요.”
다비드의 조롱에 제드는 할 말이 없었다. 왕은 세습이었고, 이번 왕은 입이 삐뚤어져도 현명하지 못했다.
“여기 왕 죽여 줄까요?”
장난으로라도 왕을 죽인다고 말한다면 사형이었다. 제드는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달콤한 눈빛으로 제드에게 진실로 묻고 있었다.
“괜찮다.”
제드는 다비드가 걱정이었다. 지구에서는 다비드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지만, 이곳은 아니다.
귀족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민은 그냥 죽는 세상이다. 왕이 다비드가 죽기를 원한다니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제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다비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다.”
다비드는 너무 헤벌쭉 웃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올곧고, 호구 같았다.
“나는 수백의 로봇을 가지고 왔고, 모든 로봇에는 자폭 기능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
“그리고 지구에는 생화학 무기가 많아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도심에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런 짓 마라.”
“제드, 그대로 통역해요.”
다비드가 눈을 휘며 제드의 손등에 입 맞췄다. 부대장의 표정이 썩었다.
제드는 다비드의 바람대로 그의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역했다.
부대장의 썩었던 표정이 파랗게 변했다가, 위협당한 짐승처럼 경계심을 바짝 드러냈다.
“이 말을 보고한다면, 왕께선 당신을 더 죽이려고 할 것 같군.”
왕은 멍청하니까. 부대장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제드는 부대장의 입장이 난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비드를 무력으로 잡을 수도 없거니와 죽일 수도 없었다. 잘못했다가는 다비드가 왕국을 초토화할 것이다.
그를 잡지 못한다면 왕은 길길이 날뛰며 부대장의 목을 자를 수도 있었다. 그는 고뇌에 빠졌다.
“다비드는 곧 떠날 겁니다.”
“나는 제드 두고 아무 데도 안 가요.”
제드의 말에 다비드가 곧바로 대답했다.
“안다. 나도 널 따를 거다.”
그 말에 다비드의 굳었던 입매가 허물어졌다. 제드는 사람을 녹이는 재주가 있다고 다비드는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드가 이은 말에 부대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다비드는 제드의 말을 들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 * *
다비드와 제드는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우주선과 로봇들은 대기상태로 안전한 곳에 두었다. 부대는 왕성으로 복귀했다.
“왕이 속았으면 좋겠군.”
“내가 이 나라 왕을 잘 모르지만, 멍청할 거라고 믿어요.”
그렇기는 하다. 제드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부대장에게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잘라 보냈다. 그 머리를 다비드라고 할 참이었다.
잘린 목의 단면은 짐승의 피와 살점으로 기계 부분이 티가 나지 않도록 메꾸었다. 왕은 다비드의 얼굴을 모르니 금발의 안드로이드를 그라고 믿기를 바랐다.
다비드는 플라잉카와 다르게 불편한 마차 안에서도 제드를 꼭 붙잡고 있었다.
“어떻게 온 거냐.”
“우주선 타고 왔어요. 제드가 없어진 후로 계속.”
제드는 다비드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아름답던 외모는 그대로지만 고생한 티가 났다. 다비드의 어깨까지 긴 머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을 증명했다.
“제드가 날 기억하지 못하거나, 반기지 않았으면 슬펐을 거예요.”
슬픈 정도가 아니라 생화학 무기를 쏘아 대려고 했다. 또는 제드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겠다고 한다면 생화학 무기로 협박하려고 했다. 그러지 않아서 제드나 왕국은 다행인 셈이었다.
“와 줘서 고맙다.”
다비드의 웃음기 어린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드의 한마디에 심장에서 발끝까지 흐물렁거리는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녹을 것 같았다.
“제드, 제드.”
살면서 납치당했을 때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제드는 자신을 몇 번이고 울렸다.
“울지 마라.”
애절하게 매달리듯 안기는 다비드를 마주 안으니 제드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쟁 내내 떠오르던 얼굴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을 위해 먼 길을 와 주었다. 고마움에 제드는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내 곁에 있어 줘요.”
“그래.”
함께 있어서 비로소 둘은 완전하다는 감정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돌덩이가 없어진 듯 제드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입맞춤은 점점 진해졌다. 눈을 빛내며 제드를 집어삼키는 다비드의 숨결이 거칠었다.
마차에서 끝까지 할 생각이 없는 제드가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다비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어내지 말아요.”
“그래도 여기선, 너 몸도 성치 않다.”
다비드는 중상을 입어도 제드와 비벼 댈 수 있었다. 다비드는 끝까지 하지 않을 테니 입술을 내놓으라며 협박하듯 속삭였다.
제드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에 웃으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기계 슈트를 벗고, 검은 옷을 입은 상태에서 만지는 것은 처음인지라 제드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축축하고 얼굴이 너무 보송했다.
제드가 다비드의 웃옷을 들추자 다비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적극적인 건 좋은데, 여기서 하면 마차 다 부서져요.”
마주 웃어 주고 싶었지만, 제드가 미간을 구겼다.
“몸이 왜 이러냐.”
드러난 다비드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얼음 송곳에 찔린 상처는 제드의 능력으로 붉게 지혈되어 있었지만 피가 미미하게 흘렀다.
상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물지 못한 칼로 그은 상처가 곳곳에 있었다. 가슴에 남은 화상 자국이 아직도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다쳤어요. 제드가 고쳐 줘요.”
어디서 다치면 이렇게 될까. 크고 작은 상처는 오래된 것부터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 다양했다.
제드는 더 능력을 쓴다면 기절할 수도 있었지만, 다비드의 몸을 보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능력을 썼다.
딱 기절하기 전까지,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능력을 쓴 제드가 신음하자 다비드가 그의 손을 잡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매일 조금씩 해 줘요.”
매일매일. 제드에게 족쇄를 채우듯 다비드가 말했다.
* * *
제드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잠시 잠에 들었다.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눈을 뜨니 마차는 제드의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는 왕궁으로 돌아가고, 제드는 다비드를 집으로 안내했다.
“여긴 가축을 키우는 곳인가요?”
이 누추하고 허름함 가득한 곳이 제드의 집일 거라고 다비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드의 집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민 중에서도 중간. 그러나 다비드의 눈에는 나무집이 다 무너져 가는 컨테이너 박스보다도 못해 보였다.
돌아본 다비드의 얼굴은 정말 순진하게 물어보는 표정이었다.
“내 집이다.”
제드는 성큼성큼 집으로 가서 문을 열고 다비드를 기다렸다. 다비드는 중세시대 영화에서만 보던 나무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행성과 생활 양식은 지구가 발전하기 전의 인류와 흡사했다.
제드가 입고 있는 옷만 해도 어두운 색의 셔츠와 바지였다. 펑퍼짐한 옷은 밧줄 같은 것으로 넥 부분을 조여 입는 형식이었다. 질 낮고 허름한 옷이었지만 제드의 좋은 몸을 감출 수는 없었다.
집은 투박하면서 아담했다. 그리고 이곳의 기술로는 없앨 수 없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평소의 다비드라면 들어오지도 않을 집이 제드의 흔적으로 가득하니 다비드는 좋아서 웃음이 흘렀다.
“벗어라.”
“나는 제드가 적극적이라서 정말 좋아요.”
제드는 다비드가 무엇을 말하든 무시하고 옷장을 열어 그가 입을 옷을 골랐다.
“여자 옷?”
소리도 없이 제드의 등 뒤에 선 다비드가 혼잣말했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차가운 숨결에 제드는 몸에 있는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왜 여자 옷이 여기 있어요?”
후후 웃는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뒤돌아보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제드는 목을 긁적이고 옷장을 뒤졌다.
“동생 옷이다.”
“아, 여동생이 있다고 했죠.”
“그래. 얼마 전에 결혼해서 나갔다.”
“우리도 해요.”
“무엇을?”
“결혼이요.”
제드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고 옷을 챙겨 뒤를 돌았다.
“너 입에서 피난다.”
“몸이 안 좋아서 피 토했나 봐요.”
그렇다기에는 입술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다비드는 제드의 옷장에서 여자 옷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제드는 잠시 눈을 붙여 조금 충전된 힘을 그의 입술을 치유하는 데 사용했다. 이 정도 상처는 금세 아물게 할 수 있었다.
“이걸로 갈아입어라.”
제드는 옷을 건넸다. 다비드는 제드와는 다르게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드가 눈 밖으로 사라질까 그는 제드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비드의 상체가 드러나자 제드는 아까 보았던 상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파 보이는 상처에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다비드가 바지를 벗자 그 인상은 더욱 험악해졌다.
“여긴 왜 이러냐.”
“다쳤어요.”
