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37)

수호령(守護靈) (295) 회유(懷柔) 

혈무린은 꽤나 바빴다. 

일마와의 잦은 만남도 그렇고 마교 안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그러했다. 

이미 준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섣불리 움직이기는 다소 

이른 감이 있어서다. 일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비록 혈무린을 믿고 있

는 듯 하긴 하지만 조금만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바로 어떠한 수를 낼 

수 있는 인물이다.

약 십일 간 마교 안에서 준비를 하던 혈무린은 몇 가지 확신을 안았다. 

목숨이 걸린 일이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지 않고서야 훗날도 없다. 애초부

터 목숨을 걸고 향했던 마교 행이다. 이미 정했던 일에 후회는 없다.

혈무린은 가장 큰 마교의 핵심적 인물과 만나려고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일마 다음으로 마교의 권세를 쥐고 있는 인물은 금천멸문대의 수장인 사욱

천이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절정무인들과, 단순히 무를 추구하는 그의 성

품에 많은 자들이 사욱천을 존경한다. 

더군다나 사욱천이라면 혈무린 또한 친분이 있었던 자다. 비록 한동안 왕

래가 끊겼다 하지만 충분히 만날 만한 명분이 있다.

사욱천에게 지금 마교의 상황을 말하고 그를 설득시키기만 한다면 마교의 

힘 중 반 정도는 돌아선다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일마를 밖으로 내보낼 

수만 있다면 그 후로는 일사천리다. 

"가서 말하게. 내일 나 혈무린이 사욱천을 찾아간다고."

"알겠습니다."

혈무린의 수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사라졌다. 그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움켜쥐었다. 고개를 수그렸지만 슬쩍 드러난 혈무린의 눈이 무섭게 

불타올랐다.

'친구여.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자네의 복수는 내가 해주겠네. 자네가 날 

고깝지 않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에겐 자네 만한 지기가 

없었으니까.'

혈무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유백명의 복수를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 비

록 자신을 쫓아낸 지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적은 없

다. 인생의 반 이상을 친구로 지냈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같이 뛰어 놀 수 

있는 지기였다.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다. 혈무린의 무공이 완성되었을 때 가장 먼저 술병

을 달고 달려 온 친구도 유백명이었다. 마교의 교주라는 사람이 칠칠맞

게……

"후후."

그 날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혈무린과는 다른 의미로 여운휘는 바빴다. 유설린의 옆에서 대부분의 시간

을 참선으로 보냈다. 오행검법을 익혔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유가의 정보에 

대해서도 들었다. 

유가는 우문학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일마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실상 그의 세력을 끊는 자들이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여운휘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침 일찍부터 오행검법을 

수련하던 여운휘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다소 심심해하는 듯한 유설린

을 보고 여운휘가 잠시 시간을 낸 것이다.

변장을 한 채로 그 둘은 건물에서 나왔다.

마교에는 무인도 있지만 일반인이 오히려 훨씬 많다. 사람이 사는 곳에 필

요한 것은 무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의 수가 무

인보다 훨씬 위다. 

여운휘는 유설린과 함께 조용히 마교 안을 걷고 있었다.

유설린에게도, 여운휘에게도 꽤나 마교가 낯설었다. 둘 다 오래 마교에 있

었지만 실상 제대로 밖에 나와서 구경해 본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유설

린은 최대한 말을 자제한 채로 사내 같이 움직였다.

목소리를 바꾸면 된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서다.

유설린은 여운휘의 옷소매를 꼭 잡은 채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여운휘가 나오자 해서 나왔으면서도 내심 마음이 불안한 듯 했다. 

유설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럴 시간 없는 거 아냐?"

"뭐가."

"지금 이럴 시간 없잖아. 상대는……"

유설린은 말을 멈췄다.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렇지만 그 정도로도 여운휘가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걱정 할 필요 없다. 난 너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거니까. 지금 순간이 행

복하지 않다면 훗날이 무슨 쓸모가 있나."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이 되니까."

말 대로다. 여운휘가 일마와 싸운다는 사실이 너무나 걱정된다. 

여운휘를 믿는다. 그 누구와 싸운다 해도 자신을 위해 이길 거라고 생각한

다. 그렇지만 일마가 어떠한 자인지 아는 유설린으로서는 쉽사리 답을 내

릴 수 없다.

여운휘는 녹포괴존에게 패했다. 비록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 

큰 차이는 메우기 힘들 것만 같다. 그런데 일마는 그런 녹포괴존보다도 강

한 고수다. 걱정이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계속해서 한다. 알겠다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 불안

한 생각이 든다. 여운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유설린을 힘들게 만

들었다.

여운휘가 죽는다면 마교 따위 필요 없다. 누구를 위한 마교인가. 복수를 하

고자 했지만 이제는 안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소중한 사람의 목숨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유설린은 이번 기회를 통해 알아버렸다.

