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協力)
유가로 갔던 여운휘는 바로 혈교로 돌아왔다.
혈교는 꽤나 분주해 보였다. 실제로 혈교는 부족한 무기를 보충하고 식량
을 구입하는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혈교로 와서 정해진 방에서 며칠을 푹 쉰 여운휘는 철비상을 만나러 갔다.
돌아온 날 여운휘는 혈무린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혈교에게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래도 여운휘 또한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그랬기에 여운휘는 검 하나 걸치고 철비상을 찾아갔다.
시녀를 따라 찾아간 철비상은 상당히 바쁜 모습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여운휘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시
녀가 말했다.
"주인님. 모셔왔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다. 넌 이만 나가보거라."
"예."
고개를 숙인 시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철비상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운데 있는 상으로 가 앉으면서 반대편을 가리켰다.
"자네도 어서 앉게."
"그러지."
철비상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여운휘에게 건넸다.
여운휘는 갑자기 자신에게 종이를 건네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
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종이를 살폈다.
어딘가의 내부 지도다. 그것도 비밀통로까지도 완벽하게 그려진.
세세하게 그려진 종이를 바라보던 여운휘가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알다시피 지금 우리 혈교는 일마의 세력들을 꺾고 있네. 그리고 지금 자
네가 보는 지도가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 머무는 건물의 것이지."
"꽤나 크군."
여운휘는 지도를 살피면서 말했다.
건물 수만 해도 수백 여 채고, 그 규모 또한 거대 문파와 견줄만할 정도다.
이 정도의 세력이라면 가지고 있는 무력조차도 보통을 넘어설 것이다.
"어디지?"
"검문."
여운휘의 질문에 철비상이 바로 대답했다. 지도를 들고 있던 여운휘가 고
개를 들어올렸다. 검문이라면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곳이다.
"검문이 일마의 수족이었다고?"
"우리도 다소 놀랐네. 정확히 말하자면 검문이 수족이 아니라 선풍검(旋風
劍) 엽강청(葉剛靑)과 뇌수혈황이 일마와 관련이 있지."
검문이라면 가 본 적도 있다.
그곳에서 여운휘는 엽강청과 뇌수혈황 모두를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전
여운휘를 궁지로 몰아넣었을 그때도 뇌수혈황은 그곳에 있었다.
"뇌수혈황은 실제로 강호십일객 중 일인, 그리고 엽강청 또한 강호십일객
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자라네."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우문학이 말해줬던 것이 있다. 검문과 유설린의 어머니인 엄여홍의 죽음이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이제는 확실하게 알아버렸다. 일마는 그때부터 이미 무림에 개입해 있던
것이다. 엄여홍을 죽게 만든 것 또한 일마의 계책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기로 검문에 가 본 적이 있다고 아는데? 맞는가?"
"간 적이 있었지. 그리 길게 있지는 않았지만 일 때문에 갔었던 적이 있
어."
"엽강청을 보고 어떻던가?"
"만만하지 않은 자. 결코 속내를 보이지 않더군. 무공은 뇌수혈황에 비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자라고 생각했지."
철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는 계속해서 종이를 살피다가 말했다.
"검문을 칠 생각인가?"
"그래."
"무리야. 검문 자체를 소리 없이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물론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니……"
여운휘가 말을 끌자 철비상이 미소를 지었다. 여운휘를 바라보며 그가 말
했다.
"알아차렸는가?"
"핵심 인물들만 죽이는 건가?"
"바로 맞췄네!"
철비상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는 몸을 낮추어 여운휘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둘을 우리가 맡아야 하네. 그 외에 죽여야 할 자들은 나머지 수하들이
해결할 걸세."
"엽강청과 뇌수혈황을 죽여야 한다는 소린가?"
"그렇네. 왜? 겁이라도 나는가?"
철비상의 장난기 어린 말에 여운휘는 몸을 뒤로 뺐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그들은 여운휘의 상대가 아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겁이 나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날 상대해야 하는
그 쪽이지."
"하하! 맞는 말이야! 자네와 싸울 그들이 불쌍하기까지 하군 그래."
안하무인격인 여운휘의 말에 철비상은 웃어 버렸다.
검문의 문주인 엽강청과, 강호십일객 중 한 명인 뇌수혈황.
둘 모두 무림에서 가지는 비중이 결코 적지만은 아닌 인물이다. 그렇거늘
그런 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에도 여운휘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
다.
여운휘는 철비상을 바라봤다.
비록 강호십일객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들보다 하수라고 평가받지 않는 자
다. 이 자라면 엽강청과 호각이거나 아니면 한 단계 위의 고수다.
문제는 그들을 은밀하게 죽여야 한다는 거다. 너무 큰 소란이 일면 근방에
있는 검문의 무인들이 달려 올 것이다.
