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友情)
달이 참 밝다.
이곳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남궁세가에서 죄수를
가두는 곳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후보였던 그가 남궁세가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자
들만 가둔다는 이곳에 갇혔다. 그저 작은 창살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달
빛이 유일한 벗이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뇌옥(牢獄)에 갇힌 자는 남궁진이 유일하다.
한 사내를 위해 남궁진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야 만 것이다.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후보 중 하나였던 자신이 마교의 무
인을 위해 무림맹 고수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죄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친우
를 지키기만 했다면 웃을 수 있었을 게다.
그런데…… 진군휘, 아니 여운휘가 죽었다. 그토록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구하려고 했던 그가 결국 악록산에서 죽어 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남궁진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친우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은 이런 꼴이다.
평생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남궁세가는 더 이상 남궁진이라는 이름을지
닌 무인이 무림을 횡행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제는 남궁진이라는 자는 완전히 끝나 버린 것이다.
그저 하루에 세 번 들어오는 밥만 먹으며 남궁진은 하루 하루를 보냈다.
내공도 완전히 전폐 됐다. 독특한 수법으로 그의 내공이 묶여 버린 것이다.
무인 남궁진, 인간 남궁진 모두 이제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면 안 되는 자
가 되어 버렸다.
덜컹.
남궁진은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이 뇌옥에서 나갈 수 있는 통로로 한
무인이 다가왔다. 그자는 틈으로 식사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식사다."
남궁진은 조용히 식사를 받았다.
한 눈에 봐도 사람이 먹을 거라고 보기는 다소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
하 뇌옥에 갇힌 이상 그런 것에 불평을 할 수도 없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반 년 가량이 지나니 이제 이런 식단에도 익숙해져 버
렸다.
식사를 넣어준 무인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꼴에 죽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처먹기는……"
남궁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볼품 없는 식사만큼이나 이런 모욕
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하늘에 뜬 밝은 달이 미치도록 시리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
한 친우가 생각나서일까.
하남에서 안휘는 바로 붙어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여운휘
가 안휘에 도착한 것은 하남을 떠난 지 정확하게 칠일이 지나서다.
검문도 그러했지만 남궁세가 또한 와본 적이 있다.
남궁진은 남궁세가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을 가둔다는 뇌옥에 갇혀
있다. 물론 보초 같은 것은 다른 곳에 비한다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할 것이다. 그렇지만 반면 남궁세가의 인원은 평소에 비해서 절반 정
도 밖에 되지 않을 게다.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 탓이다. 남궁세가 또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일
류 고수들의 대부분을 정사대전에 참여시켰다. 당연스럽게 남궁세가 자체
에 남아 있는 무인들은 얼마 없고, 있다고 해도 다소 실력이 부족한 자들
이 대부분이었다.
남궁진을 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뇌옥을 찾아가 간수들을 조용
히 죽이며 들어가면 된다. 그 누가 막는다 해도 여운휘는 상대해낼 자신이
있었다.
엽강청, 뇌수혈황과의 싸움에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을 얻었다.
녹포괴존에게의 패배, 일마에게 당했던 기억, 무림맹의 고수들에게서 유설
린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 자신감을 잃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밟고 일어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죽립을 눌러 쓴 여운휘는 객잔에도 들르지 않고 큼지막한 집 벽에
기댄 채로 고개를 수그렸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눈은 지
나가는 모든 사람을 훑었다.
약간 낡은 무복이 마치 여운휘는 떠도는 부랑자와 같이 보이게끔 했다. 아
무도 죽립 속에 감추어진 여운휘의 날카로운 눈빛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노점상들이
하나씩 문을 닫는 것을 여운휘는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武)의 길을 걸으면서 단 한 번도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적이 없
다. 아니, 단 한 번 유설린이 예외다. 그녀 때문에 오히려 무의 길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런 여운휘에게 또 다시 고개를 돌리게 한 사내가 있다.
남궁진이다.
그 때문에 여운휘는 고개를 돌렸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여운휘를 위해 자
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남궁진은 여운휘에게 다시금 고개를 돌리게끔 만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여운휘의 몸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경공을 펼치는
것이 아니고 남궁세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여운휘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그저 파락호로 보이는 한 사내가
어딘가를 급하게 달려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여운휘는 남궁세가를 향해 곧바로 달렸다.