"쓸 때 없는 소리. 너는 나를 믿고, 나는 너를 위해 싸운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이번 일이 끝나면…… 바다를 보러가자."

"응."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의 말에 걱정이 다소 사그라지었다. 그 

정도로 그를 믿는 탓이다. 

바다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는다 했다. 그렇

다면 여운휘는 절대 죽지 않을 거다.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여운휘는 유설린을 지키면서도 주변을 계속 살폈다.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

는 감시자의 눈을 찾기 위해서다. 다행히 혈교에서 준비해 온 완벽한 변장 

탓인지 자신들을 살피는 눈은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운휘의 눈이 한 곳으로 고정 된 것은 그

때였다.

퍽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마구 맞았다. 초라한 옷차림의 

인물은 그대로 반항도 하지 못한 차래 마구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었다. 

건장한 장정 넷이서 힘도 없어 보이는 한 인물을 흠씬 패고 있는 것이었

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여운휘의 눈이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스친 

초라한 노인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해서다. 더군다나 한 쪽

의 옷소매는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외팔이라는 소리다.

'사…… 마연?"

문득 떠오른 하나의 이름에 여운휘는 그대로 멈춰서 그 두드려 맞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정확하게 복부에 틀어박히는 주먹에 노인은 대짜로 쓰러

져 버렸다. 비록 엉망이 되긴 했지만 대충 얼굴이 분간이 갈 정도다. 여운

휘의 눈빛이 변했다.

"왜 그래?"

옆에서 함께 걷던 유설린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여운휘가 조용히 

턱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아는 사람이다."

"누가? 저 맞는 사람이 아니면 주먹을 휘두르는 자 중에서?"

"맞는 사람. 날 이곳에 데려온 자다."

"휘를?"

유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운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말이 어

떠한 의미인지 아는 탓이다. 여운휘는 성큼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여운휘의 손이 막 쓰러져 있는 사마연의 복부에 발길질을 하는 사내의 어

깨에 닿았다. 여운휘의 손길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만하지."

"이 미친놈이 어디서……"

사내가 재빠르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다가 여운휘의 허리에 차져있는 검을 

보고는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비록 주먹질은 좀 하는 자들이었지만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니었다. 

이곳은 마교다. 섣불리 어설픈 파락호들이 설치고 다닐 곳이 아니라는 소

리다. 사내 넷은 여운휘의 모습을 보고 급히 그 자리를 떴다.

여운휘가 조용히 사마연을 내려다 봤다. 실제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겠지만 십 몇 년 전에 비하면 상당히 늙은 모습이다. 사마연은 누운 채

로 마구 기침을 해댔다. 이미 얼굴은 피투성이다.

여운휘는 조용히 사마연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꽤나 많이 맞은 듯 

하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자들 같은데 이토록 맞은 것에 의문을 

가졌는데 몸을 보니 이제 이해가 간다. 무공을 완전히 잃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몸의 진기는 끊어질 듯 약하고 몸에는 근육이라곤 없고 온통 살

덩어리다. 

오랜 시간 검을 잡지 않았다는 소리다.

"흐흐!"

사마연이 눈을 감은 채로 음침한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여운휘가 사마연의 

진기를 돌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어날 수 있겠소?"

"됐다. 내 갈 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쿨럭, 쿨럭!"

사마연은 몸을 비틀면서 연신 기침을 해댔다. 유설린은 옆에서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 노인이 없었다면 여운휘와의 만남은 불가능

했다. 어떻게 본다면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라고까지 볼 수도 있지 않겠는

가.

여운휘가 손을 내려 사마연을 일으켜 세웠다. 사마연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놔라! 내 비록 약해졌다 하지만 본 적도 없는 자의 동정 따위는……"

"나 또한 남의 몸에 손대는 것은 좋아하지 않소. 당신 또한 그 정도는 알

텐데."

"…… 무슨 말이냐?"

사마연은 힘겹게 눈을 뜨고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는 단박에 

여운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릴 적의 모습은 한평생을 등에 지고 살아

가려는 듯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열 살 짜리 어린아이의 성장한 모습까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마연은 자신을 부축하고 걷는 이 사내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사마연은 힘겹게 눈을 뜨고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기는 한데……

흠칫.

사마연은 눈을 보는 순간 멈칫 해 버렸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눈동자

만은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기이한 마력을 

가진 눈. 그리고 사마연이 기억하기에 그런 인물은 하나밖에 없다.

"넌…… 혹시 그때 그 꼬맹이……"

말을 하면서도 사마연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기로 사곡에 

들어갔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운휘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사마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오."

"마, 말도 안 돼! 분명……"

"쉿. 할 이야기가 있다면 이따가 하시오. 지금 이곳에서 떠들어도 될 처지

는 아니니까."

여운휘의 그 말에 사마연은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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