허벅지에 난 상처는 다친 상처가 아니었다. 제드는 부대에 있을 때 자해하는 병사를 보았다. 다비드의 허벅지는 앉아서 칼로 그은 듯한 상흔이 여러 줄 있었다. 상처 위에 계속해서 상처를 낸 것인지 지저분했다.
“너….”
“제드가 고쳐 줘요. 제드만 고칠 수 있어요.”
눈을 빛내며 웃는 다비드가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원래도 다비드는 정상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불안해 보여 제드는 깊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
옷을 갈아입은 다비드는 제드에게 폭 안겼다. 빵빵하게 부푼 근육은 변함이 없었다. 가슴은 더 커진 것 같았다.
평민의 옷을 걸쳐도 다비드의 고귀함을 덮을 수 없었다. 마치 사연 많은 황족이 도망을 위해 평민 분장을 했지만 우아한 태를 지울 수 없는 것 같은 행색이라고 제드는 생각했다.
“이러면 움직이기 불편하다.”
“참아요. 이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끄응. 소리를 내며 무거운 다비드를 품에 달고 제드는 작은 방으로 가서 침대에 앉았다. 마차에서 쪽잠을 자도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음식을 먹을 기력도 없다.
침대는 제드가 아침까지 누워 있던 그대로 정돈되지 않고 너저분했다. 제드가 몸을 뉘자 다비드도 함께 침대에 누웠다.
온통 제드의 냄새와 흔적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다비드는 제드의 몸을 각인하듯 만지고 눈 감은 제드의 모습을 두 눈에 새겼다.
제드가 눈을 떴을 때, 밖은 어두컴컴했다.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다리를 얽은 다비드는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제드에게 꼭 맞는 침대는 장신의 남자 두 명을 견디기에는 비좁았다.
제드를 꽉 쥐고 있는 다비드의 손과 다리를 풀자 침대는 무너질 듯 괴로운 소리를 냈다. 다비드는 오랜만에 푹 잠들어 시끄러운 소음에도 깨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밝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제드는 잠시 밖으로 향했다.
제드는 부대장을 믿지 않았다. 그의 평판은 좋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다비드를 야밤에 덮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제드는 불 하나 없는 집 근처를 서성거리며 수상한 자가 없는지 살폈다. 고요한 풀벌레 소리와 흙냄새만 가득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청각을 세울 때, 집 안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깜짝 놀라 제드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앞에는 거실에 있어야 할 목제 테이블이 흙바닥에 꽂혀 부서져 있었고, 창문은 모두 깨져 있었다.
제드는 서둘러 내부로 들어갔다. 누군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다비드?”
제드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다비드는 거실의 깨진 창문 앞에서 제드를 돌아봤다.
다비드의 손에는 피가 흘렀고, 유리 조각을 밟은 발밑으로 피가 고이고 있었다. 다비드를 마주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성할 때가 없다.
다비드는 말없이 부릅뜬 눈으로 제드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피로 된 발자국이 바닥에 찍혔다.
“꿈인 줄 알았어요.”
가까이 온 다비드의 표정은 이상했다. 우는 듯 웃는 듯 조금 일그러지고 흐리멍덩한 눈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럴 리 없다.”
“정말요?”
다비드의 손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유리 조각을 쥐고 있었다.
“그건 놔라. 위험하다.”
제드의 다정한 말에 다비드는 웃으며 자신의 배를 찔렀다. 제드가 질색하며 다비드의 유리 조각을 쥔 손을 움켜잡았다. 다비드는 몸에 닿는 제드의 손을 느끼며 그제야 활짝 웃었다.
“뭐 하는 거냐!”
“하하. 꿈이 아니네요.”
날카로운 유리에 제드가 다칠까 다비드는 손에 쥔 것을 멀리 던지고 제드의 품에 안겨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이다.”
그가 제드의 몸을 만질 때마다 제드의 옷은 그의 핏자국으로 더러워졌다. 정상적이지 않은 그의 상태에 제드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의 몸을 치유했다.
“따뜻해요.”
“왜 그런 거냐.”
“이래야 진짜 제드를 만난 걸 실감할 수 있어요.”
다비드는 제드의 따스한 능력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댔다. 내가 다쳐야 제드가 나를 봐주죠. 나를 치유해 주죠. 나를 가엽게 여기죠. 제드는 착하니까.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그는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제드는 상처를 치유하고, 그가 안정될 때까지 토닥거렸다.
“앞으로 떠나지 마요.”
“내가 떠난 거 아니다. 너도 보지 않았냐.”
“근데 그 새낀 어딨어요?”
다비드는 멘가가 떠오른 듯 제드를 향해 물었다. 그의 눈빛은 당장 멘가를 찾아가 찢어 죽을 것처럼 반짝거렸다. 잔인한 생각을 할 때 웃음이 진해지는 것은 여전했다.
“멀리 갔다.”
멘가는 그의 고국으로 돌아간 지 한참이었다. 그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다비드가 이곳으로 온 것을 알면 그는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가 빠르게 고국으로 돌아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다마치스 왕국에 남아 있었다면 다비드에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었을 것이다.
“제드.”
“울지 마라.”
다비드는 ‘내가 또 울어요?’ 하며 물었다. 피투성이 미남은 위태로웠다. 그의 몸에 남은 흉터나 행동을 보았을 때, 제드는 그가 습관적으로 자해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의 몸에 있는 흉터와 상처는 누군가에게서 공격당했을 상처가 아닌 것이 더욱 많았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 다비드는 억지로 깬 잠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의 놀란 심장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제드.”
따스하게 안아 주는 제드는 자신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저 떨리는 턱을 꾹 다물고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다비드가 어두운 침실에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구와는 다른 집의 내부는 지저분한 느낌에 원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기가 없는 행성은 촛불과 달빛에 의지하며 밤을 보냈기에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하고, 어두웠다. 다비드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냈다.
근 1년 만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했기에 몸은 턱없이 부족한 잠을 채우려 더 자라는 듯 깨질 듯한 두통을 선물했다.
다비드는 익숙하지 않은 내부를 돌아다니며 제드를 찾았다. 작은 방과 창고, 화장실. 그리고 거실에 딸린 작은 주방까지.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곳을 확인한 후에야 아무 곳에서도 제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처절한 상실을 동반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죽일 거야.”
눈앞이 빨갛다. 도망간 걸까. 나를 두고. 이 행성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은 분노와 서글픔에 이가 아득아득 갈렸다.
낮에 보았던 제드는 꿈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던 환상이거나. 드디어 미쳐 버린 걸까. 다비드는 눈을 벌겋게 뜨고 입을 찢어 웃었다.
-쾅
걷어찬 무거운 목제 테이블이 창문을 뚫고 흙바닥에 꽂혔다. 창문 근처로 갈수록 떨어진 유리 파편이 발바닥에 밟혀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유리 조각을 잡고 입에 넣어 씹어 삼키자. 그래야 이 답답하고 쥐어 터질 듯한 마음이 고통으로 달래질 것 같았다. 당장 화풀이할 대상이 없으니 제 몸에 해를 입히고 싶다. 누군가를 죽이고, 나도 죽고 싶다.
다비드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으며 자신이 아파하면 제드가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도 있었다.
“다비드?”
삐걱대는 목을 돌려 보니 제드가 문 앞에 서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거꾸로 솟던 피가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것 봐. 내가 아프면 나타나잖아.’
붉었던 시야가 점차 원래의 색으로 변했다. 불안하게 들쭉날쭉 뛰었던 심장이 반가움과 억울함으로 박동을 달리했다. 눈물이 나고 손발이 떨리는 것을 다비드는 그제서야 알았다.
* * *
제드는 상태가 좋지 않은 다비드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사실 다비드가 제드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 때문에 혼자 두고 싶어도 두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오려는 것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 씻을 때도 같이, 먹을 때도 같이. 사생활이 없다.
“전쟁 중이었다고요?”
흔하지 않게 다비드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제드의 어깨를 잡은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다른 놈과 붙어먹는 것까지 상상하고 혹시 그가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가 전쟁에 나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거기서 제드가 죽었다면? 다비드는 심장이 찌릿거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 긴 시간을 거쳐 제드만을 바라보며 이 행성까지 왔는데, 반기는 것이 제드의 시체라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을 살육했겠지.’
그리고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서 제드의 시체를 붙들고 서서히 말라 죽어 갔겠지. 다비드는 진심으로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비드는 불안감에 두꺼운 제드의 몸을 껴안았다. 그립고 그토록 원하던 품이다. 전쟁 중에 다친 곳 하나 없었다.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다비드가 몸을 떨며 불안해하자 제드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내가 다 죽여 줄게요.”
“누구를?”
“전쟁을 치렀던 나라. 아니, 이곳 왕을 죽여 줄까요?”
산뜻하게 말하는 다비드의 모습에서는 농담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받지.”
