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91) 구출(救出)
여운휘의 생각도 사무린과 마찬가지였다. 부상을 당한 우문학이 감당하기
에는 너무나 큰 힘이기에 여운휘는 급히 검을 움직였다. 사무린이라면 유
설린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이미 여운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무린을
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벌일 여인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십
몇 년 전에 알았다.
'칫!'
여운휘는 등뒤로 다가오는 사무린의 검을 알아차렸다. 애초부터 예상은 했
지만 너무나 빠르다. 강호십일객 수준의 무인에게 등을 보였다는 것은 분
명 치명적이다.
여운휘는 급히 검을 거꾸로 잡았다. 등을 돌리다가는 오히려 가슴이 베인
다. 여운휘의 검이 겨드랑이 쪽으로 뒤로 빠져나갔다. 이번에 놀란 건 사무
린이다.
검이 정확하게 어깨를 노리고 튀어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사무린은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지금 뒤로 물러선다면 오히려 공격당하게 될 게 분명하
다. 사무린은 어깨에 싸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 미묘한 감촉이 일었다.
'베었어!'
그러나 여운휘의 몸 또한 비틀렸다. 사무린은 어깨에 이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검이 어깨에 완전히 틀어 박혀 버렸다. 사무린은 몸을 돌리는 여
운휘의 가슴에 그대로 손바닥을 쳐냈다.
퍼엉!
여운휘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갔지만 사무린은 재차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땅에 무릎을 꿇었다.
왼쪽 어깨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무린은 천천히 피에 젖어버린 어깨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면 여운휘는 멀리서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이 베였고, 고스란
히 가슴으로 일장을 받아냈지만 오히려 사무린의 부상이 더 컸다.
한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죽어? 이 내가?'
사무린의 검이 붉은 요기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의 그것
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검강이다.
장기전으로 끌어 봤자 좋은 건 여운휘다. 사무린은 많은 내공을 소모한다
해도 한 방의 위력이 있는 검강을 택했다. 그에 반해 여운휘는 그저 검을
옆으로 살짝 눕혔다. 여운휘의 몸에서는 일말의 내공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사무린의 심기를 건드렸다.
"날…… 우습게 보지 마! 당장 검에 내공을 집어넣어! 안 그러면 넌 이번
에 죽어."
"죽여봐. 넌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내 아래야. 알겠나 사무린?"
"개자식이!"
사무린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검에 휩싸인 붉은 검강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반면 여운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실
상 여운휘는 지금 사무린에게 자신이 지금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를 선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오행검법을 완벽하게 익히면 그저 검을 드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진법이 펼
쳐진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검을 이
용해 억지로 진법은 펼쳐 낼 수 있다.
여운휘의 검이 허공 위를 가볍게 움직였다. 사무린으로서는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꽃…… 잎?'
분홍색 꽃잎이 갑작스럽게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방에
있던 지형들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무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운휘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여운휘뿐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사라졌다.
분홍색 꽃잎이 마구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무린은 다리를 멈췄다. 갑작스러
운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멍하게 있던 사무린의 눈동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무턱대고 뒤
로 몸을 날렸다. 그렇지만 사무린의 입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해내면서 땅을 나뒹군 후에야 사무린의 눈앞에 있던 환상들이 사라
지기 시작했다. 분홍색 꽃잎도, 알 수 없는 주변의 경관들도 모두 사라졌
다. 남은 건 볼품 없게 나뒹구는 자신과 그런 사무린을 내려다보는 여운휘
다.
사무린은 소매로 피를 닦아냈다. 더 이상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무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운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여운휘는 제
왕검을 들어 올렸다. 사무린과의 지독한 악연을 끊을 때가 온 것이다.
"호호, 대단하네. 난 아무리 죽어라 노력해도 항상 네 뒤야. 네 말이 맞아.
난 아무리 강해져도 너 다음이었지."
"내 검에서 무엇을 봤지?"
