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의 말대로 저택에 머물며 다비드와 마주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자주 나갔고, 저택에 돌아와도 2층에서 머물고는 했다.
이따금 지진이라도 난 듯 저택이 흔들릴 때가 있었는데 다비드가 지하에서 훈련할 때 발생하는 소음이라고 했다.
“집 부서지겠군.”
제드는 그사이 굉장한 적응을 마쳤다. 태블릿과 인터넷 사용법을 터득해서 이세계 자료를 찾아다녔다.
글을 읽을 수 없었기에 로봇을 끼고 옆에서 내용을 읽게 시켰다. 모든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너무 허무맹랑해.”
인터넷에서는 이세계, 차원 이동 등 많은 내용이 토해져 나왔다. 대부분 사람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글이 많았다. 비슷한 축으로 타임머신 등의 내용도 추가적으로 훑었다.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제드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치유 능력을 검색하며 초능력, 마법, 기사 등에 대해 검색해 보았지만, 영화와 각종 가공된 콘텐츠만 쏟아져 나왔다.
제드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 말고 찌뿌둥한 몸을 풀러 헬스장으로 향했다. 에든은 체련 단련장을 헬스장이라고 불렀다.
“지루해.”
이 저택에 머무는 내내 아주 안락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보냈다.
다비드는 첫날 자그마한 상처를 치료하게 한 후 그를 찾지 않았다. 이따금 에든만이 그에게 연락해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을 뿐이었다.
제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이세계에서 온 사람들의 자료였다. 에든은 알겠다고 했지만, 그는 알아낸 것이 없는지 그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훌륭하군.”
이곳의 운동시설은 제드가 살던 곳보다 훨씬 진보되었다. 각종 기계 설비가 단련하고 싶은 부위별로 진열되었고, 중량도 많았다.
몸에 패치를 붙이면 심박수와 자극 부위, 근육 강도가 표시되었다.
제드는 러닝머신이라는 기계가 가장 좋았다. 심장이 터지고 폐가 찢어질 만큼 뜀박질하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러닝머신은 오르막길, 내리막길, 산악길 등 설정하여 뛸 수 있었고, 빠르기도 조절할 수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끼고 달리면 더 오래 달릴 수도 있었다.
제드는 땀으로 흠뻑 젖은 윗옷을 벗고 머리카락이 다 젖을 정도로 뜀박질하곤 했다. 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호흡 소리, 쿵쿵 뜀박질하는 소리만 들렸다.
운동에 집중한 나머지 헬스장에 다비드가 들어온지도 몰랐다.
“제드.”
다비드는 자신이 들어온지도 모르고 가슴을 출렁거리며 땀방울이 튈 정도로 뛰는 제드를 바라보았다.
‘땀을 흘려 본 게 언제더라.’
다비드는 땀을 흘리지도 숨이 차지도 않았기에 가끔 사람들의 생리현상에 괴리감을 느끼곤 했다.
“제드.”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자 그의 옆에 서서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제드는 다비드의 잘난 얼굴을 보고는 머신을 정지시켰다. 기계가 서서히 멈추자 제드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빵빵하게 부푼 반질반질한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하아. 그래.”
다비드는 잘 만들어진 근육을 잠깐 보았다가 곧 그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오늘 나랑 외출해요.”
그와는 몇 주 만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산뜻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제드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얕게 그어진 상처가 거슬렸다.
“다쳤는데 왜 나에게 오지 않았지?”
“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저 상처보다 얕은 상처도 치유 받았으면서. 첫날에는 정말 제드가 쓸모 있는 인간인지 시험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제드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대충 수건으로 닦고는 그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축축한 손이 가까워지자 다비드의 표정이 굳었다.
“만지지….”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제드의 손에서 일렁이는 빛이 나왔다.
따스한 감각에 다비드는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운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진짜 태양의 은은한 내리쬠 같았다.
다비드는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축축한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는 제드의 팔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손이 떨어졌다.
“다 됐다.”
제드는 깨끗한 조각상 같은 얼굴에 났던 생채기가 없어지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 좋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에 다비드는 들었던 손을 내렸다. 팔을 뽑으려면 땀범벅인 팔을 만져야 했기에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그가 만약 장갑을 끼고 있었다면 제드는 피를 쏟으며 떨어진 팔을 봐야 했을 것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살기가 득실득실했다.
‘까탈스럽긴.’
위생 개념이 흐린 세계에서 오기도 했고, 제드 자체도 그다지 깔끔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남자들끼리 지냈던 숙소에서는 땀내를 맡으며 생활하는 게 일상인지라 냄새에 대해서도 너그러웠다.
그러나 완벽한 다비드의 얼굴을 보곤 깔끔한 것이 참 잘 어울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하지.”
다비드는 할 말을 끝내곤 바로 나가 버렸다. 제드는 헬스장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귀족처럼 샤워 코롱이라는 것을 뿌리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아주 밝은 옷에 집착하는 그는 오늘도 흰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었다. 신발 또한 반짝이는 하얀 운동화였다.
인공 태양을 받아 눈이 부실 만큼 하얗게 번쩍거리며 1층으로 내려오는 그를 보자 다비드의 미간에 금이 갔다.
“흰옷을 참 좋아하시나 봐요.”
“아주 좋아한다. 잘 어울리지 않나?”
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다비드는 할 말을 잃었다. 값비싸고 세련된 옷도 매치를 거지같이 하면 저렇게 괴상하게 보이는구나 생각했다.
“어디 가는데 새까맣게 입었지?”
다비드는 그와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벨트로 허리를 조이는 검은색 가죽 상의에 검은 바지, 전투화까지 신고 있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러 가요.”
“누구?”
“제드 옷이 좀 더러워질지도 모르겠어요.”
흰옷에 더러움이 묻으면 잘 보였기 때문에 제드는 조심해서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택 앞에는 누가 봐도 엄청나게 빠를 것 같은 잘 빠진 전투기가 세워져 있었다.
“이건 전에 탔던 거랑 다르게 생겼는데?”
전투기와 이동용 플라잉카를 구분하지 못했던 그는 짙은 잿빛의 기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별로 다를 건 없어요. 좀 더 빠르고, 미사일이 나간다는 것 정도?”
미사일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제드는 또 다른 하늘을 나는 마차라고 생각하며 전투기에 올랐다.
전투기의 좌석은 단 두 개뿐이었는데, 앞뒤로 달려 있었다.
제드가 뒷좌석에 앉아 멀뚱거리자 다비드는 귀찮은 듯 그의 몸에 여러 개의 벨트를 착용했다.
“왜 묶지?”
“질문이 너무 많네요? 몸 고정하는 거니까 가만있어요. 생각보다 더 빠르거든요.”
“기분이 안 좋군.”
어깨, 복부, 허벅지를 단단히 고정하고 귀와 눈을 덮는 헬멧까지 씌우자 갑갑했다. 두꺼운 호스가 연결된 마스크까지 쓰자 영락없이 묶인 사람이었다.
앞 좌석에 앉은 다비드도 그와 같이 안전 장비를 착용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는 어깨를 고정하는 벨트만 차고는 전투기의 헤드를 닫고 바로 이륙 준비를 했다.
“넌 왜 안 묶지? 모자도 안 쓰고.”
“저는 괜찮아요. 모자가 아니라 헬멧이에요.”
제드는 답답하게 몸을 죄는 벨트와 헬멧, 호흡기를 벗어 버리고 싶었다. 다비드를 보니 착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전투기가 쏘아져 나가자 제드는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시트에 푹 파묻혀 속도의 무서움을 경험했다. 산소호흡기가 없었다면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앞을 보니 다비드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전투기를 조종하고 있었다.
창에 비친 그의 얼굴이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짓누르는 무형의 무게에 제드의 몸은 멀미하는 것도 잊었다.
고통의 시간이 잠시 흐르고, 전투기는 허공에 멈춰 섰다.
“쓸모없이 기절한 거 아니죠?”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드는 골이 핑글핑글 돌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항속거리가 짧아서 여기에 세우고 가야 해요.”
전투기는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뚜껑이 열리자 제드는 몸을 죄이는 벨트를 풀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밟았다.
땅이란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전투기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싶었지만, 흰옷을 입을 것을 자각하고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제드가 힘들어하거나 말거나 다비드는 조종석 아래에서 기계 슈트를 꺼내 어깨에 걸쳤다. 상반신과 팔, 어깨까지 둘러지는 메탈 소재의 슈트는 다비드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는 우주 전쟁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주연 같아 보였다. 온통 검은 옷에, 짙은 기계 슈트까지 걸친 그는 창백한 피부와 밝은 금발만이 유독 돋보였다.
기계 슈트의 팔에는 8가지 기관총과 레이저 건이 장착되어 있었고, 등에는 지상에서 최대 11m까지 점프할 수 있는 출력장치가, 어깨에서는 스위치만 누르면 소형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전투에 특화된 기계 슈트는 200kg이 넘는 무게였다. 그것을 걸친 다비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다.
“속 안 좋아요? 뛸 수 있어요?”
“아직 머리가 띵한 것 같다.”
“저런, 그래도 달려요.”
배려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는 거냐, 하는 눈빛으로 기계 슈트를 점검하는 다비드를 흘겼다.
제드는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1구역과는 사뭇 다른 거주지가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
“10지구요.”
1지구와는 다르게 이곳은 해가 잘 들지 않는 듯 우중충했다. 거리는 온통 부서지고 보수조차 되지 않은 듯 지저분했다.
건물도 낙후되었고, 낡아 보였다. 1지구에서 흔히 보이던 청소 로봇도 없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스산했다.
공기조차도 먼지가 가득해 숨을 쉴 때마다 기관지가 답답해졌다.
“1지구와 많이 다르군.”
“시체가 나뒹구는 13지구보다는 나아요.”
그 말에 제드는 작게 탄식했다. 제드가 살던 세계에서도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시체가 나뒹굴지는 않았다. 마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드가 운이 좋아 1지구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가 아님에도 13개로 나누어진 지구는 각 구역으로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고, 특권층만이 1지구부터 3지구에서 고귀하게 살 수 있었다.
다비드는 지구의 어디든 아무런 제약 없이 다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오늘처럼 전투기를 이용해 단번에 1지구에서 다른 지구로 이동하고는 했다.
“갈까요?”
“그 반가운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건가?”
“맞아요. 이제 잡으러 가 봐요.”
잡는다고? 제드가 물으려 했지만, 무거워 보이는 슈트를 걸친 다비드는 가벼운 걸음으로 더러운 거리를 앞장서서 걸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불도 켜지 않은 건물의 창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지상에서 가까운 층의 창문은 금속판을 땜질해 모두 막아 놓은 곳도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왜 우릴 쳐다보지?”
“여긴 로버들이 자주 다녀서 경계하는 거예요. 오늘은 캐롤이 다녀가서 구걸하러 나오진 않네요.”
“여긴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곳인가?”
“뭐, 누군가 하겠죠?”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한 가벼운 말투가 제드의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어릴 적 제드가 살던 동네도 이처럼 지저분하고, 인정도 미래도 없었다.
