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303) 만류귀종(萬流歸宗)
뇌성(雷聲)이 울렸다. 천지가 흔들리는 듯 했고 검 끝이 미친 듯이 울었다.
천지개뢰벽검(天地開雷劈劍). 지금 일마가 펼치고 있는 것은 그의 독문무공
인 천지개뢰벽검이었다. 엄청난 굉음이 귀를 얼얼하게 하면서 쏟아져 내렸
다. 사방에 검의 환영이 가득했고 쉴 새 없이, 빈틈 없이 검날이 파고든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검의 틈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그대로 몸 한 쪽이 날아
가게 된다.
여운휘는 눈을 부릅뜬 채로 일마의 검을 피해내면서 기회를 엿봤다.
핏핏!
자잘한 상처가 하나씩 늘었지만 결코 여운휘는 물러서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물러선다면 오히려 이 검 속에 파묻히고 만다. 한 번 밀리게 되면 그
이후로는 선공을 잡기 어렵다. 여운휘의 몸이 연신 움직이며 일마의 검을
피해냈다.
마침내 틈을 발견한 여운휘가 오른 발을 내딛으며 검을 찔러 넣었다. 몸을
비튼 여운휘의 가슴 부근을 일마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고, 순간 여운휘의
손을 떠난 제왕검이 금색 빛을 뿜어냈다.
타탕!
검날의 옆면을 후려친 것은 일마의 손이다. 그는 손으로 검의 옆면을 쳐냄
과 동시에 발로 여운휘의 하음혈을 노렸다. 발이 아슬아슬하게 여운휘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둘의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서지 않고 살수를 펼
쳤다. 지금 물러서는 쪽이 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탓이다. 검과 손, 그
리고 발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파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일마의 다리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한때 귀각
(鬼脚)이라고도 불렸던 일마의 발차기다.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처음은 손으로 받아내려고 했지만 이내 그 위력에 튕겨 나가 버렸다. 그제
야 여운휘는 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발차기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팔꿈치가 여운휘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그나마 뒤로 피했기에 충격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렸
다. 일마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이겼다!'
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무인의 감이 외쳤다. 이건 끝난 싸움이라고.
몸을 구부린 채로 굳었던 여운휘가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채로 위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카앙!
검이 위로 밀려나가 버렸다. 동시에 일마는 발을 내질렀다.
퍽!
여운휘가 땅을 굴렀지만 곧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일마가 눈을 찌
푸렸다. 분명히 끝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늦어 버리고야 말았다. 아까부터
자꾸 짜증이 치민다. 이 알 수 없는 주변의 상황에.
여운휘는 입안에 고인 침을 내뱉고 검을 움켜쥐었다.
그는 제왕검을 곧추 세우고는 일마를 노려봤다. 강해졌지만 역시 일마는
일마인 모양이다. 결코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만약 오행검
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강적이다.
여운휘가 천천히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검에서 미친 듯이 바람이 불
기 시작했다. 일마는 그 광경에 섬뜩함을 느꼈다. 검풍(劍風)은 분명 아니
다. 정말로 자연에서 흐르는 바람이 여운휘의 검 끝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
다.
'이, 이게 사술이라고?'
아니다, 이건 분명 사술이 아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사술이 아니라
면 설명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렇게 볼 수만도 없다.
그때 여운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수라(阿修羅)."
아수라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천천히 그 모습
을 바꾸었다.
아수라라는 말 그대로 혼돈이다.
어느새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강이 생겼고, 돌이 있던 자리에는 집이 생겼
다. 그리고 이 안에서의 여운휘는 너무나 커다랗게 보인다.
그나마 보이던 여운휘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졌다. 일마는 믿을 수 없는 상
황에 기겁하면서도 곧 정신을 집중했다. 진법이다. 지금 여운휘는 환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진법이다. 긴장하면 진다.'
수많은 진법을 경험해 봤다. 그 안에는 단 한 시진 동안 사람이 겪을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과 추위를 토해내는 진법도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갔던
모두가 죽었지만 일마만은 살아 남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서 있는 것은 일마가 될 것이다.
"어디냐."
스륵.