"꽃잎. 분홍색 아름다운 꽃잎."
"…… 그렇군."
여운휘는 약간 의외라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무린의 얼굴에 미소
가 걸렸다.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섬뜩했던 예전의 웃음이 아니다. 모든 걸
포기한 자가 짓는 달관한 미소다.
"뭐야? 그 알 수 없는 꽃잎은."
"내 검이다."
"정말…… 하늘은 불공평해. 천부적인 재능도 모자라 그런 검법까지 주면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는…… 평생 달려도 쫓아갈 수 없잖아. 호호호!"
사무린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의 조무래기들은 당장 멈춰라!"
다소 늦긴 했지만 혈교에서 보내준다던 무인들이 도착한 것이다. 살황도,
살수들도 모두 검을 내려야만 했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 더 이상은 싸워봤
자 답은 내려진 것이다.
그나마 유리했던 머릿수마저도 이제는 밀리는 형편이다.
사무린의 눈이 주변을 한 번 훑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는 분위기다.
사무린과 눈이 마주치자 여운휘는 제왕검을 들어올렸다. 단숨에 숨을 끊어
주려는 것이다. 여운휘의 사무린에게 물었다.
"마지막 할 말 있나."
"살고 싶었어…… 천하제일의 무인으로."
여운휘는 잠시 사무린을 내려다보다가 검을 들어올렸다.
"편하게 보내주마."
여운휘가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유설린의 소리쳤다.
"휘, 베지마!"
막 사무린의 목까지 닿았던 검이 멈추었다. 사무린의 몸이 움찔했다.
"뭐지?"
"죽이지 마. 사무린은."
"널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일마의 수족이기도 하지."
"알아, 알지만……"
유설린은 사무린을 바라봤다. 피투성이인 채로 그녀는 땅에 쓰러져 있었다.
평소 유설린이 알던 사무린은 화려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
"비록 반년이지만, 그리고 거짓이었지만 날 살펴 준 사람이야. 죽이지 말아
줬으면 해."
"그렇지만……"
"내 복수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목숨이 죽는 건 싫어. 부탁이야,
휘."
여운휘의 눈이 유설린에게로 향한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여운휘는 곧
사무린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때냈다.
"고마워. 내 부탁을 들어줘서."
여운휘는 사무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
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무린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늦었소! 미안하오."
여운휘의 옆에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에 잠시 동안 같이 행동하
던 비적이다. 그가 이번에도 유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여운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됐다. 이 안에 정리 좀 부탁하지."
"알겠소. 그런데 이 여인은……"
비적이 사무린을 가리키며 묻자 여운휘가 간단하게 답했다.
"그냥 둬. 잡아가지도 말고, 알아서 하게 그냥 내버려 둬."
"그리하겠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비적은 몸을 날렸고 여운휘도 몸을 돌려 유설린을 향해 다가갔
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여운휘가 멈췄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일마에게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 어차피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
었으니까. 가서 말해. 내가 살아 있다고. 조만간 만나러 가겠다고 말이야.
이번엔 살려주지만 다음에 만나면…… 죽는다."
"……"
사무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여운휘도 대답
을 바랬던 것이 아니기에 그냥 그렇게 유설린과 우문학을 비롯한 자들과
모습을 감췄다. 장내는 비적이 이끄는 혈교비적사(血敎飛寂死)가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누워 있는 사무린을 건드리지 않았다. 한 명씩 사라지
다가 마침내 장내는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피를 흘리며 누워 있던 사무린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드디어 목소리가 세
어 나왔다.
"호, 호호호! 깔깔깔!"
사무린은 미친 듯이 웃었다. 살았다, 정말 운이 좋았지만 살아 난 것이다.
숨이 붙어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렇지만 사무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기쁘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사무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를 많이 쏟아서 순간 비틀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걸었다. 떨어트린 검을 향해 눈도 돌리지 않았다.
망가진 건 어깨만이 아니다. 용기도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검을 들 수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사무린은…… 무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