운 좋게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제드 또한 이들처럼 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들의 처지를 알았고, 운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형편이 좋지 않은 이들을 돕고는 했다.
다비드는 높은 건물이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어깨에 장착된 소형 미사일을 건물에 쏘았다.
푸른 불길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자 먼지와 돌덩이가 날아왔다. 제드는 머리를 보호하며 몸을 숙였다.
“뭐 하는 짓이냐!”
“반가운 쥐새끼가 자살 테러하기 전에 먼저 하는 거예요.”
테러하기 전에 먼저 테러한다. 똑똑한 또라이 같은 말이었다. 긴 다리로 부서진 건물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그는 해사한 미소를 짓고는 미사일과 총을 쏴 댔다.
건물 안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비드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드는 그 미친 짓을 모래바람을 막은 손가락 사이로 쳐다보았다.
건물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고,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나와 도망쳤다. 일반적인 시력으로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겠지만, 다비드는 가능했다.
건물 하나가 무너지자 주변에 있던 것들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재수 없으면 죽는다. 제드는 커다란 돌 뒤로 몸을 숨겼다.
“정말 귀찮게 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는 다르게 다비드는 꽤 즐거워 보였다.
짧은 시간 동안 건물 세 개가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더러운 거리는 한층 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드는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콜록, 콜록!”
먼지가 서서히 걷히자 제드는 겁도 없이 다비드가 뛰어올랐던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옷이며 머리며 먼지로 온통 더러워졌다. 하얗던 옷은 백 번 빨아도 원래의 색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다가서니 다비드가 어느 앳된 청년을 위협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 항복할게요!”
청년은 뒤로 넘어진 상태에서 다비드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얼굴, 낡고 해진 옷, 반쯤 부서진 허접한 기계 슈트를 걸친 모습이 위협적이지 않았다. 두 팔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싸울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그의 앳된 모습에 제드는 신입 부대원이 생각나 다비드를 말리려 했다.
-퍽
웃는 낯으로 다비드는 청년의 한쪽 다리에 총알을 박았다.
“아아악!”
시끄러운 비명이 귀를 때리자 제드의 인상이 깊어졌다.
“시끄러워요. 입 안에 칼집을 내기 전에 조용히 해 주겠어요?”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차근차근 말하는 다비드를 보더니 청년은 비명을 참으며 파들거렸다.
청년이 눈을 질끈 감더니 손에 있는 어떤 버튼을 누르자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제드는 눈 뜬 상태에서 상대가 사라지자 헛숨을 들이켰다.
다비드가 가소로운 표정으로 청년이 사라진 허공에 몇 번 더 총질해 대자, 청년이 피를 토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제드, 떨어진 신체도 붙일 수 있어요?”
“빨리 붙이면 되긴 한다만….”
다비드의 물음에 무심코 대답한 제드는 입을 다물었다. 다비드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제드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답에 제드는 웃으며 슈트에 장착된 레이저건을 꺼내 청년의 팔을 썰었다.
순간 단면이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썰린 팔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쳤다.
청년은 기계 슈트와 함께 팔 한쪽이 떨어지는 것을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솟구치는 피와 함께 고통이 느껴지자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 팔은 안 붙여도 될 것 같아요. 숨만 붙여 놔요.”
다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 내용만큼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말하면서 청년의 다른 팔도 마저 썰었다.
“캐롤은 투명화를 할 수 있어요. 아주 거슬리는 기술이죠.”
“그만해!”
“방금 자살 테러하려던 놈인걸요.”
캐롤은 과거에도 몇 번씩 이런 식으로 다비드를 유인하고는 했다.
10지구나 11지구에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내고는 사라진다. 다비드가 나타나면 비교적 앳된 부하를 남겨 두고 그를 공격하거나, 자폭시키는 등 가소로운 방법이었다.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다.”
“저 쥐새끼가 죽으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 거예요.”
사람을 썰어 대고는 제드에게 살리라고 협박하는 꼴이었다. ‘맡은 일은 잘해야죠?’ 하는 눈치를 주자 제드가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떨어진 두 팔을 주워 들고 그에게 다가서도 그는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패닉에 빠진 듯 소리만 질렀다.
“가만있어라.”
“아악! 내, 내 팔!”
제드는 근무하면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내장을 훤히 내보인 부상자를 많이 맡았다. 그가 침착하게 청년의 곁에 다가서자 다비드는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
‘나사 빠진 인간은 아니었네.’
하얗던 옷이 더러움과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얼굴도 머리카락도 먼지로 지저분했다. 청년의 떨어진 두 팔을 들고 무릎을 굽혀 그의 상태를 살피는 얼굴이 진지했다.
제드가 치유하려는 줄 모르는 청년은 계속해서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가만있어야 붙일 수 있다. 과다출혈로 죽고 싶지 않으면….”
“정말 시끄럽네요.”
제드의 말을 끊고 다비드가 청년의 옆구리에 총을 한 발 더 발사했다.
“으아악!”
“그만해라!”
자비 없는 다비드를 무서워하지 않고 제드는 박력 넘치게 소리쳤다.
고통에 소리치는 청년을 보며 좋아하던 다비드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고는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제드는 청년의 두 팔을 절단부에 대고는 능력을 방출했다. 팔이 이상하게 붙을까 각도를 잘 조절해야 했다. 피로 인해 절단된 부위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버둥거리던 청년은 몸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빛에 고통이 둔감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포에 질려 다비드를 보던 시선을 제드에게로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분수처럼 피를 쏟던 팔의 절단부가 얼기설기 엉성하게 아물어 갔다. 총알이 박혔던 곳은 상처를 남겨 두고 지혈되었다.
금색으로 일렁이는 제드는 신성해 보였고, 청년은 고통도 잊고 입을 벌리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놀랍네요.”
다비드는 순수하게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가히 신이 내린 능력으로 보였다. 어떠한 장비 없이 맨몸으로 중상 입은 사람을 치유하는 제드는 신비로웠다. 한참 동안 금빛 능력을 청년의 몸에 퍼붓던 제드가 말했다.
“너무 많이 다쳤어.”
“이제 끝난 건가요?”
“상처가 깊어서 힘을 다 썼다. 쉬고 다시 치유해야 돼.”
제드는 단시간에 녹초가 되었다. 일렁이던 금빛이 잠잠해지고 그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훔쳤다. 몸이 텅 비는 느낌에 현기증이 일었다.
청년은 얕게 피가 배어 나오는 제 팔을 살폈다. 다시 붙은 팔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끝에 미약하게 감각이 느껴졌다.
“히이익!”
얼떨떨한 얼굴로 제드와 제 몸을 살피다, 다비드와 눈이 마주친 청년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공포와 고통이 버무려진 그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나한테 할 말 있죠?”
“그런 거 없어요.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어요!”
“시킨다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자살 테러를 하려고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네요.”
자살 테러를 테러로 막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쓸 만한 정보가 있길 바랄게요.”
그래야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곱게 접힌 다비드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비드가 청년의 머리를 발로 차 기절시켰다. 옆에서 한쪽 다리를 꿇어앉아 있던 제드가 눈을 홉떴다.
“방금 치료한 사람한테 무슨 짓이냐.”
“이러면 안 돼요?”
“대충 붙여 놓은 거라서 안정해야 해.”
“안 붙여도 됐는데. 그냥 지혈만 하지 그랬어요.”
다비드는 제드가 생긴 것답지 않게 인정이 많다고 생각했고, 제드는 그가 생긴 것답지 않게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부대에서도 가끔 있었다. 도덕심과 죄책감이 결여된 인간들. 몬스터를 토벌하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들의 성향은 눈에 띄곤 했다.
태어날 때부터 성향이 그 모양이었는지, 몇 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가 죽어 가는 것을 보다 종국에는 감정이 마모되어 그렇게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적을 죽이며 희열을 느끼는 부류였다.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같은 먼지 구덩이에 있었는데 그는 깨끗했다. 제드와 청년은 몇 달은 노숙하고 피 웅덩이로 샤워를 한 것처럼 더러웠다.
“정말 추레하네요.”
“….”
앞으로 다비드와 외출할 일이 생긴다면 절대 밝은 옷을 입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제드는 가자미눈을 하고 그를 흘겼다.
“아는 자인가?”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보자마자 총알을 박고 팔부터 잘라 버려서 무슨 원한이 있나 싶었는데, 그는 이 기절한 청년과 초면인 것 같았다.
부대에서 치유자로 굴러먹기를 십수 년, 그는 깨우친 것이 있었다.
이런 부류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죽어도 알지 못했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사람을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즐기지 말라는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무시하거나 대충 맞춰 주는 게 상책이다.
다비드는 제드에게 외출을 말했던 표정 그대로 산뜻하게, 기계 슈트에서 얇고 질긴 금속 줄을 꺼내더니 청년의 목에 걸었다.
제드는 그가 하는 것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그째로 청년을 질질 끌고 가자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아픈 사람을 여기에 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그것도 몰라요?’ 다비드가 상큼하게 되물었다. 힘을 다 털어 죽어 가는 청년을 겨우 치유한 마당에 그가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끌고 가다간 목이 잘린다.”
그렇다고 힘없는 몸으로 청년을 들쳐 업을 수 없었다. 다비드는 더러운 그를 만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드는 청년의 목에 걸린 줄을 풀어 그나마 다치지 않은 쪽 다리에 감았다.
“됐다.”
이 울퉁불퉁한 거리를 걸어 전투기까지 도착할 때까지 청년의 몸은 거리에 쓸려 걸레짝이 되고, 다리가 빠지겠지만 제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200kg이 넘는 슈트를 입고, 70kg이 넘는 청년을 끌고 가는 다비드는 힘든 기색이 없었다. 돌덩이에 청년의 머리가 찧어도 그는 막힘없이 앞으로 나갔다.
뒤를 따르는 제드는 자신들의 모습이 귀족 하나와 거지 둘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전투기 앞에 도착했을 때 청년은 역시나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기절한 것이 그에게는 다행인 셈이었다.
“음, 들어갈 곳이 없네요.”
2인용 전투기에는 청년이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너덜너덜해진 청년을 구기다시피 운전석 아래로 접어 넣었다.
다비드가 입고 있던 슈트까지 쑤셔 넣자 운전석 아래는 꾹꾹 눌러 싼 도시락 같아 보였다.
제드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힘을 많이 소진한 듯 얼굴색이 파리했다. 꼬질꼬질한 얼굴 사이로 보이는 눈이 퀭했다.
“힘들어요?”
“아니다.”
“힘을 많이 쓴 건가 보죠?”
“이 정도는 쉽다!”
제드는 자신의 능력이 굉장히 대단하며, 아무나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기운을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다비드도 그의 능력을 두 눈으로 보아 인정하는 바였지만, 퀭한 눈을 부라리며 우기는 모습은 썩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요. 타세요.”
헬멧을 건네고 다비드는 운전석에 앉아 그가 벨트와 호흡기를 착용하는 것을 기다리며 운전석 아래 있는 청년으로 발장난을 쳤다.
다리 아래에 슈트와 청년이 구겨진 것을 발로 꾹꾹 눌러 밟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제드는 뒷좌석에 앉아 벨트를 착용했다.
“호흡기는 안 해요?”