제드는 왕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우리 언제 가요?”
다비드는 걸핏하면 제드에게 지구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갈 거다. 여기 정리 좀 하면.”
“빨리요.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알겠다.”
다비드가 빙글빙글 웃으며 진심으로 말했지만 제드는 고개를 설렁 움직이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바쁘니까 저리 좀 가라.”
“싫어요.”
제드는 집을 정리하고, 동생에게 할 말을 골라 편지를 부쳤다. 그녀에게는 그냥 ‘떠난다’가 아닌 함께하고 싶은 사람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과연 이해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곧 복귀일이 다가왔다. 부대장이 제드의 직위를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에게 안전지대로 피신한 동생 가족이 제드가 사라져도 계속 그곳에 머물 수 있다는 확답을 받아야 했다.
통신기를 이용하는 지구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인력을 이용하여 편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비드도 그 사실을 알 텐데 제드를 재촉했다.
“납치당했을 때 이후론 이런 허름한 집에서 처음 자 봤어요.”
그는 악의 없이 제드를 깠다. 다비드는 태어날 때부터 귀한 존재였기에 납치당했을 때 이외에는 누추한 곳에서 지낸 적이 없었다.
입었던 옷을 옷장에 그냥 걸어 두고 세탁하지 않는다거나 보이는 곳에 쓰레기를 둔다거나 이불에 털이 붙어 있다거나 하는 것이 다비드의 입장에서는 충격이었다.
불 질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제드가 씻지도 않은 채 뽀뽀를 해 주면 생각이 일순간 날아갔다. 더러워도 어떻게든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 안에 묻어 있는 제드의 손길을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다비드는 제드와 함께 며칠 동안 이곳에 묵자 빨래를 직접 하는 것도, 음식을 구해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밤이면 불이 약해 금방 자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제드를 옆에 두고 마음의 안정을 얻자 슬슬 성적 매력을 어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드와 함께라면 이런 비위생적인 곳에서도 뒹굴 수 있어요.”
비록 그 말이 제드에게 아주 빈정 상하는 말인 것은 몰랐지만.
“어디 가요?”
제드가 겉옷을 입고 신발을 구겨 신자 다비드가 다급하게 물었다.
“허름하고 비위생적인 집에서 나갈 거다!”
그 말에 다비드가 제드를 졸졸 따라 나오려 했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다급하게 제드를 잡는 것이 애잔하다.
“가지 말아요.”
며칠 동안 옆에 붙어 있어 상태가 나아졌던 다비드는 다시 불안증이 도진 듯 눈동자가 요동쳤다. 손이라도 떨 기세에 제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뒤져 다비드에게 제 옷을 건네고 신발도 주었다. 다비드가 입고 온 지구의 옷은 이곳에서 입기에는 너무 특이하고 튀었다.
제드의 옷은 다비드에게 잘 맞는 편이었다. 제드가 입으면 가슴 근육이 군침이 돌 정도로 부각되는 티셔츠는 다비드에게 적당히 맞았고,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신발은 다비드에게 좀 커서 헐렁했다.
“어디 가는데요?”
“먹을 게 떨어졌다.”
장을 보러 나가는 모양이다. 다비드는 식재료를 사 본 적 없었다.
지구에서는 안드로이드가 가공된 식재료를 조리하는 방식으로 식사를 때웠기 때문에 시장은 물론 이곳에 와서야 사람이 요리하는 것을 실제로 처음 보았다.
“여긴 조리된 음식이 없나요?”
“있는데 비싸다.”
음식을 포장해서 먹는 것은 비싸다. 그렇기에 식재료를 사서 직접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물론 맛이 없었다. 특히 제드는 음식을 굉장히 못했기에 항상 처참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다비드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인지라 제드가 한 음식을 한 입 먹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뱉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삼켰다. 그 정도면 다비드에게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제드가 만든 음식은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찬성했다. 겉은 탔는데 속은 익지 않거나, 흐물흐물하고 비린 스튜가 건강에 좋을 리 없었다.
부대에서는 음식이 배식되었고 집에 있을 때는 제드의 음식을 혐오하는 동생 덕에 제드의 음식 솜씨는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지구 음식이 그립군.”
제드는 다비드 다음으로 지구의 음식이 무척 그리웠다. 떠올리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돌아가면 매일 배부르게 먹여 줄게요.”
다비드가 하는 얄미운 소리 중에서 손에 꼽히는 매력적인 말이었다.
“그래. 버그가 바쁘겠군.”
버그와 감자는 제드가 지구를 떠난 날 다비드의 손에 박살 나고 찢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제드가 천진하게 물었다.
“에든이랑 감자는 잘 지내나?”
“네. 모두 제드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구로 돌아가면 버그랑 감자부터 복원시켜야겠다. 에든은 알 바 아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도 알 바 아니었다.
다비드가 행성 이주 프로젝트를 걷어차고 이곳으로 날아온 것은 그가 지구의 인류를 버리고 제드를 택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병든 행성에 버려진 인류. 행성 이주에 부합되는 인물을 어떻게 충당했을지 다비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제드를 제외하고는 다비드는 연민이나 걱정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달달하게 웃으며 거짓말하는 다비드를 보고 제드는 그가 버그와 감자를 부순 줄 꿈에도 몰랐다.
“발밑 조심해라.”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따라오는 다비드가 넘어질까 주의를 주었다. 제드만 바로 보던 다비드의 눈에 이제야 포장되지 않은 길이, 탁 트인 풍경이 들어왔다.
흙과 돌이 깔린 바닥은 인공적으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발로 걸어서 길을 낸 흔적이 가득했다.
맑고 새파란 하늘과 깨끗한 공기는 내뱉는 숨마저 청량하게 만들었고, 따스한 햇살이 온몸을 품어 주었다.
“진짜 태양.”
엄밀히 말해서 태양은 아니다. 제드의 행성 근처에 태양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미확인 행성이었다. 볼에 닿는 햇볕이 따뜻하고, 똑바로 직시한 태양은 잔상이 남아 안구를 괴롭혔다.
길 근처에는 수풀이 많았고, 종아리만큼 쌓인 돌담 근처로 곡식처럼 보이는 노란색 식물이 아무렇게나 뻗어 있었다.
더 멀리에는 우물이 있었고, 나무와 돌로 지어진 집이 하나둘 보였다. 핵전쟁 이전의 화가가 그린 풍경화 같은 모습이다.
그 풍경 속에 제드가 헐렁한 옷을 입고 앞서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제드의 거친 머릿결이 날리고, 어둡고 긴 옷자락이 펄럭였다.
“이제 제드는 어디 못 가요.”
제드가 있을 곳은 내 옆이라고 다비드는 생각했다. 이 행성에 로봇을 두고 그가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생화학 무기를 퍼뜨리겠다고 협박할 작정이었다.
다비드를 돌아보는 제드의 깊은 아이홀과 일자로 뻗은 코, 각진 턱선이 완벽한 모양을 이루었다. 키가 큰 덕에 치렁치렁할 정도로 긴 겉옷이 잘 어울렸다.
“이리 와라.”
걸음을 멈춘 채 넋 놓고 바라보자 제드가 웃으며 다비드를 멈춰 서서 기다렸다. 다비드는 그 모습을 보며 울컥한 마음으로 그에게 달려가 옆에 붙어 섰다.
“지금 모습, 나만 보고 싶어요.”
다비드가 음산하게 중얼거렸지만 제드는 별 다른 타격 없이 바람에 날리는 다비드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눈에 띄겠군.”
화려한 금발이 어깨까지 내려온 다비드는 정말 조각상 같은 모습이다. 이 마을에 금발은 흔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미인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다.
휴전 중인지라 마을 사람의 수가 줄고, 길가에 문을 연 상점도 적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장터 느낌이 들었다.
훤칠한 남자 둘이 장터에 들어오자 눈길이 쏟아졌다. 분주하게 걷던 아낙들이 장바구니를 놓치고 입을 떡하고 벌렸다.
다비드는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었다. 그저 식재료를 길가에 내다 놓고 파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상호도 없는 매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신기했다.
거리에는 솥이 꺼내져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하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은 때 타고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다.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짐승의 냄새가 났다.
“빵이랑 고기, 콩, 토마토도 좀 사야겠군.”
야채와 콩, 감자, 토마토를 넣고 푹 삶아서 빵을 찍어 먹어야겠다. 제드는 할 줄 아는 음식이 얼마 없었기에 동생이 만든 스튜에 들어갈 법한 재료를 생각해서 장을 보기로 했다.
제드와 다비드가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랐다. 다비드는 그들의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간혹 다비드의 미모에 넋을 빼놓는 사람들은 지구에서도 많았다.
