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8)

제드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재생수에 가득 찬 캡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입에 꽂은 산소마스크 덕에 호흡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뿌연 시야로 보이는 밖으로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드가 두꺼운 유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리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밖에서 무언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곧 캡슐 가득 들어 있던 재생수가 빠지자 에는 듯한 추위가 급습했다.

“하아, 하아.”

“추우실 테니 옷 입혀 드리겠습니다.”

아래 속옷 한 장 입고 있던 제드의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덜덜 떨렸다.

그를 캡슐에서 건지며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말했다.

“캡슐에서 회복하고 나오면 원래 춥습니다. 잠시 진정하시면 몸 상태를 봐 드리겠습니다.”

제드는 탈골되었던 어깨와 질질 끌던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숨 쉴 때마다 찌르는 고통을 느꼈던 가슴께도 괜찮아졌다.

“다비드는?”

“…괜찮으시면, 바로 보러 가시겠습니까?”

의사는 조금 조급해 보였다. 제드가 다비드를 찾자 반색하며 말했다. 제드가 기계에 들어가 수술을 하고, 캡슐에 들어가 치료받던 일주일 동안 다비드는 끔찍한 고통에 방치되었다.

수술 기계와 재생수가 통하지 않는 다비드의 몸은 마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의 기계가 갈아 끼워졌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할 것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그의 중추신경계에서 마비되는 부분을 찔러 보아도, 다비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마취나 마약성 진통제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었다.

다비드는 뇌출혈과 뇌압 상승으로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자연 치유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었는데, 수술 기계와 재생수가 통하지 않으니 주변에서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제드도 의식을 잃고 많이 다쳐 캡슐에 들어가 있었다. 모두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캡슐에서 나온 사람은 보통 하루 이틀은 푹 쉬어야 했기에, 의사는 제드가 눈을 떴을 때 잠시간 쉬게 해 주려고 했다. 다시 기절이라도 하면 더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가 먼저 다비드에 대해 말을 꺼내기 전에 제드가 알아서 다비드를 찾으니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어떻게 됐지?”

“다비드 님의 기계 부분은 대부분 교체한 상태입니다. 인간인 부분이 모두 회복되어야, 근육이나 피부 이식이 가능해서… 계속 고통 속에 계십니다.”

다비드의 몸 상태는 극비였다. 아주 소수의 관계자만 알고 있었다. 제드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너무 추웠다.

의사가 걸쳐 준 도톰하고 긴 스웨터도 뼈가 시릴 듯한 추위를 막아 주지는 못했다. 둘은 얼마 걷지 않아 곧 다비드의 병실 앞에 설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병실 앞에는 에든이 제드를 걱정스럽게, 그러면서도 반가움이 깃든 표정으로 맞이했다.

눈 밑이 시커먼 것이 제드가 캡슐에 들어 있는 동안 마음고생을 꽤 한 것 같았다. 울퉁불퉁 자기 주장하던 에든의 근육이 조금 작아진 듯 보였다.

에든이 병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곳이 드러났다.

병실 안에는 하얀 휘장이 넓게 쳐져 있었는데 휘장 밖으로 여러 개의 기계 장치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가동되고 있었다.

“안에 다비드가 있나?”

“네,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에든이 휘장을 걷으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제드는 다비드의 모습을 얼어붙은 눈으로 지켜봤다.

다비드는 녹은 거죽을 모두 제거해 거의 기계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알 한쪽은 녹은 상태 그대로 뻥 뚫려 있었다. 금속으로 촘촘하게 짜인 몸은 반질반질하고 기이했다.

구멍 뚫렸던 배 부분은 말끔하게 채워져 있었지만, 꺾였던 팔이나 종아리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러고 있지?”

“뇌출혈과 얼마 남지 않은 내장을 회복시켜야만 기계적인 부분을 다시 끼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복부를 수리하느라 뇌에 쇼크가 왔습니다.”

결국 제드의 힘으로 그를 치유해야 기계적인 부분을 점차 수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제드는 방금 캡슐에서 나왔지만, 망설임 없이 그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을 짜냈다.

에든은 제 상사의 끔찍한 모습과 제드의 능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아프지 않았던 적이 없던 다비드는 칼 위를 걷고, 몸에 불을 지르는 고통이 걷히고, 따스한 감각을 느꼈다.

병원에 도착해서 한 번도 열리지 않던 다비드의 한쪽 눈이 열렸다.

‘제드.’

말을 하고 싶었으나 끈적이는 목구멍은 열리지 않았다. 겨우 뜬 뿌연 시야로 제드가 집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출렁이는 금빛 물결이 자신의 몸에 따스함을 넣어 주었다.

깨질 듯이 아팠던 머리가 진정되었다. 다비드는 죽어 가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제드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살리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그는 묵묵히 제 온 힘을 다비드를 위해 사용했다.

처음 그에게 손등을 치유받았을 때는 이 따스한 느낌이 불쾌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고통스럽다 못해 감각 없는 몸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식사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몸은 밥을 먹지 않기 일쑤였고, 그렇기에 배부름을 느낀 적은 아주 오래되었다. 어릴 때나 느껴 보았던 포만감이라는 느낌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멈췄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작게 콩콩 뛰었다. 고통이 잠잠해지자, 다비드는 일주일 만에 기절이란 것을 했다.

“그만, 멈추셔야 합니다!”

제드가 비틀비틀거리면서도 다비드를 붙잡고 있자, 에든이 옆에서 그를 부축했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다. 오늘 무리한다면 내일 제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쉬시고, 회복하시면 다시 부탁드립니다.”

“하아, 하아.”

“다비드 님 뇌파가 진정된 것을 보면 잠드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일주일 동안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다비드의 뇌파는 뒤죽박죽이었다. 잠이 들면 죽을 수도 있었기에 의사는 그를 억지로 깨웠다.

의사가 보기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오름세와 내림세를 반복하던 뇌파가 지금은 평온한 상태였다.

에든은 제드를 다른 병실까지 부축하며 데려다주었다. 캡슐에서 나왔으니 이제 평소 패턴대로 몸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깊게 주무시고, 밥 많이 드시고, 빨리 회복하셔야 합니다.”

의사도 에든도 빨리 회복해서 다비드를 치유하라는 은근한 압박을 보냈다. 제드는 곤죽이 되었던 다비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제드의 일과는 다비드를 치유하고, 질 좋은 음식을 먹고, 쉬고, 영양제를 맞는 것이 전부였다. 팔자 좋은 애완동물이 된 것 같았다.

다비드의 상태는 좋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계속해서 제드의 치유가 필요했다. 기계 부분을 수리하고 피부를 이식할 때도 제드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캐롤의 대장은 죽었나?”

“그렇다고 봅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비드 님과 제드 님뿐입니다.”

“신원미상자는?”

얼마 전 에든에게 캐롤의 부대에 신원미상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알리자, 놀라워하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건가.”

“제드 님과 함께 전투기에서 퉁겨져 나왔다면, 그 폭발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신원미상자가 제드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마주쳤지만, 그는 제드를 보고 놀랐고, 얼핏 반가워 보이기도 했다.

2년 전 이곳에 온 그도 아직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아 희망이 조금 꺾였지만, 그자를 찾아서 정보를 같이 모은다면 어쩌면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드 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에든의 호칭은 아이삭스 씨에서 제드 님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제드가 없었다면 다비드는 죽었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어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회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든이 다비드를 걱정하는 이유에는 그가 자신의 상사라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안타까운 어린 시절을 알았지만, 그가 평소 로버들을 살육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격도 파탄 났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해서인지 에든은 다비드에게 애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다비드가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병든 지구에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사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었다. 인류에게 그의 목숨은 소중했다.

