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89) 구출(救出)
말을 마치자마자 여운휘의 몸이 공청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수답게 날렵하
게 몸을 날려 여운휘의 공격을 피했지만 곧 날아든 공격이 허벅지를 스쳤
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공청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급히 뒤에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대기하고 있던 스무 명 가량의 살수들이 각종 공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던 여운휘는 그저 검을 일직선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날아
들던 암기들과 무기들이 모두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으악!"
피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혹은 동료가 던진 암기에 적중 당하면서 쓰러
졌다.
공청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 같은 상황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 쉽게 반 수 정도가 쓰러져 버렸다. 암기들에 독이 묻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독에 당한 지문육가의 살수들은 다시 일어서지를 못했다.
혈리추검 공청은 허탈한 듯이 웃었다.
그 어떠한 수를 쓴다 해도 이길 수 없다. 공청이 여운휘를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무리 봐도 이길 수 없을 듯 하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절초를 펼치지.
예전에 기억나나? 내가 수라지혈(修羅之血)이라는 암기술을 펼쳤지."
"그리고 깨졌지."
"그래. 부끄럽지만 그때 수라지혈이 깨졌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지.
그때는 일 수에 서른 두 개의 비수를 던졌지만 이제는 오십 개 모두를 던
질 수 있네. 어떠한가 한 번 막아보겠는가?"
여운휘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공청은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수라지혈을 만들었던 자를 제하고는 살령대의 대주 중 오십 개를 한 번에
쏟아낼 수 있는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청
또한 오십 개 모두를 한 번에 던지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금이 그 절초를 완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어떠한 공격도 먹히지 않는다면 도박을 해보는 게 낫다. 그가 고함을
질렀다.
"간다! 수라지혈!"
붉은 빗줄기가 사방을 에워싸면서 날아들었다. 공청은 암기를 모두 던져내
는 순간 탄성을 토해냈다. 목숨을 걸고 펼친 수라지혈이다. 그리고 생전 처
음으로 오십 개의 암기 모두를 터트렸다.
일말의 기대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운휘도 움직였다. 그의 검이 느린 듯 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탕! 타앙! 탕탕!
여운휘의 검이 멈추자 공청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해 보였다. 성공했기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여운휘가 막아 버린 것이다.
공청이 눈을 감았다.
"베게."
여운휘는 망설임 없이 공청의 목을 베어 버렸다.
호남제일살수인 혈리추검 공청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안에 있던 살아 있는 살수들이 모두 밖으로 움직였다. 아마도 살황과 백면
귀황 풍운조와의 대결 탓이리라.
여운휘 또한 그 결투를 보기 위해 우문학과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유
설린과 함께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
"왜…… 나에겐 검을 휘두르지 않죠?"
사무린이다.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꽤나 분해 보이는 얼
굴로 사무린이 여운휘를 노려봤다.
여운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사무린은 여운휘를 향
해 몸을 날려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거죠? 왜 나에게는 검을 휘두르지 않냐고 물었어
요."
"너에겐 검을 휘두를 가치도 없으니까."
여운휘는 가볍게 대꾸했다. 사무린은 그 말에 상당한 충격을 먹었는지 뒤
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다인가요?"
"그래."
말을 마친 여운휘는 우문학과 유설린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혼자 남은 사무린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머리
를 때렸다. 평생 여운휘를 보면서 살았다. 그를 추월하고자 무공에 더욱 정
진했고 다른 수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막상 당사자에게 검을 휘두
를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들어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여운휘의 알 수도 없는 기도에 몸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할
말이 없다. 여태까지 달려온 모든 길이 거짓인 것만 같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사무린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에서는 백면귀황과 살황의 싸움을 보는 여운휘가 있었다. 사무린이 그
런 여운휘를 향해 소리쳤다.
"날 봐! 날 보란 말이야! 여운휘!"
그 고함소리에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사무린을 바라봤다. 그 차가운 눈빛
에 움찔했지만 사무린은 곧 마음을 다잡았다.
"덤벼. 죽여줄게."
미소로 자신을 치장하던 사무린이 사라졌다. 항상 속마음을 감추던 사무린
이 사라지고 진짜 그녀만이 남았다.
항상 하던 존대도 사라졌다. 애초부터 존대 따위를 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그저 상황에 맞게 그렇게 변한 것뿐이다. 살기 위해 바꾸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꼬맹이 주제에 잘난 척이나 하고……"
사무린이 침을 뱉었다. 평소 그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사곡에 잡혀가게 되면서 사무린은 자신의 모습을 바꿨다. 원래의 성격으로
산다면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틱틱 거리는 여인을 좋아하는 남
자는 그리 없다.