그러나 지구에는 다비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은 다비드를 어려워하고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좋지 않은 소문이 무성하기도 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이 마을의 아낙들은 처음 접하는 범상치 않은 미모에 오금이 후들후들 떨렸다. 다비드가 미의 신이라고 해도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라며 납득할 정도였다.
“소피네 총각 아니야?”
“합. 맞네.”
점점 정신이 돌아온 그녀들은 벌레가 들어갈 정도로 벌리고 있던 입을 닫았다. 다비드 옆에 있는 제드를 보았다. 다비드한테 홀려서 그보다 더 큰 제드를 놓쳤다.
제드는 마을에서 유명했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다니며 부대에서 잘 돌아오지 않아 마을 사람이랑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출중한 능력, 곰 같은 키에 야차 같은 근육, 남자다운 얼굴. 제 동생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까지 다 알았다. 그런데 미혼이다. 사귀는 여자도 없는 것 같았다. 마을에는 제드가 진국이라고 소문났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중에 뿔뿔이 흩어지고, 소피도 제 오빠 덕을 봐서 안전지대로 피신했다.
남은 몇몇 사람들이 우울함을 억지로 숨기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데 제드가 새색시보다 더 예쁜 훤칠한 남자를 끼고 등장하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제드에게로 향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다비드가 기분 나쁜 듯 웃었다.
다비드가 터지기 일보 직전에 더 진하게 웃는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들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다비드의 아름다움에 자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늘 죽는 날인가 봐. 천사님이 데리러 온 건가 봐.”
“저런 천사면 죽을 맛이 나지.”
제드는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고 식재료를 사기 위해 야채가 진열된 좌판으로 향했다. 좌판을 등지고 코를 파고 있던 상점 사장은 옷에 아무렇게나 이물질을 닦고 뒤를 돌았다.
“헉.”
입을 떡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는 멈춘 듯 다비드를 보았다. 도시에는 연극을 하는 배우가 있었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는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미의 경지에 오른 얼굴과 그에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금발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제드의 인사에 그제야 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으로는 계속 다비드를 힐끔거렸다.
“색시 데리고 왔어?”
머리가 길면 키가 크든, 가슴이 없든 무조건 여자라고 생각하는 그가 제드에게 물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신랑이라고 해요.”
한술 더 뜬 다비드가 웃으며 제드에게 말했다. 다비드의 입에서 낯선 언어가 나오자 사장이 놀란 눈을 했다.
“외국인인가 봐?”
좌판 근처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평소 제드와 친하지 않았던 아낙들이 말을 걸어왔다.
“외국 사람인가 봐. 목소리가 꾀꼬리야.”
“친구야? 훤칠하네. 훤칠해.”
눈 깜짝할 새에 좌판이 드글거리자 사장이 식재료가 상한다며 침 튀기지 말라고 소리쳤다. 주위가 산만해지고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다비드는 짜증이 났다.
“다들 죽고 싶나 봐요?”
목소리 봐! 너무 멋져! 다비드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시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란을 듣고 이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제드는 다비드의 웃음이 진해질수록 불안해졌고, 주위 사람들은 황홀감에 찼다. 혹시 다비드가 좌판을 엎을까 제드는 그의 손을 쥐고 사장에게 식재료를 포장하도록 주문했다.
“밥 해 먹으려나 봐!”
“남자 둘이 그것 가지고 되겠어?”
“토마토 콩 요리 해 먹으려고?”
미남은 무엇을 먹는지 궁금한 아낙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다비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작은 아낙들이 침을 튀기며 가까이 붙는 것이 싫었지만 제드가 손을 꼬옥 잡고 있어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고맙군.”
제드가 식재료의 값을 치르고 다비드를 데리고 옆으로 가려 했지만, 끊임없이 늘어나는 인파로 길이 막혔다.
분명 전쟁 때문에 마을의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 했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바글바글하다.
그녀들이 토마토 콩 요리에 들어가면 맛있는 식재료라며 비싼 고기와 빵까지 자신들의 장바구니에서 꺼내 제드에게 건넸다.
제드는 제 손에 들린 빵과 고기, 다비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미남은 어디를 가서도 굶진 않겠거니 생각했다.
“생화학 무기….”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다비드가 활짝 웃으며 무기에 대해 언급하자 제드는 제 손에 가득한 짐을 고쳐 들고 다비드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벌써 가?”
“소피네 총각! 우리 집에 남편이 사고 한 번도 안 입은 옷 있는데 이따 가져다줄까?”
쏟아지는 선심에 제드는 이 마을이 이렇게나 따뜻한 곳인 줄 처음 알았다. 제드는 딱 잘라 거절하고 그들의 헤치고 나아갔다.
다른 것도 장 보려 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녀야 할 것 같아 제드는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다란 두 미남이 멀어지자 아낙들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두 남자가 손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 잘 어울리네.”
“남자들한테 무슨 막말이야.”
“내 말이 틀려? 잘 어울리잖아.”
“남자끼리 징그럽게 손을 잡고….”
중얼거리던 야채 가게 사장은 자신에게 향하는 섬뜩한 아낙들의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무섭다, 무서워. 중얼거리며 그녀들의 싸늘한 시선을 피해 좌판을 정리했다.
“제드도 저 사람들 거슬리죠?”
그렇다고 말하면 당장 뒤돌아 깽판을 칠 기세였다.
“아니, 원래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까득. 다비드가 치열이 상할 것처럼 이를 갈았다. 제드는 그가 어디에서 빈정 상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들 다비드에게 홀렸는데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옷 준다고 할 때 그 사람 왜 쳐다봤어요?”
“내가?”
쳐다봤었나? 모르겠다. 말을 걸어왔으니 쳐다보고 의사를 표하지 않았을까. 제드는 쳐다본 것 가지고 유별나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런 적 없다.”
“지구로 돌아가면 내가 백 벌은 사 줄게요. 제드가 좋아하는 흰옷.”
“멋지군!”
제드가 활짝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다비드는 그가 왜 흰옷에 집착하는 줄 몰랐다. 제드가 웃자 언제 언짢았냐는 듯 기분 좋아진 다비드가 물었다.
“근데 왜 흰옷 안 입어요?”
지구에서 그의 드레스룸은 모두 흰옷으로 가득 차 다비드가 몰래 버리고 정상적인 옷들로 채운 적도 있었다. 반면 제드의 방에 있는 옷장에는 흰옷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제드는 자신이 평민이라 귀족에게 열등감이 있어 흰옷에 집착한다는 말을 단순하게 일축했다.
“이곳에서 흰옷은 고귀하다는 증명이다.”
다비드는 시장에서의 사람들의 행색을 보았다. 밝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제드 또한 마찬가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비드는 이곳에 와서 밝은 옷을 입은 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특권층의 증거가 흰옷이었구나, 그래서 제드는 그렇게 집착한 것이었어. 다비드는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다비드는 제드의 손을 꽉 잡으며 정말 지구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흰옷으로만 드레스룸을 채워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제드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비드는 냄새만 맡고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배고팠던 제드는 꾸역꾸역 먹었다.
“재료도 제대로 넣었는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군.”
재료 빼고 모든 것이 문제다. 재료의 양, 재료를 넣는 타이밍, 불 조절, 끓이는 시간 등 어느 것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음식은 곤죽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빵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내가 나갈게요.”
다비드가 문을 열자, 집 앞에는 로봇들이 있었다. 한편에는 거대한 우주선도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면 걸릴까 봐 지상에서 이동시켰어요.”
제드는 저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오느라 고생했다며 동글동글한 로봇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험상궂은 인간형 전투 안드로이드에게는 악수를 한 번씩 했다.
“안에 우주 식량이 있으니 그걸 먹어요.”
다비드는 음식물 쓰레기보다도 못한 제드가 만든 음식이 거북했다. 먹고 제드가 탈이 날 것 같았다.
로봇을 시켜 제드의 집을 청소하고, 우주선 안에서 영양제와 식량, 깨끗한 침구를 꺼내 옮겼다.
제드는 실시간으로 깨끗하지는 집이 신기했다. 다비드가 건넨 영양제를 삼키며 그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영양제인가.”
“아, 이건.”
다비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제드와 사용했던 남성용 윤활제였다. 로봇에게 우주선 이동을 서두르게 시킨 것은 다 윤활제 때문이다. 그와 빨리 몸을 섞고 싶어 안달이 났다.
제드와 재회했을 때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며칠 동안은 애타고 불안한 마음에 손만 잡고, 품에 안겨 잤다. 그러나 심신이 안정될수록 밤이고 낮이고 성욕이 솟구치다 못해 철철 넘쳐흘렀다.
“먹는 거예요.”
뒤로 먹는 거다. 다비드가 손에 쥐고 있는 약의 용도를 모르는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들어가 정돈하는 로봇을 도왔다.