“괜찮다.”
호흡기는 숨 쉬는 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얼굴과 목이 눌려 그만큼 답답하기도 했다. 제드는 몸에 힘이 쭉 빠져 빨리 집에 가서 더러운 몸을 씻고 한숨 자고 싶었다.
그의 말에 다비드는 전투기를 가동했다. 허공에 천천히 뜨던 전투기는 어느 순간 앞으로 튀어 나가듯 상공을 갈랐다.
다비드는 발로 청년과 슈트가 움직이지 못하게 꾹 눌러 밟고 있다가 청년이 벌레처럼 꿈틀거리자 기분 나쁜 듯 발을 떼어 버렸다.
“으어억!”
발을 떼자마자 청년은 종잇장처럼 날아가 제드의 뒤, 전투기 벽에 딱 붙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엄청난 속력에 벨트로 몸을 고정하지 않은 청년은 엄청난 압박감을 감당해야 했다.
“속, 도 좀, 줄, 여라.”
“전투기에 그런 게 어딨어요.”
있다. 감속 기능이 없는 전투기는 없었다. 다비드는 압박감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제드의 귀신같은 속삭임을 무시했다.
“우웨엑!”
어지러움과 속이 뒤틀리는 감각에 제드는 결국 장렬히 구토를 했다. 호흡기를 착용했더라면 구역질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토한 다음이었다.
구토물 또한 속력 때문에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청년은 잠시 깨어난 의식 속에서 토사물을 맞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비드는 난리가 난 내부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전투기를 조종했다. 만약 토사물이 조금이라도 그의 몸에 튀었다면 제드는 뼈도 못 추렸겠지만, 다행히도 구토물은 모두 걸레짝이 된 청년이 맞았다.
* * *
제드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에 내려섰다. 깨끗한 거리와 화창한 하늘, 맑은 공기. 착륙이라는 것이 이토록 감격스러운 것임을 처음 알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땅이 헤어진 애인이라도 되는 양 애절하게 더듬거렸다.
누렇고 시커메진 옷과 신발, 먼지 쌓인 머리카락, 검댕 묻은 얼굴. 딱 거지꼴이다.
피가 굳어 가는 옷에 튄 토사물까지 완벽하게 제드를 구차하게끔 만들었다. 원래 하얀 옷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행색이다.
“제드, 정말 거지 같아요.”
친절한 말투에 열 받는 말만 골라 해 대는 그가 정말 얄미웠다. 올려다본 다비드는 순수하게 정말 거지 같아서 감탄한 표정이었다. 제드는 땅을 더듬거리던 손을 거두었다.
다비드는 가벼운 조깅을 마친 사람처럼 산뜻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 같은 보송한 얼굴을 퀭한 몰골로 바라보자 그는 더럽다는 듯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비드가 저택 문을 열자 정원을 청소하던 작고 동글거리는 로봇들이 뽈뽈 기어 나왔다. 전투기 속 토사물에 범벅된 청년을 빼내어 이송하고 그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죽겠군….”
제드가 비척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청소 로봇이 따라왔다.
뒤돌아보니 제드가 걸을 때마다 검은 발자국이 남아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청소 로봇은 제 할 일을 하며 부지런하게 제드의 발자국을 지워 댔다.
“더럽혀서 미안하다.”
에든이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말했지만,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없는 세계에서 온 제드는 그 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뽀작거리며 돌아다니는 로봇을 말 잘 듣는 몬스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드가 서서 말하자 가까이 다가온 로봇의 얼굴에 웃는 얼굴 모양의 이모티콘 홀로그램이 떴다. 이모티콘을 모르는 제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롱하지 마라.”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경고했지만, 로봇은 무시하고 웃는 얼굴로 청소하기 시작했다. 제 발끝에서 콩콩대며 청소하는 모습이 하찮았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좁쌀 같은 놈.’이라고 중얼거리며 제드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다비드는 방으로 들어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오늘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네요.”
오랜만에 마주한 에든은 운동 후 씻고 나오는 제드를 향해 장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옷을 뚫고 나오는 잔뜩 펌핑된 제드의 근육을 보더니 갑자기 가슴을 부풀리고 팔뚝을 움찔거리며 제 근육을 뽐냈다.
“찔러 보시겠습니까?”
“싫다.”
‘왜 이 자는 항상 작은 옷을 입는 거지.’
돈이 부족해서 작은 옷만 입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든은 항상 몸에 피트되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근육이 부각되는 정장을 고집했다.
“아이삭스 씨도 제 근육이 멋지다고 생각하시죠?”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그의 옷을 바라보고 있자 에든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다비드는 어디 있지?”
그와 함께 10지구에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다. 충분히 힘을 충전했으니 다시 청년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비드 님께선 바쁘셔서요….”
에든은 근육을 뽐내다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려 대답했다. 속이 좋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데려온 남자의 치료가 덜 끝났다.”
“아, 들었습니다! 잘린 팔을 붙이셨다고요!”
대단하다는 듯한 그의 반응에 제드의 고개가 빳빳해졌다.
“나에겐 별것 아니지.”
“능력이건 근육이건 정말 출중하십니다!”
에든은 1지구의 실세라고 불리는 다비드 밑에서 일하는 유능한 비서인 만큼 사탕발림을 몹시 잘했다.
에든의 쉴 새 없는 칭찬에 더 이상 고개가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제드가 기세등등해지자 에든은 그가 생각보다 순진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상이 심하니 다시 치료해야 해. 그대로 두면 팔이 다시 떨어질 거야.”
“아마… 두 분은 지금 지하에 계실 겁니다.”
일을 마치고 에든과 함께 저택에 돌아온 다비드는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아마 며칠 전 잡은 캐롤의 말단으로 보이는 청년을 가지고 놀고 있을 것이다.
에든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얼굴 맞대고 일하는 상사가 사람을 가지고 고문을 해 대는 것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완벽한 외관과는 다르게 다비드는 취미라는 게 없다. 인생의 낙이 로버 고문인 사람인 것 같았다.
“같이 내려가지. 상처가 심해서 못 움직일 거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택에는 치료 머신과 재생수가 모두 구비되어 있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든은 다비드가 그 청년을 무슨 꼴로 만들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빠르게 말했다.
제드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상사를 이해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 꼴을 본다면 누구도 다비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알겠다. 내가 전에 부탁한 정보는?”
“차원 이동을 한 사람들 말이십니까? 찾은 게 있습니다. 좀 더 확실해지면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래.”
에든과 제드가 식사를 하기 위해 1층 거실로 나오자 다비드가 지하층에서 올라와 있었다. 그는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볼일 끝나셨습니까?”
“네, 그럭저럭이요.”
“식사 전이시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다비드는 대부분 혼자 식사했기 때문에 에든은 그가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예의상 물은 질문에 다비드는 예상외의 대답을 했다.
“그럴까요?”
“아, 역시 혼자 드시는… 예?”
“같이 먹어요.”
에든은 다비드가 뭘 먹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한 영양제를 물과 함께 섭취하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그는 대체로 혼자 식사했다.
다비드와 함께 식사라니, 차라리 로버들과 길바닥에서 밥 먹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가만 서 있던 안드로이드가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인가?’
저택에서 안드로이드를 처음 보는 제드는 그를 주시했다. 이 저택에서 인간은 제드, 다비드, 에든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봇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드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듯한 에든은 그의 생각이 맞는다는 듯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 제드의 턱을 조금 넘는 키와 얄상한 몸. 느슨하면서도 팔목과 발목에 딱 맞는 단조로운 옷은 안드로이드의 존재감을 지웠다.
안드로이드는 제드가 가끔 마주치던 성직자 같은 느낌이었다. 존재감이 없고, 세속과 단절된 삶을 살던 그들.
“이건 몬스터라고 보기에도 어렵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생명은 없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감히 이런 존재를 만든 이세계의 사람들이 제드는 크게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용감이 거의 없는 식당은 반짝반짝했다. 헤링본 바닥재와 어두운 톤의 벽지, 철제 수납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열댓 명이 앉아도 될 만큼 커다란 목제 식탁에 앉자 안드로이드가 알약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 두고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건 왜 먹는 거지.”
“여기엔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에든은 4살 아이가 물어볼 법한 제드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것만 먹고 살 수도 있나?”
다비드는 알약을 들고 있는 제드를 향해 말했다.
“삐쩍 마르고 싶다면 그래도 돼요.”
“마르길 바라는 사람도 있나.”
몸을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제드는 자신의 건강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마르면 안 되지.’ 하며 물도 없이 약을 꿀떡 삼켰다.
곧바로 안드로이드가 각양각색의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스위치만 누르면 단시간에 코스 요리를 조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어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식탁이 풍성해졌다.
“이거 정말 맛있습니다.”
에든은 혼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아 다비드에게 말을 걸었다. 다비드가 정말로 식사를 하고 있어 신기하기도 했다.
“괜찮네요.”
곧은 자세로 스테이크를 썰고 입에 넣어 씹어 삼키는 것이 색달랐다.
‘정말 잘생기셨구나.’
화보 같은 모습에 에든은 제 괴물 같은 상사가 새삼 잘생겨 보였다.
‘근데 밥을 안 먹어도 되지 않나?’
에든은 표정 변화 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는 다비드를 보며 생각하다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눈을 깔았다.
‘너무 궁금해하지 말자….’
빨리 밥 먹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옆에서 허겁지겁 식사하는 제드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 듯 그는 우걱우걱 음식을 먹었다.
“배고프셨습니까? 잘 드십니다.”
제드는 에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스테이크를 크게 잘라 우물거렸다.
‘정말 복스럽게 먹네.’
어릴 적 굶은 기억이 많은 탓에 제드는 식사할 때만큼은 전투적으로 임했다.
식사 예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허겁지겁 먹는 제드와 곧은 자세로 그를 지켜보는 다비드. 흔들리는 눈빛의 에든은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음료로 목을 축이며 천천히 식사하던 다비드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드 덕에 살려서 잡아 올 수 있었어요.”
아마 며칠 전 청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제드는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성의 없는 대꾸에 에든은 나이프가 제드의 미간에 꽂히지 않기를 바랐다.
다비드는 정말 기분이 좋은 것인지 제드에게 관대했다.
다비드의 말대로 제드가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청년을 보는 순간 그를 조각조각 내서 가지고 놀다 죽여 버렸을 수도 있었다.
“더 치료해야 한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럴 것 같지는 않군.”
다비드가 그를 어떻게 썰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본 제드였다. 청년은 절대 잘 지내고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악의 가득한 다비드를 보고도 제드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가.”
“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죽이고, 장기를 팔고, 아이들을 착취하는지 알면 치료해 주고 싶지도 않을걸요?”
그 말에 제드는 인상을 썼다. 치유자들의 딜레마였다. 범법자, 살인자들도 치료해 주어야 하는가의 문제. 이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제드는 한결같이 생각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요? 그럼 제드는 그가 당신 가족을 죽였다고 해도 치료해 줄 수 있어요?”
“그런 상황을 겪어 보진 않았지만, 죽고 싶을 만큼 몰아붙이다가 치유해 주길 반복하겠지.”
“그건 마음에 드네요.”