남궁세가라는 현판이 달린 건물을 향해 달리던 여운휘의 몸이 옆에 있는
나무를 박찼다.
탁!
공중으로 가볍게 뛰어 오른 여운휘는 남궁세가 안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
다. 너무나 쉽게 안으로 잠입한 여운휘는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서 지낸 적
이 있기는 하지만 뇌옥의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직감인 것이다. 손님이 머무는 곳과 뇌옥은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
다. 그거는 일반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게다.
여운휘는 일부로 손님이 묶는 곳과는 반대되는 곳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
했다.
여운휘가 대놓고 남궁세가를 활보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를 알아차
리지 못했다. 여운휘가 먼저 알아차리고 움직인 탓도 있지만 그의 은신술
이 너무나 빼어난 탓이다.
사곡에서 익혔던 은실술은 아직도 여운휘에게는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그의 몸이 마치 나무에 동화 된 듯이 서 있었다. 바로 옆을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세가의 무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변이 어둑한 탓도 있지만 여운휘에게서 숨소리나 체온조차 흘러나오지
않은 탓이다.
완벽한 동화에 남궁세가는 하나의 눈먼 장님이 되어 버렸다.
여운휘는 무음보보신법(無音步步身法)을 펼쳤다. 싸울 때는 그다지 좋은 신
법이 아니나 잠행이나 은신에 있어서는 최고의 신법이다. 소리도 나지 않
고 그림자까지 주변의 주형지물을 이용해 감춘다.
그는 반대쪽부터 해서 사방을 돌기 시작했지만 뇌옥을 쉽사리 찾지 못했
다.
남궁세가에 있는 수많은 건물 중 그 무엇이 뇌옥인 줄 알아차릴 수 있겠는
가. 더군다나 뇌옥이라면 지하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운휘는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남궁세가의 무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운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몇몇 무
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쉽사리 잡기는 어렵다.
주변에 있는 눈 때문이다. 막 고민을 하던 여운휘는 어느 건물을 발견했다.
저 곳은 가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저 건물의 주인 또한 잘 알고 있다.
'사향화(死香花) 남궁려희(南宮慮姬)……'
천하삼절의 하나지만 다가서는 남자들은 죽는다 해서 사향화라는 명칭이
붙게 된 가련한 여인.
남궁진이 남궁세가에서 몇 안 되게 마음을 터놓는 가족이기도 했다.
여운휘는 순간 망설였다. 남궁려희라면 여운휘를 만난 적이 있다. 비록 죽
립을 쓰고 있고 목소리만 조금 바꾸면 아무리 그녀라도 알아볼 수 없겠지
만 그래도 굳이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하나 고민이 든 것이다.
그렇지만 남궁세가의 아무 무인이나 잡고 그 사실을 묻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만 같다.
여운휘는 남궁려희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의 거처는 두
명의 무인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운휘는 그들을 제압하려다가 곧 마
음을 바꿨다. 가능하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생각 탓이다.
그는 뒤로 돌아 창가로 갔다. 다행히 남궁려희는 무엇인가에 열중해서 창
가로 여운휘가 다가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운휘는 창문을 통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그의 움직임이 은밀했기에 남궁려희는 그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운휘가 남궁려희에게 다가갔다.
뚜걱 하는 발자국 소리에 남궁려희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휘둘렀다.
파악!
재빠른 일수였지만 여운휘가 당할 턱이 없었다. 여운휘는 그녀의 손을 낚
아챔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남궁려희의 혈도를 점했다. 그녀의 몸에서 일
순간 힘이 쭉 빠져나가 버렸다.
남궁려희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전혀 알 수 없는 자가 방에 난입
했다. 더군다나 실력 또한 대단해 자신의 일수를 가볍게 막아내며 혈도를
제압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다. 만약 상대가 죽이려고 든다면 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 두려운 듯한 눈빛도 잠시, 평소의 그녀답게 남궁려희는 평정
을 되찾았다. 평정을 되찾으며 남궁려희는 상대의 눈을 보려 했다. 그렇지
만 죽립이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여운휘는 남궁려희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남궁진과 친분이 있는 자요. 그를 구하러 왔소."