대답 대신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일마는 그 자그마한 기척을 머리에
새겼다. 대충 위치는 감이 간다. 그렇지만 섣불리 움직이면 이쪽이 당한다.
호흡은 최대한 깊고 짧게.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대응은 빠르게. 모든
신경들이 쭈뼛쭈뼛 일어나면서 비명을 질렀다. 막 움직이던 일마는 움찔하
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땅이 불쑥 일어나는 것을 느낀 탓이다. 그렇지만
공중으로 날아오르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기세가 옆구리를 스쳤다.
'칫!'
재빠르게 몸을 말면서 뒤로 물러선 그는 옆구리에 흐르는 피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일마는 공격이 날아든 곳을 머리에 새겼다.
이 싸움은 단 한 번으로 승부가 갈라진다. 특히 상대가 보이지 않는 일마
로서는 더욱 그 일격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 그만큼 많은 집중이 필요한
것이다.
눈을 감은 채로 여운휘를 찾으려던 일마는 뚜벅거리는 발소리에 눈을 떴
다. 모습을 감추고 있던 여운휘가 나타났다.
"좋아, 아주 좋아."
일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만 그렇다고 해서 위축된다면 이길 길이 없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러한 상
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마는 그대로 검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몸을 날렸다. 일순 일마의 검에 미
칠 듯한 광풍이 몰기 시작했다. 그는 있는 힘껏 검을 여운휘를 향해 내리
쳤다. 그런데 검이 여운휘를 그대로 관통하고 지나갔다.
누가 본다면 놀라서 기절할 관경이었거늘 일마는 민첩하게 검을 뒤로 움직
였다.
예상대로 환영이었다. 그렇다면 여운휘가 움직일 경로로 가장 좋은 곳은
바로 뒤다. 일마는 그것까지 계산하고 움직인 것이다. 무엇인가가 닿는다고
느낀 순간 검이 옆으로 밀려났다. 아마도 여운휘 또한 대응을 한 모양이다.
급히 뒤로 물러난 일마는 씨익 웃었다.
가능성이 있다. 모든 것은 환영이다. 눈에 현혹되지 않고 그 본질만 꿰뚫으
면 그만이다. 아무리 눈앞이 화려해도 답은 하나다.
"환영 따위로 날 이기려 하다니. 크크, 넌 날 못 이겨. 알겠나?"
"환영이라……"
이 알 수 없는 진법 안에서 처음으로 여운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마는
그 목소리의 위치를 파악했다. 거리는 삼 장 정도 떨어져 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움직이면 벨 수 없다. 여운휘 또한
방비를 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절호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일마는 기회를 엿봤다.
그때였다.
우르릉!
알 수 없는 소리에 일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위에서
검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에 일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놀람
을 느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결국은 환영이다. 진짜로 자신을 베는 것
은 여운휘의 검 하나다. 그것만 알아내면……
그런데 검이 점점 다가오면서 일마의 등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설마…… 허상이 아니라……'
믿기 어렵지만 그 검들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 저것은 가짜가 아니다. 하
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이런 무공이 있다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
겠는가. 만약 이것이 허상이 아니라면 분명 천하제일의 무공이다.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오, 오행검법!'
대자연의 기운이 움직였다. 오행을 움직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 같은 무
공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검을 드는 순간 사방이 자신만의 공간이 된
다. 무림 역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알려진 검귀의 오행검법이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애초부터 오행검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안
이하게 대처하지는 않았을 게다.
일마는 급히 자신의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의 검에서 하얀색 빛이 터져
나왔다. 그 크기는 꽤나 컸지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들을 모두 막기
에는 불가능했다. 일마는 급히 검막을 펼쳤다.
콰쾅!
검에는 내력까지 실려있어 검막으로 검을 막아내는 일마는 충격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디냐! 어디!'
일마는 검막을 펼치면서도 여운휘의 공격을 잡기 위해 신경을 모두 쏟아
넣었다.
스륵.
가벼운 발걸음이지만 분명 느꼈다.
'여기냐!'
검은 검막을 펼치기 위해 들고있으니 불가능하다. 일마는 한 손에 모을 수
있는 내공을 모두 쏟아 넣으며 일장을 쳐냈다. 무방비 상태라면 이 일장으
로도 승부를 끝낼 수 있다. 더군다나 일마는 여운휘의 움직임을 확실히 잡
아냈다.