다비드의 눈이 휘었다. 제드가 봤다면 전처럼 넋을 놓고 보았겠지만, 그는 지금 눈앞에 놓인 음식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건 무슨 고기지? 맛있군.”
“소 배양육입니다.”
옆에서 숨 막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에든이 대답했다. 제드가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계속된다면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다비드가 나이프를 던질 것 같아 불안했다.
“배양육?”
“네, 동물을 도축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듭니다.”
“만든 고기라고? 이게? 연성하는 건가?”
“아닙니다. 동물의 세포를 배양해서 만드는 겁니다. 축산업은 환경오염과 위생 문제로 금지된 지 오래입니다.”
제드는 세포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질문만 해 대는 것 같아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기는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맛과 질감이 너무 진짜 같았다.
하지만 가짜라고 말하니 부드럽던 고기가 갑자기 질겅거릴 정도로 거슬렸다.
그가 약간 표정을 굳히며 먹는 속도가 느려지자 에든은 잘됐다는 듯 안도했다. 다비드의 미소가 진해질수록 우걱대는 제드의 생명이 위험했다.
제드의 반응은 처음 배양육을 보급했을 때의 보통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프랑켄 고기라며 배양육을 먹는 것을 꺼렸다.
처음 배양육을 목도한 그들의 반응에 비하면 제드는 꿋꿋이 먹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게걸스럽게 먹지는 않았다.
“다음에 캐롤이 나타나면 제드랑 같이 나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요원들도 준비하겠습니다.”
“일 못 하는 것들은 거슬릴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해요. 휩쓸려서 죽으면 재수 없는 거죠.”
다비드는 식사하는 것을 멈추고 아예 턱을 괸 채 제드가 먹는 것을 봤다.
표정은 분명 꺼림칙해 보이는데 입은 쉴 새 없이 고기를 씹고 있었다. 다비드는 아마 그가 잘 못 먹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제드는 왕국을 위해 일하며 나름대로 대접도 잘 받았고, 잘 먹고, 몸도 키우며 살았지만 다비드의 눈에는 먹을 것에 환장한 비렁뱅이처럼 보였다.
“전투하는 데 아이삭스 씨가 가신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슈트 사용법을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치면 바로 치료하면 되잖아요?”
“내 몸은 치유 못 한다.”
다비드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 두고 치유만 시키려고 했는데 제드가 다쳐 죽으면 데리고 온 쓸모가 사라진다.
“그럼 정말 위험합니다. 훈련소에서 한 달은 단련하셔야….”
“그 전에 캐롤이 나타나면 또 눈 뜨고 놓치라고요? 농담하는 거죠?”
제드를 바라보던 눈이 에든에게로 향하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바라보는 눈에서 광기가 번들거렸다.
다비드보다 몸이 두 배는 두꺼운 그는 심리적으로 아주 작은 사람이 된 듯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집에 가고 싶다.’
에든은 강렬하게 생각했다.
“제드는 내가 가르칠게요. 방어 슈트 입혀 놓으면 되겠죠.”
“직접 말씀입니까?”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죠? 제드?”
“나는 뭐든 잘 배운다!”
제드는 다비드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칠 수 있었다.
다비드는 누구를 가르쳐 본 적 없었다. 얼마나 사람을 악독하게 굴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근데 캐롤이 뭐지?”
“로버 중에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버들은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다고 했다. 그중 가장 악질이라면 듣지 않아도 얼마나 핵폐기물급 쓰레기인지 짐작이 갔다.
“며칠 전 잡아 온 쥐새끼가 투명화 쓴 것 봤죠?”
“신기한 능력을 썼었지.”
“아주 골치 아픈 기술이죠. 캐롤만의 기술이에요. 레이더에도 안 잡혀서 아직까지 나한테 안 죽었어요.”
만약 그들이 투명화를 쓰지 못했다면 이미 다비드의 손에 전멸했을 터였다.
“그럼 오늘부터 슈트 사용법 알려 줄게요.”
“알겠다.”
에든은 그 말에 밥을 먹고 부리나케 이 저택에서 사라질 것을 다짐했다. 제 몸을 치유해 줄 제드를 다비드가 죽이지는 않겠지만, 혹시 거슬리게 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에든은 제드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운동 이야기를 심도 깊게 나누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물론 에든 혼자 떠든 것이었지만, 어쨌든 제드는 꽤나 좋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시체를 치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비드는 식기를 놓았고, 제드도 웬만큼 배가 찼는지 식사를 그만두었다.
다비드와 식당에 들어오면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에든은 식사가 끝나자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다.
“돈을 조금 주나?”
“네?”
“왜 에든은 항상 작은 옷을 입지?”
저택 밖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제드가 다비드에게 물었다. 다비드는 무슨 소리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뜻을 이해하고는 팔짱을 낀 채로 허리를 살짝 숙여 몸을 들썩였다.
그가 웃을 때마다 금발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항상 소리 없이 눈만 휘며 웃을 때는 야릇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웃으니 또 청순했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또 넋 놓고 그가 큭큭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치열이 좋다. 웃으니까 확 어려 보인다. 근데 얘 몇 살이지? 하는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좋아서 입는 거예요. 세상에. 설마 내가 옷 살 돈도 안 주고 부려 먹는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에든의 연봉은 무지막지했다. 그가 입는 터질 듯한 괴상한 정장은 누군가의 월급만큼 비쌌다.
다비드는 산뜻하게 물었지만, 제드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입을 찢어 놓으리라 생각했다.
“고약한 취향이군.”
자신의 패션 센스는 생각도 못 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다비드는 한동안 큭큭거렸다.
* * *
제드는 처음으로 지하에 내려와서, 기둥 없이 탁 트인 내부에 슈트와 각종 무기가 진열된 것을 보고 놀랐다.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하나도 알 수 없는 회로와 거대한 모니터가 있었고, 재생수가 담긴 캡슐과 기계 수술 장치 등 값비싸고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기계 슈트는 상반신용, 전신용으로 나뉘어 먼지 하나 없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다비드가 착용했던 것도 한쪽에 있었다.
제드가 호기심에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캡슐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는 어린아이가 들어갈 만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구경하는 그를 두고 다비드는 전신용 하얀색 기계 슈트를 한 손에 들고 제드에게 다가왔다.
“흰색이군! 마음에 든다!”
그는 자신이 쓸 슈트의 색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강박증 있는 사람처럼 밝은색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오늘 입은 옷도 아이보리색 셔츠에 통 넓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비드는 호기심을 보이는 제드를 무시하고 그의 몸에 슈트를 걸치고 착용시켰다. 생각해 보니 전에 전투기에서 벨트도 손수 채워 주고 이제는 슈트까지 착용시키고 있었다.
평생 제 손으로 누군가의 수발 비슷한 것을 들어 본 적 없는 다비드는 조금 짜증이 나 슈트의 가슴 여밈세 부분을 꽉 조였다. 제드의 가슴골이 모이더니 빵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숨 막힌다.”
다비드의 생각보다 제드의 가슴은 더 컸다. 여밈세를 채우자 부풀어 오른 제드의 부드럽고 봉긋한 가슴이 손등에 닿았다. 그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촉에 다비드는 신경질이 났다.
“젖통이 에든만 하네요.”
저 예쁜 입에서 상스러운 단어가 흘러나오자 제드는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잠시 의문이었다. 그리고 에든만 하다니. 누가 들어도 욕이 아닌가?
그가 정신을 차리고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다비드가 슈트에서 손을 뗐다.
묵직한 슈트가 제드의 몸을 짓눌렀다. 분명 다비드가 한 손으로 가볍게 들던 것이다.
“…생각보다 무겁군.”
“엄살 부리지 마세요. 제 슈트는 3배는 더 무거워요.”
“그래. 엄살이다. 하나도 안 무겁다.”
제드는 무거운 슈트가 하나도 무겁지 않다는 듯 표정 관리했지만, 슬슬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목이 후들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비드에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드가 입은 슈트는 초보자가 입기에 다소 무거운 편이었다. 처음 착용했을 때 뒤로 발라당 나자빠지는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제드는 잘 버티는 편이었다.
다비드는 이 사실을 그에게 굳이 알려 주며 다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손에 남은 그의 가슴 감촉이 은근하게 따라붙어 불쾌했다.
“익숙해지도록 서른 바퀴만 돌까요?”
제드는 너른 지하의 단련실과 산뜻하게 웃는 다비드를 번갈아 보았다.
“제자리에서 도는 걸 말하는 건가?”
“하하. 정말 재미없어요”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말한 다비드는 가뿐하게 테이블에 놓인 상자를 들고는 지하에 딸린 방으로 사라졌다.
지하에 처음 내려왔을 때는 탁 트여서 시원해 보였는데, 다시 보니 심각하게 넓었다. 이 무거운 슈트를 지고 서른 바퀴를 돌면 기절할 것 같았다.
제드는 부대에 처음 들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훈련하던 것을 상기하며 이를 악물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 * *
“허억. 허억.”
지하에는 제드의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숨소리와 목에서 피 끓는 소리가 섞여 시끄럽게 목을 긁었다.
제드는 제 귀에 들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 때문에 옆에 다비드가 다가온지도 몰랐다.
“다 돌았어요?”
“허억, 다, 허억,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마지막 바퀴를 채 돌지 못하고 드러누워 정확히 29.8바퀴를 돌았지만 반올림하면 서른 바퀴가 맞았다.
다비드는 뜀박질을 시켜 놓았지만, 그가 정말 다 돌 줄은 몰랐다. 처음 슈트를 입고 서른 바퀴를 뛰는 것은 꽤 힘들었을 텐데.
다비드는 땀에 푹 젖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 성격에 꼼수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뛰었다.
다비드는 아까 들고 사라졌던 상자보다 더 작은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제드는 숨을 한참 몰아쉬더니 그가 다시 뜀박질을 시킬까 봐 말을 걸었다.
“왜 캐롤을 잡으려는 거지?”
“아주 나쁜 놈들이니까요.”
“나를 옆에 두면서까지 잡을 필요가 있나? 폴리스나 다른 사람들을 부리면 되지 않나.”
제드는 이곳 사람이 아닌지라 왜 다비드가 그렇게 캐롤과 로버를 싫어하는지 몰랐다. 다비드는 지구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을 말했다.
“나는 어릴 때 그들에게 납치당했었어요.”
그 말에 제드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비드가 말한 강도, 살인하는 이들에게 직접 납치당했다면 그들을 혐오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대중들이 아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 다비드 폴머는 어릴 적 납치당했고, 두 달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폴머 가문은 다비드를 구출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액을 쏟아부었고, 캐롤은 다비드의 몸값을 받고 그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대중들은 다비드 폴머가 얼마나 만신창이로 돌아왔는지는 몰랐다. 다비드는 신체의 모든 기관이 망가져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몸에는 팔다리는 물론 대부분의 장기가 없었고, 눈, 코, 입, 귀마저 없었다. 그나마 뇌가 많이 남아 있어 다비드를 살릴 수 있었다. 살린다기보다는 뇌와 남아 있는 신체에 기계를 덧붙였다.
