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300) 만류귀종(萬流歸宗)
만류귀종(萬流歸宗)
여운휘는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이치가 몸 안에 있다. 가볍게 쥐고 있는 손안에
는 무수히 많은 변화가 있다. 눈을 감은 채로 여운휘가 손을 들어올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여운휘는 두 손으로 단정히 뒤로 묶었다.
옷도 새카맣다고 해도 될 정도로 짙은 검은 색이다. 평소 여운휘가 즐겨
입는 옷이다. 눈동자는 더욱 검다. 마치 마주보기만 하면 단숨에 빨려 들어
갈 정도로 신기한 마력이 있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왕검을 허리
에 찼다.
꽤나 깔끔해 보이는 차림으로 여운휘는 몸을 돌렸다. 뒤에는 몇 명의 인물
들이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여운휘는 한 장의 서찰을 꺼내 사욱천에게 밀었
다.
"부탁하오. 그에게."
"알겠네. 어제 준비한 대로 서찰을 전하지."
대부분이 걱정스럽다는 얼굴이다. 여운휘를 향하는 눈빛이 그러는 것은 어
쩔 수밖에 없다. 지금 여운휘는 천하제일의 고수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일마 혼자 올 거라는 보장도 없다. 다른 누군가를
대동하고 온다면 더욱 일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여운휘는 태연해 보였다. 오랜만에 잠도 푹 잔 탓에
긴장도 상당히 풀렸다.
"괜찮겠나?"
철비상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궁진이 나
섰다.
"나도 있네. 비록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내가 함께 가는 것이……"
"지지 않아, 나는."
차가운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믿음이 물씬 넘쳐나는 한 마디에 남궁진은
여운휘를 그저 뚫어져라 바라봤다. 여운휘의 몸에서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기백이 풍겨나는 듯 했다.
여운휘는 한 사람씩 바라봤다.
혈무린, 사욱천, 남궁진, 철비상, 우문학, 풍운조, 그리고 유설린.
모두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지만 정작 유설린만은 여운휘처럼
태연한 표정이다. 마치 가까운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가는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올 거라고 믿으니까 그런 표정을 짓는 게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안에서 여운휘를 가장 생각하는 유설린이 이렇게 웃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잘 다녀와."
"그래."
평소와 같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상대와 싸워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유설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유설린은 자신의 앞에 서 있
는 여운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앞에 구겨진 옷을 펴주려는 듯 그녀는 조
심히 여운휘의 옷 앞섬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로 여운휘의 옷을 어루만지던 유설린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반드시 돌아왔어 라는 여운휘의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설린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
개를 들지 못했다. 여운휘는 앞섬에서 손을 떨어트리는 유설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우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운휘가 말했다.
"지금처럼 웃으면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응."
유설린에게서 눈을 땐 여운휘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이만 약속 장소에 가 있을 거요. 이 이후의 일은 부탁하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게."
혈무린이 걱정 말라는 듯이 말하며 여운휘를 인자한 눈으로 바라봤다. 여
운휘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크기를 아는 혈무린으로서는 도움을 주지 못하
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여운휘의 앞에 있다. 그렇지만 몸을 돌릴 생각은 없다.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일이다.
두려움 따위는 없다.
사욱천의 성난 듯한 얼굴로 일마 진린의 거처로 찾아갔다. 급히 무인들이
입구를 막았지만 사욱천이 소리쳤다.
"비켜라!"
"저기 무슨 일로……"
"너희 같은 놈들에게 말할 게 아니다! 귀검사영에게 내가 왔다 말해라!"
"무슨 일인가."
일마 정도 되는 무인이 사욱천의 거친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사욱천이 소란스럽게 등장했으니 알기 싫어도 알게 된 것
은 당연했다. 일마는 가뜩이나 되는 일이 없어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사욱
천이 등장하자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일마의 태도를 보면서 사욱천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하류 잡배 놈!'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저 한 가지 사실에 화가 난 무인처럼 행동했다. 사욱
천은 품안에 있는 서찰을 꺼내들어 일마에게 냅다 던졌다. 마치 비수처럼
서찰이 일마에게 날아들었다. 내공이 실린 서찰을 그가 가볍게 받아냈다.
"이게 뭔가."
"내가 왜 자네의 심부름꾼을 해야하는 건가."
"심부름꾼? 도통 이해 못할 소리만 하는군."