"내일 모래쯤 출발할 거네. 미리 준비해 두게."
"그러지."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에 뻗은 다리를 지닌 말 두 마리가 땅 위를 달렸다.
말발굽이 맹렬한 소리를 뿜어댔고, 그 위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의 몸
또한 크게 흔들렸다.
한 인물은 죽립을 쓰고 옷은 검은색 일색이다. 반면 옆에 있는 사내는 시
원스럽게 머리를 뒤로 올린 호남형의 인물이었다.
그 둘은 일행인지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호남형의 인물은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덩치를 지녔다. 반면 죽립을 쓴
자는 호리호리한 몸을 지닌 자였다. 그렇지만 둘 모두 그토록 달리는 말
위에서 흔들림 없이 균형을 잡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호남형의 사내가 말고삐를 잡아챘다.
"워이 워이!"
말은 고삐가 잡아당겨지자 고개를 비틀면서 천천히 멈추어 섰다. 그 뒤를
따라 달리던 죽립의 인물도 멈췄다.
죽립의 사내가 말 위에서 뛰어 내렸다.
가볍게 땅 위로 착지한 그는 죽립을 올렸다.
곧게 뻗은 콧날과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옆에 있던
호남형의 사내도 말 아래로 내려왔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래."
여운휘와 철비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렸다. 말을 바꾼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십 일 정도를 거의 쉬지도 않고 달려서야 겨우 이곳에 온 것이다. 떠날
때만 해도 봄기운이 완연했는데 이제는 여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씨
도 무덥다.
여운휘는 앞을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성벽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소주다.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소주,
이곳에는 검문이 있다. 철비상은 말 등에 얹혀 있는 안장을 내려놓고 말의
엉덩이를 쌔게 쳤다.
깜짝 놀란 말이 길을 내달렸다. 하지만 철비상은 그런 말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여운휘도 마찬가지였다.
철비상은 일부로 말을 가게 놔둔 것이다. 이곳부터 말은 오히려 거치적거
리는 짐이 될 뿐이다. 어차피 오래 달린 탓에 한동안 쉬기 전에는 제 값어
치를 하기 힘들다.
말이 달려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철비상이 고개를 돌려 여운휘에게 말했
다.
"감세."
그가 먼저 성큼 성큼 성벽을 향해 다가갔고 여운휘가 그 뒤를 따랐다.
소주의 안은 북적거렸다.
여운휘는 죽립을 눌러 쓴 채로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소주는 큰 도시다.
이런 곳이라면 무림맹과 마교 양쪽의 정보망 모두 깔려 있을 게 분명하다.
괜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정체가 발각 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비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철비상은 사람들 틈에서 단연 두각(頭角)을 드러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덩치 탓이다. 그는 급히 객잔을 찾았다. 물론 사방에 객잔들이 있었지만
철비상이 찾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이번 거사를 같이 할 자들이 있는 객잔을 찾는 것이다.
"끙. 이 근처가 맞는 것 같은데……"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철비상이 말했다. 여운휘 또한 종이에 적혀 있는 객
잔 이름을 힐끔 보더니 곧 근방에 있는 객잔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객잔을 찾아낸 것은 철비상이었다.
"찾았네. 저기로군."
여운휘는 철비상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는 객잔을 바라봤다.
어향객잔(漁香客棧).
"어서 가지."
물고기가 유명한 소주답게 객잔 이름 중에 물고기 어(漁) 짜가 들어간 곳
이 상당히 많았다.
철비상은 사람들의 틈을 헤집고 어향객잔을 향했다.
가까이서 본 어향객잔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에도 특색이 없고, 크기
도 평범하다. 모자라지도 않고 빼어나지도 않아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띄
지 않는다.
철비상이 문을 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상인들로 보였
다. 소주에서 한 몫 건지기 위해 상인들이 몰려드는 모양이다.
점소이 하나가 철비상을 향해 다가왔다.
나이가 열 여섯 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나이는 딱히 많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점소이는 철비상에게 물었다.
"자고 가실 건지요, 아니면 식사를 하고 가실 건지요?"
"미리 동행이 와 있단다. 숙박객(宿泊客) 중에 비문적이라는 사람이 있을
테니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전해주게."
"아! 그 분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분이 기다린다던 분이 아저씨였
군요."
점소이는 철비상이 찾는 비문적이라는 자를 아는 듯 했다.
철비상은 그저 씨익 웃음으로서 점소이의 질문에 대답을 대신했다.
점소이가 뛰어 올라간 이층에서 삼십대 후반 정도의 사내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걸음걸이가 가볍고 몸은 호리호리하다. 그렇지만 얼굴 가운데에 그어진 긴
검상과 날카로워 보이는 눈은 차갑게 빛났다.
심성이 깊은 자고, 함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임이 분명하다.