“답장이 늦는군.”
제드는 부대장에게 왕이 잘 속아 넘어갔다는 내용과 동생의 안위를 챙겨 줄 것이라는 답신을 받았다. 그러나 동생에게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했다. 할 말이 없는 걸까. 혹시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동생의 답신을 받아야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다비드는 조바심이 났다. 로봇을 시켜 동생에게 편지를 받아 올까 싶었지만, 길을 알지 못해 로봇에 좌표를 입력할 수 없었다.
로봇에 의해 정돈된 집은 전보다 쾌적했다. 사실 제드의 나무집보다 우주선에서 지내는 것이 더 안락하고 위생상 좋겠지만, 다비드는 곧 영영 떠나게 될 제드에게 벌써부터 우주선에서 지내자고 말하지 않았다.
“같이 씻어요.”
다비드는 씻을 때조차 제드와 떨어지기 싫어했다. 제드가 화장실에 갈 때도 다비드는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요즘 다비드는 재회했을 때보다 정신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이나 눈빛이 끈적해진 것이 증거였다. 바로 지금처럼.
“혼자 씻어라.”
제드는 잘 씻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자주 씻었지만, 이곳의 위생 개념상 평민은 물론 귀족과 왕족도 잘 씻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제드는 잘 씻는 편에 속했다. 소피가 깔끔한 성격이었기에 씻지 않는다며 제드를 구박했기 때문이었다.
“나랑 씻기 싫어요?”
다비드가 웃으며 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자 제드는 하는 수 없이 그와 우주선으로 향했다.
“이게 왜 있을까요.”
다비드가 불쾌하게 히죽 웃었다. 우주선의 욕실은 하나였지만 간이 칸막이를 내릴 수 있는 구조였다. 다비드는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발견조차 하지 못했을 제드가 천장에서 귀신같이 보고는 칸막이를 내리고 씻기 시작했다.
어떤 얼간이가 만든 것인지 불투명한 칸막이는 제드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누가 이딴 걸 설계한 걸까요.”
다비드는 그 설계자를 잡아 족치고 싶었다. 그 설계자는 다비드가 행성 이주 프로젝트에 동행인을 추가한다는 말을 듣고 배려심 넘치게 부랴부랴 칸막이를 설치한 것이었다.
다비드는 칸막이 앞에서 제드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서성이다 씻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로 개운하게 씻고, 건조까지 하고 나오자 제드는 우주선에 없었다. 다비드는 그가 보이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해 빠르게 나무집으로 향했다.
제드는 다비드의 걱정을 모르는 듯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자요?”
그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다비드의 불안감에 뛰었던 심장이 맥없이 돌아왔다.
다비드는 자신을 불안하게 한 제드의 몸을 만졌다. 힘을 주지 않은 탐스러운 근육은 말랑하고 따뜻했다.
다비드는 제드의 셔츠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방금 씻은 몸은 보송하고 생기가 돌았다.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가슴은 다비드의 아랫도리를 기세 좋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할 때가 되었다. 다비드는 너무 오래 참은 자신이 대견했다. 젖꼭지를 빙글빙글 돌리자 제드가 간지러운 듯 신음했다.
“뭐냐.”
선잠에 들어 있던 제드가 눈을 떴다. 어두운 침실에서 셔츠를 벌리고 제 위에 올라와 가슴을 희롱하는 다비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는 반쯤 발기한 제드의 성기를 바지 위로 매만졌다.
“내 생각 하면서 자위한 적 있어요?”
손에 꼽을 정도로만 했다. 제드가 민망함에 아무 말 하지 않자 다비드가 손을 꾹 눌렀다.
“읏.”
“왜 말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랑 했어요?”
“안 했다.”
소중한 곳이 터질까 봐 제드는 다급하게 말했다.
“확실해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드를 본 다비드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별로 세게 누르지도 않았는데 제드는 끙끙거렸다. 발기한 탓에 살살 눌러도 아팠나 보다.
다비드는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지를 내리자 제드의 우람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가슴과 아래를 모두 내보인 제드의 모습에 다비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빨아 봐도 돼요?”
“그걸 왜….”
제드는 성기가 더럽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입에 담는 것은 지저분한 행위라 여겼다.
다비드는 제드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성기 뿌리를 손으로 잡고 귀두를 머금었다.
누워 있던 제드는 상체를 일으켰고, 다비드는 자연스럽게 그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 침대 밑에 무릎 꿇었다.
“흐으. 더럽다. 빼라.”
“안 더러워요.”
귀두 끝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리는 다비드는 지독히도 음란해 보였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가 성기를 감싸자 제드는 다비드의 머리를 밀지도 못하고 허리를 떨었다.
‘이, 이렇게 기분 좋다니.’
제드는 다비드를 저지하려던 손을 그의 어깨에 살포시 대었다. 그 반응에 다비드는 입을 끌어 올리고는 혀를 움직였다. 제드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다비드는 제드의 성기를 물고 입에도 성감대가 있구나 싶었다. 제드의 성기를 빨아 댈 때마다 흥분감에 머리가 찌릿했다. 제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음을 흘리는 것도 좋았다.
다비드의 머리가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음탕한 소리가 났다. 제드는 다비드의 입에 사라졌다 드러나는 자신의 성기가 낯설었다.
다비드의 이가 귀두에 닿을 때마다 오싹한 감각이 들었다.
“빼라더니, 기분 좋은가 봐요?”
다비드가 요도 입구를 혀를 찌르고 돌리며 제드를 비웃었다. 손으로 기둥을 훑을 때마다 침과 함께 손바닥이 마찰하며 끈적한 소리를 냈다.
“안 돼. 나올 것 같다. 혀, 혀로 어디를 건드리는 거냐!”
“입에 싸요.”
사정감이 끓어오르자 제드가 다비드의 머리를 잡고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진짜, 진짜 나올 것 같다.”
제드는 온 힘을 다해 사정을 참으려 했다. 그러나 인정 없이 빨아들이는 감촉에 그만 다비드의 입에 파정하고 말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쾌감에 미미하게 인상을 쓰자 다비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웃음 지으며 제드의 정액을 꿀떡꿀떡 삼켰다.
“진하네요. 진짜 안 했나 봐요.”
다비드는 깨끗하게 귀두 끝까지 쪽쪽 청소하듯 빨고는 제드의 정액 맛이 어떻다며 감상을 늘어놓았다.
제드는 오랜만에 느끼는 사정의 여운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비드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제드 이거 기억해요?”
“영양제 아니냐.”
아까 로봇이 가져다준 영양제였다. 왜 지금 이 순간 다비드가 저을 보여 주는지 영문을 몰랐다.
다비드는 제드의 허벅지 중간쯤 내려가 있던 바지를 벗기고는 다리를 들어 구멍을 보았다. 제드의 무거운 몸을 아기 다루듯 하는 다비드의 힘은 여전했다.
“이거 넣을 거예요.”
“그거 혹시 전에 넣은 그거냐.”
제드는 다비드와 관계했을 때를 기억했다. 다비드가 뒤에 무엇을 넣자 구멍이 미끌미끌해지고 안이 간지러워졌었다. 영양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것인가 보다.
“맞아요. 싫어요?”
다비드는 제드가 삽입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할 때는 좋아했지만 처음 삽입을 할 때는 항상 싫은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항상 다음에는 자신이 넣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안 받아 주면 이 행성 폭파할 거예요.”
제드는 그 말에 웃었다. 다비드의 협박은 무섭지 않았다. 흥분한 게 여실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협박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 하나만 바라보고 이 먼 행성까지 찾아온 그가 무서울 리 없었다. 다비드의 것은 심히 크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좋다.”
제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비드는 그의 구멍에 알약을 삽입했다. 손가락이 들어오는 그 어색한 감각에 제드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다비드가 웃옷을 벗었다. 제드가 매일 치유해 준 덕에 상처는 말끔히 나았다. 그러나 멘가에 의해 상처 입은 곳은 오래된 탓에 흉이 남았다. 자잘하게 흉진 곳도 있었다. 제드는 그 흉터에 마음이 썼다.
그러나 다비드가 바지를 벗자 제드는 쓰던 마음과 몇 분 전에 떠올렸던 ‘못 참을 만한 정도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고쳤다.
오랜만에 본 다비드의 것은 참지 못할 정도였다. 무식한 것이 징그럽게 서 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아니다.”
아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는 제드의 표정에 다비드가 웃었다. 참 생각하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나는 타입이다.
제드가 멈칫거리며 다비드의 것을 한 손으로 잡았다.
‘묵직하군.’
몇 번 만지지도 않았는데 다비드의 것이 한계까지 커졌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두껍고 뜨거운 성기가 움찔거렸다.
