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령(守護靈) (286) 구출(救出)
풍운조의 마음은 급했다. 어떻게든 유설린을 지켜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일
이기에 풍운조 또한 당황하고 만 것이다. 운이 좋게도 풍운조는 살수들의
방해 없이 유설린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는 앞뒤 볼 것도 없이 소가주의 거처로 다가가 문을 열어 젖혔다.
풍운조의 상기되었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일기 시작했다. 소가주는 무사했
다. 옆에 있는 사무린이 정색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하네."
"무림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시겠다?"
말을 마친 사무린은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풍운조는 급히 손을 들어 그
런 사무린의 말을 저지했다. 비록 도망칠 계획이었고, 사무린을 죽이려고
했던 풍운조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이상한 살수들이 나타났네. 지금 무림맹의 무인들이 전부 죽어가고 있어."
"…… 그 말이 사실인가요?"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사무린은 애써 놀란 척 했다.
풍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사무린이 마교의 무인이라는 것을 모
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무린이 여태까지 유설린을 죽이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자신의 손으로 유설린을 죽여서는 안 되는 탓이다. 그녀는 지금 무림맹의
수뇌부 중 한 명의 추천으로 이곳에 있다. 그런 자신이 직접 유설린을 죽
인 사실이 발각되면 바로 일이 벌어진다.
물론 그럴 확률은 적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굳이 사무린이 죽이지
않는다 해도 유설린을 죽일 자들은 많다.
"자네가 확인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보다 어서 도망쳐야 하네!"
"안 되요. 확인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해요."
풍운조의 두 눈에 살기가 일었다.
어차피 죽이려 했던 자다. 이렇게 물고늘어진다면 차라리 사무린을 죽이고
유설린과 도망치는 게 낫다. 풍운조의 살기 어린 모습에 사무린은 천천히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막 둘이 부닥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풍운조와 사무린 모두 고개를 돌렸다.
"흐흐흐! 목을 내놓아라 소가주!"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다. 사내가 들어오는 순간 방안은 혈향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모양이다. 풍운조는 급히 유설린 앞을 막아섰다.
그는 뒤에 있는 유설린을 바라봤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 왔음에도 불구하
고 두려워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는 기색이 없다. 그저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이 유설린은 멍한 눈으로 상황을 응시했다.
풍운조는 사무린을 바라봤다. 그녀 또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살수 사내의 뒤로 하나 둘씩 다른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
다. 그들은 각기 다른 병장기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풍운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너무 많은 탓이다. 이 정도라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게다.
시간은 걸리지만 이길 수 있다. 풍운조는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듯 쌍장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오랜만이군."
들어 본 적이 있는 자의 목소리다. 뒤따라 들어온 한 사내가 복면을 벗었
다.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혈리추검 공청?"
"기억하다니 영광이로군. 귀면신황!"
호남제일살수 공청은 옛날 악양유가와 일전을 벌인 적도 있다. 그때 공청
은 여운휘에게 패했고 그 후로는 소식이 뜸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분명 그는 풍운조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여운휘와 싸울 때보다
강해진 공청이라면 풍운조 또한 다른 살수들도 있는 이 마당에 상대하는
것은 버겁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공청보다 더욱 최악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벗으면서 노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풍운
조는 놀라고야 말았다.
"살황(殺皇)!"
강호십일객 중 하나인 그도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떠한 수를 써서라든지 상대를 죽이고야 만다는 자. 풍운조의 안색이 굳
어졌다. 이제는 무리다. 같은 강호십일객 중 하나까지 있다면 풍운조가 이
겨낼 수 없다.
상대를 응시하던 풍운조가 급히 몸을 돌렸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이쪽
을 향해 살기를 내뻗은 것이다. 풍운조가 손을 휘두르기도 전에 밖에 있던
살수가 유리창을 몸으로 깨면서 나뒹굴었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쓴 것이
다.
창 밖으로 우문학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에 부상을 당했는지 얼굴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한 팔은 덜렁거렸
다. 그렇지만 우문학은 힘겹게 창문을 통해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가 풍운조의 옆에 와서 섰다.
"헉헉!"
호흡이 거칠다. 그는 고개를 돌려 풍운조를 바라봤다.
[제가 저 젊은 놈을 맡겠습니다.]
[호북제일살수인 혈리추검 공청이네.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해 봐야지요. 사실 서 있을 힘도 제대로 없습니다. 풍 노야께서 살황이라
는 자를 최대한 빨리 쓰러트려 주십시오. 사무린이 다른 자들은 막을 테니
승산은 있습니다.]