“제드 님만 믿습니다.”

근육만 멋진 사람이 아니라 능력도 멋진 사람! 에든에게 제드의 호감도는 무한대로 샘솟고 있었다.

“근데… 옷장에 옷이 많지 않으십니까?”

“엄청 많다.”

에든은 진심으로 그 많은 옷 중 제드는 왜 맨날 저런 것만 입을까 의문이었다. 각양각색의 값비싼 옷들이 옷장에 가득한 것을 보았는데 밝은 옷만 고집했다. 심지어 같은 옷 같았다.

그 또한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터질 것 같은 정장을 고집하면서 제드의 패션 센스를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안 빨아 입으시는 것 같은데….’

벗어 두면 로봇이 알아서 세탁하는데 제드는 더러워지지 않거나 냄새가 나지 않으면 갈아입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옷 이야기를 들으면 눈치를 챌 것 같은데 제드 본인은 잘 어울리는 줄 알고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은근 기분 좋아했다. 그 무신경하면서 의외로 눈치 없는 구석에 에든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또 가십니까?”

제드는 다비드의 침실에 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많은 사람이 있는 병원보다 다비드의 저택이 더 안전했고, 사건을 들은 방송사에서 병원 앞을 서성거리자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의 저택은 최신식 기계 설비가 갖추어져 있기에 기계 수리기사나 의사가 필요할 때만 방문하는 것으로 했다.

다비드의 병간호는 로봇과 안드로이드가 담당했지만, 제드는 그의 몸 상태가 신경 쓰여 수시로 그를 찾아 상태를 살폈다.

“힘이 좀 찬 것 같다.”

마취가 통하지 않아 계속해서 통증을 느낀다는 의사의 말에 제드는 능력을 짜내 쓰고, 조금이라도 힘이 충전되면 다비드를 치유했다.

분명 제드의 몸에도 무리가 가는 행위임에도 그는 불평 없이 해냈다. 다비드가 아프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제드는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에든이 응접실에서 일을 보게 내버려 두고 제드는 다비드의 침실로 향했다.

2층 구석,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했던 그곳에는 이미 제드의 생체인식이 되어 있어 알아서 문이 열렸다.

“나 왔다.”

넓은 내부는 이미 의료기기로 가득 차 있었고, 무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본래의 인테리어와는 다르게 지금은 하얀 천과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드의 인기척에 다비드가 눈을 떴다. 그는 아직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성대가 다 녹아 기계와 엉겨 붙어서 치료하는 데 시일이 좀 걸린다고 했다.

근래 피부를 이식해서 붕대 감은 몸은 화상 입은 듯 온몸이 흘러내리다 잘못 굳은 치즈 같았다. 제드는 그를 거리낌 없이 만져 대며 말했다. ‘싫다고 하지 않으니 만져도 되겠지.’ 제드는 단순했다.

“밥은 아직 못 먹나?”

다비드는 불구와 다름없는 몸이었지만 눈알을 굴린다든지 의사 표현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다비드의 한쪽 눈에 제드가 비쳤다. 제드는 그의 동공을 살피고, 입을 벌리게 해서 목구멍을 살피고 얼마나 나았나 몸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치유자는 간병인이 아니었지만, 일의 특성상 환자를 돌보는 일에도 제드는 익숙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좀 더 나으면 눈알을 넣어 준다고 하더군. 조금만 참아라.”

한쪽 눈으로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으라는 소리였다.

제드가 움직이는 대로 다비드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얼굴과 몸을 붕대로 감아 놓아서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캐롤의 대장은 죽었나 보다. 축하한다. 복수에 성공했군.”

붕대 사이로 그의 입이 히죽 올라간 것도 같았다. 폭발 현장에서 제드가 다비드를 찾았을 때, 복수의 결과는 보고 죽으라고 했던 것이 다비드는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다비드의 표정에 제드는 말을 이었다. 이미 에든에게 들었을 수도 있었지만 제드는 어쨌든 축하했다.

“내가 본 이들은 복수에 성공하면 망가지더군.”

제드는 과거 복수에 성공한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집착할 대상이 사라지자 처음에는 기뻐했지만, 결국 삶의 목표를 잃고 피폐해졌다.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드의 말에 다비드는 잠시 생각했다. 저를 괴롭힌 마지막 남은 캐롤을 죽여도 다비드는 통쾌하다거나, 엄청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드디어 다 죽였구나.’ 하는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허무한 건가? 그런 것도 같았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다. 캐롤의 수장은 다비드의 손에 조각났다. 그의 고통에 찬 얼굴과 비명, 저주, 마지막 모습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걸레짝이 되어 다 죽어 가던 자신을 불길 속에서 구하러 온 제드의 모습이었다.

절뚝거리며 화상 입은 손으로 자신을 끌던 피투성이 제드. 죽지 말라며 자신을 구원하던 황금색 빛.

‘정말 구하러 와 줬어.’

가슴이 답답해지고 배 속이 질척거리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드나들며 자신을 매만지고 돌봐 주는 제드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는 불안함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긴 깨끗해서 다행이다.”

제드는 더러운 현장에서 살이 곪아 썩어 가던 제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곳에 비하면 여기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제드는 거즈로 붕대 사이로 드러난 다비드의 웉퉁불퉁한 피부에서 나오는 진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투박한 손길에 다비드는 제드의 표정을 살폈다. 망가진 제 몸을 보고 드나드는 의사나 기술자들은 안타깝다든가, 아깝다든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제드에게는 그러한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다들 네 걱정을 한다.”

제드는 에든, 의사, 기술자, 뉴스에서 나오는 다른 이들이 다비드를 걱정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비드는 실소를 지었다. 자신을 찬양하지만 애타게 필요할 때는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 존재들. 제 외관에 홀려 침을 질질 흘려대는 머저리들.

‘나한텐 얼굴만 다르지, 다 똑같아요.’

다비드에게 인간이란 얼굴만 다르고 모두 비슷한 존재였다. 불쾌하기 짝이 없으며, 귀찮기만 한.

다비드가 가족들에게 돌아가 재활하는 동안 사랑을 받았다면 그가 타인에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지만, 그가 돌아오고 얼마 후 그들은 사망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그때 다비드는 10살이었고, 몸과 정신이 정상적이지 못해 부모님이 죽었다고 인지하지도 못했다. 몸은 기계로 고쳤어도 망가진 정서는 그때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에든도 네 걱정을 많이 한다. 그 좋아하는 운동도 못 하고 근육이 쪼그라들 때까지 일만 하는 것 같으니 너 다 나으면 휴가 좀 줘라.”

조곤조곤, 제드의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비드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거기는, 유감이다.”

이어지는 말에 다비드의 눈이 찌푸려졌다.

“녹아 없어진 것 같다. 충격이 크겠지.”

다비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충격의 떨림이 아닌 폭소의 떨림이었다.

다비드는 어릴 적 그곳 또한 거세당했기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다비드에게 아랫도리는 그저 쓸모없이 큰 살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어릴 적 그곳을 재생하고 난 후 남에게 보인 적도 없었다.

“울지 마라. 붙여 줄 수 있을 거다.”

진지한 제드 때문에 다비드는 몸이 아픈 것도 잊고 진짜 웃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다. 사나이는 이럴 때 우는 거지. 비밀로 하겠다.”