여운휘로서는 처음 보는 자였지만 철비상은 익히 잘 아는 자였다.
철비상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고생이 많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 자네가 고생이었지."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하지요. 그리고 이 분이……?"
비문적이라는 사내는 여운휘를 힐끔 바라본 후 철비상에게 물었다.
철비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문적은 주변을 한 번 조심스레 살
핀 후 앞장서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문적의 방은 이층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이었다. 그를 따라 철비상
과 여운휘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비상이 죽립을 벗고 있는 여운휘를 보며 말했다.
"이 사내는 비적이라고 부르면 되네."
"아까는 비문적이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가명이지. 물론 비적도 진짜 이름은 아니긴 하지만 모두들 이 사
내를 그리 부르지."
"만나소 영광이오. 비적이라고 하오."
비적이라는 사내는 여운휘에게 포권을 했다. 여운휘에 대해서 그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여운휘는 비적이라는 사내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한다.
"뭘 하는 자지?"
"지금 일마의 세력을 자르고 있는 세력 중 하나를 담당하고 있네. 혈교비
적사(血敎飛寂死)라는 개중 가장 강한 단체를 움직이고 있지."
여운휘의 눈이 비적의 몸을 훑었다. 비적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작은 목소
리로 말했다.
"살수인가?"
"…… 듣던 대로요.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자라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인
듯 하오."
비적은 실로 놀랐다.
처음 봤을 때 여운휘의 모습을 보고 다소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나이에 비해서 어려 보이는 얼굴도 그렇고 몸에서 강인한 기도가 풍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은연중에 소문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얕잡아 보았
거늘……
그저 훑어 본 것만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이 살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네 수하들은 강한가?"
"나에 비해 다소 실력이 떨어질 뿐 내 수하들은 이 비적조차도 전력을 다
하기 전에는 상대하기 힘든 자들뿐이오. 여태까지 여섯 개의 세력을 부수
면서 죽은 자는 전무하오. 부상자 둘이 전부요."
"여태까지 너희들이 부순 세력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검문에 비교하
면 분명 조족지혈이다."
비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의 살수 훈련을 받은 탓에 혈교비적사는 정면격돌이 아닌 암습을 노렸
다. 그 탓에 지금까지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부서야 할 검
문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여태까지 정보망이나 재력에 관련 된 곳을 부셨
다면 이번에는 무력을 지닌 곳이다.
여태까지와는 격을 달리 할 게 분명하다.
여운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심하다가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부하들에게 꼭 각인시켜 두도록."
"그렇게 하겠소."
여운휘를 바라보는 비적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지금 여운휘의 말에 기분이 상했거나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강한 무인을 보게 되면 한 번쯤 겨루어 보고픈 호승심이 인 탓이다.
그렇지만 손을 겨룰 수 없는 상황. 비적은 자신의 불타오르는 가슴을 식혀
야만 했다.
철비상이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비적에게 물었다.
"대충 뽑아뒀다고 하던데 그 목록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비적은 말 없이 품속에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철비상에게 건넸다. 철비
상은 건네 받은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열 몇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철비상은 고개를 들어 비적을 바라봤다.
"꽤 고수도 있는데 조용히 해결할 수 있겠는가?"
"예. 문제없습니다."
비적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모습에 철비상은 더 이상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이 사내가 이토록 자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번엔 비적이 임무에 대해 물어왔다.
"저는 오히려 다른 둘이 걱정입니다. 그 둘 모두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
인데……"
"아무래도 그렇긴 하네. 하지만 자네들이 수고하는데 우리도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뇌수혈황은 강호십일객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철비상은 여운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운휘는 못 들은 척 벽에 몸을 기
댄 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적은 다소 걱정스럽다는 듯이 철비상을 바라봤다. 혈무린의 명령이긴 하
지만 상대가 뇌수혈황이다. 강호십일객이라는 위명이 비적을 내리 누르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비적이 여운휘에게 다가가 물었다.
"외람 되오 만 한 마디 하겠소. 당신은 뇌수혈황을 이길 수 있소?"
"이보게, 자네……"
"일도 아니지."
뭐라고 하려던 철비상은 여운휘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반면 비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호십일객 중 하나를 상대
하는 것을 이토록 쉽게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건 자신감이오 아니면 자만이오?"
"자신감도, 자만도 아니다. 당연한 일이니까."
비적은 강호십일객 중 일인을 만난 적이 있다.
얼굴에 생긴 이 검상 또한 강호십일객 중 하나였던 검황(劍皇)에게 당한
것이다. 그때 비적은 그 압도적인 무력에 나중에는 검을 들 용기조차 잃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금 상대해야 할 뇌수혈황은 자신에게 그러한 공포를 심어줬던 검
황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자다.