다비드는 금방 쌀 것 같았다. 그는 제드와 떨어지고 단 한 번도 자위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끔 제드 꿈을 꿨을 때 몽정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개운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바라던 제드와의 접촉에 어설픈 손길만으로도 사정감이 들 정도였다.
침대에 앉아 다비드의 것을 투박한 손길로 만지던 제드가 순간 다비드의 것을 입에 물었다.
“아, 제드….”
다비드는 그가 제 것을 입에 담을 줄 몰랐던 터라 조금 놀랐다. 다비드는 선 자세로 침대에 앉아 제 큰 것을 입에 넣고 서툰 솜씨로 우물거리는 제드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후우….”
제드는 몸집이 큰 만큼 입 안도 넓었다. 다비드의 것을 머금고도 입이 찢어지지 않았다.
‘향긋하군.’
제드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지만, 다비드의 사타구니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염려했던 것만큼 거부감이 없었다.
다비드가 신음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았다. 기둥을 훑으며 쪽쪽 빨아들이자 다비드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성기가 두근두근 뛰는 것을 제드는 혀로 느꼈다.
“나와요.”
제드의 머리칼과 귀, 목덜미를 쓰다듬던 다비드가 그의 입에서 성기를 쑤욱 뽑았다. 제드의 입술과 그의 성기에서 타액 섞인 정액이 늘어났다.
손으로 훑지 않았는데도 성기 끝에서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흐읏.”
그을린 제드의 가슴과 얼굴에 불투명한 흰 정액이 튀었다. 쇄골과 배꼽은 웅덩이를 만들고 가슴골을 타고 흘렀다. 다비드는 일부러 제드의 얼굴에 성기를 비볐다.
“왜 얼굴에 묻히는 거냐.”
“보기 좋아요.”
다비드는 황홀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액 묻은 제드의 뺨과 가슴을 야하게 문지르며 정액을 발랐다.
알약이 녹아 제드의 구멍 근처가 축축했다. 구멍 속이 간지럽고 흐물흐물하다.
제드가 다리를 벌리고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다비드의 것이 빠르게 커졌다.
“넣어 달라는 거죠?”
“좀 덜 풀린 것 같다.”
‘아닐걸요’ 하며 다비드가 침대에 올라왔다. 눈빛이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 같다.
둥글한 귀두를 구멍에 맞추고 비비며 조금씩 누르자 주름이 천천히 열렸다. 다비드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하아. 제드.”
창백하기만 하던 다비드의 몸이 상기되었다. 넣자마자 사정감을 참는 듯 억눌린 한숨을 뿜었다.
“너무 깊다. 읏.”
다비드의 길고 두꺼운 것이 장까지 깊게 찔렀다. 제드는 아픈 듯 묘하게 미간을 구겼다.
제드의 구멍이 넓게 벌어져 성기를 따라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다비드는 제 것을 야금야금 삼키는 아래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성기가 미끄러지며 조금씩 들어갈 때마다 제드의 배가 불룩하니 솟았다.
윤활제의 역할을 하는 알약의 효과는 엄청났다. 제드는 아픈 와중에도 배를 채우는 쾌락을 느꼈다.
다비드는 다 넣지도 않고 성급하게 안을 퍽퍽 쳐올렸다. 침대 나무 프레임에서 부서질 듯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읏. 천천히 해라.”
“못 참겠어요….”
제드의 어깨에 얼굴은 묻은 다비드가 애처롭게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래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끈적하게 허리를 놀리며 안을 헤집고 전립선을 누르자 제드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제드, 여기 느끼죠?”
“빠르다! 나올 것 같다.”
삽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정할 것 같은 성기를 쥐고 참았다. 그 말에 다비드가 웃으며 허리를 더 세게 쳤다.
“앗, 나온다고…!”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제드의 것에서 정액이 튀었다. 사지를 바르작거리고 고환을 움찔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에 다비드의 몸이 달떴다. 제드의 얼굴까지 튄 정액을 맛있게 핥았다.
“하아.”
숨을 헐떡이며 너무 쉽게 뒤로 간 제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뒤로 박히고 쌌네요?”
다비드는 약간 수치스러워하는 제드의 표정을 보며 좋아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제드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다비드는 그를 제 위에 앉혔다. 무거운 덩치가 손쉽게 들리자 제드가 기함했다. 삽입한 채 자세가 바뀌자 안에서 성기가 꿀렁거렸다.
“제드, 허리 움직여 봐요.”
다비드는 앉은 자세로 제드를 품에 안고 두 손으로 엉덩이를 쥐었다.
제드에게 움직여 보라고 하면서 참을성 없이 먼저 허리를 쳐올렸다. 무거울 텐데 그의 허리는 거침이 없었다.
제드는 그의 것이 너무 깊숙이 박혀서 입으로 나올 것 같았다. 다비드는 불룩해진 제드의 배를 매만졌다. 허리를 흔들 때마다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둥그런 귀두로 제드의 배를 뚫어 버리고 싶다는 가학심도 들었다. 내 집이라도 되는 양 내장을 다 헤집고 영역 표시하고 싶다.
흔들리는 큰 가슴을 세게 쥐자 제드가 신음했다. 손가락 사이로 젖꼭지가 애처롭게 튀어나와 후들거렸다.
눈앞에서 푸딩처럼 흔들리는 가슴을 참지 못하고 다비드는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하읏. 느낌 이상하다.”
아래를 움직일 때마다 철퍽이는 소리가 생생하다. 제드의 허리를 세게 껴안고 그의 가슴을 빨던 다비드가 이로 연약한 살을 긁었다.
제드가 그의 어깨를 밀어도 다비드는 행위에 열중하며 제드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비드의 고환이 제드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괴팍하게 때렸다.
대단한 크기의 것이 안을 헤집는 것은 온몸을 맞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단번에 들어왔다 빠지며 젖꼭지까지 빨리니 몸 전체가 성기라도 된 양 오싹했다.
제드는 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부끄러움도 모르고 걸쭉한 정액을 질질 흘렸다.
“히익.”
참으려 해도 성기에서 울컥울컥 진득한 같은 것이 나왔다. 제드가 움찔거리며 다비드의 가슴에 뜨끈한 것을 뿌려도 그는 멈춤 없이 아래를 쳐올렸다.
“아, 조여요. 여기 안에 기분 좋아요.”
제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울 정도로 쾌락이 지속되자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 쳤다.
“잠깐, 그만!”
제드가 삽입한 것을 빼려 하자 다비드가 그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꾹 눌렀다.
제드는 머리를 지배하는 미쳐 날뛰는 쾌감에 비정상적으로 몸을 떨었다. 다비드는 경련하며 제 성기를 바짝 조이는 뜨겁고 울퉁불퉁한 제드의 안에 진득한 정액을 내뿜었다.
다비드의 성기가 움찔거리며 정액을 토해 낼수록 내장 안이 축축해지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기이했다. 제드가 사정하며 안을 조이자 다비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정액 잘 어울려요.“
이리저리 튀긴 정액 때문에 제드는 엉망이었다. 억지로 여러 번 사정한 탓에 몸이 붉고 정신없는 표정이었다.
“매일 뒤집어씌우고 싶어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제드의 얼굴에 키스했다. 혹사당한 침대는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드는 다비드가 매일 정액을 넣어 주고 싶다는 소리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가시지 않는 쾌락에 움찔거렸다.
다비드는 제드를 번쩍 들어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삽입한 채로 발기한 것이 살짝 죽으니 헐렁해진 구멍에서 윤활제와 정액이 섞인 하얀 거품이 흘렀다.
분홍색으로 통통하게 부어오른 구멍과 젖꼭지가 다비드의 눈에 들러붙었다.
반 정도 빠진 두껍고 긴 성기를 다시 천천히 집어넣자 다비드는 탄식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인 양 쫄깃한 속살이 착 달라붙어 왔다.
천천히 빼고 다시 넣는데 성기가 길어서 거리감이 있었다. 박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제드가 다비드의 팔을 잡았다.
“그만, 쉬었다 하자.”
다비드는 제 것을 삼키는 구멍에 집중했다. 제드가 자신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박을 때마다 제드, 흣, 속이 움찔거려요.”
제 큰 것이 완전히 집어 삼켜졌다. 복근이 불룩해지고 홀쭉해질 때마다 제드는 진저리쳤다. 성기가 꺼덕거리며 다비드의 배에 닿았다.
제드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묻고 다비드는 너무 좋다며 중얼거렸다. 다비드의 꿀 떨어질 것 같은 눈에는 사랑이 충만했다. 제드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방금 안에 쌌는데 또 싸고, 그의 배가 불룩해질 정도로 싸고 싶었다. 제드의 정액과 땀으로 젖은 큼직한 젖통에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었다.
“제드 몸이 미끌미끌해요.”
