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94) 회유(懷柔)
회유(懷柔)
일마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혈교가 지금 이곳에
당도했다는 것이다. 무인의 숫자는 무려 삼천 명 이상이다. 그것도 뽑고 뽑
은 정예들이라고 하니 기본 적으로 어느 정도는 된 무인들일 게다. 이 정
도라면 혈교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온 거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일마는 당장에 혈무린을 반기러 밖으로 나갔다. 혈교의 무인들은 마교 바
로 밖에서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던
일마는 혈무린의 모습을 발견했다.
일마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끼이익.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마는 아래로 뛰어 내
려 문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혈교의 무인들도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혈무린이 포권을 취했다.
"오셨습니까?"
"이렇게 손수 마중까지 나올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저는 혈 교주님께서 이만한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
니다. 삼천에 달하는 무인이라니……"
실제로 일마는 이만한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천 명 정도의 무
인이라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교를 사람들은 십만마교라 부른다. 하지만 그 십만이라는 거대한 숫자
안에는 마교 내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실제로 무인의 수
는 그 반의 반도 되지 않고 또 그 중에서 쓸 수 있는 자들은 오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만한 무인이라면 분명 혈교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떠
나 사활을 걸었다 해도 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무리를 이끄는 것은 혈
교의 교주인 혈무린이다.
"나 또한 이 일을 성공하길 바라니까."
"어쨌든 안으로 드시지요. 이 정도 인원이라면 묶는 곳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 합니다."
"진린 당신이라면 불가능 한 일은 분명 아닐 게요."
"물론이지요."
일마는 씨익 웃었다. 이만한 무인들이라면 마교의 일부를 아예 때어주고
지내라고 해도 결코 아깝지 않다. 무인들을 슬쩍 슬쩍 바라보던 일마는 이
들이 결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말을 마친 일마는 혈무린의 옆에 나란히 서서 마교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혈교의 무인들이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행렬이 길었는지 그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 무인들 안에서 몇 개의 눈이 번쩍였다.
'저 자가 일마?'
남장을 한 유설린은 그래도 그 미모가 쉽사리 감춰지지 않았다. 물론 수많
은 무인들 틈에 끼어서 결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누가 본다 한들 쉽사
리 눈을 돌리기 힘들 외모임은 분명하다. 그녀는 처음 본 일마의 모습을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저기에 있다. 아버지를 죽도록 계책을 꾸민 것도,
어머니를 죽게 한 것도 저 자의 손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아마 저 자만 없었다면 지금 유설린은 마교 안에서 아무런 것도 모
른 채 살아왔을 것이다.
일마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설린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혔
다. 유설린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운휘가 있다.
"가자."
"응……"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
지만 무서운 눈빛을 빛내는 우문학이 옆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이
제는 무진이라고 자신을 불러달라는 남궁진이 있다. 그리고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이 꽤나 먹어 보이는 무인들 틈에 변장을 하고 있는 풍운조
도 함께다.
유설린의 발이 천천히 문을 건너 마교 안으로 들어섰다.
이 길을 그토록 걷고자 했다. 자신의 발로 반드시 돌아오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왔다. 유설린의 아버지인 유백명의 마교로!
'이제부터 시작이야.'
반드시 되찾고야 만다. 마교를 아버지를 죽인 일마에게 넘겨줄 마음은 절
대 없다. 혼자라면 불가능하다. 그녀는 힘이 없으니까. 하지만……
유설린은 옆에서 따라 걷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이곳까지 오는데 이 사내
가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게다. 아니, 애초부터 마교를 벗어나는 것조
차 불가능했을 게 분명하다.
유설린은 여운휘의 얼굴을 바라보며 걷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어깨
에 올려져 있는 여운휘의 손을 감쌌다.
여운휘가 갑작스러운 유설린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유설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곳까지 함께 와 줘서 고마워."
"…… 약속이니까."
여운휘는 멋쩍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미 여운휘와 유설린은 마교로 돌아왔
다. 여운휘가 한 약속대로. 이제 남은 것은 마교를 되찾는 것뿐이다.