다비드는 몸의 70% 이상이 기계였고, 사람보다는 사이보그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천사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다비드가 얼굴이 뭉그러져 사지를 잃고 보따리 인형처럼 돌아오자 그의 가족들은 고통과 분노, 슬픔에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내가 직접 잡아야 해요.”
가족들이 아무리 격분해도, 다비드의 분노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다비드는 몇십 년이 지나도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십여 년 동안 이식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며 점점 미쳐 갔다.
흉측했던 외모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기계 몸과 부작용으로 더 이상 현대 의료가 통하지 않는 체질이 되었다.
의료 기계가 통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부작용이었다. 수백 번 들어갔던 수술 기계와 재생수는 그의 몸을 더 이상 치료하지 못했다.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부분은 죽은 것 같았다. 의사가 아무리 좋은 약을 발라 주어도 정말 더디게 치유되었다.
기계인 부분은 교체가 가능했지만, 몸에 남은 인간의 부분과의 조화가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썩어 들어갔다.
상처가 잘 낫지 않는 몸이 되었기에 다비드는 로버와 캐롤과 싸울 때 몸을 사려야만 했다.
특히 투명화가 가능한 캐롤이 나타났을 때는 더욱더 사려야 했다.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비드 앞에 제드가 똑 하고 나타났다. 다비드는 그가 기꺼웠다.
“납치당했을 때 캐롤이 내 장기를 거의 팔았어요. 사지를 다 잘라 놔서 몸 대부분이 기계고요.”
신체의 일부분을 기계로 대체하는 경우는 상류층에서는 흔했다. 패션 때문에 몸을 개조하지는 않았고, 사고로 인체를 소실한 사람들이 막대한 금액을 주고 기계를 달았다. 물론 다비드처럼 인체의 70% 이상을 기계로 대체한 이는 없었다.
상류층이 아닌 사람 중 가끔 인체 개조를 불법적으로 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몸이 썩는 부작용을 흔하게 겪었다.
“나는 수술 부작용이 있어서 치료를 받아도 몸이 낫질 않아요. 그래서 제드의 치유 능력이 필요해요.”
피부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세포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든 피부이기는 하지만 다비드에게 이식하면 수술 기계와 재생수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불행을 생글거리며 말하는 다비드의 눈은 미친 사람 같았다. 이미 미쳐 있는 사람이 캐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사는 것일지도 몰랐다.
“열심히… 돕겠다.”
“반가운 소리네요.”
제드는 몸에서 나던 열기가 다비드의 말을 듣고 싸늘하게 식은 것을 느꼈다. 그의 고통과 감정이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 이건 비밀이에요.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면 죽을 줄 알아요?”
다비드는 죽여 버린다는 말을 무슨 농담처럼 해 댔다.
“알았다.”
“오늘은 이만해요. 다리 후들거려서 일어날 수 있어요?”
“일어날 수 있다!”
당장은 못 일어나겠지만 5분만 더 앉아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제드는 앉아서 무거운 슈트를 벗기 위해 꿈지럭댔다.
“한 번만 알려 줄 테니까 외워요.”
다비드는 그의 옆에 주저앉아 슈트 벗는 법을 알려 주었다. 팔, 가슴, 다리에 있는 죄임세와 스위치를 어떻게 누르는지를 알려 주자 제드는 열심히 머리에 새겨 넣었다.
그가 슈트를 벗고 바닥에 들러붙을 것 같은 몸을 일으켜 1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다비드가 들고 나왔던 작은 상자가 움직였다.
“저건 뭐지?”
“볼래요?”
다비드가 또 위험하게 웃었다. 눈을 휘며 입을 길게 옆으로 찢으며 웃었는데, 아름답지만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제드는 다비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 그를 피해야 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 보겠다.”
“궁금하지 않아요? 안에 뭐가 있을지.”
다비드가 방으로 사라지기 전에는 저 상자보다 컸다. 방에서 나오니 상자가 작아졌다. 아이 하나 들어갈 것 같은 저 움직이는 작은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제드는 며칠 전 자신이 치유해 준 청년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하며 다비드를 애써 무시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다비드는 그 후 매일 지하에서 뜀박질시켰다. 첫날보다 돌아야 할 바퀴 수는 점점 늘었고 슈트도 점점 무거워졌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 하는 훈련이므로 제드는 군소리 없이 다비드의 말을 따랐다. 보호 슈트를 사용하는 법도 간간이 배웠다. 공격형 슈트보다 사용법이 간단했기에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몸이 고되니 밥도 잘 먹고, 잘 잤다. 그렇게 몸을 단련하며 캐롤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때, 에든이 저택에 찾아왔다.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죽을 줄 알았나?”
에든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죽거나, 어디가 크게 다쳤을 줄 알았는데 건강했다. 역시나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좋은 소식 가져왔습니다.”
“차원 이동에 대해 찾은 건가?”
“네, 가짜 자료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제드 또한 검색해서 알아낸 정보 중 거의 모든 것이 가짜였기에 에든의 말이 이해 갔다.
에든은 얇은 펜 같은 것을 꺼내더니 가장자리를 두 번 터치하자 홀로그램 종이가 차르륵 펼쳐졌다.
“오오!”
제드는 태블릿을 처음 봤을 때처럼 펜처럼 얇고 가는 것을 빼앗아 들고 위아래로 살펴보고 햇빛에 비춰 보고 탈탈 털어 보고 난리를 부렸다.
그 원시인 같은 행동을 에든은 조금 짠하게 바라보다 제드의 손에 들린 홀로그램 종이를 툭툭 치며 설명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푸른빛을 발하던 종이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더니 2명의 사람이 3D 형상으로 구현됐다.
“오오!”
‘오오’를 연발하는 제드는 조금 모자라 보이기까지 했다. 에든은 형상 속의 사람을 설명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제논 파디스. 다른 사계에서 왔다고 주장했고 자신을 대장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아이삭스 씨와 마찬가지로 통역 기계가 아닌 뇌파 기계를 삽입해야 하는 말을 알아들었고, 파이디테논이란 곳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곳이군.”
“그렇습니까?”
“이 자는 언제 이곳에 왔지?”
“60년 전입니다.”
“지금은 죽었겠군.”
“행방불명입니다. 운 나쁘게도 9지구에서 발견되어 폴리스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D 형상 속 그는 키가 땅딸막하고 풍채가 좋았다. 대장장이라는 그의 말처럼 어깨와 팔이 두꺼워 보였고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에든은 옆에 있는 다른 형상을 가리키고 설명을 계속했다.
“이 사람은 이름이 안 쓰여 있습니다. 그냥 ‘신원미상’이라고 적혀 있고, 굉장히 사나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별로 건진 게 없군.”
“손에서 작은 불꽃이 나와 불을 피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능력자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자는 12지구에서 발견되었고 2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12지구라면 치안이 굉장히 안 좋은 동네라고 했다.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능력자라면 어쩌면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희망이 들었다.
아니면 비교적 가까운 시간에 이곳에 떨어진 그의 발자취를 수소문하면 그가 원래 세계로 돌아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논 파디스라는 사람은 죽었을 테니 제외하고 2년 전 행방불명되었다는 사람을 더 조사해 주었으면 한다.”
“제논 파디스는 왜 죽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60년 전 사람이면 죽었을 게 뻔하지.”
“이곳에서 노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지?”
3D 형상 속 그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100세는 되었을 것이었다.
“사람이 백 살까지 살다니. 듣도 보도 못 했군.”
“1지구의 평균 수명이 200세까지인 것을 아십니까?”
“뭐…?”
제드가 온 세계에서 남성의 평균 수명은 60대였다. 위생, 의술 등 여러 방면에서 지구에 비해 그 수준이 떨어져 수명이 길지 않았다.
“물론 1지구를 제외하면 평균 수명이 낮습니다. 11지구부터 13지구는 30대입니다.”
이곳에서는 결국 수명도 빈익빈 부익부를 따라간다는 것이었다. 제드는 혀를 찼다.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치료와 보살핌을 받았다면 말이다.
“그럼 둘 다 더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다.”
“네. 이 둘 말고도 다른 사례가 있는지도 더 알아보겠습니다.”
에든이 가방을 챙겨 나가려 하다 테이블에 멀뚱히 앉아 있는 제드를 돌아봤다.
근육이 가득 차서 징그러워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내려다보자 제드의 목이 꺾였다.
저 몸으로 그가 제드의 세계에 간다면 잘나가는 용병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글을 읽지도 못하고, 기계를 잘 다루지도 못하니 그는 훈련하거나 정원을 구경하거나 멀뚱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괜찮다.”
제드는 무료한 감이 있었지만, 매일 바쁘게 살다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야성미 넘치는 얼굴과 멋진 몸. 에든은 남자답게 생겨서는 순한 그가 다른 세계에 똑 떨어져 있는 것이 안쓰러웠다. 다비드와 함께 사는 것이 특히나 안타까웠다.
제드가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것에 비해 멀쩡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 둘이 잘 맞는 것도 같았다.
“제가 방송 보는 법 알려드리겠습니다.”
에든이 홀로그램 영상기를 켜자 벽면에 화면이 떴다.
“이걸 누르시면 뉴스를 보실 수 있고, 저건 재미로 보는 방송이고, 이건….”
에든은 성인방송을 설명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제드가 온 세상에는 이런 자극적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처음 포르노를 보고 얼마나 큰 충격에 빠졌었는지 떠올렸다. 자위하면 근손실 난다는 우스갯소리를 믿는 에든은 조용히 성인방송을 숨김 표시했다.
“뉴스를 보시면 그래도 이곳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에든은 심심풀이로 좋다며 설명을 마치고 방에서 나갔다.
제드가 어색한 손짓으로 뉴스를 켜자 여러 매체가 한 화면에 떴다.
“다비드?”
가장 첫 번째 영상에서는 큼지막한 다비드의 얼굴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클릭하자 다비드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크고 웅장한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찍은 영상이었다.
-오늘 아침 다비드 폴머가 드디어 행성 이주 프로젝트를 실행했습니다. 1지구회는 성명을 통해 ‘이번 프로젝트는 항공 우주 산업의 큰 발전에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비드 폴머는 직접 우주선을 타고 행성 간 순찰을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우주탐험은 핵폭발 이후 처음으로, 우주과학자들은 인류가 우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의 기자에게도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 화면에는 많은 사람이 다비드를 촬영하려 난리가 나 보였다.
얼마나 좋은 카메라를 사용했는지 멀리서 촬영한 영상은 그의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해도 하나도 깨지지 않았다.
화면에서도 그의 외모는 굉장했다. 화면이 왕 커서 더 굉장한 것 같았다.
제드는 못 알아듣는 말이 반 이상이라 로봇을 호출했다.
“행성 이주 프로젝트가 뭐지?”
“핵전쟁 이후 파괴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인간이 이주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약 100여 개의 행성 중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찾는 것이 1단계, 인류가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2단계,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 3단계입니다. 현재 1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드는 로봇의 설명을 거의 못 알아들었다. 뉴스, 오락프로를 뒤져 봐도 온통 다비드의 얼굴뿐이다.
“심각한 오염으로 지구는 약 421년 뒤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행성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다비드 폴머! 그의 업적.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다비드 폴머.