아래를 굼실거릴 때마다 구멍과 성기 사이로 흘러나온 정액이 음란한 소리를 내었다.
“안 힘들죠?”
“하아. 힘들….”
다비드가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젓자 대답할 수 없었다. 마주친 눈을 휘며 웃는 것이 색마 같았다. 어지간히도 쌓인 것인지 다비드는 끈질겼다.
“부족해요.”
제드는 충분히 즐긴 것 같았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다. 오늘 몸을 혹사시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허리가 꺾일 것 같았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다비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드가 그의 손가락을 혀로 밀어 뱉어 냈다.
“내일 더 하자.”
“나 싫어요? 이것밖에 못 해요?”
다비드가 애원과 도발을 동시에 했다. 애처로운 표정과는 반대로 제드의 구멍을 들쑤시는 아래는 호색한 같았다.
“안 싫다….”
다비드가 주책없이 웃었다. 제드는 배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커지는 다비드의 성기를 느끼며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허리가 저절로 움직여요.”
기분 좋아. 다비드가 다시 제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다비드는 제드의 천천히 하라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철퍽이며 아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죽겠다는 기색을 폴폴 풍기며 다비드를 뿌리칠 마음도 없었지만, 힘이 너무 세서 뿌리쳐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일부러 전립선 근처를 빙글빙글 돌리는 탓에 제드도 곧 흥분해서 허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한 번만이다.”
제드는 후에 한 번만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혼자 두 번 더 사정해서 나중에는 드라이 오르가슴을 느낄 정도였다.
다비드는 파정하지 않기 위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사정감을 참았다. 그 악착같은 노력은 제드의 ‘안에 싸라.’는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
“하아, 제드.”
황홀경에 찬 다비드가 제드의 입을 개처럼 핥았다. 제드는 다비드의 성기와 연결된 구멍 입구를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 느낌이 없다.”
제드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비드는 얼른 그를 재생수에 담그기 위해 제드의 안에서 뭉그적거리던 성기를 빼내었다.
제드의 부어오르는 구멍에서 성기가 쑥 빠져나가자 민망한 소리를 내며 밖으로 정액이 분출되었다.
“하읏.”
“한 번만 더….”
“그만해라.”
제드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벌렁이는 구멍에서 나오는 정액을 닦아 내지도 못했다. 다리를 오므릴 힘도 없었다.
그 모습을 집착 가득한 눈으로 보던 다비드는 없는 인내심을 끌어 올려 로봇을 호출하고 재생 캡슐을 가동했다.
* * *
우주선 밖에서 대기 중인 안드로이드에게 제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다비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옮겨졌다.
그를 안아 들거나 업고 싶었지만 배 속에 고인 정액이 너무 줄줄 흘러서 그럴 수 없었다.
정액을 안에서 모두 뺐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찔끔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드는 그냥 옆에서 부축이나 하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다비드는 그 말에 따랐다.
“부끄럽군.”
“신경 쓰지 말아요.”
제드는 부드럽게 웃는 다비드를 보았다. 그의 바지는 미사일이 뚫고 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불편해 보였지만 다비드는 잘 걸었다.
제드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혹사시킨 그의 성기는 힘든 줄을 몰랐다. 제드의 시선이 아랫도리에 맴돌자 다비드가 기대에 찬 표정을 보냈다.
제드는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 보내는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못 본 척했다.
“누워요. 나오면 추울 거예요.”
우주선의 재생 기계는 한 대뿐인지라 지구에서처럼 마음대로 재생수를 따뜻하게 만들 수 없었다. 고장 나기라도 하면 제드가 다쳤을 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제드의 입에 호흡기를 씌워 주고 기계를 닫았다. 투명한 창 너머로 평안하게 눈을 감고 휴식에 들어가는 제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큰일이네요.”
다비드는 팔팔한 아래와 제드를 번갈아 보며 달큼한 한숨을 쉬었다. 아직 한창 더 할 수 있는데 제드를 위해 참는 수밖에 없다.
* * *
다음 날 제드가 깨어날 때까지 다비드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를 빤히 지켜보며 기다리던 다비드는 제드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자 재생수를 빼내었다.
몸을 떨며 추워하는 제드에게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괜찮아요?”
방금 깨어난 제드는 몽롱한 것 같았다. 무방비한 젖은 몸으로 안겨 오는 제드가 기꺼워서 다비드는 어제 마음껏 풀지 못한 아래가 다시금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배고프다.”
다비드의 마음도 모르고 제드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았다. 다비드는 제드의 축축하게 젖은 가슴을 움켜잡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로봇에게 식량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했다.
제드는 입으로 음식을 쓸어 담았다. 이 행성에 돌아오고 나서 쭉 지구와는 다른 맛없는 식사를 했고, 전쟁을 하는 와중에는 그보다도 못한 음식을 먹어야 했다.
우주 식량이라 지구에서 먹던 음식보다 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제드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맛있어요?”
그의 옆에서 물을 따라 주던 다비드가 물었지만 제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불같은 정사를 보낸 후의 아침 식사라고 하기에는 참 분위기 없었지만, 다비드는 제드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다비드가 그의 모습을 옆에 착 달라붙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드는 어느새 우주선에서 꺼내 온 생활복을 입고 있었다. 팔뚝에 1지구회 마크가 떡하니 붙어 있는 어두운 남색 생활복은 제드에게 딱 맞아 잘 어울렸다.
“에든이 흰옷을 안 넣어 뒀네요.”
제드가 입을 옷을 넣어 둔 수납장에 분명 흰옷이 있었다. 다비드는 잘 찾아보지도 않고 에든을 탓했다.
“몸은 괜찮은 거죠?”
“그래.”
제드는 우주 식량 3인분을 먹어 치우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비드는 그가 식사가 끝나도록 기다리다 부리나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비드의 긴 머리카락이 제드의 턱을 간지럽혔다.
“머리 잘라야겠다.”
귀찮기도 하고, 제드가 없어진 탓에 정신을 놓고 있던 다비드는 머리카락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드는 짧은 머리를 좋아하나 보다. 그럼 잘라야겠다고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제드는 다비드를 잠시 앉혀 두고 침실로 향했다. 엉망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침실은 어제의 흔적이 남김없이 지워져 있었다. 서랍장에서 낡고 무식하게 큰 가위를 들고 나와 다비드에게 건넸다.
“이건 왜요?”
“쇠붙이는 이것밖에 안 남았다.”
쇠붙이로 만든 식기나 칼은 전쟁 중에는 더욱 귀했기에 동생이 거의 챙겨 나갔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이미 팔아서 남은 것이라곤 몇 개 없었기에 다비드가 머리를 자른다고 해서 가위를 찾아 가지고 나온 것이다.
나무의 가지를 칠 때 쓸 법한 가위를 건네는 제드를 잠시 바라보다 다비드는 이끌리듯 말했다.
“제드가 잘라 줄래요?”
이 가위로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가 잘릴 것 같았다. 운 좋으면 귀만 잘려 나갈 정도로 무식했다. 낡고 녹슨 가위는 스치기만 해도 파상풍에 걸릴 것 같았다.
“내가 동생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기도 했었지.”
약 20년 전 이야기였다. 오래된 영화의 노부부처럼 서로의 머리를 잘라 주는 행위를 생각하니 귀가 잘려도 퍽 좋은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흠.”
“왜 그딴 소리를 내는 거예요?”
다비드는 서늘한 가지치기 가위가 목덜미를 스칠 때조차 기분이 좋았지만, 제드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슬슬 불안해졌다.
“아니다. 넌 대머리여도 잘 생겼을 거다.”
다비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파들파들 떨렸다. 몸과 바닥에 떨어진 결 좋은 금발은 이미 양이 많았다.
제드는 다비드에게 천 쪼가리 하나 둘러 주지 않고, 집 앞에 의자 하나를 달랑 두더니 앉으라고 말했다. 그 말에 다비드가 얌전히 따른 결과는 참담할 것 같았다.
“아직 덜 잘랐다.”
“아니, 괜찮아요.”
“어디를 가는 거지?”
“거울 좀 보려고요.”
다비드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제드가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
“수습할 수 있다.”
“어떤데요.”
제드는 말이 없었다. 아주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다비드를 위로했다.
지구에서 다비드의 머리는 적당한 길이의 정갈한 스타일이었다. 앞머리를 내릴 때도 있었고, 올릴 때도 있었다.
그에 비해 제드는 아무렇게나 자른, 눈을 거의 가리는 머리 스타일이었다. 제드는 자신이 대충 자른 머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버릇처럼 다비드의 머리도 대충 잘라 버렸다. 다비드의 앞머리가 성큼 잘려 잘생긴 눈썹이 보였다. 뒷머리도 이상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비교적 머리 스타일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지만 이상하기는 정말 이상했다.