그런 자를 상대하는 것을 여운휘는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려 십 몇 년 전이다. 지금이라면 검황에게 그토록 우습게
밀리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강호십일객이라는 무게감만은 충분히 느낀 그다.
"방심하다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내 부하에게 말해 두라 했지만 내 생각
에는 당신도 그래야 할 듯 하오."
여운휘는 벽에서 몸을 때더니 비적을 향해 다가왔다. 여운휘가 말했다.
"보여줄까?"
"이곳은 검을 휘두르기는 너무 좁소."
"검도 필요 없어."
말을 마친 여운휘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손날을 세우면서 말했다.
"이건 검이야.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검 말이야."
말을 마친 여운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비적으로서는 무슨 말을 해서든 지금 이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 비록
여운휘에게 호승심이 인 것은 사실이지만 객잔에서 내공을 불어넣은 일장
이라도 휘두른다면 벽이 무너지고 만다.
이 상황을 중지하기 위해 비적은 말을 하려고 했다.
헌데 아무런 목소리도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말을 하기 위해 여운휘를
바라보는 순간 온 몸의 힘이 쭉 빠져 버린 것이다.
알 수가 없다. 그저 손목을 들고만 있을 뿐이다.
온 몸이 빈틈 투성이고 어떻게든 파고만 들면 나름대로 동수로 겨룰 수 있
을 것만 같다. 머리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여운휘의 들어올린 손을 보는 순간 등뒤가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정말로
여운휘의 손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검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헙!"
비적은 숨을 들이키고야 말았다. 가볍게 한 발 다가온 여운휘의 손이 목젖
에 닿아 있다. 눈으로 봤는데 몸으로 대응하는 것이 너무 늦어 버린 것이
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마치 물먹은 솜처럼 말이다.
비적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운휘의 눈을 마주했다. 딱히 말은 하고 있지 않
았지만 눈에서 여운휘의 마음을 읽었다.
넌 죽은 거야.
여운휘의 눈은 그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비적 또한 그것에 반발할 수 없
었다.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비적은 말을 이었다.
"…… 왜 무림맹에서 당신을 그렇게 죽이려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오."
여운휘는 목 근처에 가져다 댔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비적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 움직일 수가 없게 만들다니……"
"내가 익히는 무공이다."
"실로 대단하군. 사람을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다니!"
여운휘는 다시 벽 근처로 다가가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게 대단하다고? 내가 이 무공을 대성했다면……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넌 죽어."
비적은 소름끼치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여운휘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무공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제 그만하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하는 게 어떠한
가?"
철비상이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뭐 그냥 밋밋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지요."
"나도 상관없다."
"그럼 내가 말해서 이곳으로 술상 좀 봐 와 달라고 부탁해야겠군."
막 나가려던 철비상이 고개를 돌렸다.
"아, 거사일은 언제인가?"
침상 위에 앉으려던 비적이 재빨리 대답했다.
"삼일 후입니다. 달이 뜨지 않는."
삼일은 뭔가를 준비하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여운휘는 그저 방 안에 앉아 가만히 있었지만 철비상과 비적은 바쁘게 움
직였다. 특히 비적은 거의 볼 새도 없을 정도로 외출이 잦았다.
사전에 여러 가지를 준비하려는 듯 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묵고 있을 수
하들의 관리도 하는 모양이다.
거사가 있는 날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비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철비상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올 게야. 거사 전에 말일세."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창 밖을 바라봤다. 옆에 있는 철비상은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장난처럼 휘두르는 손짓에 미약하게나마
권풍이 인다.
슉슉!
가볍게 주먹을 내지르던 철비상은 갑자기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쒜엑!
공기가 갈리는 듯 했다. 그의 주먹에 의해 터져 나온 소리는 분명 그런 오
해를 하게 만들 정도로 맹렬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바라보던 여운휘와 철비상은 그제야 문
쪽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며 비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입니다."
짧은 말 한 마디만 남기고 비적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철비상과 여운휘는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비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약속 지점에서 뵙겠습니다."
"조심하게."
"철비상님도."
말을 마친 비적이 먼저 몸을 날렸다. 비적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후에도
잠시 서 있던 여운휘와 철비상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립을 쓴 여운휘는 품속에 숨긴 제왕검을 슬쩍 만졌다. 언제부터인지 제
왕검은 여운휘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
두 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여운휘는 그저 철비상의 뒤만 쫓았다. 우선은 비적과 그의 수하들을 만나
야 한다. 그 장소는 철비상이 알고 있다.
철비상은 검문의 근처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그곳에는 가게 한 채가 있었
다. 막 문을 닫으려는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철비상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당과(糖菓) 있소?"
"이 사람 보게. 이곳은 어물전(魚物廛)이네. 생선을 파는 곳에 와서 당과라
니. 다른 곳 가서 알아보게."
