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97) 회유(懷柔)
대청은 꽤나 깨끗했다. 마교 제일의 무사라고 알려진 사욱천의 거처답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를 패기가 가득 풍겼다.
그렇지만 혈무린 또한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부탁하러 온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을
모시는 곳도 아닌 훈련장으로 안내됐다.
그곳에서는 웃통을 벗고 있는 사욱천이 있었다. 그의 도가 미친 듯이 휘둘
렸다. 미약한 경풍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손
님이 왔다는 것을 알기도 하련만 사욱천은 묵묵히 도를 휘둘렀다.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결코 육십이 넘은 무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움직인 후에야 숨을 고른 사욱천이 도를 거두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는 사욱천을 확인하고서야 혈무린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
욱천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으로 혈무린을 마주봤다.
"오랜만이군."
"나 또한."
혈무린의 말에 사욱천이 가볍게 답했다. 예전엔 상관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비록 혈교의 교주가 되었다 하지만 사욱천에게는 오히려
예전이 더 깍듯이 대했다. 그는 혈무린을 마교의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
기 때문이다.
"만나주었군. 날 피하면 어쩌나 생각했네."
"혈교의 교주가 아닌 전 마교의 부교주 혈무린으로 온 것이니까 만난 것이
오. 만약 혈교의 교주로 만나려 했다면 거절했겠지."
사욱천은 진정한 마교의 무인이다. 마교 무인의 표본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사욱천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배신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 그렇기에 지금의 교주인 유백명 또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고 은
근슬쩍 힘을 잡은 진린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할 이야기가 있네."
"나와 할 이야기는 없을 걸로만 알고 있소만?"
"중요한 이야길세."
혈무린은 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모두 물러나라는 신호다. 그렇지만 사
전에 이야기 한 바가 있어 여운휘와 유설린만은 혈무린의 뒤에 남아 있었
다.
사욱천은 옆에 있는 수건으로 가볍게 땀을 닦으며 이 상황을 바라봤다. 모
두가 훈련장에서 나가자 혈무린이 입을 열었다.
"도와주게. 자네 밖에 없네. 마교를 예전으로 돌리고 싶네."
"…… 무슨 소리요. 마교를 예전으로 돌리고 싶다니. 그리고 지금의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거요? 마교를 배신하고 떠난 자의 이야기 따
위 들을 생각 없소."
"잘 듣게. 자네가 진린이라고 아는 인물은 바로 강호십일객 중 최고 고수
인 일마네."
"미쳤소? 진린이 일마라니?"
사욱천은 혈무린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진린과는 상당히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비록 사이는 안 좋다 하지만 알고 지낸 지는 이년이 넘었다. 나름
대로 강한 자라고 생각했지만 일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이네. 일마가 지금 마교를 쥐어 삼키려고 하고 있네."
"당신 말대로 일마가 진린이라면…… 왜 마교를 노리는 거요?"
"천하일통(天下一統). 무림맹과 마교뿐만이 아니라 황궁까지 잡아 삼키려고
하는 거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옛날 내가 어렸을 적 일마가 마교를 찾아온
적이 있네. 그는 그 당시 마교의 교주님이셨던 유문극님에게 마교를 걸고
한 판 하자고 했지. 십수를 겨뤄 버틴다면 앞으로 평생 은거하겠다고 했지.
유문극님은 버텨냈고 일마는 사라졌네. 그런데 지금 다시 나타난 걸세."
혈무린의 말이 끝나자 사욱천이 침묵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가뜩이나 지금 무림맹과 마교
의 싸움이 거세어 지는 바람에 사욱천 또한 마교 밖으로 출전해야 할 때라
고 생각하던 찰나다. 그런데 실상 그런 마교를 움직이는 것이 일마라고 생
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혈무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싸워봤자 그것은 일마에게 도움이 될 뿐
이지 마교에게는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몇 가지 진린의 행동에서 수상했
던 점들이 혈무린이 말했던 것들과 미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왠지 엉터리 병법을 펼친다 했지.'
괜히 많은 피를 흘렸다. 마교의 무인 중 죽지 않아도 될 자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자빠졌다. 그 때문에 사욱천은 진린에게 반기를 들었고 지금은 흑
색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소. 비록 당신을 배신자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
라는 것 정도는 아니까."
"고맙네. 날 아직까지 믿어줘서."
"하지만! 당신은 지금 마교로 왜 돌아온 거요?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비록 마음은 아팠
지만 유백명과 한 약속이 있어서지."
"약속?"
그런 말은 처음이었기에 사욱천은 반문했다. 유백명은 몇 안 되게 사욱천
이 존경하던 무인이었다. 혈무린도 존경하는 무인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시는 마교를 밟지 않겠다고."
"지금 이곳에 있으니 그 약속을 어겼군."
"아네. 알고 있어. 나 또한 그 탓에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 하지만 말이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졌네."
"개소리!"