“걱정 말아라.”
“더 자르지 말아요.”
가지치기 가위를 들고 있던 제드의 손을 잡았다. 이러다가 진짜 대머리가 될 수도 있겠다.
수습할 수 있다, 없다로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제드의 집으로 난 작은 길목으로 빠르게 말을 탄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다비드가 로봇을 부르려 하자 제드가 저지했다. 각자의 말을 타고 달려오는 두 명의 사람은 낯이 익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둘만 있는 곳으로 누군가 다가오자 다비드는 몹시 경계했다.
“소피인 것 같군.”
“그게 누군데요.”
제 머리를 망친 이의 입에서 여자 이름이 튀어나오자 다비드가 소름 돋는 얼굴로 웃었다.
“동생이다.”
동생? 빠르게 달려오는 이는 눈만 빼고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품이 큰 펄럭이는 고동색 외투 때문에 성별도 짐작 가지 않았다.
그의 동생이라지만 궁금증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이제야 제드가 동생과 인사하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겠다 정도였다.
제드와 다비드가 있는 곳까지 말을 탄 두 명의 사람은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서서히 말이 멈추고, 소피는 말 위에서 내려와 빠르게 걸어왔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냐.”
“편지 받고 바로 출발했어.”
외투를 벗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눈썹과 각진 턱, 총명한 눈과 높은 코는 제드를 똑 닮아 있었다.
큰 키와 골격, 짙은 밤색 머리칼은 둘이 남매라는 것을 처음 본 다비드도 눈치챌 정도였다.
소피는 제드의 옆에 딱 달라붙어 선 다비드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누, 누구야?”
“편지에 적은 ‘지구’에서 온 사람이다.”
다비드의 미모에 얼이 빠진 소피의 뒤로 브로디가 말에서 내려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헉.”
부부는 닮는다더니 똑같은 표정으로 다비드를 보고 얼이 빠졌다.
어떻게 눈코입이 저럴까. 비율은 물론이고 희고 깨끗한 피부와 금발 머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경외감이 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다비드의 머리가 조금 이상한 것을 봤다. 소피는 제드의 손에 들린 가지치기 가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 옛날에 내 머리 이상하게 잘라 놓은 것 기억해?”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머리 기를 동안 동네에서 얼마나 놀림당한 줄 알아?”
“누가 놀린 거냐!”
제드가 버럭 하며 근육을 씰룩였다. 그의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다비드는 정말이지 사람 같지 않았다.
소피가 받은 편지에 제드는 지구로 돌아간다고 썼다. 그곳에서 자신을 찾으러 먼 길을 날아온 ‘연인’과 함께 떠난다는 말이었다. 소피는 당연히 그 연인이 여자일 줄 알았다.
남자인 것도 놀라운데 엄청난 미인이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옆에 있는 브로디도 편지를 함께 본 탓에 다비드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소피가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모… 몬스터?”
“아니, 로봇이라는 거다.”
소피와 브로디가 음료를 가지고 온 로봇을 보고 경악했다. 허벅지 정도 오는 흰색 로봇은 작은 고철 손으로 열심히 음료를 나르고 소리도 없이 발에 달린 바퀴 같은 것을 돌리며 사라졌다.
“놀라운 것 투성이네.”
소피는 제드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집 앞에 놓인 우주선이라는 것과 로봇, 그리고 제드를 찾으러 왔다는 정체불명의 미남을 보니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귀한 얼음을 동동 띄운 음료는 갈색을 띠고 있었다. 제드가 그것을 들고 벌컥거리며 마시자 소피도 따라 마셨다.
“와. 이게 뭐야? 너무 맛있어.”
“복숭아 아이스티다.”
태어나서 마셔 본 음료 중 가장 맛있었다. 달달한 복숭아 향이 코와 입을 가득 메웠다. 목을 축인 소피는 제드와 다비드를 다시 바라보았다.
제드의 옆에 있는 다비드는 손거울을 보고 약간 얼이 빠져 있었다.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튀어나왔다.
“제드, 내 평생 이런 모욕적인 머리는 처음이에요.”
다비드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에 그의 언어와 성격을 모르는 소피와 브로디는 제드가 그를 막 대한다고 생각했다.
“이분께선 그, 형님의….”
브로디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애인? 남자친구? 약혼자? 그는 제드를 동경하고, 그로 인해 전쟁 중 안전지대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브로디는 평범한 이곳의 사람이었고, 다비드를 보았을 때 미모 다음으로 제드의 연인인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연인이지.”
제드의 대답에 손거울을 들고 얼이 빠져 있던 다비드가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보았다.
제드가 처음으로 자신을 연인이라고 칭했다. 가슴에서 목까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로비 브로디입니다.”
“이쪽은 다비드 폴머다. 말은 알아듣지만 이쪽 언어를 사용하지 못해.”
“그렇군요.”
“다비드, 이쪽은 내 동생 소피다.”
소피는 제드가 어디 가서 딸릴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 혈육이 나름 잘생긴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비드의 옆에 있으니 소도둑놈 같았다.
“지구라는 곳으로 간다고?”
“그래.”
“거기서, 이분이랑 같이 살게?”
“그래. 지구에선 남성끼리 연애하고 결혼도 한다.”
“뭐 해 먹고 살게? 거기도 능력자 부대가 있어?”
“아니. 다비드가 부자다.”
제드는 다비드가 부자인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소피는 생각보다 침착해 보였다.
“다비드가 남자인데도 놀라지 않는군.”
“남자라서 놀라기 전에, 엄청난 미인이잖아. 너 장난 아니다. 여태껏 애인 하나 안 사귀더니 얼굴 엄청 보는구나?”
그런 것도 같다. 다비드가 저런 외모가 아니었다면 함께 잠자리를 가졌을까. 그랬을 것이라고 확답은 못 하겠다.
소피의 말에 다비드의 귀가 쫑끗거렸다. 애인 하나 사귀지 않았구나! 실없이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제드와 잠자리를 가져서 날아갈 것 같던 기분이 머리를 망쳐 조금 저조해졌는데, 다시 날아갈 듯 좋아졌다.
“제드, 내 세 번째 애인이랑 열다섯 번째 애인도 여자였어.”
소피의 말에 제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피가 여자를 사귀었던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열다섯 번째라는 말에 제드는 반응했다.
‘부럽군!’
혼자만 연애를 많이 한 혈육에게 제드는 배신감을 느꼈다. 브로디도 알고 있었는지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언제 출발하게?”
“널 봤으니, 곧 출발할 거다. 브로디와 안전지대로 돌아가라.”
“잘 모르겠어. 난 여기가 좋아.”
소피의 표정이 어두웠다.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여기보단 거기가 안전할 거다.”
소피는 제드가 목숨 걸고 자신과 브로디를 안전지대에 보내 주어서 감사했다. 안전지대가 자신에게 맞지 않아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하는 것이 염치없다고 생각했다.
제드는 소피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휴전했으니 전보다 위험하지는 않겠지. 네가 행복한 곳에서 살아라.”
“응. 너도.”
제드가 소피를 끌어안자 어느새 다비드가 흉흉한 눈으로 제드 옆에 붙어 섰다. 머리를 바보같이 잘라서 잘생겼지만 모자란 사람 같아 보였다.
소피는 다비드를 잘생긴 부자 바보라고 생각했다. 제드가 남 돕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런 남자와 눈이 맞았다고 이해했다.
소피와 브로디는 다시 안전지대로 돌아가 짐을 챙겨 와야 했기에 떠났다. 제드와 소피는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브로디와 돌아갔다. 남이 보기에는 삭막한 이별이라고 하겠지만, 남매에게는 더없이 깔끔하고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훗날 소피는 남자아이를 낳는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제라드라고 짓는다.
* * *
“빨리 가요.”
다비드는 행성에 불을 지를 거라며 재촉했다. 제드는 간소하게 짐을 챙기고 집을 돌아보았다. 풍경도 돌아보았다. 별 감흥 없던 오래된 나무집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리울 것 같았다.
“그건 왜 챙겼어요?”
“내 짐이다.”
제드가 챙긴 사각형 나무 가방을 보고 다비드의 웃는 표정이 이상해졌다. 왜 쓰레기를 챙겼을까. 현미경으로 보면 세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가방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싶었다.
“우주선에 다 있어요.”
귀한 쇠붙이(가지치기 가위)까지 챙겼기에 가방은 무거웠다.
“없는 것도 있을 거다.”
다비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드의 손을 잡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이곳을 벗어나 단둘이 우주를 떠돌고 싶었다.
그의 재촉에 제드는 다비드의 손을 잡고 우주선에 올랐다. 다비드의 얼굴에 피어난 진실 된 미소를 보며 제드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골드 닷을 향한 그들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