"딸 아이에게 하나 가져다 주려고 하오. 있으면 좀 주시구랴."
"거참. 알겠으니 따라 들어오게. 안에 내가 종종 먹으려고 챙겨둔 게 있으
니."
노인은 투덜거리면서 앞장섰고 철비상과 여운휘는 그 뒤를 쫓았다. 막 안
으로 들어가자 노인이 옆에 있는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랬다. 이 노인은 혈교의 비밀거점 중 한 곳을 관리하는 인물이었던 것이
다.
철비상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이미 사십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기다
리고 있었다. 모두 검은 색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다. 남자와 여자가 섞인
그들은 철비상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철비상 또한 포권을 취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개중에서 낯익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교비적사의 우두머리인 비적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후 시작할 겁니다."
"대충 설명해 보게."
비적은 옆에 있는 수하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수하는 큰 지도 한 장
을 급히 벽에 걸었다. 비적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상황 설명에 나섰다.
"이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곳들이 저희가 죽여야 할 자들이 있
는 곳입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 자가 뇌수혈황, 초록색으로 되
어 있는 자가 검문의 문주인 엽강청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비적은 잠시 지도의 몇 군데를 가리키더니 다시금 입을 열
었다.
"저희는 이런 방향으로 죽여야 할 자들을 베고 갈 겁니다. 두 분께서는 이
길을 통해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시자는?"
"일 각을 기준으로 한 번씩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마디로 들
어가셔서 일 각 안에 웬만하면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 일
각이 지나면 다음 보초가 지나갈 테니까요. 소란이 일면 아무래도 걸릴 위
험이 다분합니다. 물론 그 보초가 아니더라도 소란이 일게 되면 근방에 있
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다. 철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비상은 합공을 하려는 것이다.
여운휘와 함께. 누워 있는 자를 기습하여 목을 따버리면 그걸로 그만이다.
물론 철비상으로서는 그다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벌이려고 한다는 것이 더 우스운 것이다.
"나와 여운휘가 기습을 감행한다면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을 걸세. 걱정 말
게."
"두 분이 함께라면 저 또한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비적은 검문에 있는 여러 가지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서로 시간을 맞추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지금은 두 개의 조로 나뉘어져 움직이는 거랑 다름없다.
비적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여운휘와 철비상. 만약 한 조가 너무 먼저 움
직이면 다른 조는 움직임이 힘들어 진다.
"저희들이 여기까지 가는데는 이 각 정도가 걸릴 겁니다. 그러니 두 분이
일차 목적지점에 도착 한 후 두 명의 보초를 그냥 보내신 후 움직이시면
됩니다."
일 각에 한 명씩 보초가 지나가는 걸 이용한 계책이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여운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퇴로는?"
"아. 이번에 우리는 수로를 이용할 거요. 둘을 죽인 후 두 분은 바로 왔던
길을 거슬러서 오면 되오. 그대로 나와서 일직선으로 달리면 선착장(船着
場)이 있소. 그곳에만 가면 누군가가 배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 배에 타서 검문의 손길만 벗어나면 이번 임무는 완성이오."
강소성 소주(蘇州)의 서남쪽에는 태호(太湖)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흐르는 물은 소주를 감돌아 장강으로 빠져나간다. 이 수로
를 잘만 이용한다면 도망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들어갈 길과 나올 길, 그 외에 조심해야 할 것들을 비롯해 검문에 대해 이
야기를 하다보니 한 시진은 금방 지나갔다.
비적은 뒤에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얼굴에 검은 복면
을 뒤집어썼다. 이곳에서 검문까지의 거리는 무척이나 가깝다.
"건투를 빕니다."
"자네도 반드시 성공하게."
"옙! 그럼."
비적과 그의 수하들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를 이어 여운휘와 철
비상도 따라나섰다. 여운휘는 죽립을 눌러 썼고 철비상도 검은 복면을 썼
다.
여운휘와 철비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검문 쪽을 향해 치달렸다.
탁!
두 사내의 몸이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치나 싶더니 검문 안으로 빨려 들어
갔다.
검문 안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잠들 시간이라서 그런지 종종 켜져
있는 불빛만이 검문을 밝히고 있었다.
스슥.
여운휘와 철비상은 몸을 낮춘 채로 검문을 달리기 시작했다.
철비상은 머릿속으로 비적이 전해줬던 지도를 그렸다. 앞장서서 달리던 철
비상이 갑자기 다리를 멈추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뒤따르던 여운휘도 멈췄
다.
비적이 말한 대로라면 곧 보초가 이곳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납작 엎드리라는 철비상의 수신호에 여운휘는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초로 보이는 무사 하나가 주변을 살피면서 이곳을 지나갔
다.
그 무사가 지나간 후에 따라오라는 듯 철비상이 손짓했다.