일마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서찰을 펼쳤다. 그리고 안에 있는 내용을 읽
는 순간 움찔해 버렸다. 그는 급히 고개를 들어 사욱천을 바라봤다. 사욱천
은 되려 일마를 쏘아붙였다.
"뭔가."
"이 서찰…… 누구에게 받았는가."
"어제 저녁에 전혀 본 적 없는 놈이 나에게 주고 사라지더군. 얼굴을 좀
가리고 있어서 정확히 보지는 못했네. 다만 남자였고 다소 젊어 보였다는
것 정도는 확신하지. 그리고 내가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사라질 정도로
꽤나 강한 무인 같더군. 그 서찰이 반드시 자네에게 가야한다며 나에게 주
고는 사라졌다네."
일마는 침묵한 채로 서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놀랍게도 서찰을 보낸 자의 이름에 여운휘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것도 만날 장소까지 적어 둔 것을 보아하니 누군가의 장난은 아닌 듯 했
다. 더군다나 일마와 여운휘의 연을 아는 사람 또한 몇 안 되니……
"무슨 일인가? 표정이 좋지 않은데."
"아, 아니네. 무패도,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 이만 가게."
"…… 그리하지."
사욱천은 일부로 수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마
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손을 들어올렸다.
화르륵!
서찰이 손에서 일어난 진기에 불이 붙어 사라졌다.
'만나자고? 건방진 놈!'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여운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일마가 마교
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알아낸 것이다.
수족이 되거나 아니면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
금의 결과는 일마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여운휘는 살아있고, 적이
다.
'내 손으로 끝냈어야 했어.'
너무 여운휘를 얕봤다. 사무린 정도라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거라고 판단
했던 것이 일마의 가장 큰 실수다. 차라리 자신이나 좌운 정도가 나섰더라
면 지금 여운휘가 살아서 이런 서찰을 보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몇 차례나 꼬였던 모든 계획들 사이에는 여운휘가 있다. 아마도
요즘 무림에서 자신의 수족들이 잘려나가던 것 또한 여운휘가 이끄는 유가
의 세력일 거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얕보지 않는다. 무공 실력은 압도한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경시
할 마음이 사라졌다. 여운휘를 얕본 것이 지금까지 일마가 저지른 최고의
실수였다고 판단 될 정도로.
일마는 지붕 위에 숨어 있는 수하에게 좌운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가기 전
에 몇 가지 할 이야기들이 있다.
부른지 채 반각도 되지 않아 좌운이 일마의 거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
스러운 부름에 좌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여운휘에게서 서찰이 왔네."
"뭐? 서찰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던가?"
"만나자더군. 새벽에."
"만나러 갈 생각이군."
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놔두기에는 여운휘가 너무 커 버린 것이
다. 계속 설치게 놔두었다가는 가랑비에 옷 젖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쪽은 몇 명이 기다리는지 모르네. 흑색 기마대라도 같이 움직이는 게
어떠한가. 아니면 자네의 직속 수하들이라도……"
"사욱천이 보고 있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모양일세. 내가 이상한 무
인들과 움직이면 뒤를 캐려고 혈안이 되겠지. 큭큭, 그리고 상관없지. 상대
가 몇 명이던 변하지 않아. 이 싸움의 승자가 내가 될 거라는 사실은."
백 명, 아니 천 명이 기다린다 해도 상관없다. 일마는 그 안에서 여운휘를
제거하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만약 그 많은 수의 인원이 모두 비밀을
안다면?
죽이면 그만이다. 잔챙이들은 그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어중이떠중이
들이 얼마나 되던 간에 일마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 기회
에 자신을 방해하는 세력을 싸그리 쓸어버릴 생각인 것이다.
"굳이 자네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아예 비밀스럽게 흑색 기마대를 움직이
는 것이……"
"아니, 내가 가겠네. 더 이상 애송이놈들이 나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내 귀에 여운휘와 유가라는 이름이 들리지 않게 내 손으로 확실히
끝낼 생각이네."
단호한 일마의 말투에서 좌운은 그의 마음을 읽었다. 요즘 이래저래 일들
이 벌어지면서 상당히 초조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마 본인의
손으로 확실히 정리하려는 것이다.
"내일 그 놈의 목을 들고 돌아오지."
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된 장소로 시간에 맞추어 가기 위해서는
지금쯤 움직여야 한다.
일마는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마교를 벗어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상당히 안 좋은 인연이다. 그리고 그 종지부를
곧 찍게 될 것이다.
'건방진 애송이 놈. 죽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