-다비드 비운의 과거! 폴머 가의 미스터리.
이곳의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제드는 여러 가지 화면 중 다비드의 얼굴 뒤에 화려한 꽃 효과를 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다비드 폴머.’를 클릭했다.
-이 얼굴! 저희 채널의 놀라운 정보원 말에 의하면 다비드의 옷 아래 감춰져 있는 그의 몸은 더 대단하다고 합니다!
남녀가 다비드의 얼굴을 큰 화면에 띄워 놓고 그 앞에 서서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에이미, 제가 죽은 건가요? 왜 천사가 저기 있죠?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정말 다비드만 보면 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요. 다비드 날 가져요!
-다비드를 실제로 볼 기적적인 일이 우리 평생 있을까요?
-그날은 우리가 죽는 날이 될 거예요! 눈이 멀어서!
화면 속 다비드의 얼굴이 확대되자 둘은 미모에 눈이 멀어 버릴 것 같다고 눈을 가리며 깔깔 웃어 댔다. 제드의 생각보다 다비드는 더 유명인사인 것 같았다.
-그가 섹시한 이유는 성격에도 있어요.
-그럼요. 그는 친절해 보이지만 난폭한 성정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합니다.
-모든 인터뷰를 개무시하는 것만 봐도 그래요.
-하하. 진정해요. 그가 로버를 처치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살인을 너무 즐긴다는 의견도 많아요.
-로버는 죽어도 싸요. 그는 핫 섹시하게 그들을 살육한다고요. 누구도 그를 욕하게 두지 않을 거예요!
-인성 문제도 있습니다. 다비드의 부하직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기밀 서약을 하므로 그에 대해 발설할 수 없어요. ERC 매체에 다비드와 함께 일을 했다는 사람의 글이 잠깐 올라왔다가 지워진 적이 있었죠.
-그걸 믿어요?
-음, 나는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 글에는 다비드가 로버를 가지고 놀며 11지구 현장에 있는 동료가 로버를 놓치자 웃으면서 귀를 잘랐다고 했어요. 수술 기계와 재생수를 써서 말끔하게 고쳐 놓았지만! 비인간적이잖아요!
-그건 루머에 지나지 않아요.
-사실일지 아무도 모르죠. 그는 인성 문제가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어요.
-얼굴이 이러면 인성에 문제 있어도 되지 않아요?
-그건 맞아요. 얼굴이 이런데 인성 좀 파탄 날 수도 있죠! 하하!
다비드를 처음 본 날 자신도 넋을 뺐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한 것 같았다. 제드는 그들이 다비드를 보며 흥분된다는 몸짓을 할 때마다 보기 껄끄러워져서 화면을 껐다.
제드는 몸을 풀며 매일 갔던 지하로 향했다. 저택에 처음 왔을 때, 지하와 2층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제 지하는 제드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좋은 장소가 되었다.
제드는 지하에서 슈트를 구경했다. 다비드가 기계 슈트를 입고 단련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그는 마치 가벼운 옷을 걸친 듯 부드럽고 가볍게 움직였기에 제드는 자신이 입는 하얀색 기계 슈트보다 그가 입는 슈트가 더 가벼운 줄 알았다.
“윽!”
다비드의 슈트를 집어 들자 자존심 상하게도 돌덩이 같은 것이 조금 들릴 뿐이었다.
제드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두 손으로 슈트를 다시 들어 올렸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팔근육이 잔뜩 울그락거릴 만큼 힘을 써야 겨우 들렸다.
“이걸 입고 어떻게 서 있지?
“못 서 있을 정도는 아니라서요.”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슈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발등이 찍혔으면 뼈가 산산이 조각났으리라.
제드는 그가 이 슈트를 한 손으로 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거운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목에서 나는 끙끙 소리를 참고는 제자리에 걸어 두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제드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누가 봐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비드는 제드가 자신의 몸이 대부분 기계라 힘이 세다는 것을 알 텐데도 저렇게 센 척하는 것이 웃겼다.
“오늘도 훈련하려고 내려왔어요?”
“그래.”
하루 정도는 쉬어도 별말 하지 않을 텐데, 제드는 매일같이 성실하게 내려와 슈트를 입고 뜀박질을 하고 작동법을 익혔다.
‘바보 같을 만큼 우직한 타입.’
다비드는 그를 그렇게 정의했다.
제드는 방송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다비드 폴머가 제 앞에 있는 것이 새삼 신기한 느낌이었다.
“왜 돌아가려고 해요?”
다비드가 뜬금없이 물었다. 에든이 제드에게 했던 말은 다비드도 알고 있었다.
제드와 비슷한 사례의 사람을 두 명이나 찾았다. 그는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무슨 소리지?”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 말에 제드가 움찔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방송에서 칭송하던 잘생긴 얼굴로 말하니 그럴듯했다.
“난 이곳에서 이방인일 뿐이다.”
“신분은 만들면 되죠. 가족이나 배우자 때문에 돌아가려고요?”
제드는 배우자는커녕 연애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여동생 하나였고, 그녀는 제드가 일 때문에 숙소에서 생활하다 가끔 집에 들어갈 때면 미친 듯이 갈궈 댔다.
여동생은 애인이 자주 바뀌었고, 제드는 연애를 잘하는 그녀가 조금 부러웠다. 그녀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대단했기에 자신이 없어도 잘 살 것 같았다.
다만, 제드가 부대에서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누명을 썼을 경우 여동생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녀 성격에 억울하게 누명을 쓸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선 부유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요. 캐롤과 상대할 때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주 가끔이고.”
다비드는 제드의 능력이 필요했다. 저 희귀한 능력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모르니 억지로 옆에 감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상으로 회유하는 것이었다.
접촉하면 알아서 낫는 구조였다면 그의 신체를 훼손한 뒤 도망가지 못하게 하면 됐을 텐데 참으로 번거롭다고 생각했다.
“캐롤을 전멸시키면 보상도 충분히 해 줄게요.”
다비드가 말을 할 때마다 제드의 눈이 흔들거리고 귀가 팔랑댔다.
“평생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 보상할 수 있어요.”
완벽한 얼굴로 살살 웃으며 말하는 것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마치 악마 같았다.
그가 사기꾼이었다면 나라를 팔아먹을 수도 있겠다고 제드는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제안은 고맙다. 생각해 보지.”
다비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캐롤을 잡을 때까지는 그가 돌아갈 방법을 찾게 두지 말아야겠다.
어느 날 이곳에 떨어진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할 수 없지만, 다비드는 그가 제 발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이나 정신질환도 고칠 수 있어요?”
“아니, 몸에 난 상처만 된다.”
“아쉽네요.”
“그건 왜 묻지?”
다비드는 지하실 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그 상자를 보는 순간 제드는 인상을 썼다. 그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다비드가 상자를 열었을 때, 제드는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상자 안에는 캐롤의 청년이 물기 없는 모습으로 둘둘 말려져 있었다. 멍하니 눈이 풀린 모습과 뒤틀린 몸뚱이가 섬뜩했다. 그의 코에 연결된 기계 장치가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방송에서 떠들던 그의 인성 문제가 머리에 스쳤다. 이걸 인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원하는 바가 있다고 해도, 저주해 마지않는 상대라 해도 해사하게 웃으며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 바람직할까.
제드가 살던 곳에서도 구타나 고문을 행하여 자백을 받는 방식을 썼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냥 죽여라.”
“안 돼요. 캐롤이잖아요. 숨은 붙어 있는데 머리가 망가져서 쓸모가 없게 됐어요.”
제드는 다비드가 살인범이라도 치유해 줄 것인지 물었을 때, 제드는 고문하고 치유하기를 반복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꼴을 직접 눈으로 보니 참담하고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었다.
기계 장치에 연결되어 바짝 마른 몸을 꿈지럭거리는 청년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지 눈동자가 조금 하얀 빛을 띠었다.
상자는 정상적인 사람의 무게라고 하기에는 몹시도 가벼웠다. 마치 청년은 껍데기만 남은 듯 보였다.
“이러는 게 즐겁나?”
“즐거운 건가? 잘 모르겠어요. 납치당했을 때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이 청년의 정신보다 네 정신을 고치는 게 더 시급한 것 같다.”
얼굴에 대고 이처럼 막말을 내뱉는 사람은 다비드가 납치되고 난 후로 처음이었다.
다비드가 재활할 때는 모두가 뒤에서 수군거렸고, 몸이 기계로 대체되고 로버를 죽이고 다니기 시작할 때는 다들 앞에서는 칭찬을 하고는 뒤에서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수군거렸다.
다비드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건방지게 굴지 말아요. 지금도 봐주고 있는 거니까.”
제드는 비로소 다비드가 웃을 때 왜 에든이 좌불안석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부류였다.
지금도 그는 제드를 죽일지 말지 가늠하는 듯 보였다. 눈에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한데, 필요에 의해 죽이지 못하는 게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다비드는 제드의 손에 들린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그럼 이건 버려야겠어요.”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는 투로 말하던 그가 상자를 건네받아 뒤돌아 지하실에서 올라갔다.
“자신이 당했던 일을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청년은 다비드보다 어려 보였다. 다비드가 어릴 적 겪었던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을 것인데, 같은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로 그는 저 짓을 저질렀다.
옮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비드는 아름다운 외관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더 속이 다 썩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단면을 아주 조금 엿본 것 같은 기분에 제드는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이곳에서 제드가 할 것은 별로 없었고 그가 말한다고 다비드가 들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는 요새 한창 입었던 기계 슈트를 들어 착용했다.
“제드!”
그다지 기분 좋아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상자를 들고 사라졌던 다비드가 계단 위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캐롤이 나타났대요.”
* * *
대비하고 있었기에 캐롤의 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제드는 토벌전에 나갈 때의 긴장감과 비슷한 것이 다리와 목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죽고 죽이는 현장에 가는 것은 언제나 심장을 뛰게 했다. 묵직한 고동은 즐거움에 비롯한 것이 아닌 걱정과 불안함, 조금의 죄책감과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무거운 표정의 제드와는 다르게 다비드는 싱글벙글 소풍 나가는 사람 같았다.
“이번엔 정말 다 죽여 버릴 수 있어요.”
캐롤이 나타나도 전면전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제드가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선에서는 치유가 됐기에 그는 재활에 성공했을 때 이후로 가장 크게 기쁨을 느꼈다.
“예전에는 사형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만들었다고 해요. 그전에는 화형이나 교수형을 집행했고.”
들뜬 다비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이 많았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동족을 죽일지 잘 아는 부류가 아닐까요?”
가뿐하게 전투기를 조종하며 그는 무시무시한 말을 지껄여 댔다. 제드는 속력과 중력에 따라가지 못하고 짓눌린 몸뚱이로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의 흉악범은 모두 ‘13지구 밖 배출’로 통일되었다. 10지구부터 13지구는 할렘가였기에 폴리스가 잡아 사형하지 않아도 그들은 30대 언저리쯤에 그들끼리 싸우다 죽거나 다비드의 손에 죽었다.
1지구부터 3지구까지는 범죄가 거의 없었고, 4지구부터 9지구까지에는 흉악범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13지구 밖 배출’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다.