여운휘와 철비상은 다시금 달렸다.
뒤에서 따르는 여운휘는 그저 철비상의 수신호대로만 움직였다. 이미 그는
비적에게 모든 행동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
비적의 말 대로였다.
정확한 보초들의 위치와 움직이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얼마 되
지 않는 시간 동안 수많은 베일에 감춰져 있는 검문의 이것저것들을 파악
했다. 비적의 능력이 빼어나다는 소리인 것이다.
여운휘도 내심 비적의 능력에 감탄했다.
비적이 언급한 대로 움직이니 여운휘와 철비상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목표
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이곳에서 이 각을 보내야 한다. 두 명의
보초가 지나갈 때까지는 우선 몸을 감추고 있어야 한다.
거사는 그 후에 벌인다.
처음 목표는 엽강청이다.
선풍검이라고 불리는 자. 검문의 문주이면서 일마의 수족과도 같이 움직인
자다. 왜 일마에게 협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운휘와 철비상은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그 둘의
모습을 가려줬다. 무인 하나가 앞을 지나갔다.
'하나.'
여운휘는 속으로 수를 셌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무인 하나가 또 앞을 지나갔다.
여운휘와 철비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라본
채로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으로 뜻이 통한 것이다.
무인이 꺾이는 순간 여운휘와 철비상이 앞에 있는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거리가 멀지 않았던 탓에 금방 건물에 다가갈 수 없었다. 두 사내는 몸을
옆으로 감췄다. 검문 문주인 엽강청의 거처를 지키는 두 명의 무인 탓이다.
단 일 수에 죽여야 한다. 실수한다면 일이 귀찮아진다.
철비상이 손가락으로 한 명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가슴을 두
드렸다.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리킨 자를 자신이 맡겠다고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면……
여운휘는 다른 한 무인을 바라봤다. 둘 모두 방심하고 있다. 철비상의 들어
올려졌던 손이 떨어졌다.
철비상의 몸이 날아올랐고 여운휘는 그의 등뒤에 숨은 채로 비수 하나를
날렸다.
쒜엑!
퍽!
빠악!
철비상의 우수가 한 사내의 머리통을 부쉈고, 여운휘의 비수는 또 다른 사
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둘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방으로 뛰어들었다. 비록 작은 소리였다고는 하
지만 엽강청 정도 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판
단한 것이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벼운 옷차림의 엽강청이 침상에서 급히 일
어났다.
"뭐 하는 놈이냐!"
베개 근처에 병기를 놓고 자는지 이미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엽강청은 여운휘를 알아보지 못했다. 죽립을 눌러쓰고 있으니 여운휘의 정
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엽강청은 쉬이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괴한의
등장이었지만 단순히 살수로 보기에는 너무나 강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게 엽강청이 고함을 지르지 않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켕기는 것이 있어서다. 혹시나 이 자들이 자신이 모시는 상관에게서 온 자
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 분이라면 이만한 자들을 능히 수하로 두고도 남을만한 자다.
그렇지만 죽립을 쓰고 있던 여운휘가 검을 꺼내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아니, 혹시 그 분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뭐 하는 놈들이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주저리주저리 말도 많군."
철비상은 말을 마치면서 자신의 주먹을 들어올렸다. 철사자 철비상의 무기
는 검도, 도도 아니다. 쇠보다도 단단한 그의 주먹이 바로 철비상의 무기인
셈이다.
권왕(拳王)이라는 이름이 아쉽지 않은 자가 바로 철비상이다.
엽강청은 어떻게든 주변에 이 일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자들이 자신
의 상관이 보낸 자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다. 이 둘이 자신을 죽이러 왔
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아차린 탓이다.
문제는 이 주먹을 쥐고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만 해도 상대하기 껄끄러울
정도의 고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죽립의 인물까지 가세하면 승부는 당연
히 갈라진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엽강청의 행동 하나 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조금이
라도 섣부른 움직임을 보인다면 출수 할 생각이다.
변한 게 없다. 사람 좋아 보이는 외모의 소유하고 있고 무척이나 순해 보
인다. 그렇지만 속에는 구렁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것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구렁이를!
엽강청은 자신의 애병(愛兵)을 들어올렸다. 검인데 다소 날이 휘어져 있다.
길이나 그 두께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만이 유독 다르다.
천하이십삼변선풍검(天下二十三變旋風劍)을 펼치기 가장 적합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엽강청만의 검인 것이다.
우선 검을 휘둘러서 시간을 벌어 볼 생각이다.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가 사
방에 진동을 하면 곧 검문의 무인들이 달려 올 것이다.
탁.
엽강청은 검집을 땅에 던졌다. 그는 휘어진 검을 들어 올린 채로 자세를
잡았다.
"감히 검문의 문주인 나에게 도전하다니 배짱 한 번은 좋구나."
