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96) 회유(懷柔)
사마연은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렸던 아이다. 그가 마
지막으로 봤을 때 여운휘는 겨우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 그
랬던 꼬맹이가 지금은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릴 정도의 어른이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강한 무인이 된 듯 하다.
'저 아이는……'
사마연은 여운휘의 옆을 따라오는 인물을 바라봤다. 처음엔 덩치가 작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여자인 듯 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기에 사마연은 그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궁금한 게 산더미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끝도 없이 많다.
사심 없이 따라온 아이를 사지(死地)로 몰았다는 생각에 사마연은 오랜 시
간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여운휘가 살아있음에 사마
연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범한 행동에 죄책감이 그나마 줄어드는 느낌이었
다.
여운휘는 사마연을 부축한 채로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곳보다
자신들이 머무는 곳이 안전하기는 하지만 그곳까지 사마연을 데리고 간다
는 것은 무리다. 여운휘는 들어가자마자 방 하나를 잡고 사마연, 유설린과
함께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여운휘는 사마연을 침상 위에 앉혔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
아쉬었다.
여운휘가 진기로 내상을 어루만지었기에 아까 당한 부상도 이제는 버틸 만
하다. 사마연이 여운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꼬맹이가…… 많이 컸구나."
진기요상(眞氣療傷)은 막대한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마연 본인이 가
장 강했을 때조차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경지인 것이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니까."
"그래. 벌써 이십 년 가량이 흘렀군. 너와 마지막으로 본지 말이야."
"많이 늙었소."
"크흐흐, 네 말대로 시간이 흐르니 변하더군."
"아직도 술이오? 그때 나를 마교로 데리고 오면서도 쉬지 않고 마셔대더
니."
여운휘는 진기를 돌리면서 이미 사마연의 상태를 알아버렸다.
주독(酒毒)이다. 이미 술기운이 뼛골까지 스며들었다. 얼굴에도 붉은 반점
들이 슬쩍 슬쩍 보이는 것이 주독에 걸린 게 분명하다.
"팔이 잘려서 좌절한 무인에게 남는 건 술 뿐이었으니까."
사마연은 비어 버린 한 쪽 옷소매를 흔들었다.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
무덤덤 하기도 하련만 아직도 이 팔만 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렇게 되
기를 바랬던 것은 아닌데……
사마연은 곧 고개를 흔들며 앞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유설린이 걸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오. 지금 이 사람 때문에 살고 있지."
여운휘는 사마연의 눈이 유설린을 향하자마자 말했다. 그는 조금더 유설린
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세히 에서 봐서 그런데 여자 같은데…… 목소리도 그렇고."
"맞소. 비록 남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인이오."
그때 유설린이 사마연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작스러운 유설린
의 인사에 사마연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왠지 모르게 기품이 풍기는 인물
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절로 일어서 버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휘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전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꼬맹아 혹시 지금 보표를 하고 있는 게냐?"
보표란 사람을 지키는 무사를 일컫는 거다. 호위무사와 비슷한 개념이 바
로 보표인 것이다. 여운휘는 짧게 답했다.
"난 꼬맹이가 아니오."
"허!"
그 한 마디에 사마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어렸을 때
의 여운휘의 모습이 생각나 버린 것이다. 꼬맹이라는 말에만 여운휘는 민
감하게 반응했다. 꼬맹이가 아니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곤 했던 여운휘가
떠오른 것이다.
"그래. 넌 꼬맹이가 아니었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넌 애늙은이야. 어
린놈이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지. 아주…… 능구렁이라
고 생각했었다."
사마연은 과거의 회상에 잠긴 듯 잠잠히 가라앉은 눈으로 여운휘를 응시했
다. 사마연의 눈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아까 전 그가 했던 질문에 답했다.
"난 보표가 아니오. 비록 이 여인을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보표와는 조금
다르오. 무엇인가 대가를 받으면서 지켜주는 게 아니니까."
"돈으로 움직일 만한 놈은 아니었지."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은 물론 과거의 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 물어봐라. 내 아는 거라면 대답해 주지."
사마연은 벽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버티고는 앉아 있지만 허리를 세우
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히 버겁다. 이제는 무인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보
다도 못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그다. 술에 절어버린 몸이 이제는 사마연의
명령을 거부할 수준에 이른 것이다.
"현재 마교의 정세가 어떤지 물으려고 하는 거요."
"정세라…… 내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지. 마교의 위에서나 알만한 일을
내가 어찌……"
"그런 거라면 사마연 당신에게 묻지도 않았소.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이
술을 마시면서 이래저래 들은 무인들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요. 그들은
지금 마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거요.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가장 진
실 되어지지. 속내를 털어놓기도 하고 말이야."
