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37)

수호령(守護靈) (287) 구출(救出) 

어떻게든 밀어내야 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몇 명이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그다지 빼어나지 않은 상대들이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

다. 그렇지만…… 수가 압도적으로 밀리는 지금 도저히 이길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혈풍구룡검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능려운 또한 밀려도 예전에 밀렸을 것이다. 간신히 자리에 버

티고 있는 것은 우문학이 전수해준 혈풍구룡검법 덕분이다. 

그 기기묘묘한 변화를 가진 혈풍구룡검법은 겨우 이류 정도의 무인들이 쉽사리 상대할 만한 것

이 아니다.

어떻게든 유설린을 구해야 하는데…… 그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데리고 도망을 가야 하

는데……

능려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유설린뿐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능려운은 그녀를 구할 힘이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밀린다면 탈출로를 잃게 된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능려운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

다. 오로지 악으로 능려운은 버텼다.

어느새 몇 없던 악양유가의 무인들도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칼들이 미칠 듯이 춤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빨간 피가 가득 수놓였

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캉!

검과 검이 부닥치는 순간 능려운이 뒤로 밀려났다. 손아귀가 얼얼하다. 더 이상은 검을 쥐고 있

을 힘조차 없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마치 안개가 낀 듯 하다. 

이제는 주변에 그나마 남아 있던 무인들도 쓰러져 버려서 홀로 남은 것만 같다. 그 증거로 자신

을 공격하던 무인들의 숫자가 월등히 증가했다. 능려운은 이마를 닦았다. 

흰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수많은 공방 중에서 머리에 일격을 당했다.

능려운은 거칠게 숨을 쉬었다.

"헉헉……"

앞에 있던 커다란 덩치의 장정이 주먹을 휘둘렀다.

황소의 머리통이라도 단숨에 부숴 버릴 것만 같다. 능려운은 그 공격을 용케 피해냈지만 그대로 

복부에 무릎이 틀어박혔다.

"우웩!"

한 사발 피를 토하면서 능려운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몇 명의 무인이 

달려들었다. 

능려운의 흐릿한 눈 속에 수많은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빠

져버렸지만 한 여인을 생각하는 순간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는 여인이다. 아름답고, 마음은 비단결 같다. 웃을 때는 마치 하늘에서 선

녀가 강림한 것 같을 정도로 화사하고, 그 모습만 보면 심장은 미칠 것만 같이 두근거렸다.

미칠 듯이 사랑했지만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봐주지 않았다.

여운휘라는 사내. 그만을 바라보던 여인이다. 

능려운의 몸이 마치 쓰러질 듯이 땅으로 숙여졌다.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사방에서 달려들던 무

인들은 그대로 등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순간,

"허엇!"

"피햇!"

몸을 굽힌 상태에서 능려운의 몸이 갑작스럽게 돌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왔던 사내의 몸이 미칠 

듯이 이는 검의 소용돌이 속에서 찢겨져 나갔고 그밖에도 주변으로 다가왔던 자들이 뒤로 튕겨

져 나갔다.

순식간에 세 명이나 되는 자가 재기불능의 부상을 입었고 다섯 명은 피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팍!

능려운은 검을 땅에 꼽았다.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것이다.

능려운의 눈이 붉게 변했다. 핏줄이 터져 버린 탓이다.

'그러면 어떻다는 말이냐…… 그녀가 나를 보지 않는다 해서 내 마음은 변함이 없거늘.'

여운휘의 모습도 떠올랐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해달라고 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욕심 탓에 

결국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능려운은 땅에 박힌 검을 뽑아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사물들이 온통 붉게 보인다. 그렇지

만 아무도 섣불리 그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방금 전 그 가공할 일수에 놀라 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이 능려운이 할 수 있는 혼신의 일격이었다.

'미안하오. 내 악행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리시는 모양이오.'

천벌을 받을 만 했다. 그토록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야 말았다.

죄를 지었다면 의당 벌을 받아야 하는 법. 그렇지만 그것이 유설린에게까지 미치기는 능려운은 

원치 않았다. 

능려운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는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는 오기만이 머릿속을 가

득 채웠다. 그것이 그가 유설린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서서 사방을 바라보던 능려운을 향해 마침내 누군가가 검을 휘둘렀다.

쾌검을 익힌 자로 검은 정확하게 능려운의 심장을 노렸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져 버린 능려운으

로서는 간신히 몸을 비트는 것이 전부였다.

검이 심장은 빗겨갔지만 가슴을 꿰뚫었다. 

능려운은 검을 뽑아내려는 상대의 양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악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

이 흘러내렸다. 

몸 속에 있는 장기들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제는 살 수 없다.

그는 붉게 물든 눈으로 자신을 찌른 상대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는지 상대는 계속

해서 검을 뽑아내려 했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내가…… 내가!"

능려운의 고함에 스리슬쩍 다가오던 자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죽음을 각오한 능려운의 

몸에서 무서울 정도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이류 정도의 무인들에게 그것은 공포스럽게 다가왔

다.