방은 꽤나 컸다. 이미 사전에 예정된 대로 방에 배정 된 넷은 유설린 일행
이었다.
유설린과 여운휘, 그리고 남궁진과 우문학 이렇게 넷이 한 방에 있게 됐다.
가장 구석에 있으면서 방음도 좋다. 아마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해서 이 방을 배정한 모양이다.
가볍게 짐을 정리하면서 여운휘를 비롯한 우문학과 남궁진은 주변을 살폈
다. 아무도 감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연락을 해놨습니다. 유가도 움직일 겁니다."
우문학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유설린에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남궁진이 물었다.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유가의 힘이 어느 정도입니까?"
"화산파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전 교주이신 유 교주님이 이십 년도
전에 만들었으니까."
"대단하군요."
남궁진은 놀랍다는 얼굴로 우문학을 바라봤다. 이것저것 몰랐던 일 투성이
다. 그저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만으로 알고 있었거늘 그 뒤에 숨겨진 싸움
이 보통을 넘어선다. 유설린과 여운휘의 일만해도 놀라운데 일마도 이 일
에 개입되어 있다. 더군다나 마교의 실세가 오히려 일마라는 사실은 남궁
진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유가의 힘이 구파 일방 중에서도 수뇌를 차지하는 화산파 정도의
수준이라니……
우문학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아직 일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왠
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모든 것을 포기했었던 탓이다. 끝났다고, 어떻게든
유설린만은 살리는 걸로 이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했던 우문학으로서는 지
금이 꿈만 같다.
마교를 되찾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이다.
유가도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문학이 무림맹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유가만은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세력만큼은 살려두
기 위해서다. 물론 죽은 듯 잠잠하게 사라졌던 유가였지만 이번 거사가 벌
어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곧 일마의 남은 세력들도 끊어지게 될 것이다.
완전한 고립이다. 그렇게 되면 일마로서 남는 것은 혈교 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혈교는 일마의 가장 큰 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일마를 제압하는 것, 그를 살려두면 후환이 된다.
"일마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헌데 그를 제압할 만한 고수가 우리 쪽
에는……"
머릿수로는 충분히 압도 할 수 있지만 일마 자체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이
쪽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하지."
"자네가?"
우문학은 여운휘를 보면서 반문했다.
비록 그가 강하다 하지만 일마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
각한 것이다. 차라리 여운휘와 혈무린, 그리고 그 외의 고수 몇 명이 협공
을 하는 것이 낫다고 우문학은 생각했다.
"협공이 낫지 않겠는가?"
"무리야. 혈무린이 강하다 하지만 그가 상대라면 못 버텨. 금방 무너져 버
릴 거다."
"하지만 자네 혼자 보다는……"
"아니. 오히려 혼자가 낫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쉽사리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고. 차라리 끼지 말고 보고 있다면 모를까 여럿이라고 해도 결코 그
게 이득이 되지 않을 상대다."
여운휘는 일마와 겨루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지금
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은 오행검법을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지만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이미 혈 교주와도 이야기는 끝났다. 유가의 움직임과 맞춰서 일마에게 서
신을 보낼 거다."
"일마에게 무슨 내용의 서신을 보낸다는 말인가?"
"나와 붙자고."
"뭐?"
"일마는 내가 상대한다. 그리고 일마가 밖으로 나온 동안 마교의 정리가
시작된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다.
동쪽을 공격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한다는 계책이다. 한 마디
로 상대방을 혼란시킨 후 허를 찌르겠다는 소리다. 하지만 문제는 일마가
그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여운휘가 그 자리에서 죽어서
도 안 된다.
"가능하겠는가?"
"해보지 않고서는 장담할 수 없지. 하지만 성공하면 모든 게 끝이다."
여운휘는 도전을 하려고 한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한 달 안에 일마와 싸우
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오행검법을 모두 익혀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오행
검법으로 일마와 상대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일마는 내 손에 죽을 거다. 그리고 그 후엔…… 내가 천하제일인이다."
여운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