사마연은 여운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그것이 왜 궁금하냐고 묻는 듯 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다 봤
지만 결국 고래를 흔들어 버린 것은 사마연이었다.
"졌군 졌어.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말해주지. 술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부분 불만뿐이지. 그들은 이 싸움이 끝나길 바라고 있네. 그들
은 무인이 아니니까. 겉으로는 마교의 승리를 원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들
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이 언제 끝나느냐 이지.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
고사는 그들에게는 마교나 무림맹의 싸움이 중요할 리가 없으니까."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왜 물었는지 궁금하지 않소?"
"궁금하지. 술 먹다보니 느는 건 수다 뿐이거든.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그거
만큼 좋은 안주가 없지. 하지만…… 그 안주 때문에 죽는다면 먹지 않는
게 당연하지."
"손은 죽었지만 머리는 죽지 않은 듯 하오."
"됐다, 꼬맹아.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따위 그만하고 이만 나가보거라. 분
명 할 일이 있을 텐데."
여운휘는 유설린을 바라본 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짧게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다시 찾겠소. 그때는 내가 술 한 잔 사지."
"흐흐, 어린 놈 코 뭍은 돈으로 술을 먹으라 이 말이냐? 어서 가거라. 네
놈은 나 같은 낙오자와 함께 할 녀석이 아니니까 말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길 빌어 주마."
말을 마친 사마연은 그대로 침상에 누워 버렸다. 여운휘가 계산을 해놨으
니 내일까지는 이곳에서 쉴 생각이다. 여운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 쪽을 향해 다가갔다. 막 문을 연 여운휘가 몸을 뒤로 돌렸다.
"사마연 당신은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소. 내 이름을 기억하시
오?"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던 사마연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잊을 리가 있느냐. 여운휘라는 그 세 글자를.'
그렇지만 정작 입에서는 다른 말이 터져 나왔다.
"나이를 먹어서 다 잊었다! 냉큼 가거라!"
여운휘는 몸을 돌려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문을 닫기 위해 손을 내
밀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
흠칫.
누워 있던 사마연의 몸이 다시금 꿈틀했다. 속내를 들켜버린 기분이다.
여운휘가 고맙다고 말한 것은 이유가 있다. 여운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십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잠시동안 함께 했던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고마웠
던 거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여운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여운휘가 문을 닫고 나간 후에야 사마연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능구렁이 녀석…… 귀엽지 않은 녀석……"
여운휘와의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그 날도 여운휘를 이렇게 보냈다. 사곡
에 여운휘를 떠나보냈을 때와 지금의 상황이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었
다.
'살아 나왔지.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곡에서.'
사마연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준비하는지는 모르지
만 분명 마교에 관련된 무엇일 것이다.
사곡에서도 살아 나온 여운휘라면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게다.
사마연은 모른다. 여운휘가 진군휘라는 사실을. 무림에 대해 관심을 끓은
사마연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진군휘라는 이름은 마교에 알려졌다.
혈무린이 마교에 있는 수뇌부들과 만나러 다녔다. 그 움직임은 결코 은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마에게 말을 해서 당당하게 만나러 가겠다는 의사
를 밝힌 것이다. 거사를 치르기 전에 그들과 한 번씩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일마에게 수뇌부들을 만나는 이유로 혈무린이 제시한 말이었다.
딱히 반대 할 이유도 없다. 마교 내부에서 혈교를 개입시킨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혈무린이 원래 마교의 인물이었
기에 쫓겨나면서 관계들이 얽혀 버렸다. 그 관계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풀
겠다는데 일마로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입장이다.
그렇게 혈무린은 여러 수뇌부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결코 수상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에 슬슬 일마의 관심도 완전히 끊겨
버렸다. 그렇게 사전작업을 한 후에 혈무린은 이빨을 들이밀었다.
오늘 만날 사욱천이 바로 거사의 첫걸음인 것이다.
평소대로 십 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거동하고 움직였지만 그 안에는 두
명이 섞여 있었다. 여운휘와 유설린이다. 유백명에게 충성했던 사욱천의 마
음을 움직이기 위해 유설린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유설린이 가면 여운휘가
함께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욱천의 거처에 이르자 무인이 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혈교 교주인…… 아니, 마교의 전 부교주였던 혈무린이 찾아왔다고 전하
게."
"알겠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여섯 명의 무인 중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다.
여운휘와 유설린은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 이곳에서의 거사가 성공해야지
계획 된 일이 수월해진다.
안으로 들어갔던 무인이 밖으로 나왔다.
"안으로 드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