가슴에 올라온 제드의 손이 그를 위로하듯 토닥토닥 움직였다. 다비드를 바라보는 눈에는 약간의 동정을 담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포근했다.

다비드는 웃음 때문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다비드는 수시로 찾아오는 제드를 기다리곤 했다. 또 언제 올까. 의사나 수리기사, 에든이 오면 귀찮기만 했다.

자신을 안쓰럽게 또는 징그럽게 쳐다보는데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제드가 자신을 바라보는 반응은 궁금했다.

의사는 제 얼굴이 전처럼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의 경력을 걸고 꼭 돌아오게 해 주겠다고 했다.

다비드는 사실 별로 상관이 없었다. 어쩌란 말인가. 제 얼굴을 가지고 떠들어 대는 변태들은 제 얼굴이 망가진 것에 더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나 제드는 자신의 얼굴보다 아랫도리를 보며 더 마음 아파했다.

“오늘은 하반신 위주로 치유해 주지.”

그의 넘치는 배려에 다비드의 몸이 다시금 떨렸다.

“감동하기는.”

우쭐대는 게 볼수록 가관이다. 제드가 다비드의 골반 쪽에 손을 올리고 능력을 쓰자, 떨리던 다비드의 몸이 멈췄다.

하루에 몇 번씩, 내리쬐는 따스함은 중독성 있을 만큼 좋았다. 그가 몸에 닿는 시간은 몸을 콕콕 찌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순간이다.

다비드는 몸에 타인의 손길이 닿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제드의 손이 몸에서 떨어지자 진득한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더.’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낯선 마음이 속에서 삐쭉 솟았다.

* * *

아픈 사람에게 성격 좋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그것이 제드의 지론이었다. 다비드는 원래도 성격이 좋지 않았지만 제드는 마음 넓은 자신이 이해해 주기로 했다.

“면도 안 했어요?”

“했는데 금방 자라는 편이다.”

“지저분해요.”

말이 매끄럽게 나올 만큼 회복한 다비드는 옆에 있는 제드에게 시비를 걸었다.

제드는 잠시 욱했다가 붕대 감은 다비드의 얼굴과 성치 않은 한쪽 눈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드러난 입술은 아직 피부가 제대로 안착되지 않아 쭈글쭈글 엉망이었다.

“수염이 빨리 자라는 건 남성 기능이 좋다는 거다.”

“애초에 면도가 제대로 안 됐어요. 아저씨 같아.”

“다물어라.”

자세히 봐야 보일 듯 말 듯 한 면도 자국을 한쪽 눈으로 귀신같이 알아본 다비드가 신기했다. 지구의 면도 기구에 익숙하지 않아 서툴게 면도한 게 티가 났나 보다.

제드가 턱을 만지작거리자 다비드는 그의 반응을 보고 웃었다. 불안정한 목 상태는 쇠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만들었다. 킬킬 웃는 목소리가 악당 같았다.

“봐줄 만해요.”

“그럴 리가? 완벽한데.”

“누가 그래요? 에든 말은 믿으면 안 돼요.”

터질 것 같은 정장이나 입는 에든의 안목은 믿으면 안 된다며 다비드는 덧붙였다. 원래 이렇게 유치했나? 제드는 침대에 누운 그를 내려다봤다.

“나 아프니까 옆에 있어요.”

투정도 는 것 같다. 아프면 그럴 만하지, 하고 그를 이해했다. 부대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동료가 제드를 잡고 아이처럼 우는 것을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매일 능력을 퍼부어도 회복이 더디군.”

오늘도 사심 없는 손길로 다비드의 이곳저곳을 만져 댔다. 그럴 때마다 다비드는 제드를 빤히, 노골적으로 쳐다보곤 했다.

다비드는 자신의 외모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남들이 평가하는 것에도 관심 없었지만 제드가 흉하게 변한 제 몸을 만지거나 볼 때면 그의 반응을 예민하게 확인했다.

제드의 살짝 뻗친 앞머리 밑의 깊은 아이홀을 보다가 더 내려가 일자로 높게 뻗은 코, 각진 턱, 도톰한 입술을 진득하게 훑던 다비드는 저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옆에 누울래요?”

다비드의 몸을 여기저기 만지던 제드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방금 입 밖으로 말했나?’

다비드는 방금 제 귀로 들은 ‘옆에 누울래요?’가 환청이 아닌 것을 제드의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아니… 저 옆에 안락의자 누울 수 있어요.”

다비드는 요새 자신이 얼빵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이었다. 이상한 말이나 해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는 했나 보다.

“그럴까?”

제드는 할 것이 없었기에 다비드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안락의자를 두고는 빈둥거렸다. 태블릿을 들고 씨름하자 다비드가 그를 도왔다.

“e라고 쓰여 있는 거 눌러요.”

“글 못 읽는다.”

“아, 전화기 모양 옆에 있는 거요.”

“전화기가 뭐지.”

“보여 줘요.”

뭐 하나 쉽게 알아듣는 게 없었다. 다비드의 얼굴에 태블릿을 들이밀고 제드는 같은 화면을 보려 얼굴을 붙여 왔다.

태블릿을 든 제드의 팔목은 튼실하고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근래 들어 매일 맡던 익숙한 샤워 코롱 향과 함께 살냄새가 훅 들어왔다.

‘냄새 좋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체취는 역겹다고 생각했는데 제드의 향은 좋게 느껴졌다. 자꾸만 그의 신체에 관심이 가는 것을 부정하며 다비드는 태블릿에 집중했다.

“두 번째 것 눌러요. 뭐 검색하려고요?”

“13지구 폭발.”

“그건 왜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다. 거기 살던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냐.”

“그 사람들이 걱정되나 봐요.”

무심하게 생겨서 제드는 다정한 면이 있었다. 다비드에게 그러는 것처럼 여기저기 속도 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그가 타인을 걱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도 있을 거 아니냐.”

“구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다비드가 어디에서 심술이 나서, 또 재수 없는 말로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지만 제드는 덤덤했다.

“맞다. 그래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애들은 왜 걱정해요? 애가 있어요? 제드 결혼했어요?”

갑자기 질문이 많아졌다. 결혼했냐는 다비드의 마지막 말이 높게 올라갔다.

“아니다. 내가 고아여서 그래.”

어릴 적 여동생과 함께 고아가 된 제드는 머리 하나만큼 작은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구걸이건 뭐건 다 했고 능력자 부대에 들어가 갖은 고생을 했다.

지금의 그녀는 강인했지만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난 후에는 정신적 충격으로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몬스터 토벌전이나 분쟁 지역에 갔을 때는 그곳의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제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려 노력하곤 했다.

다비드 역시 어릴 적 고아가 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같은 처지의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고 애는 더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들은 구조 1순위니까.”

인구문제로 13지구 어디서든 아이는 귀했기에 많은 지원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아이에 대한 납치나 인신매매도 많았다.

다비드가 어릴 적 납치를 당한 것도 ‘폴머 가문의 아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몸값을 뜯기 위해서였고 내장이 팔린 이유 또한 아이의 내장이 필요한 거부들에게 팔기 위해서였다.

기계 내장과 팔다리는 특권층에게 흔했지만, 사람의 내장을 이식하는 것이 부작용이 훨씬 덜했다. 다비드는 자신의 그 많던 내장이 어떤 아이들의 몸에 이식됐을까,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 옆에 눌러서 음성으로 말하면 검색될 거예요.”