그런데,
'느, 느낌이 없다.'
손에 닿는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알아차렸다.
'속았어!'
일마는 급히 휘두른 손을 회수하면서 반대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퍼억!
이번엔 닿았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일마의 아랫배에서 찢어질 듯한 고
통이 치고 올라왔다. 일마는 눈을 부릅뜬 채로 앞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있던 광경들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도자기가 깨어져 나가는 것처럼 집도, 나무도, 바위도 부서졌다. 그리
고 일마의 앞에는 여운휘가 있었다.
변했던 주변의 광경들도 원래의 그곳으로 돌아왔다.
"쿨럭!"
여운휘의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일마의 얼굴을 적셨다. 마음 같아서는 웃
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처음 휘두른 일장이 실패했다. 급히 손을 회수하면서 여운휘의 배를 가격
했지만 그 위력이 처음보다 훨씬 못 미친다. 당연하다. 회심의 일격을 날린
후 재차 휘두른 손에서 그만한 위력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마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정확하게 검이 틀어박혔다. 어떻게든 웃으려
는 일마의 벌려진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오행…… 검법이냐?"
"그래."
말을 하는 일마도 그렇지만 대답을 하는 여운휘 또한 얼굴에 핏기가 없다.
일마의 일장에 속이 진탕이 된 모양이다.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
했는데 일마는 당하지만은 않았다. 만약 처음 일장에 맞았다면 일마에게
검을 꼽아 넣기도 전에 여운휘 먼저 나동그라졌을 것이다.
"흐흐 왜 녹포괴존이 탐냈는지…… 알 것 같군."
일마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지금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눈앞에 있는
여운휘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하게도 움직이려고
하면 피만 터져 나온다. 이제는 기력도 없고, 섣불리 움직여봤자 꼴만 사나
울 뿐이다.
일마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천하제일인 자신이 겨우 새파란 어린놈에
게 당해 버렸다.
일마는 입술을 비틀었다.
"비록 네 놈이 날 이겼지만…… 이제 너 또한 고독할 것이다. 천하제일이
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니까."
천하제일,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는 지고지존(至高至尊)한 자리. 무인으
로서 상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외로운 길이다. 일마가 천하의 패자가 되
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상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천하제일이 되
자 목표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 앞에 있
는 사내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도 널 반기지 않아. 겉으론 널 존경한다 해도 속으론 두려워만 할 뿐
이지. 알겠나? 넌 돌아갈 곳도 없게 될 것이다. 흐흐!"
일마의 비웃음 가득한 말에 여운휘는 제왕검을 뽑아내면서 대답했다.
"모두가 등을 돌린다해도 상관없다. 끝까지 날 위해서 울어줄 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 옆이 내가 있을 자리다."
애초부터 무림맹, 마교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무림맹의 맹주, 마교의 교주
자리를 준다고 해도 이쪽에서 거절한다. 여운휘는 언제나 유설린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 외의 것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여운휘의 확고한 대답에도 일마는 그저 흐흐 하고 웃었다. 여운휘의 말에
재밌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 대답에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한 것인가는
일마 본인을 제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여운휘 또한 그런 것에 관심은 없다. 이제는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
다. 무림맹과 마교가 붙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 예상대로라면 지금 무림맹
은 흔들린 마교의 무인들을 밀면서 치고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여운휘는 제왕검을 들어올렸다. 일마는 제왕검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질렀
다.
"크하하! 내가! 내가 천하제일의 무인 일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면서 말을 내뱉으며 일마는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여
운휘의 검이 정확하게 일마의 목과 몸을 분리시켰다.
여운휘는 침묵한 일마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의 잘린 머리를 들고
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한 사내가 멍하니 바라봤다.
일마에게 서신을 전하러 왔던 자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
다. 일마가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여운휘의 검에 찔려서 죽었다. 천하제일
의 무인의 죽음이 너무나 초라했다.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만약 눈앞에 목 없는 시체만 없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천하제일 무인의 죽음을.
일마가 죽었다. 반 백년 정도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일마가
죽었다. 그를 죽인 것은 갓 삼십도 되지 않은 여운휘라는 사내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