“지금의 사형은 너무 인도적이에요.”
13지구 밖으로 배출되면 방사능과 다량의 먼지 때문에 사람은 몇 분 생존할 수 없었다. 옛날 사형 방식보다 더 빠른 죽음이었다. 인도적인 사형은 없겠지만, 다비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제드, 한쪽 눈이 기계인 사람을 보면 날 불러요.”
온몸이 짓눌리는 감각에 제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다비드는 흥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대장이에요.”
그는 다비드를 납치한 캐롤 중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이었다.
“빨리 난자하고 싶어요.”
가장 잔인하게 죽이고 싶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다비드의 입이 해괴하게 찢어질 듯 올라갔다.
전투기 KAI가 상공을 번개보다 빠르게 질주했다. 13지구에 도착하자 인공 태양의 빛은 희미해졌다. 대기오염이 심한 듯 투명한 전투기의 앞은 온통 컴컴했다.
강렬한 랜딩 라이트를 내리쬐며 착륙한 땅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고, 1지구에서 보던 나무 조형물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쓰레기와 건물, 항공기의 잔해들로 가득 찬 곳에는 고장 난 로봇과 더러운 뼈들이 굴러다녔다.
제드는 전투기 문이 열리자마자 콧속으로 들어오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부대에서 맡았던 남자들의 땀 찌든 냄새보다 더 지독했다.
오물과 기름이 뒤섞인 악취는 타르처럼 기관지에 들러붙는 듯했다.
“여긴 완전히 버려진 곳이군. 정부는 왜 이곳을 방치하지?”
“캐롤이 이 구역을 잡고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쓰레기를 청소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배부른 것을 더 좋아해요.”
1지구회는 13지구를 구제하는 데 돈을 쓰지 않고, 행성 이주에 돈을 퍼부었다. 행성 이주에 필요한 금액의 만분의 1의 금액만 투자했다면 13지구가 이 정도로 방치되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제드는 이세계나 자신의 세계나 신분제가 존재하는 것에 메스꺼움을 느꼈다.
하얀색 전신 기계 슈트를 착용하자 헬멧이 얼굴을 덮었다. 외부 공기가 차단되자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콧속에 남은 악취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토가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다비드 또한 전신을 감는 메탈 슈트를 착용했다. 그가 말을 하자 제드는 슈트 안에 장착된 출력장치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드, 내 옆에 붙어 있어요. 내가 다치면 달려와서 구해 줘야 해요?
다비드의 달달한 음성이 슈트 안을 가득 채우자 제드는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자신을 구해 달라는 말이 재밌다는 듯 웃음기 서린 목소리였다.
-알겠다. 구해 주지.
그 말에 다비드는 납치되었을 당시 애타게 찾던 부모님, 친구, 선생님을 떠올렸다. 제 몸이 분해되는 두 달 동안 아무도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핵전쟁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미미해졌기에 다비드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을 신을 찾기도 했다.
‘살려 주세요. 죽여 주세요. 너무 괴로워요.’
어릴 적 빌고 빌었던 미지의 존재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귀와 눈알, 혀가 제거되어 들리지도, 보이지도,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비드는 속으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제발 살려 달라고, 괴로우니 죽여 달라고. 그러나 자신을 구원해 준 존재는 없었다.
청각과 시각이 사라지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보따리 인형이 되어 여기저기 쓸려 다녔다.
미세하게 시력을 찾았을 때 자신이 1지구에 돌아온 것을 알았다.
기쁨과 안도감보다는 분노와 허무함이 차올랐고,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래도 부모님이 곁에 있다는 자각을 하자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그들이 곧 죽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비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다비드는 제드의 구해 준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군.
-캐롤의 전투기가 위에 떠 있어요. 투명화 때문에 안 보이지만, 소리를 들으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올려다본 검은 하늘은 쓸쓸하고 불길하기만 했다. 그러나 다비드의 말대로 기체가 웅웅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형태 없는 소리는 불길함을 증폭시켰다.
다비드는 웃으며 어깨에서 소형미사일을 꺼내고는 연달아 발사했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미사일은 보이지 않는 것에 맞더니 크게 폭발했다.
오염이 심각한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흙먼지가 일었다.
-쿵!
허공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거대한 기체가 깜빡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항공기나 전투기라고 보기에는 쓰레기성 같은 모습이었다.
고철과 톱니바퀴, 항공기 파편으로 더럽게 만들어진 캐롤의 전투기는 위에 달린 여러 개의 기둥으로 새까만 증기를 뿜어 댔다.
-무지막지하군.
지나치게 커다란 캐롤의 전투기를 보고 제드는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것은 다비드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고 살짝 기우는가 싶더니 무식하게 큰 항공 폭탄과 소형로켓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다비드는 제드를 발로 차고는 곧바로 기체로 돌진했다.
‘더럽게 아파!’
다비드가 발로 찬 덕분에 제드는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다. 미사일이 크게 폭발하며 세상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냈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는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구멍 난 기체에서는 캐롤로 보이는 로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더럽고 조잡한 기계 슈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제드와 다비드가 입은 것처럼 온몸을 감싸 주는 최신식이 아니라 버려진 기계로 만들어 살을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그들은 눈알이 없어 누더기 안대를 차거나, 앞니가 빠진, 성치 않은 누런 이를 드러내곤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어딜 가는 거냐!
다비드는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말했지만, 홀로 캐롤 사이로 들어가 레이저로 그들을 토막 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범상치 않은 그를 보고 투명화를 시작했다.
-젠장, 다비드!
제드가 불러도 그는 캐롤을 난도질하고, 투명화한 상대를 찾으려는지 허공에 소형미사일을 난사했다.
제드는 다비드에게 달려가다 그가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공격해 대자 계속해서 소리만 칠 수밖에 없었다.
무형의 손이 제드의 팔을 잡고 꺾었다. 제드가 당황한 것도 잠시, 제 팔에 닿은 손을 잡고 세게 내려치자 투명화했던 캐롤의 모습이 드러났다.
부대에서 일하며 몬스터 토벌을 했던 짬으로 제드는 주저 없이 상대의 목을 비틀었다. 캐롤의 잔당으로 보이는 더러운 사내는 목뼈가 부러지자 흰자를 보이며 죽었다.
-진정하고 같이 가자.
제드가 한 명을 처치하는 사이, 다비드는 전투기에서 쏟아져 나온 캐롤의 대부분을 학살하고 구멍 난 기체 사이로 뜀박질해 들어가고 있었다. 저만 쏙 빼고 가는 것이 다비드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했다.
기계 슈트를 걸쳐 둔해진 몸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다비드의 슈트보다 3배는 가볍다고 해도 제드에게는 너무 무거웠다. 제드는 타고나기를 기골이 크고 힘이 좋았지만 수십 킬로그램을 몸에 두르고 달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더럽게 무겁군.
-비실비실하네요. 단련 좀 하세요.
애타게 부를 때는 답하지 않더니 혼자 중얼거리는 말에는 대답하는 꼴이 재수 없다.
제드가 구멍 난 기체에 매달려 안으로 들어오자, 외부만큼이나 더러운 내부가 보였다.
굵은 전선이 나뒹구는 내부는 때가 끼지 않은 곳이 없었고, 폭발로 인해 여기저기서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다비드가 죽인 캐롤들은 몸이 분리되어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 눈이 없거나 코가 없거나 몸의 일부가 기계였다. 다치고 아물고를 반복한 몸은 썩어 가는 것처럼 시커멓고 고름 냄새를 풍겼다.
쓰러진 캐롤을 따라가면 다비드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제드는 시체 길을 따라 걸었다.
-어디 있지?
-위로 올라와요.
귓가에 들리는 다비드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흥분감이 깃들어 있었다.
제드는 어지러운 전선들 사이의 사다리와 간이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섰다. 기체가 크게 흔들리자 벽에 몸을 부딪쳤다.
-대장을 잡으면 동력장치를 부술 거니까 잘 탈출해요.
-난 왜 데려온 거냐!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데려온 거라지만 이렇게나 제멋대로 행동하다니. 제드가 속했던 능력자 부대였다면 영창감이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네요?
들려오는 칭찬 아닌 칭찬에 제드가 중얼댔다.
-네가 내 부하였다면 벌써 영창 보냈다.
제드의 말에 다비드가 낮게 웃었다. 약 오르는 상황이었지만 귀에 울리는 다비드는 웃음은 듣기 좋았다.
‘비웃는 소리도 듣기 좋군.’
재수 없다. 제드는 생각하며 열심히 그를 쫓았다. 다비드는 쉼 없이 학살을 저지르는지 위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캐롤의 시체가 늘었고, 기체에는 구멍이 뻥 뚫려 외부의 먼지가 들어왔다.
캐롤의 전투기가 한쪽으로 점점 기우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살피던 제드의 눈에 움직이는 사람이 잡혔다.
큰 몸집에 육중한 기계 슈트. 흰머리가 섞인 남성은 죽어 있는 자신의 부하를 보며 분노하고 있었다.
악독해 보이는 깊게 팬 표정 주름 사이로 그의 한쪽 눈이 징그러운 기계인 것이 보였다.
그의 한쪽 얼굴은 기계와 융화가 잘못된 듯 푸른빛을 발하는 눈알 주변의 피부가 울긋불긋 화상을 입은 듯했다.
-네가 말한 대장이란 녀석, 여기 있는 것 같군.
-자극하지 말고 숨어 있어요.
-이미 눈 마주쳤다.
다비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욕설이 나왔지만 흉흉한 안광으로 자신에게 돌진하는 대장이라는 녀석의 맹렬한 기세 때문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평균 수명이 30대에 머무는 13구역에서 흰머리가 희끗희끗할 때까지 살아남은 그는 역시나 범상치 않았다.
“개 같은 오뚜기 새끼!”
그는 슈트로 얼굴까지 감싼 제드를 다비드라고 착각하곤 달려들었다. 그의 기계 슈트는 무식하게 컸고, 제대로 맞으면 바로 기절할 것 같았다.
제드가 그의 주먹을 피하자 머리통만 한 주먹이 벽에 박혔다. 고철로 만들어진 벽은 깡통 구겨지듯 구멍 났다.
“네 놈 새끼를 살려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의 슈트에서 수십 개의 총구가 열리더니 제드를 향해 마구잡이로 총알을 발사했다.
제드의 방어 슈트는 대부분 그것을 막아 냈지만, 같은 곳에 총알이 맞자 깨지기 시작했다.
-제드, 아직 살아 있어요?
제드는 그를 피해 간신히 도망가는 중이라 대답하지 못했다.
덩치 큰 캐롤의 대장은 무거워 보이는 슈트를 입었음에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괜히 대장이 아닌 것 같았다.
-죽었나 봐. 아깝네.
-살아 있다!
다비드의 무심한 말에 제드가 소리쳤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또다시 낄낄댔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드는 덩치를 피하기도 바쁜데 귀에서는 다비드의 웃음소리가 들리니 열 받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제드는 그에게 다리를 잡혔다. 거꾸로 들린 제드의 시야에 더러운 가랑이가 들어왔다.