다비드가 말하자 제드는 곧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톡톡 몇 번 누르더니 뉴스를 읽어 달라고 다비드의 눈앞에 태블릿을 다시 들이밀었다. 로봇을 부르려다가 다비드는 그냥 자신이 읽었다.

“13지구에 출몰한 캐롤이 전멸했다는 속보입니다. 폭발의 영향으로 타 지구까지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현장은 화재로 인해 접근이 어렵습니다. 캐롤을 전멸시킨 것은 다비드 폴머로 현재 생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로버로부터 다른 이들을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캐롤이 전멸한 날 올라온 뉴스는 다급한 그 날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아직 목이 불안정해 자신의 목소리가 거칠다고 느꼈다.

그 듣기 싫은 목소리를 제드는 잠자코 집중하며 들었다. 큰 덩치로 귀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좀 귀여웠다.

“너 힘들면 안 해도 된다. 로봇 시키면 돼.”

“괜찮아요. 이 정도는.”

평생 남의 부탁은 콧방귀로 응수하던 다비드는 제드의 부탁을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주고 있었다.

제드는 여러 뉴스 중 파괴된 13지구의 모습과 다비드의 모습이 합성된 사진의 뉴스를 클릭했다.

“네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뭐라고 쓰여 있지?”

“13지구의 참혹한 현장에서 다비드 폴머가 중상으로 발견됐다. 다비드 폴머는 심각한 부상으로 현재 자택에서 요양 중이다.”

“자택에서 요양하는 건 어떻게 알지?”

“정보가 빠르니까요.”

기사 밑으로 여러 개의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 다비드 얼굴 많이 안 다쳤길! 완쾌 빌어요.

- 실존 인물 맞아? 얘 그래픽 아니었어?

- 미친 다비드 얼굴 상했으면 같이 캐롤 사냥할 파티원 구한다.

- 나 남잔데 다비드랑 결혼할 법 좀 알려줘.

댓글은 모두 다비드의 얼굴 이야기뿐이었다. 제 얼굴이 곤죽이 된 걸 보면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드는 그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제드는 궁금한 것도 많은지 영상까지 확인했다. 의자에 누워 태블릿을 위로 들고 톡톡 화면을 두드리며 영상을 보는 것이 퍽 현대인 같았다.

제드는 뉴스를 보고, 다비드는 제드를 한참 구경했다. 휴식할 때 타인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다.

“치유해 주마. 한숨 자라.”

힘이 충전된 제드가 다비드에게 다가왔다. 머리에 닿은 손이 크고 듬직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따스한 열기와 금빛이 몸을 감싸왔다.

‘기분 좋아.’

기절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인 앞에서 잠들어 본 적 없는 다비드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나 잠들어도 옆에 있을 거예요?”

“아니. 운동할 거다.”

단호하고 무뚝뚝한 말에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다비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운동… 농구 할 줄 알아요?”

“모른다.”

“수영은요?”

제드는 바다에 가 본 적도 없었다.

“할 줄 모른다.”

“재미있어요. 나으면 같이 해요.”

납치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놀았을 때 참 즐거웠다. 제드랑 함께하면 막연하게 그때처럼 즐거울 것 같았다.

“졌다고 심술부리지 마라.”

“누가 그런 걸 부린다는 거예요.”

제드는 손에 닿는 부드러운 다비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건방진 태도에 화를 내야 마땅했지만 다비드는 그 손길을 끝으로 잠에 빠졌다.

* * *

오늘도 꽉 조이는 옷을 입은 에든은 감동의 눈길로 제드를 보았다. 다비드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제드는 부담스러운 그의 눈빛을 무시했다.

“근육이 다 터질 정도로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거절하겠다.”

저 근육이 다 터질 정도면 안기는 제드는 뼈가 부러질 것이다. 절대 사양이다. 에든은 볼 때마다 초췌해져 갔다.

다비드의 상태가 호전되어 가도 아직 실무를 볼 상태가 아니었기에 에든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갖은 일을 도맡아야 했다.

에든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제드 님, 신원미상자는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못 찾았나?”

“네. 13지구 전체를 뒤져도 추적이 어렵습니다. 부상을 당한 것이라면 분명 흔적이 남았을 텐데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불의 능력을 사용하는 신원미상자가 하필 캐롤인 것도 모자라 그날 만나고, 이야기도 나눠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 아쉬웠다.

“그냥 여기서 살아요.”

붕대를 푼 다비드가 침대에 앉아 말했다. 피부는 아직도 울퉁불퉁하고 화상 입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통풍을 위해 붕대를 제거해야만 했다. 새로 끼워 넣은 기계 안구가 잘 안착되어 두 눈은 파란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붕대를 제거한 의사는 다비드를 안타깝게 보았다. 아름다웠던 그의 얼굴과 매끄럽던 피부를 기억했기에 내보인 반응이었다.

어떻게든 원래의 그 빛나는 외모로 되돌리기 위해 온갖 의료기술을 쓸 예정이었고, 제드 덕에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지만 흉측한 모습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든도 그 모습을 보고 놀랐지만 금방 표정 관리를 했다.

제드는 이제 습관처럼 다비드의 얼굴을 매만졌다. 손에 닿은 피부는 플라스틱처럼 요철이 심했다. 깜빡일 줄 모르는 듯한 파란 눈에 제드의 얼굴이 담겼다.

제드의 손이 눈 주변을 지나 재건하지 않은 뭉그러진 코, 흐물흐물한 입술을 쓸고 지나갔다. 에든은 그 모습에 숨을 들이켰다.

“앞은 잘 보이나?”

“잘 보여요.”

다비드는 더 만져도 된다는 듯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그렇게 만지면 안 됩니다!’

에든이 ‘맹수를 만지면 위험합니다!’라고 소리 없이 속으로 외쳤다. 조마조마한 심정과는 다르게 다비드는 얌전하게 제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말려 올라간 입술이 기분이 좋은 듯도 보였다.

많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심각하게 다친 것 같은 제 상사의 상태가 갑작스레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드는 오늘 아침부터 다비드를 치유했고, 의사가 기계 장치로 피부를 재생시키는 레이저를 쏘고 새로운 눈알을 박아 넣은 참이다.

“이제 어딜 치유하면 되지?”

“몸에 있는 기계 장치는 웬만큼 수리되었고, 머리랑 피부 쪽을 해 주시면 됩니다.”

의사는 답하고 다비드에게 인사한 뒤 방에서 나갔다. 에든은 다비드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하려 의사를 따라나섰다.

“오늘도 나랑 있어요.”

“그래.”

다비드는 제드를 자꾸만 옆에 두었다. 몸을 아예 움직이지 못할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로봇이 다비드의 수발을 다 들어 주는데 옆에서 할 것도 없었다.

방에 돌아가도 할 것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라 다비드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래도 다비드랑 있으면 옆에서 시비를 걸긴 해도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다.

인터넷, 홀로그램 TV 등 제드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했다.

다비드의 옆에 붙어서 종일 같이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능력을 쏟기를 반복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밥은 안 먹어요?”

“너 치유해 주고.”

“식사하고 해요.”

남의 식사 여부를 신경 쓰지도 않는 다비드는 온종일 붙어 있다 보니 제드가 얼마나 먹을 것을 좋아하는지 알았다. 그는 제드의 식사를 챙기기도 했다.

우걱우걱 먹는 것이 밥맛 떨어진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또 복스럽게 잘 먹는다.

“그럴까 그럼?”

은근 손에 질척대는 다비드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로봇을 호출했다.

