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37)

수호령(守護靈) (298) 회유(懷柔) 

"자네!"

혈무린이 소리치자 사욱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대로의 격한 대결이 아니다. 그저 

검을 맞대어 보고 싶은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오.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흑색 기마대의 대주와 강호십일객들

과 겨루고도 지지 않은 저 사내를 내가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혈무린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연스레 그의 눈이 여운휘에게

로 향했다. 어찌하겠냐고 묻는 혈무린의 눈에 여운휘는 검을 빼는 행동으로 답했다.

사욱천이 씨익 웃었다.

"좋아. 의당 사내라면 도전을 피해서는 안 되지."

너무나도 곧은 인물이다. 온갖 암투가 꿈틀거리는 무림에서 이런 인물이 금천멸문대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맥과 무공 탓이었다.

도를 든 사욱천이 여운휘의 건너편에 섰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숨은 거칠어진다.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맞서는 순간 떠올랐다.

'맞아! 소교주님의 호위무사가……'

몇년 전 사욱천이 금천멸문대의 수장이 되기 전의 일이다. 금천멸문대의 많은 무인들이 단 한 사

내에 의해 궤멸한 일이 있다.

당시엔 겨우 호위무사 하나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타박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게 이해

가 간다. 앞에 있는 여운휘라는 사내가 그때의 호위무사였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너로구나. 불패의 금천멸문대의 이름에 유일한 오점을 남겼던 놈이."

"그들은 목숨을 걸고 나와 싸웠소. 오점이라 불릴 이유가 없소."

"알고 있다. 내가 수장이 되기 전이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금천멸문대였으니까. 그 하나만

으로도 멋진 놈들이었을 게 분명하지."

"알고 있다면 다행이오."

짧게 말을 끊은 여운휘는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사욱천의 눈이 빛났다. 가벼운 대련인 듯 말했지만 쉽게 쉽게 상대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들어

올린 사욱천의 도는 호리호리했다.

일반적인 도보다는 작아 보이고 검보다는 크다. 파괴력을 줄인 대신 속도에 그만큼 힘을 실은 것

이다. 거기다가 도를 쥐는 손도 왼손이다.

좌수도(左手刀).

그저 단순히 손만 바뀌었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검로가 바뀐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분명 엄청

난 차이다.

흔들거리던 도가 쏘아졌다. 여운휘는 약간 몸을 비틀면서 날아드는 도를 쳐냈다.

탕!

도가 막히는 순간 사욱천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무릎이 여운휘의 턱을 노렸지만 빠른 대응

에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지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욱천은 덜어져 내리며 그대로 도

를 내리쳤다.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변화를 내포한 도법이었다.

여운휘의 몸이 도의 간격안으로 빨려드는 듯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여운휘는 전혀 당황하

지 않았다. 오히려 빨려드는 힘을 이용해 자신의 검을 움직였다. 다가오던 사욱천의 도가 튕겨 

나갔다.

욱씬 거리는 손목을 잡고 사욱천은 여운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이 

오히려 튕겨 나가버렸다. 

사욱천은 도를 움켜쥐고 여운휘의 주변을 빙글 빙글 돌았다. 틈만 보이면 바로 도를 휘두르려고 

했는데 빈곳이 보이지 않는다. 식은땀이 등 뒤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반 각이 흘렀다. 도를 쥔 채로 사욱천은 움직이지 않았고 여운휘 또한 검을 든 채로 그런 

그를 마주봤다. 검을 내려트리고 사욱천을 바라보는 여운휘의 눈은 여유로 가득했고, 반면 사욱

천은 땀 투성이였다. 검을 맞대지도 않았지만 위압감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때 아까전 사라졌던 수하가 한 사람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

황하는 듯 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 사욱천의 모습에 평소의 그를 상기해냈다. 어디서 좀 강해보

이는 무인을 보자 한 번 겨뤄보자고 한 모양이다.