사욱천이 버럭 이를 들이밀었다. 혈무린이 마교에 욕심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난 마교의 교주가 될 생각이 없네. 모든 것은……"
혈무린이 고개를 돌려 유설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분장했던 것들을 때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사욱천의 표
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왠지 덩치가 작다 생각했거늘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를 기품에 사욱천이 물었다.
"누구냐?"
"유설린이라고 해요."
"소, 소교주님?"
유설린이 고개를 끄덕하는 순간 사욱천은 급히 고개를 돌려 혈무린을 바라
봤다. 유설린의 행방불명은 사욱천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었을 거라
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소식도 없고 여인의 몸으로 마교를 탈출해 살아나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자신이 소교주라는 사실을 버젓이 밝히며 나타난 여인
이 있다. 도저히 그냥 믿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만 증거가 있습니까? 당신이 소교주님이라는 증거가."
"없어요. 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남은 거라고는 아버지가 남
겨줬던 유품 하나 뿐이니까요."
유설린은 그 목걸이를 슬쩍 꺼내서 보여줬다. 하지만 그 목걸이를 사욱천
이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증거가 없는 이상 전 당신을 소교주님이라고 믿을 수가 없습
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을 보니 유백명이 떠오른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소교주
인게 분명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러던 중 사욱천의 눈이 옆에 서 있는 한 무인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소교주라고 주장한 여인의 옆에만 서 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사욱천은 뚫어져라 사내를 바라봤다. 이 사내의 정체를 안다면 정말 이 여
인이 소교주인지 아닌지 나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
만 아무리 봐도 본 듯 했던 기억만 날 뿐 그 어떠한 답도 내려지지 않았
다.
사욱천은 아예 대놓고 묻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날 아나?"
"모르오."
"아니야. 분명 본 적이 있어. 넌 누구냐?"
"여운휘라고 하오. 아, 나와 소교주에 대해 말해 줄 만한 사람이 있소. 귀
도 풍유혼이라고 나와 소교주를 아는 자요."
사욱천은 여운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그 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분명 들어본 이름인데……
"여운휘? 여운…… 휘!"
퍼뜩 생각난 것이 있어 사욱천은 눈을 부릅떴다.
생각난 것이다. 천마대 내에서 무적이라는 생각에 방탕해졌던 자신을 부끄
럽게 만들어 버렸던 아이가 말이다. 말도 해 보지 않았지만 평생을 잊지
않고 지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얼마 전 사마연과의 만남에서도 물었
었지만 듣는 순간 생각이 났다.
그 꼬맹이의 이름은 분명 여운휘였다.
"난 널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너도 날 기억해 봐라. 우린 마교에서 만났
다."
여운휘 또한 사욱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음엔 그저 어디선가 본 사람
과 자신을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늘 이름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해 낸
것이다. 여운휘는 마교에서 봤다는 말에 몇 명들로 압축해봤다.
자신을 사곡에서 훈련 시켰던 무인 중 하나인가도 생각해봤지만 그들은 얼
굴을 가렸다. 얼굴을 보지도 못한 사람을 기억해 내라고 할 리는 없다. 여
운휘는 사곡을 기준으로 고민하다가 이내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기억이 난 것이다. 사마연과 함께 사곡으로 오던 도중 잠시 만났던 무인을.
"…… 사마연과 본 적이 있었소. 사곡으로 가던 도중에."
"으, 으하하! 살아있었구나!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말이야!"
육십이 넘는 고령의 무인의 웃음소리가 훈련장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은
이 둘의 인연을 전혀 알 리가 없기에 이상한 표정으로 둘을 응시했다.
"귀도 풍유혼이라고 했겠다? 좋아. 그를 부르지. 여봐라!"
쩌렁 쩌렁 울리는 외침에 문을 열고 무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복한
그에게 사욱천이 말했다.
"귀도 풍유혼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라. 지금 급히!"
"알겠습니다."
수하가 사라지자 사욱천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여운휘에게로
향했다. 그때 꼬마였었는데 이제는 훤칠한 장부가 되어 나타났다. 더군다나
무공 실력 또한 범상치 않아 보이니……
"그 날 난 사라지는 널 보며 십년 후를 기대했지. 분명 대단한 놈이 될 거
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소?"
"그래,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갔는지 난 여운휘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들
어본 적은 없다."
"진군휘라는 이름은?"
"……?"
"그게 나요."
"하하!"
사욱천이 시원하게 웃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예상
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군휘라면 현재 무림에서 강호십
일객의 팔황보다 높게 칠 정도의 인물이다. 돌연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눈
앞에 살아서 있다.
비단 놀랍지 않다. 죽은 줄 알았던 소교주도 살아온 마당에 무엇이 신기할
까.
"풍유혼이 오려면 시간도 걸릴 터."
사욱천은 옆에 올려놓았던 도를 들어올렸다. 강호십일객과 견주어지는 여
운휘와 무공을 겨루어 보고 싶은 게다.
어차피 옛날 본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비록 목숨이 건 대결
은 아니지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검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