다비드가 전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알았다. 직접 들은 것과 뉴스에서 찾아본 것을 합쳐 보니 그의 인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어릴 적 납치되어 끔찍한 일을 겪었고, 1지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아가 되었다. 재활을 반복하다 보니 투정 부릴 사람이 없던 것 같았다.

성격도 고약해서 로버들을 죽이며 정서장애를 겪었을 터였다.

제드는 치유 후 자신에게 끈끈한 애정 비슷한 것을 느끼는 이들을 잘 받아 주는 편이었다. 치유 능력을 받는 사람은 성스러운 치유력과 그 따스한 힘에 이끌리듯 그들을 사랑스러워했다.

능력자 중에서 치유자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몬스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공격형 능력자들이 훨씬 대접받기는 했지만.

“잘 먹겠다.”

제드는 안드로이드에게 말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갓 구운 빵을 비스크에 찍어 먹고, 스테이크는 큼지막하게 썰어서 한입에 넣었다. 샐러드도 드레싱에 찹찹 섞어 먹었다. 제드는 음식을 가리지 않아 처음 먹어 보는 맛도 잘 먹는 편이다.

음식을 다 삼키기도 전에 다른 음식을 입에 넣을 준비를 하는 것이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안 먹나?”

제드는 정신없이 2인분의 양을 거의 다 먹었을 때가 되어서야 다비드에게 물었다.

제드가 밥 먹는 것을 보던 다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식사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다. 자신의 몸의 대부분이 기계인 것을 모르는 대중의 시선 때문에 가끔 먹는 시늉을 내기는 했다.

“제드 다 먹어요.”

인간의 신체가 몇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영양제는 항상 챙겨 먹었고, 가끔의 식사로 몸은 유지되었다. 음식을 먹는 것으로 쾌락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 식사란 다비드에게 귀찮기만 한 것이다.

식사를 마친 제드는 후식으로 접시에 정갈하게 놓인 과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꼭지 부분이 말끔하게 잘린 딸기를 입에 넣자 제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맛있는데.”

탐스러운 붉은빛 딸기는 값비싼 설탕을 잔뜩 뿌린 것 같이 달달하고 향이 풍부했다. 크기도 엄청나게 커서 제드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유전자 변형으로 만든 체리 딸기라는 것을 모르고 먹던 제드는 이곳의 과일은 최고라며 연신 감탄했다.

“생각해 보니까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생각해서 배가 고프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생각이 없어도 배는 항상 고프지 않나. 제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멀쩡한 포크를 두고 손으로 집어 먹던 제드는 사용하지 않은 포크를 그에게 건넸다. 다비드는 큼직한 딸기를 베어 먹었다.

입술 피부가 제대로 안착되지 않아 그의 입가로 과즙이 흘렀다.

“씁.”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어릴 적 여동생에게 했던 대로 칠칠치 못하다는 소리를 내며 소매로 다비드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오늘도 여전히 흰옷을 입고 있던 그의 소매가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피부에 느낌이 없어서 과즙이 흐르는지도 모르던 다비드는 제 입가를 억센 힘으로 닦아 내는 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물들었군.”

“옆에 냅킨 있는데… 왜 더럽게 소매로 닦아요.”

“접으면 안 보인다.”

통 넓은 긴소매의 끝을 두어 번 접은 제드는 다시 딸기에 집중했다. 드러난 팔뚝은 두껍고 핏줄이 서 있었다. 만지면 맥박이 쿵쿵 뛸 것 같은 야성미가 느껴졌다.

“팔이 아파요.”

그 말에 제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치유해 줬는데?’ 하며 팔을 살피려 하자 다비드의 푸른 눈이 그를 직시했다.

“먹여 줘요.”

“뻔뻔한 소리를….”

진짜 팔이 아픈가? 딸기가 진짜 먹고 싶나? 저 싹수없는 놈이 왜 저러지 싶어 얼굴을 살펴봐도 피부가 어그러져 표정을 살피기 어려웠다.

과일 한두 개 입에 넣어 주는 거로 안드로이드를 부르기도 애매한지라 제드는 제일 작은 딸기를 들었다.

평소의 다비드였다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더럽다고 질색했겠지만, 저항 없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의 입에 딸기를 넣어 주는데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 손가락이 입 안에 조금 닿았다가 나왔다.

제드는 손에 남은 축축함을 옷에 문질러 닦으려다가 흰옷을 입을 것을 자각하곤 양손을 비벼 축축함을 없앴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손을 샥샥 비벼 감촉을 없애려는 게 퍽 솔직한 반응이었다.

제드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던 다비드가 슬금슬금 웃자 제드가 퉁명스레 말했다.

“왜 웃지?”

“그냥 맛있어서요.”

다비드의 얼굴 앞에서 저렇게 투명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먹어도, 먹지 않아도 될 별 관심 없는 딸기를 받아먹던 다비드는 안드로이드가 식기를 치우고 환기하자 제드에게 말했다.

“치유해 줘요.”

“그래. 졸리면 자라.”

“제드도 같이 잘래요?”

“싫다.”

‘내가 왜 네 옆에서 자. 몸도 많이 나은 놈이 투정은.’ 제드는 투덜거리며 다비드를 치유했다. 오전에 몸을 수리한 것이 피곤했는지 다비드는 금방 잠이 들었다.

방에서 나오자 에든이 보였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저택에 남아 일을 했나 보다.

아까 의사를 따라 나온 에든은 그에게 다비드의 뇌는 문제가 없다는 답을 들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아직 안 갔나?”

“할 일이 많아서 못 갔습니다.”

에든은 제드에게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굉장히 곤란합니다. 이번 달에 시행하기로 했던 행성 이주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비드가 다쳐서 그런 건가.”

“네. 엄청나게 공들인 프로젝트인데 적임자가 다비드 님뿐이라 대체 인력이 없습니다. 장기간 우주에서 버티며 우주선 조종까지 할 만한 사람이 지구에서 다비드 님뿐이라니….”

“다비드는 몸이 기계라서 가능한 것인가.”

“기밀 사항이지만, 추측하신 게 맞습니다.”

에든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밖에서 윗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만큼 투자금과 시간이 많이 들었고 대중들의 기대도 크다 보니 걱정이 많습니다.”

에든의 지방 없는 볼이 푹 꺼져 있었다. 에든은 자신도 모르게 제드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 같아 큼큼 헛기침했다.

제드의 무심한 태도와 은근 내보이는 인정, 순박하고 올곧은 태도와 이세계의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모습이 에든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근데 다비드의 거시기는 언제 달지?”

“예?”

상사의 아랫도리 여부를 듣게 될 줄 몰랐다. 제드는 민감한 주제를 굉장히 뜬금없이 진지한 태도로 묻고 있었다.

“거시기가 없던데.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에든은 진지한 제드의 표정에 당황했다. 신체가 완성되면 당연히 모든 기능을 뇌와 연결하기 때문에 감각은 인간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주제넘은 생각이었지만 에든은 다비드가 잘 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니 그것을 달아 놔도 과연 쓰기는 할까 싶기도 했다.

자신이 다비드를 모신 오랜 기간 동안 다비드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왜 제드는 제 상사의 거시기에 진지한 걸까. 남자라면 숙연해지기는 하겠지. 싶어 에든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 속도로 몸이 호전되고 피부가 안정되면 다음 주중쯤 다실 겁니다.

“다행이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제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돌보는 환자의 거시기 걱정이 컸나 보다.