'한 놈 된통 당하겠군'

평소의 사욱천을 아는 그는 확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대결을 볼 수 없는 듯 하다. 수

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고 그를 따라온 귀도 풍유혼만이 이 상황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사욱천을 바라보다가 곧 그 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저, 저 자는!'

아는 사람이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몇 년 전 소교주와 함께 마교를 도망친 여운휘다. 풍

유혼은 크게 당황하면서 급히 주변을 살폈다. 옆쪽에 있는 자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이제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교의 전 부교주인 혈무린이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지만 유설린도 있다. 이제는 애가 아닌 여인

으로 변해버렸지만 그 미모는 변하지 않았다. 한 눈에 풍유혼은 그녀가 유설린이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가 다급한 걸음으로 그쪽으로 다가왔다.

"귀도로군."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꾸벅하면서도 풍유혼의 눈은 유설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마주보고 있던 유설린

도 웃으면서 말했다.

"많이 늙으셨네요."

"……!"

그 한 마디에 풍유혼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풍유혼이 말했다.

"사, 살아 계셨군요."

"휘가 있었으니까요."

"역시……"

풍유혼은 고개를 돌려 여운휘를 바라봤다. 사욱천과 마주하고 있는 여운휘의 모습이 예전보다 

커 보인다. 어떻게 된 것이 여운휘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한데 사욱천의 몸은 땀으로 번들거렸

다. 상의를 벗고 있는 탓에 흐르는 땀이 확연히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막 물으려는 순간 사욱천이 움직였다.

"하압!"

거센 기합 소리와 함께 사욱천의 도가 사방팔방을 압박하면서 날아들었다. 기회를 옅보던 사욱

천이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준비한 것이다. 아까부터 여운휘와 검을 대면서 점점 분위기가 이상

하게 흐르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검을 대지 않는다. 

그것이 사욱천이 준비한 마지막 수법이었다.

도는 강맹한 베기를 위주로 한다. 그리고 사욱천의 공격 또한 그 기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

지만 그 빠르기가 일반적인 도법에 비해 월등했다.

쒝!

파파파팡!

미칠 듯이 몰아치는 도를 여운휘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면서 막아냈다. 그 모습에 풍유혼을 입을 

쩍 벌렸다.

'예전의 여운휘가 아니야……'

옛날에도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릴 적 사곡에서부터 항상 봐오던 풍유혼이 아니던가. 그렇

지만 지금은 괴물 정도로 여운휘를 표현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의 나이의 인

물이 현재 마교에서 최고 고수라고 불리우는 사욱천을 이 정도로 상대하다니……

팍!

사욱천의 마지막 공격이 막히는 순간 그는 천천히 도를 내리트렸다.

더 싸울 수는 있었지만 이 이상 해봤자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느낀 탓이다. 그리고 지금 풍유혼

이 나타났다는 것도 알고 있고.

"대단하군. 나보다 강해."

역시 풍유혼의 오해는 아니었던 듯 하다. 사욱천은 대놓고 패배를 인정했다.

"나중에 다시 붙어 보지.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니."

사욱천은 풍유혼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에게 손짓했다. 풍유혼은 그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고개를 든 그가 급히 물었다.

"사 대협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혈무린 어르신이야 오신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소교주

님까지……"

"소교주님이 맞으신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 사내가 그때 제가 키운 무사입니다."

"하, 하하! 자네 대단한 제자를 뒀군 그래. 현 무림의 최고고수가 자네의 손으로 만들다니 말이

야."

"과, 과찬이십니다."

풍유혼은 과찬이라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을 흔들 사욱천이 유설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는 유설린 앞에 서서 한층 부드러워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소교주님."

말을 마치며 사욱천이 덜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소교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마교를 잡아 삼키려는 놈들을 하나도 없이 베겠습니다. 소교주님의 명이라면."

"고맙네!"

혈무린은 무릎을 꿇고 있는 사욱천의 손을 감싸 안았다. 사욱천이 이 편으로 들어선다면 마교의 

상당 부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리고 명분을 이용하면 일마는 고립 된다.

"우리 한 번 일을 벌려보세."

말을 마친 혈무린이 기쁜 듯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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