그 말에 남궁려희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자신에게 어떠한 해코지를 하러 온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
다. 여운휘가 재차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요향이 있다면 눈을 두 번 깜박이시오. 그럼 혈도를
풀어 주리다."
평소 여운휘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말하던 차가운 어투가
아닌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어투다.
그 탓일까?
남궁려희는 몇 번이나 본 여운휘임에도 불구하고 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
다.
고개를 땐 여운휘가 남궁려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두 번 눈을 깜박였다. 여
운휘는 재빠르게 점했던 혈도를 풀어주었다. 남궁려희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고는 일부로 기침을 했다.
"콜록!"
목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남궁려희가 여운휘를 향해 말했다.
"무슨 말이죠? 진이라면 지금 뇌옥에 갇혔어요. 그를 구하겠다고요?"
"그렇소. 난 그를 구할 생각이오."
"불가능해요. 그곳은 남궁세가의 뇌옥을 지키는 사대무원(四代武元)들이 있
어요."
"사대무원이라는 자들이 강하오?"
"물론이죠. 남궁세가 내에서도 그 적수가 될 사람은 몇 명 없어요."
남궁려희는 앞에 있는 죽립을 쓴 자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
데 다소 낯이 익은 듯 한 자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나 잠시 고민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운휘가 말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던 상관없소. 난 그를 구할 것이오. 그러니 그 뇌옥의
위치만 말해주시오."
"당신 혼자서는……"
"할 수 있소, 다 계책이 있으니 그것은 걱정 마시오. 나 또한 할 일이 있
소,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지. 그러니 내가 물은 것에 답을 해
주시오. 뇌옥의 위치는 어디요?"
재차 물어오는 여운휘의 모습에 남궁려희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설
득을 하려고 해도 먹힐 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 정체 불명의 인물의 말 같
이 분명 개죽음을 당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준비해 온 계
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 맡겨 보는 수밖에 없다.
남궁려희에게 남궁진은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남궁진이 남궁려희에게만큼은 마음을 열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그랬다. 남
궁세가에서 진정으로 터놓고 말벗을 할만한 것은 남궁진뿐이었다. 그러했
던 그가 어떠한 중죄를 짓고 지금은 뇌옥에 갇혔다.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저 무림맹에 칼을 겨누었다는 것
이 전부였다.
남궁려희 또한 그를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
녀가 어떠한 수를 쓴다 해도 남궁진을 빼낼 방도는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요즘 남궁려희는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난(蘭)
만을 그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던 찰나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남궁진을 구해주
려고 왔다고 했다. 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궁
진을 구했으면 했다. 비록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은 자지만 목소리에서 거
짓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궁려희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창문을 기점으로 동쪽을 향해 움직여요. 조금만 가면 선조들의 위패를 모
시는 곳이 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옆으로 네 번째 건물. 그곳에 들어가면
아래로 가는 통로가 있어요. 그곳이 뇌옥의 입구예요."
여운휘는 남궁려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무턱대고 찾으려
고 했다면 얼마나 걸렸을지 몰랐을 것이다.
남궁려희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통로를 이용해서 내려가면 네 명의 무인이 있어요."
"사대무원이군."
"그래요. 그들 넷이 힘을 합치면 설령 남궁세가의 가주라 해도 이길 수 있
다고 해요."
여운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무인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르쳐 줘서 고맙소. 그럼 난 이만."
말을 마친 여운휘가 다시금 창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잠시만요."
여운휘가 고개를 돌렸다. 두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여운휘를 바라보던 남궁
려희가 물었다.
"당신은 진이에게 무엇이죠?"
여운휘는 잠시 남궁려희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 친구요."
그 대답에 남궁려희가 환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여운휘의 몸이 창 밖으
로 사라졌다.
무한한 꿈을 가진 이들의 모임… 사신(四神)
그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을 보기 위한
그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들 중 남주작 요도의 이야기 이다.
dreams come true 사신(四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