그 시각 다비드는 제드의 아랫도리 걱정을 모른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 * *

빠른 회복을 마치고 다비드는 안정된 피부를 느꼈다.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을 만큼 기계 수리도 다 끝냈는데 다비드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제드의 옆에 붙어 있었다.

“운동하셔도 됩니다.”

“일상생활 가능합니다.”

“불편함이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의사는 말했지만 다비드는 몸이 아픈 것 같다며 자꾸만 병상에 드러누웠다. 에든만 속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평생 농땡이라는 것을 부려 보지도 않고 재활과 교육, 일, 로버를 죽이고 캐롤을 찾아다니는 데 바쁘게 보내던 다비드는 그것을 다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생의 복수를 끝내고 번 아웃을 겪으시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비드는 우울하거나 공허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종일 하는 것이라고는 드러누워서 제드와 밥을 먹고, 시비를 걸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다. 노인이나 중환자가 아니라면 잘 맞지 않는 수액까지 맞고 있다.

몸의 대부분이 기계면서, 몸에 도는 피도 얼마 없으면서 수액은 도대체 왜 맞는단 말인가! 에든은 분통이 터졌다.

“제드 님, 다비드 님이 왜 저러시는지 아십니까?”

“난들 아나.”

“아프다고 하시는데….”

“쟤 다 나았다.”

제드의 능력이 미미하게 통하는 것을 보아 다비드의 몸은 거의 나았다. 이제 치유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몸에 능력을 쏘일 때 전처럼 큰 빛이 나지도 않고 힘이 많이 들지 않으니 다비드는 더 따듯하게 내리쫴 보라고 툴툴거렸다. 인간 난로가 된 것 같았다.

제드는 꾀병 그만 부리라고 말했지만 다비드는 아니라고 아직 아프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전처럼 돌아온 얼굴은 다시 반질반질 빛이 났다. 조각 같은 얼굴에서는 흉측했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잘생긴 얼굴로 웃음을 뿌리는 게 영 탐탁지 않아 가자미눈을 뜨고 그를 흘겼다.

다비드가 아프지 않아 더 이상 제드는 그의 몸과 얼굴을 만져 주지 않았다. 다비드는 은근슬쩍 고양이처럼 제드의 몸에 머리를 비비곤 했다.

“근데 왜 저러고 계신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드 님에게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아니 그냥 밥 먹여 달라 하고 재워 달라고 하던데.”

“….”

“같이 운동도 하기로 했다.”

“운동 말입니까….”

다비드가 몸을 단련하고 기계 슈트를 입고 훈련할 때는 언제나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안드로이드나 로봇도 부서지는 마당에 사람이 있으면 죽임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에든은 다비드가 제드에게 개수작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캐롤에 대해서도 별말 없으셨습니까?”

“없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캐롤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에 대한 감상이 없었다.

다비드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잊기라도 한 것처럼 별다른 감정 동요를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머리를 다치신 겁니다. 정신이 이상해지신 겁니다.”

“다비드는 원래 좀 재수 없지 않았나.”

맞다. 아주 아주 재수가 없었다. 웃으면서 상대방 기를 죽이는 태도가 특히 싫었다. 그러나 에든은 상사의 집에서 상사를 욕할 수 없었다.

“가족 없이 살아서 어리광 부릴 사람이 없어 그런 것 같다.”

“…예?”

어리광은 무슨! 그가 고아가 되었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어른이 그를 지지해 주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다비드의 대리 부모를 자처하는 사람이 몇백이 넘었고 방송에서는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비드는 그 사람들을 질색했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지.”

다비드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에든은 그가 마음이 약해질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단면적인 면만 보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다.

다비드가 집, 회사, 그리고 로버를 죽을 때 보이는 행동을 보고 에든은 그를 감정이 결여된 인간이라고 판단했다

“…혹시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냥 도망가십시오.”

“알겠다.”

다비드는 항상 가볍게 웃고 있어서 더 소시오패스처럼 보였다. 원래도 돌아 있지만, 갑자기 회까닥 돌아 버려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이 순진하고 멋진 제드가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꼭 도망가라고 일러두었다. 다비드가 마음먹는다면 도망도 소용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에든은 다비드의 몸이 아플 때는 ‘나을 때까지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그의 밀린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다비드가 몸을 회복하고도 탱자탱자 노는 것을 보니 속이 쓰렸다.

에든은 거대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터로 돌아갔다. 다비드가 일을 하지 않으니 에든만 고생이다.

“왜 이제 와요?”

방으로 돌아가자 다비드가 서성이고 있었다. 링거를 꽂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제드가 더 늦었더라면 방 밖으로 나오려고 했나 보다.

환자 흉내를 내려고 달고 다니던 귀찮은 이동식 링거를 뽑으려다 제드가 방으로 들어오자 슬쩍 주삿바늘이 있는 곳에서 손을 내렸다.

“왜 나와 있는 거냐.”

제드는 다비드의 가까이 다가와 대신 이동식 링거를 끌어 주었다.

무심한 다정함. 이런 식의 친절은 또 처음 받아 봤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비드에게 대단히 굽신거리거나 잘 보이려 애쓰는 것이 태반이었다.

“에든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다비드는 가까이 다가온 제드의 옆모습을 보았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키. 깊은 아이홀. 남자다운 턱선. 두꺼운 옆 통.

다비드는 이상하게 침이 고이고 배 속이 간지럽다. 난생처음 나타나는 몸에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 놀라웠다.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느낌. 제드와 눈을 맞추고 싶은데 그러면 되돌릴 수 없는 느낌이었다.

옆에 선 다비드가 꿈질거리자 제드는 그의 아랫도리를 바라봤다. 항상 이불을 덮고 있어서 궁금했다.

피부를 이식한 이후로는 그의 맨살을 본 적 없었다. 내려다본 환자복의 아랫도리가 두둑한 것을 보니 잘 이식했나 보다. 다행이다.

제드가 흐뭇하게 아랫도리를 쳐다보자 다비드는 허리를 숙여 환자복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다. 그냥 가려야 할 것 같았다.

“에든이 걱정한다. 다 나았으면 일해라. 사지 멀쩡해서 놀면 쓰나.”

“에든 말은 무시해요. 제드가 살던 세계에선 뭐 하고 지냈어요?”

다비드는 대답하기 싫은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드는 다비드가 침대로 돌아갈 때까지 링거를 대신 끌어 주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항상 일했다.”

생각해도 마땅히 대답할 것이 없었다. 제드는 정말 항상 일만 했다.

다비드도 일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항상 바쁘게 일하고, 쉴 틈이 없었다.

인생에서 정말 지금이 가장 많은 휴식을 취하는 시기였다. 제드 또한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기였다.

“바빴나 봐요?”

“바빴다. 부대에선 사람들이 많이 다치니까.”

다비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드에 대해서는 에든이 준 보고서를 보고 알고 있었다. 이세계의 능력자 부대에서 치유자의 임무를 했다고 했다.

다비드는 제드에게 치유받을 때의 느낌을 알았다. 기분 좋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곳에서 속도 없이 능력을 남발했겠지. 다른 이들도 제드의 따스함에 중독되었을까? 불쾌감이 단전에서 끓어올랐다.

“대우는 좋았어요?”

“좋았다. 평민임에도 돈을 많이 주었고, 승진도 시켜 줬지.”

“여기보다 더 좋았나요?”

“그건 아니다.”

잘 관리된 넓은 저택, 맛있는 음식, 최상급의 편의와 새하얀 옷들.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은 제드의 일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돈은 없지만 돌아갈 때 들고 가지도 못할 테니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별로네요. 그냥 여기 살아요.”