[그리하지.]
말은 그리했지만 승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같이 피투성이 상태
로도 유설린을 지키겠다고 기다시피 온 우문학을 보니 자신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이기리라.
풍운조는 사무린을 힐끔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린 또한 살수들과 같은 편이긴 하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대충 막으면서 시간만 벌 생각이다.
그런 사무린의 정체를 모르는 두 명은 목숨을 걸고 서로의 상대에게 달려
들었다.
다른 무인들이 소가주의 거처로 오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마치 때맞
추어 악양유가의 정문을 통해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기습을 해 온 것이
다.
"와와!"
단숨에 문을 부순 무인들이 악양유가 안으로 쓸려 들어왔다.
유설린과 함께 도주를 하기 위해 준비하던 능려운은 급히 악양유가의 문
앞으로 달렸다. 정체불명의 무인들이 이곳을 기습한 것이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베기 시작했다.
유가의 수문장인 능려운은 급히 아래를 향해 달렸다. 그는 검을 뽑아들었
다.
"이 놈들!"
우문학에게서 전수 받은 혈풍구룡검법이 빛을 토해냈다.
정문으로 기습해 들어온 자들은 이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우
문학은 검을 휘두르면서 급히 주변에 떨어져 있는 무인들을 규합했다.
"이쪽으로 모이시오! 어서!"
홀로 떨어져 있다가 각개격파를 당하던 유가의 무인들은 능려운은 기점으
로 해서 적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수 차이도 있고, 실력의 차
이 또한 월등했다.
비록 이들이 이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무리라고는 하지만 지금 유가에 있
는 자들 또한 별반 다를 게 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파락호와 같이 무공도
익히지 못한 자들도 수두룩하다.
무림맹은 유가를 휘하에 넣으면서 그 무력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그 탓에
이만한 무인들을 막아낼 힘조차 악양유가에는 없었다.
약 십 여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지
만 상대의 수는 이보다 갑절의 배 이상은 많았다.
카캉!
검들이 사방에서 불꽃을 튀겨냈다.
일대 혼전이 악양유가 안에서 펼쳐진 것이다. 검을 휘두를지 모르는 자들
을 향해서도 그들은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능려운은 간신히 버티면서 연신 뒤로 물러섰다.
'무리야! 너무 많아!'
지금 상황이 능려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무인들이
악양유가를 급습해 왔거늘 정체도 알지 못하겠다.
당장 유설린에게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사전에 우문학에게 들은 것이 있다. 그와 풍운조의 힘으로 유설린을 비밀
통로 쪽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문제는 지금 그 근처까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어떻게든 악양유가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설린이 그곳에서 도망을 친다고 해도 밖으로 나가는 것
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에 앞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무림맹의 무인은 이런 괴
한들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살수들이 무림맹의 무인을 죽인 사실을 모르는 능려운으로서는 엇나간 답
을 내렸다.
이들을 무림맹이 보낸 자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드디어 무림맹에서 악양
유가를 지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무림맹이 그토록 마음먹었다면 능려운은 막을 수 없다. 비록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다.
혈풍구룡검법을 꽤나 오랜 시간 익혀 이제는 거의 대성에 가까울 정도로
익혔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다. 나름대로 일류고수의 반열에는 들어섰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막아낼 수 없다.
능려운은 앞에 있는 사내를 냅다 걷어찼다. 발로 상대를 밀어내면서 능려
운은 몸을 뒤로 젖혔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몸을
비튼 능려운은 검을 날린 상대의 가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래로 주저앉으면서 휘두른 검이 사내의 가슴을 벴다.
그렇지만 능려운은 채 숨도 몰아쉴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쓰러지는 상대
의 뒤에서 곧바로 검이 날아들었다.
"헛!"
촤악!
검이 얼굴의 옆면을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비틀지 않았다면 바로 머리가
관통되었을 게다. 얼굴이 따끔거리면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능려운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혈풍구룡검법의 초식 중 하나로 그 미미한 진동
속에 어딘가로 향할지 모르는 변화를 지닌다.
팍!
어깨를 돌리면서 능려운에게 다가오던 사내를 향해 검이 날았다.
팔목 사이로 파고든 검이 그대로 가슴을 꿰뚫었다. 능려운의 몸이 미칠 듯
이 날아 다녔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궤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