엽강청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상대에게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시간을 끄는 것이 지금
엽강청의 목적인 셈이다.
그렇지만 검을 들어올리며 철비상을 견제하던 엽강청은 곧 지독한 두려움
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옆에 서 있던 여운휘가 검을 들고 엽강청을 향해 겨눈 후부터 벌어진 일이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엽강청의 사지를 붙잡았다.
'저 둘의 합공이라면 몇 초 받아내지 못해.'
둘이 같이 달려들면 이기는 건 무리라도 반 각, 아니 반의 반 각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운휘가 검을 들어올리자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고수다. 빈틈 투성이지만 그랬기에 더욱 공격하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
는다.
말도 안 된다고 할 지도 모른다. 빈틈이 많은데 왜 공격하고 들어가지 못
하냐고. 엽강청 또한 자신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있는 창
문을 통해 빠져나간다는 것도 도박이다. 차라리…… 정면을 뚫고 지나가리
라.
엽강청은 들어올린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천하이십삼변선풍검!
여태까지 엽강청과 함께 해 온 필살의 검법이다. 변화가 많아 방어하기도
쉽지 않고 막는다 해도 바로 엽강청이 선수를 칠 수 있다.
천하이십삼변선풍검 중에서도 최후의 초식이 있다.
회오리치듯 날아드는 검이 도합 스물 세 번 변화한다. 웬만한 자들이라면
이 일수로도 수십 명을 날려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초식을 펼친다 해도 가능성이 있을 지조차도 의문이다.
우선 펼치고 난 후에 볼 일이다. 이 일검에 당한다면 좋겠지만 혹여 막아
낸다 해도 저 둘은 바로 공격을 해 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 틈에 엽강청은 몸을 뺄 생각이다. 조금만 가면 삼 사십여 명의 무인들
이 기거하는 건물도 있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살 수 있다.
천하만변(天下萬變)!
앞을 향해 몸을 내던진 엽강청의 휘어진 검에서 한동안 무림에 보이지 않
았던 절기가 터져 나왔다.
천하이십삼변선풍검의 최후의 초식이자, 필살의 초식인 천하만변이!
쉬릭! 쉬리릭!
감기듯이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날아드는 천하만변을 보고 철비상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무수한 변화가 결코 가볍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 반해 여운휘는 오히려 한 발 내딛으며 검을 뻗었다.
엽강청이 순간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다가서는 여운휘를 보며 한 놈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
다.
그런데 천하만변이 이상했다. 비록 실전에서 딱히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것
은 아니지만 수천 번 이상 사용해 본 초식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하만변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져 버린 것이다. 스물 세 번의 변화는커녕
열 번 조차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한 것이다.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스물 세 번 휘두르는 것이 열 번보다 반드시 강하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천하만변은 스물 세 번 휘두름으로 완벽해 진다.
꼴사나운 모습으로 검들이 허공을 갈랐다.
그나마 닿으려는 검들은 여운휘가 재빠르게 피해냈다.
검을 피하면서 여운휘가 외쳤다.
"철비상!"
"하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운휘의 의미가 뭔지 알아차린 철비상은 단숨에 엽
강청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상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엽강청은 고스란히 가슴으로 철비상의
주먹을 받아야만 했다.
우당탕!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나더니 급기야는 데굴데굴 굴렀다.
"웩!"
데굴데굴 구르면서 엽강청은 그대로 피를 토해냈다.
갈비뼈가 모두 부서진 듯 하다. 그리고 그 뼈들이 폐와 간을 꿰뚫었다.
엽강청은 벽에 부닥치고서야 간신히 몸이 멈추었다. 그렇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뜨고 있었고 분명 숨도 쉬고 있었지만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철비상의 주먹 때문만이 아니다.
믿음이 깨어진 탓이다.
자신 있었다. 무림의 그 누구라 해도 천하이십삼변선풍검이라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꼴사나운 모습은 무엇이
란 말인가.
엽강청은 방금 전 자신의 실책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식을 펼칠 때 밟는 투로(鬪路)도 틀림없고 내공의 분배도 평소와 다른
게 없다. 다소 긴장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 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검법 자체가 변해버리자 빈틈이 생겨 버렸다.
그리고 엽강청 본인조차도 그 같은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 방어 할 생각조
차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철비상이 파고 든 것이다.
엽강청은 모르지만 여운휘가 방위(方位)를 점해 버린 탓이다.
여운휘가 서 있던 곳은 북쪽, 엽강청이 있던 곳은 남쪽이었다. 다가오는 엽
강청을 향해 한 발 내딛음으로서 남쪽의 기세를 잡았다. 동시에 화(火)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니 엽강청의 검이 제 위력을 잃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엽강청은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인에게 목숨보다 더욱 소중한 자신의 무공에 대한 믿음이 깨어진 탓이
다.