“너는 자꾸 날 잡으려고 하는군. 내 능력이 탐나나?”

탐난다. 그의 능력도. 무심하면서도 친절하고 재밌기도 한 제드 자신도.

“난 제드가 필요해요. 제드가 원하는 건 다 줄 수 있어요. 저택을 원해요? 줄게요. 평생 써도 마르지 않은 돈을 원한다면 줄 수 있어요.”

“들어 본 제안 중 가장 짜릿하군.”

제드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꾀병을 부리며 탱자탱자 노는 이에게 들으니 현실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재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일해라. 벌어야 평생 놀고먹을 돈 주지.”

웃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제드를 보았지만, 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제드는 한없이 진지했다. 이곳에서는 다비드의 재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제드의 말을 들었다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 것이었다.

다비드는 그의 순박한 태도에 기분 나빴던 것도 잊고 또 웃음이 슬슬 나왔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요즘 자신의 증세가 딱 그랬다. 인공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보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끅끅대며 웃자 제드는 그의 머리에 대고 능력을 써 댔다.

뇌출혈이 다시 온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능력을 써 대는 제드의 행동이 웃겨서 다비드의 웃음은 더 커졌다.

* * *

“테니스 알려 줄까요?”

다비드가 제드의 방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물었다. 그와 식사하고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다비드는 더 이상 꾀병이 통하지 않자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일을 하러 나가지는 않았다. 에든 근육 빠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제는 제드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내내 옆에 붙어 있더니 오늘은 테니스라는 것을 같이하고 싶은 것 같았다.

“다비드.”

“네.”

다비드는 문을 열고 제드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성큼 다가왔다. 제드가 태블릿 화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인터넷에는 다비드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의 사진이 있는 뉴스를 띄워 놓고 음성으로 내용을 듣던 제드였다.

“인터넷에서 온통 네 얘기만 한다.”

“신경 쓰지 말아요.”

다비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제드에게서 인터넷을 압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네 걱정을 한다. 행성 이주 프로젝트라는 걸 꼭 해야 한다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걸 안 하면 얼마 가지 않아 이곳 사람들이 다 죽을 거라더군.”

제드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자 다비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해야 하지 않나?”

다비드는 뚱하게 생각했다. 캐롤을 죽이고 저 자신도 죽을 뻔했다. 행성 이주건 나발이건 별로 관심도 가지 않았다. 조부모님 대부터 투자했던 건이었지만 다비드는 인류가 죽건 말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가 저걸 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의 목숨과 미래가 달려 있다면 해야지.”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태도였다. 제드의 넘치는 인류애에 다비드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내가 저거 하면 여기 남을래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왜?

“난 원하지 않는데, 제드가 원하잖아요.”

“너희 세계 사람들이다.”

“나는 알 바 없어요.”

제드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니네 세계 사람들 목숨을 왜 나한테 거냔 말이다. 잘생긴 표정으로 뻔뻔하게 말하니 밉지는 않았다.

“사람들 목숨이 달렸는데 제드는 양심도 없어요?”

“내가 왜….”

그러면서도 제드는 그가 미래 인류의 생명이 걸린 행성 이주인지 뭔지를 하지 않을까 봐 불안감이 들었다.

정말 쓸데없이 올곧은 제드는 미간을 구겼다. 다비드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바보 같아.’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그는 진지해 보였다. 다비드 또한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상관은 없었다. 반듯한 이마를 구긴 모습이 바보 같으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드보다 키가 큰 제드는 어림잡아 190cm는 되어 보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봉긋한 가슴 근육, 탄탄한 허벅지는 그가 얼마나 몸 관리를 잘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근육 괴물인 에든을 볼 때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매력을 제드를 보며 느끼곤 했다.

제드의 드레스룸을 한번 싹 갈았더니 전처럼 극악의 하얀색 패션을 선보이는 일이 적었다. 제드는 흰옷들이 없어진 것 같다며 찾아다녔지만 다비드는 모른 척했다.

드레스룸의 옷들은 무난한 컬러로 바뀌었다. 멀끔한 얼굴과 다부진 몸은 무난한 옷을 걸쳐도 태가 남달랐다.

평균 체중의 성인 여성은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 것 같은 몸과 남성적인 얼굴에 다비드는 자주 눈을 빼앗기고는 했다.

“글 알려 줄까요?”

값을 매길 수 없는 몸값의 다비드를 선생으로 두는 것은 영광이었다. 그러나 제드는 그가 요즘 귀찮기만 했다.

“됐다.”

“아니면 옆에서 읽어 줘요?”

로봇이나 자동 안내 음성이 있는데 굳이 옆에서 글을 직접 읽어 줄 필요는 없었다. 제드는 불필요한 일 같기에 거절했다.

“됐다.”

제드는 단호했다. 다비드는 그가 거절하든 말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다비드가 앞에 있어도 다리를 벌려 앉고 하품을 하며 턱을 긁적대는 제드는 편안해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하품하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제드가 머쓱하게 물었다.

“왜 쳐다보지?”

끔뻑끔뻑,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제드는 다른 이들처럼 다비드의 얼굴을 보고 넋을 놓고는 했다.

다비드는 사람의 외관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에게 껍질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족속이었다.

사람들은 으레 다비드의 외관을 대단히 여겼고, 멍청하게 쳐다보거나, 힐끔대거나,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고는 했다.

자신 앞에서 하품을 쩍쩍 하는 인간은 없었다. 그런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비드는 자신의 흉측했던 얼굴을 보고 제드가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제드는 다비드를 보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얼굴이로다.’

턱을 긁적이던 그는 다비드의 후광 비치는 얼굴에 감탄을 뱉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흘러내리던 얼굴은 전처럼 모공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곳의 기술은 대단했다.

그가 깨끗하게 나은 데는 자신의 능력 덕도 있다. 제드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내 능력은 대단해. 내심 자신감이 솟아났다.

“징그럽죠?”

“?”

“알아요, 나를 흉측하다고 생각하는 거.”

“뭐라는 거냐. 재수 없다!”

제드의 표정이 벌레 씹은 듯 일그러졌다. 다비드는 얼굴이 흘러내린 모습을 본 제드가 자신을 아직도 그렇게 보는 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

환장하게 잘생긴 얼굴로 징그러움 운운하는 다비드가 정말 어이도 없고, 재수도 없었다.

“그래요?”

제드의 거친 대답에 다비드가 만족한 듯 웃었다.

“제드가 원하면 행성 이주 프로젝트 바로 할게요.”

그렇게 원하지는 않았지만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한테 뭘 해 줄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내가 왜….”

“내가 제드 부탁으로 우주로 나가는데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엄청난 억지였다. 제드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다비드는 원래 자신이 할 일, 이미 하기로 한 일을 제드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말했다.

“타 행성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에든이 설명해 줬지만, 잘 모르겠다.”

우주란 실로 대단했다. 제드는 우주와 행성, 별, 은하계 그 개념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주대폭발 이후 지구가 생겼고,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우주에 수없이 많이 존재하며 그곳에도 생명체가 있다고 했다.

제드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하나의 구체라는 것에 놀랐다. 과거의 제드였다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이미 차원 이동이라는 것을 겪은 제드는 금방 납득했다.

지구와 타 행성에 대한 이야기, 자기장, 핵폭발 전후에 대한 지구의 훼손 정도를 에든에게 듣던 제드는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어렵다. 몰라도 될 것 같다며 수학을 빠르게 포기하는 수험생 같은 표정으로 설명 듣기를 거부했다.

