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301) 만류귀종(萬流歸宗)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다.
천하의 흐름은 만 가지이나 그것이 곧 하나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인생사
가 그렇고 무공이 그렇다. 처음엔 무수히 많은 갈래가 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의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공으로 치자면 유초(有招)에서 무초(無招)로 변하는 경지다.
일마는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의 풍파들조차도 그를 피해 가는
듯 했다. 마치 돌이라도 된 냥 미동도 없던 일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묘시
(卯時)가 된지도 조금 지났다. 이제는 조금 있으면 해가 뜨는 듯 했다.
눈을 감은 채로 명상에 잠겨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 정도는 충분히 안다.
약속했던 인시가 지난지도 이미 꽤나 됐다. 혹시나 해서 기다렸지만 아직
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낌새도 없다.
머리 속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오간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여태까지
누군가가 여운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혼동시켰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타당한데 문제는 그러기에 뭔가 석연치 않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일마를 빼냈다면 기습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기습은커녕 주
변에서는 아무도 없다.
'뭔지 모르겠군.'
선뜻 자리를 뜰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여운휘라는 이름
으로 불러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만 그럼으로써 반대편에서 얻을 이득
이 없다. 일마가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꿈틀했다. 무엇인가 움직임이 느껴진 것이다.
막 손을 움직이려던 일마는 자신 앞에 부복하는 인물을 보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익히 아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운의 수하로 그가 일마에게 연
락을 전할 때 자주 보내던 자다. 다른 무공도 그렇지만 특히 경공에 능해
좌운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자다. 그런 그이거늘 왠지 모르게 얼굴이 상기
되고 숨도 벅차 보인다. 평소 이런 모습을 보이던 인물이 아닌지라 일마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헉헉! 큰일났습니다! 마교가!"
퍼뜩 생각나는 바가 있어 일마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설마……!"
"당했습니다. 혈교의 놈들과 사욱천이 마교 내부를 흔들면서 단 한 시진만
에……"
일마의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이것이다. 놈들은 이것을 노리고 일마를 밖
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너무 어리석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교를 나와
버렸다.
아니……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마는 철저하게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갔다.
그렇지만 혈교와 사욱천이 손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 한 시
진만에 마교가 완전히 제압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를 한 지 알 수 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좌
운 어르신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유가로군."
"예."
"큭큭!"
일마의 입가에서 실소가 세어 나왔다. 완전히 자신을 가지고 논 꼴이 아닌
가. 혈무린, 사욱천, 그리고 유가……
이가 부드득 갈렸다. 몇 십 년을 준비해서 다시금 이 자리에 올라왔다. 그
런데 과거처럼 또 물러서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지금 일마는 간
신히 화를 억누른 채로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속은 이미 새카맣게 타서
분노로 이글거렸다.
"돌아간다."
"예? 좌운 어르신께서 어디에 숨으시라고……"
"남은 세력을 규합할 생각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일마를 살려 둔 대가는
치르게 해줘야겠지."
당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뒤통수를 맞게 되니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아마도 사욱천과 혈무린은 일마의 모든 세력
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 상태로 상층에 있는 자들을 벴을 테고 그렇게 되
면 지휘계층은 단숨에 붕괴된다.
그 밑에 있는 무인들은 일마의 정체를 모른다. 그리고 일마를 위해 죽어줄
필요도 없다. 당연히 쉽게 항복을 했을 테고 마교는 이제 넘어가 버린 것
이다.
'세 놈, 세 놈만은 죽인다.'
혈무린과 사욱천, 그리고 유설린. 이 셋 만은 반드시 죽여야만 직성이 풀릴
듯 싶다.
모든 것이 사라지니 이제는 악만 남는다. 그렇게 막 걸어가려던 일마의 귀
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수하는 아니
다.
"멈춰."