능려운이 천천히 입을 땠다.

"…… 악양유가의 수문장 능려운이다. 날 베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

다."

말을 마친 능려운은 그대로 앞에 있는 상대의 안면에 박치기를 해 버렸다.

빠각!

"아악!"

머리통이 사내의 안면을 정확하게 으깨버렸다. 

낭인이었을 적 능려운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던 것이 바로 머리다. 정신이 혼미해지자 그는 예

전의 버릇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싸운 무인인 혈산랑(血山狼) 좌청을 쓰

러트릴 때도 이 박치기를 사용했다.

능려운은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피가 콸콸거리면서 쏟아졌지만 이미 그런 것은 능려운에

게 아무런 방해거리도 되지 않았다. 당장에 쓰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이끌고 능려운이 검을 휘두

르기 시작했다.

순간 주변에 있던 자들은 당황했지만 곧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발악이었을 뿐이다. 검은 허공을 휘저었고 그 위력 또한 형편없었다. 잠시 능려운의 기백에 눌렸

던 그들은 자신 있게 자신들의 병기를 휘둘렀다.

검 하나가 어깨에 박히는 순간 몽둥이가 복부를 때렸다. 능려운의 몸이 마구 굴러 벽에 부닥쳐 

간신히 멈췄다. 

고개만 간신히 기댄 채로 능려운은 앞을 바라봤다.

수많은 무인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시야를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들의 얼

굴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증이 꿈틀거린다.

비웃고 있을까? 아니면 조심스러워 하고 있을까?

능려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죽을 마당에 다른 사람의 표정 따위가 왜 궁금하단 

말인가. 이제는 가슴을 관통한 검상에 대한 고통도 천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도 힘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설린이다.

'어떻게든 살아나셔서 행복하십시오……'

그 후에 떠오른 것은 예상외의 인물이다. 우문학도 아니고, 낭인 시절 함께 하던 동료도 아닌 여

운휘가 떠올랐다.

그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다음 생에는 내 당신의 종이 되어서라도 이 죄를 갚도록 하겠소. 정말 미안하오.'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눈꺼풀을 막 닫으려는 순간 뿌연 시야로도 확인 할 수 있

는 일이 벌어졌다.

파앙!

단 일장에 주변에 있는 무인들이 나뒹굴었다.

뿌옇게 변하던 시야가 일순간 뚜렷해지면서 죽립을 쓴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능려운은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그 죽립을 쓴 사내의 모습

을 보는 순간 능려운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아아!"

평생을 등만 보고 달려왔던 사내다. 그리고 죽는 지금까지도 이 사내는 자신에게 등만을 보이고 

있다. 몸을 돌린 채로 달려드는 상대에게 일장을 휘날리는 사내. 이 엄청난 무위에 능려운은 마

음을 빼앗겼다.

자신을 이 같이 만든 상대들을 얼마 되지도 않아 쓰러트리는 무위에 능려운은 숨쉬기가 힘든 이 

순간에도 질투와 경외감이 일었다.

숨 몇 번 쉬는 동안 주변을 정리한 사내가 다가와 능려운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죽립

에 감춰진 사내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예상은 적중했다.

"괜찮나?"

마치 꿈 같다. 지금 이렇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예전처럼 웃고 있던 소가주와 그녀를 지키는 여

운휘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능려운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든 아니든 이 말을 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다.

"소, 소가주님을 부탁하오. 그리고…… 미안하……"

채 말도 끝맺지 못하고 능려운의 고개가 떨어졌다. 

여운휘는 급히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운휘는 품에 안고 있

던 능려운은 천천히 눕혔다. 

웃고 있다. 죽은 사람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이다.

여운휘는 그 미소를 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혈교에서 유가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제대로 잠도 자지 않았으니 피곤할 것은 당연하다. 그렇

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는다. 여운휘는 능려운을 힐끔 바라본 후 유설린이 있

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시간이 나름대로 들어맞은 듯 한 것이다.

여운휘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마치 새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친 여운휘의 몸이 유설린의 거처 안

으로 빨려들었다.

급히 달려가던 여운휘의 눈에 유설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익은 몇 명이 인물

이 있었다. 

여운휘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사무린이 유설린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고 있었던 탓이다. 

이미 유설린의 거처 근처까지 날 듯이 다가왔지만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만큼 여운휘

의 움직임이 은밀했던 것이다. 막 땅에 발이 닿는 순간에야 몇 명이 이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흠

칫 하는 게 보였다.

몇 명이 고개를 돌려 여운휘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죽립을 쓰고 있는 여운휘를 알아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계단을 밟고 천천히 위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쪽에 있는 살수들은 갑자기 나타난 여

운휘의 등장에 모두가 공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가 명령을 내려달라는 거다.

그때 여운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이 계단을 다 올라섰을 때까지 검을 들고 있는 놈들은…… 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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