“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건 안다. 우주에 오래 나가 있어야 한다고?”

“아니요. 금방 와요.”

다비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주에서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비드뿐이었다. 다비드는 먹거나 장시간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기에 1차로 우주에 나가서 많은 행성들을 탐색할 예정이었다.

‘수년에 걸쳐 우주 환경을 분석해 만든 1차 계획을 전면 바꿔야겠다.’ 다비드는 제드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을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다비드의 푸른 눈이 제드를 직시했다. 우주선은 다비드만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제드를 당장 우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쉬웠고, 가고 싶지 않았다.

“금방 올 거예요.”

“그래라.”

제드는 근래 다비드를 돈 많은 백수 취급했다. 다비드는 긴 다리를 꼬며 웃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 보는 무능력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 글로만 읽던 인정욕구라는 것을 느꼈다.

* * *

“대흉근이 웅장하십니다.”

빡빡 깎은 머리와 타이트한 정장, 오늘따라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는 에든이 계단을 내려오는 제드를 반겼다.

다비드가 사용하는 2층을 마음대로 오가는 제드는 언제 보아도 참 신기했다.

다비드는 에든마저 2층에 오는 것을 싫어했는데, 저 멋진 치유자는 항상 옆에 두었다. 아픈 후로 다비드가 그에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

“너도. 오늘도 웅장하다.”

다비드 때문에 고생해서 근손실이 났다며 에든은 칭얼거렸다.

팔짱도 잘 끼워지지 않을 거대한 덩치로 속상함을 토로하는 것이 잘못 들어주었다가는 또 몇 시간을 잡혀 운동 이야기만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다비드도 곧 내려 올 거다.”

“네. 다비드 님이랑 뭘 하셨습니까?”

“같이 식사했다.”

다비드가 밥을 잘 챙겨 먹는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왜… 밥 안 먹어도 되면서!’

그것도 2층 본인의 방에서 함께 먹은 것 같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왜 저러실까 정말.

진지하게 의사에게 다비드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고 물었던 에든은 말끔하게 나았다는 답을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제드는 박시한 짙은 색 바지에 무지 티셔츠를 입고 맨발에 검은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짙은 이목구비와 편안한 복장의 조화가 좋았다.

망할 놈의 흰색 옷만 고집하다 다비드가 그의 드레스룸을 싹 갈아 버린 것을 듣고는 잘됐다 싶었다.

에든은 타이트한 옷만 입는 극악한 패션을 자랑했지만 제드의 패션은 또 이해하지 못했다.

“흰옷이 다 없어졌다.”

“…잘 찾아보시면 있을 겁니다.”

“없다. 누가 다 치운 것 같다.”

제드는 밝은 옷 좀 구해 달라고 에든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옷을 내려다볼 때마다 시무룩한 그의 표정에 에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티셔츠를 문질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요동쳤다.

‘멋진 근육!’

평범한 티셔츠를 뚫고 나오는 제드의 근육은 남달랐다. 저기서 더 크게 키우면 좋을 텐데! 에든은 자신같이 괴물처럼 거대한 근육을 선호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곧 2층에서 내려오는 다비드에게 에든은 깍듯이 인사했다. 다비드는 그런 에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제드에게 눈인사를 했다.

아침 식사도 같이했다고 들었는데 왜 어울리지도 않는 눈웃음을 치실까. 에든은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

“점심도 같이 먹을까요?”

“그러지.”

제드는 둘에게 볼일이 없는지 성큼성큼 1층 방으로 향했다.

다비드는 그의 뒷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바라보다 눈치를 살피는 에든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행성 이주 스케줄 말해 봐요.”

에든은 제드를 향한 다비드의 변화에 묘한 감상이 들다가, 어제 행성 이주 프로젝트를 재개한다는 다비드의 말이 떠올라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떠나실 수 있게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1차 출발하시면 6개월 왕복이시고, 2차 사찰은….”

“일주일.”

“예?”

“1차 출발은 일주일 왕복으로 해요.”

“…잘 못 들었습니다?”

“쓸모없는 귀 떼 줄까요? 기계 귀도 성능 좋아요.”

다비드의 말에 두 번이나 멍청하게 되묻던 에든은 입을 꽉 깨물었다.

일주일이 말이 되나. 이미 사전 조사를 끝냈다지만, 이론적인 조사만 했던 행성을 둘러보기에 일주일은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 1개를 다 둘러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아시다시피 우주선은 한 번 발사될 때마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소모합니다.”

“알아요.”

“근데 일주일은….”

일주일이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이면 1지구 남반구로 휴가 갔다 돌아오는 시간 아닌가? 제 상사의 헛소리를 에든은 부정하고 싶었다.

“일주일 동안 행성 3개는 조사할게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력이지만 애초에 잡혀 있던 6개월 동안 행성 15개의 조사를 끝내는 수치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에든은 더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웃는 얼굴로 눈을 번뜩이는 다비드의 앞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1지구회 사람들과 투자자들에게는 뭐라고 하지? 기술자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다비드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그들은 에든만 갈굴 것이었다. 에든이 2미터가 넘는 근육 거구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등쌀에 떠밀려 벌써 가루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에든의 얼굴이 핼쑥해지건 말건 다비드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의 표정이 전보다 풍부해져서 에든은 나 홀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악독했다.

“그리고 신원미상자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냈습니다.”

“뭐죠?”

다비드는 제드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행성 이주 프로젝트건을 말할 때는 그다지 표정 변화가 없었는데, 제드와 관련된 말이 나오자 다비드의 푸른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처음 그가 12지구에서 발견되었을 때, 거대한 진동과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는 목격자가 있습니다.”

다비드는 에든의 말을 경청했다.

“그 시기에 12지구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발생하기는 했습니다. 로버가 불법 무기 제조 과정에서 방출된 방사능 때문에 에너지 수치가 기형적으로 나온 줄 알았다고 합니다.”

“로버 때문이 아니라 신원미상자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 에너지가 방출됐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제드 님이 1지구에서 발견되셨을 때도 비슷한 에너지와 밝은 빛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많았습니다. 그날 1지구 폴리스에 신고가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밝은 빛과 에너지라면….”

다비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화이트홀이죠?”

“그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제드 님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신원미상자가 같은 곳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럼 제드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다른 행성에서 왔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비드는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웃었다. 기쁜 건가? 화난 건가? 에든은 그 앞에서 절절맸다. 웃음이 짙어질수록 그가 무서웠다.

“제드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내일 타 행성으로 출발할 테니 준비해 줘요.”

“네!”

에든이 군기 들어간 깍듯한 인사를 하고 도망가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다비드는 고급스러운 목제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제드의 진술에서 몬스터 토벌을 나갔다가 어두운 구멍에 빠져 이곳에 왔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블랙홀에 빠졌으리라. 제드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행성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에든에게 보고받았던 100년 전 이곳에 왔던 사람과 신원미상자 또한 운 나쁘게 블랙홀에 빠진 이들일 것이다.

다른 행성의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제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주선을 통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론상으로 그를 왔던 곳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시간여행, 웜홀에 대한 연구는 위험성 때문에 중단된 지 오래되었지만, 웜홀의 통로와 좌표를 찾는 것은 비교적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순 없죠.”

어딜 가요, 제드.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에 목제 테이블 모서리가 드득거리며 뜯겨 나갔다. 다비드는 제드가 떠나는 상상만으로 기분이 나빠져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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