그래서 미소라는 가면으로 본모습을 감췄던 그녀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마음이 없다. 사무린은 검을 뽑았다.
"와봐. 네가 강해졌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싸운
것처럼 나 또한 목숨을 걸고 강해졌어. 언제나 네가 위에 있을 거라는 생
각을 버려."
여운휘가 몸을 돌렸다. 그는 사무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곧 여운휘는 멈춰 섰다. 유설린이 옷소매를 붙잡은 탓이다. 막 만난 여운휘
가 마치 꿈처럼 느껴져서다. 이대로 놓는다면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
각 때문이다.
"곧 끝내고 올게."
여운휘는 우문학에게 슬쩍 눈짓을 하고는 사무린의 앞으로 걸어왔다.
사무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운휘가 제왕검을 뽑았다.
"이렇게 검을 겨누게 될 지는 몰랐다."
"넌 그랬어? 난 아닌데. 난 너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넌 내 손에 죽을 거
라고 생각했지."
"우습군. 하지만 마음에 든다. 항상 나에게 보였던 그 모습보다는 훨씬
더."
"칭찬인가? 그럼 고맙고."
혈루검법은 이미 대성한 상태다. 다만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뿐이지
이론적으로나 모든 것은 완벽하다. 그 위력의 반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한
다 뿐이지 사무린의 검은 맹수의 이빨처럼 날카로워졌다.
'오래 끌면 내가 죽어. 속전속결이야.'
비록 호기롭게 검을 겨누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의 실력이 여운휘의 위라고
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항상 무공 실력만으로 결판이 나는 것
은 아니다.
사무린은 길게 숨을 내쉬며 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검날이 붉게 물들기 시
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운휘는 내려트렸던 제왕검을 조금 움직였
다. 예전에 알던 사무린이 아니다. 강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 이
상이다.
'방심하면 질지도 모른다.'
풀어졌던 긴장이 바짝 조여지기 시작했다. 만만하게 봤는데 그렇게 쉬운
상대는 아니다. 믿기 어렵지만 체감하는 그녀의 실력은 강호십일객 수준이
다. 겨우 자세 하나만으로 여운휘는 사무린의 무공을 판단한 것이다.
"강해졌군."
"고마워. 그렇지만 곧 이 힘을 저주하게 될 걸. 넌 나한테 죽을 테니까!"
붉어진 검이 긴 꼬리를 남기며 여운휘에게 날아들었다. 황금색 빛을 토하
면서 제왕검 또한 하늘을 갈랐다.
쿠웅!
두 개의 검이 부닥치자 쇠 소리가 아닌 뭔지 모를 묵직한 음성이 사방을
울렸다. 둘이 격돌한 주변에 있던 땅들이 흔들리는 듯 했다. 땅이 움푹 파
지면서 튕겨 올랐다.
공중으로 솟구친 두 명이 검을 맞댄 것이다.
캉캉!
여운휘의 상단에 이은 찌르기를 사무린은 용케 검을 휘두르면서 자기 쪽으
로 끌어들였다.
사무린의 검을 든 오른손과 왼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은 가슴을 노리고
손바닥은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검을 피하기 위해 공중에서도 몸을 비튼 여운휘의 복부에 정확하게 사무린
의 손바닥이 와 닿았다. 여운휘는 가볍게 몸을 뒤로 물렀다.
퍼엉!
강력한 소리와 함께 여운휘가 뒤로 밀려나가며 떨어졌지만 그 피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무린 또한 잘 알고 있다.
사무린의 검이 원을 그렸다. 그런데 검이 지나가는 자리에 붉은 환영이 남
았다. 그것은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혈루검법이라는 이름답게 검이 붉은
눈물을 흘렸다.
조그만 돌들이 마치 강한 돌풍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밀려나가기 시작했
다.
검(劍) 대 검(劍). 무인(武人) 대 무인(武人).
지독했던 악연이다. 어떻게 보면 또 그만큼 인연인 사이도 없다.
우습게도 가장 증오하는 상대이지만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한 자도 그다. 우
습게도 여운휘가 없었다면 사무린은 사곡에서 살 수 없었다. 처음 그녀는
한없이 약했다. 여운휘의 옆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죽었을 게다. 죽어도
아주 예전에.
그렇지만……
'죽여야 해.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어.'
사무린은 여운휘를 안다. 이토록 이빨을 들어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민 상대를 살려 줄 정도로 여운휘는 넉넉한 사내가
아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땀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혈루검법의 위력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깨우친 사무린이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내 앞에서는 떨림을 멈출 수가 없다. 지금도 온 몸의 신경들이 쭈뼛
거린다.
섣불리 움직이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