일마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었다. 일마가 몸을 돌린 채로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곳에
서 만나기로 한 자인데 지금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휘……"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주변에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듯 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마는 슬쩍 놀랐다. 여태까지 몇
시진 동안 이곳에 있었지만 다른 누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소리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일마와 그
의 수하, 그리고 여운휘 셋 뿐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을 혼자서 상대하러 왔
다는 소리다. 여운휘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더군다나 일전에 한 번 겨루어
보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을 게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여운휘가 자신을 상대할 정도로 컸다는 것을 일
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살아있었군."
"내 서찰을 받고 왔을 텐데."
"하지만 그게 진짜 네가 보낸 서찰인지 장담할 수는 없었지."
여운휘를 바라보던 일마가 천천히 물었다.
"이 일…… 네 놈 짓이냐."
여운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반쯤은. 혈교를 설득한 것도 나니까."
"크흐흐!"
더 이상 화도 나지 않는다. 단지 이 앞에 있는 이 놈을 찢어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다. 정말 몇 십 년 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사내 놈 하나 때문에.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치 이 전장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떠한 일도 차질이 없었으며, 또한 완벽했
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몇 십 번에 걸친 수정과 보완 끝에 세운 그
모든 계획들이 단지 한 사내에 의해서 무너져 내렸다. 고작…… 한 사내의
손에 의해 그 원대했던 야망이 완벽하게 부서진 것이다. 그것도 빌어먹을
정도로 처절하게.
일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 싶었다. 이 사내와 자신을 같은 시대
에 태어나게 한 하늘을 원망하며.
일마는 허망한 눈빛으로 푸들푸들 웃으며 자신을 이렇게까지 농락한 여운
휘를 쳐다보았다.
전 마교 교주의 딸이 도망쳤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때 일마는 대수롭지 않
게 생각했다. 별반 무공이 뛰어나지도 않은 계집이다. 도망쳐서 무슨 수를
쓴다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 보고서에 그 계집을 보살피던 호위무사 하나도 같이 있다는 건 그저
자잘한 내용일 뿐,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설마, 설마 천하를 움직일 사내가 될 줄이야."
일마의 음성은 겨울의 찬바람 탓인지 미약하게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
다. 일마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일마를 이렇게 만든 원흉인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
히 차가운 눈빛으로 일마를 바라만 볼 뿐.
"내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마."
잠시 일마를 바라보던 여운휘는 물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에게 부귀와 돈, 그 무엇이라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넌 나
의 말을 듣지 않았지. 도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힘든 길을 걷는 것
이냐."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도, 목숨을 건 싸움터에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일까 그 소리는 들리지 않
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작았는지 절정 고수인 일마마저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일마의 표정에서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안 그는
이번에는 보다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웃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일마는 여운휘를 응시했다. 천하의 패권을 잡으
려던 자신이 겨우 여인 하나를 지키려는 이런 자에게 당했다.
"용감하게 나섰지만 넌 내 상대가 아니다."
"붙어봐야지 알겠지."
"네 놈이 나한테 패한지 일년 밖에 지나지 않았어! 승패는 변하지 않는다!"
일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큼 그의 마음 상태가 변해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뿌드득!
일마의 이빨이 기괴한 소리를 토해냈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셋에 한 놈이
추가되었다. 지금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해 검을 내려트리고 있는 여운휘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무림맹과 마교를 휘두르면서 많은 계책을 펼쳤다.
그 모든 것이 성공되는 순간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깨 버린 놈. 평생
동안 다시 준비한다 해도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
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차피 천하의 주인이 되자마자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평생을 버티게 했던 꿈을 깨 버린 놈! 여운휘를 바라보는 일마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갈증이 난다. 피를 마시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
다. 일마가 성큼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네 앞에 있는 내가 바로 천하제일인이다. 그런데도 혼자 싸우겠다? 네 놈
은 죽는다."
"난 죽지 않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난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건방진 놈! 죽엇!"
강한 외침과 함께 일마가 바로 살수를 펼쳤다.
날아드는 검을 응시하던 여운휘의 눈에 유설린의 모습이 언뜻 스치고 지나
갔다. 여운휘의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져 나갔다. 그는 제왕검을 꽉 움켜쥐
었다.
'지지 않아.'
천하제일을 겨루는 둘의 검이 부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