그는 상반신 기계 슈트만 입고 있어 아래는 인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거뭇한 바지는 밑단이 다 해져서 털이 북슬북슬하고 두꺼운 종아리를 내보였다. 드러난 맨발은 굳은살과 수포로 가득했고 발톱은 모두 두껍고 까맣게 썩어 있었다.
-더러운 가랑이 치워라!
-저요?
다비드가 물었지만 제드는 기계 슈트를 입은 단단한 팔로 그의 가랑이를 내리쳤다.
“으아아악!”
얼굴의 반은 기계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랫도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무언가 터진 듯 그는 제드를 팽개치고 자신의 가랑이를 잡고는 소리 질렀다.
게거품을 문 그는 열이 잔뜩 올라 넘어진 제드의 얼굴을 내리쳤다. 슈트의 헬멧이 깨지더니 제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뚜기가 아니잖아? 씨발 새끼 죽여 버리겠어!”
기계 부분을 제외하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자 노인에 가까운 그는 귀신처럼 보였다.
개털 같은 떡 진 흰머리가 제드의 얼굴에 닿을 듯 내려왔다. 얼굴에 흐르는 때가 섞인 더러운 개기름이 그의 주름을 더욱 부각했다.
그는 낭심이 아픈 듯 아직도 한 손으로 가랑이를 붙잡고 있었고, 화가 잔뜩 올라 씨익씨익거렸다.
“터진 건가? 안타깝군.”
제드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같은 남자로서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다.
제드의 말에 내려 보던 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눈썹이 들리고 이마에 주름이 진하게 졌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얼굴을 구긴 그는 다시 한번 제드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재빨리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어깨 쪽 방어 슈트가 뜯겨 나갔다.
“윽!”
“이 개애새끼!”
된소리가 가래와 함께 끓어올랐다. 그의 밑에 깔린 제드는 양팔을 들어 올려 매서운 주먹질을 막았지만, 슈트가 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뜯긴 슈트 사이로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푹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주먹질이 멎자 제드는 올렸던 두 팔 틈 사이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굳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인의 상반신 기계 슈트 사이로 피가 뚝뚝 흘렀다.
“제드, 아직도 살아 있어요?”
노인의 얼굴 뒤편으로 헬멧을 벗은 다비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피로 물들어 가는 상체를 손으로 더듬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다비드의 빛나는 얼굴을 핏줄 터진 눈으로 지켜봤다.
“이 오뚜기 새끼!”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다비드가 어릴 적, 노인이 아직 중년일 적. 그는 다비드의 사지를 자르고는 오뚜기라고 부르며 발로 차고 일으키기를 반복했다.
다비드는 눈이 도려내지기 전까지 그가 자신을 보며 새까만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는 예쁘게 생긴 다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몇 주를 괴롭히더니 얼굴을 망가뜨리고, 어린 다비드의 내장을 빼내어 내다 팔았다.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다비드는 노인의 등에 꽂았던 쇠 파이프를 빼냈다. 기계 슈트를 뚫고 꽂혔던 쇠파이프가 빠지자 뻥 뚫린 환부에서 짙은 붉은색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다비드를 향해 슈트의 총구를 열었다. 눈앞에서 공격을 당하는 데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다비드!”
제드의 외침과 동시에 수십 발의 총알이 튀었다. 다비드는 몸을 숙이고는 옆으로 굴렀다. 구멍 난 바닥에서는 어마어마한 증기와 스파크가 튀었다.
노인은 피 흘리는 몸으로 제대로 조준하기 힘든 것인지 몸을 휘청휘청하며 사방을 돌았다. 제드가 총알을 몇 번 빗맞자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제드, 도망가요.
부서진 헬멧에서는 다비드의 음성이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송신 상태가 좋지 않아 목소리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제드는 도망갈 수 없었다. 자신의 세계에 있을 때도 치유자가 도망가면 앞에서 공격하던 능력자가 죽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개소리하는군. 난 안 간다.
다비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노인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내부에서 폭발이 심한 미사일을 꺼내는 것부터 같이 죽자는 심보였다.
제드가 서 있던 바닥이 아래로 추락했다. 위에서 떨어진 잔해를 피해 머리를 막던 제드는 온몸에 가해진 충격에 일어서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몸이 안 움직여.’
이명과 함께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저기 긁혀 피가 나고, 노인에게 맞은 어깨는 탈골되었는지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몸을 짓누르는 슈트가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위층에서는 다비드와 노인이 계속해서 무언가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고, 캐롤의 전투기는 곧 아래로 추락할 듯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제드가 바닥에 누워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소란을 들은 캐롤 몇 명이 서둘러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제드를 보고도 처리하기는커녕 도망가기 바쁜 그들 사이에서 어떤 이가 다가왔다. 제드는 공격을 받는다는 생각에 잔해들을 해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섰다.
다가온 캐롤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의 더러운 얼굴은 피곤과 가난에 절어 있었고 건강하지 못한 듯 볼이 움푹 패어 있었다.
그의 손에서 불씨가 생성되자 제드가 소리쳤다.
“신원미상자!”
그는 에든이 보여 준 이세계인 중 신원미상자임이 분명했다. 뇌파 기계를 삽입하지 않은 그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모국어에 일순간 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곧 눈을 부릅떴다.
“너, 너!”
“난 다마치스 왕국의….”
제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캐롤의 전투기가 아래로 추락했다. 제드와 그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장에 몸을 처박히고는 함께 추락하기 시작했다.
신원미상자는 2년 동안 개고생 끝에 자신의 세계에서 온 듯한 제드와 만났다. 그와 함께 이 개 같은 세계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장에 붙은 채로 제드에게 기어가 벽면에 거대한 화염을 발사했다.
“으아악!”
제드를 꽉 잡고 반대로 화염을 발사하자 힘의 반동으로 둘은 캐롤의 기체에 생긴 구멍에서 퉁겨져 나왔다.
밖으로 퉁겨져 나와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떨어진 제드는 데굴데굴 굴렀다. 신원미상자는 제드보다 더 멀리 튕겨 나간 것인지 자욱한 먼지 속에서 찾을 수 없었다.
방어 슈트가 아니었다면 제드의 몸은 산산이 조각났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찢긴 이마에서 타고 흐른 피는 눈을 적시고 턱까지 내려왔다. 피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이를 악물어야 상체를 겨우겨우 일으킬 수 있었다.
캐롤의 전투기는 빠른 속도로 추락하더니, 결국 바닥에 처박히며 폭발했다.
“다비드!”
근처에만 가도 크게 다칠 만한 폭발이었다. 폭발에 휘말린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 안에서 함께 추락한 다비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13지구 전체에 발생한 지진은 10지구까지 전달될 정도의 진동과 소음을 동반했다.
폭발이 일어난 장소에서 제법 떨어져 있던 제드는 방어 슈트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바라며 쓰레기가 쌓인 곳 사이로 몸을 숨겼다.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추락한 전투기는 지면에서 2차, 3차까지 연달아 폭발했다.
“콜록콜록.”
제드의 입에서 피 섞인 기침이 터졌다.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지독한 통증과 고단함에 눈을 감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연달아 터지던 폭발이 멎자 제드는 몸 위에 있던 쓰레기를 헤치며 일어섰다. 한쪽 다리뼈에 금이 간 것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와 다리가 작살 나고 기침할 때마다 갈비뼈가 찌릿했다.
검은 하늘보다 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뭉게뭉게 수놓았다. 화재와 폭발의 냄새는 지독한 악취와 섞여 코가 떨어질 것 같았다.
숨 쉴 때마다 폐가 턱 막힐 만큼 유독가스가 심각했다. 제드는 활활 타오르는 캐롤의 전투기에 절름거리며 다가갔다.
‘살아 있나.’
이 폭발 사이에서 목숨이 붙어 있다면 기적이 아닐까. 제드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뜨거운 화염이 가득한 곳에서 다비드를 찾았다.
‘미련한 놈. 옆에 붙어 있을 것이지.’
“다비드!”
연기와 가스, 오염된 공기로 인해 제드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졌다. 소리쳐도 불길로 인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시끄러운 소리에 묻혔다. 비교적 뜨겁지 않은 파이프를 들고 전투기의 잔해를 뒤졌다.
“너무 넓군. 젠장.”
거대한 캐롤의 전투기는 폭발하며 넓은 부위에 잔해를 뿌려 놨고, 불길로 인해 다가가기 힘들었다. 불에 점점 달아오르는 쇠 파이프를 들고 제드는 전투기의 잔해를 헤치며 계속해서 다비드를 찾았다.
불길에 살이 익고, 뜨거운 쇠붙이에 화상을 입고, 매운 연기를 마시면서도 제드는 다비드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치유자로서 제드는 자신이 맡은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치유 능력자의 의무,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다비드의 사정을 알게 되어 더욱 그를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빨리도 오는군.”
제드는 머리 위로 1지구회의 전투기와 구조기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 폭발하고 죽고 나서야 등장하다니, 다비드가 그의 부하를 조진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한참을 뜨거운 잔해를 뒤지던 제드의 눈에 다비드가 입고 있던 기계 슈트가 언뜻 비쳤다. 대부분 부서져 머리 부분만 남은 슈트는 열에 의해 거의 녹은 것 같았다. 슈트 밑으로 드러난 다비드의 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살아 있는 건가?”
피부는 녹아서 지글지글 끓었다. 무릎 밑으로는 잘린 다리의 기계 단면에서 스파크를 튀겼고, 배 부분은 반대편이 보일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팔은 반대로 꺾여 기괴해 보였다.
몸의 대부분이 기계라는 그의 말대로 지글지글 끓는 피부 아래 보이는 것은 차가운 금속이었다. 파손된 부위에서는 피 섞인 부동액이 흘렀다.
“다비드.”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제드는 불길을 피해 무거운 다비드를 질질 끌고 눕혔다. 무거운 몸이 무너지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비드의 헬멧을 벗기자 녹아내린 얼굴이 드러났다. 밝은 금발이 불길에 비쳐 주황색으로 반짝반짝했다.
제드는 뜨거운 그의 몸에 손부채질하며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구멍 뚫린 배에서 튀는 스파크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인지 아닌지 인지하지 못하겠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었다고 판단했겠지만, 제드는 힘을 끌어모아 그의 몸에 능력을 써댔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제드의 금빛 능력이 일렁일렁 올라왔다.
빠르게 능력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껴졌지만, 내려다본 다비드는 치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어떠한 미동이 없었다.
“죽지 마라.”
그토록 바라던 복수까지 했는데 복수한 사람이 만신창이가 되면 무슨 소용이랴. 정신 차리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통쾌해하거나, 후회하거나, 복잡한 감정을 느껴 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살아서 복수의 결과라도 알기를 바랐다.
“다비드, 죽지 마라.”
다비드의 깨끗하고 하얗던 피부는 녹아 한쪽 눈알과 함께 흘러내렸다.
제드는 포기하지 않고 능력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짜내다가 까무룩 기절했다.
다비드의 얼굴 피부가 옆으로 흘러내리자 그 밑을 바치고 있던 기계 장치가 드러났다. 그의 흘러내린 푸른색 눈알에 제드의 기절한 모습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