혼자 중얼거리는 엽강청에게 여운휘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그는 고개
를 들어 여운휘를 바라봤다. 엽강청은 딱히 반항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
에서 도망갈 수 없음을 느낀 탓이다.
엽강청의 입에 조소(嘲笑)가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네 놈들이 지금 어떠한 일을 벌였는지 아느냐? 네 놈들은 지금 검문을 적
으로 돌린 게야! 흐흐! 네 놈들의 말로가 편할지 내 지옥에서 지켜보마!"
저주 섞인 음성을 끝까지 들은 여운휘가 천천히 죽립을 들어올렸다. 비웃
음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엽강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들어올려진 죽립에서 언젠가 봤던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 네 놈은…… 여운휘? 분명 죽었을 텐데……"
"네 눈으로 봐라. 난 죽지 않고 돌아왔다."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네 놈은 분명……"
여운휘는 더 이상 엽강청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그의 목에 제왕검을 꼽
아 넣었다. 채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엽강청은 그대로 부들부들 떨었다.
여운휘와 엽강청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여운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옥은 인간이나 가는 거다."
말을 마친 여운휘가 목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간신
히 붙잡고 있던 엽강청의 생명줄이 끊어졌다.
털썩.
그의 몸이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곧 땅은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철비상이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
었다. 여운휘는 느슨하게 했던 죽립을 다시금 고쳐 썼다.
"다음으로."
"그렇게 하지."
철비상이 문을 열고 앞장서서 나갔다.
엽강청을 죽였으면 이번 일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
비록 엽강청보다 뇌수혈황이 훨씬 더 고수라고는 하나 검문에서 가지는 비
중은 문주인 그가 훨씬 앞선다. 그리고 뇌수혈황은 머리보다는 무력을 앞
세우는 자다.
크게 문제 될 자는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뇌수혈황의 거처는 외곽에 있다.
일부로 그가 사람들의 인적도 드문 곳으로 거처를 부탁한 탓이다.
그를 죽이러 가는 여운휘와 철비상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그
리고 이미 엽강청을 죽였으니 큰 소란이 인다고 해도 어떻게든 뇌수혈황만
죽이고 도망치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보다 철비상이 이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옆에 있는 여운휘 때문이
다.
엽강청과의 결투에서 알아 버렸다.
너무나 쉽게 엽강청을 이겨 버렸다. 비록 그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은 철비
상이었지만 그렇게 까지 만든 것은 여운휘다.
저번에 비적과의 간단한 비무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여운휘가 검을 들어
올리자 엽강청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비록 뇌수혈황이 강호십일객이라고는 하지만 여운휘의 상대가 될 것 같지
는 않았다.
자신보다도 어린 사내를 철비상은 맹목적으로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궁금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어떠한 무공이기에 상대의 기세를 꺾
고 승기를 잡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함부로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검문의 외곽에 가자 보초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곳부터는 뇌수혈황의 구역이다. 검문의 보초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그 탓에 여운휘와 철비상은 보초를 서는 무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
고 뇌수혈황의 거처에 다가갈 수 있었다.
뇌수혈황의 거처는 뭔가 달랐다.
검문의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깨끗해 보이면서 또한 단조로웠다.
그에 반해 뇌수혈황이 머무는 거처는 왠지 모를 귀기가 넘쳤다. 마치 피에
담갔다가 뺀 것과도 같은 붉은 색이었다.
철비상이 여운휘의 어깨를 툭 쳤다.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
이지는 않지만 뭔가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듯 하다.
"저곳이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미리 이야기 해뒀던 선착장으로 달리자
고."
"그러지."
막 걸어가려는 여운휘의 어깨를 철비상이 잡았다. 여운휘가 고개를 돌리기
도 전에 그는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상대는 강호십일객이네. 아무리 그래도 조심하게."
"그러지."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홀로 뇌수혈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원래대로라면 철비상도 같이 가야겠지만 여운휘의 부탁이 있었던 탓이
다.
객잔에 머물던 도중 여운휘는 철비상에게 말했다.
뇌수혈황을 만날 때는 단신으로 만나고 싶다고. 그자와는 풀어야 할 인연
이 있다면서. 너무나 강경한 모습에 철비상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자신도 끼여들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방금 전 엽강청을 꺾는 여운휘를 보며 그 생각이 변했다.
여운휘라면 능히 뇌수혈황을 이길만하다고 말이다.
철비상은 홀로 걸어가는 여운휘의 뒤를 바라봤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주인 엽강청의 죽음이 알려질 것이다. 쓰러진 보
초들을 감췄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조금만 건물에 다가오면 문주의 죽음을 알게 되는 건 당연하다.
모른다. 어쩌면 벌써 알아차렸을지도.
검문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만 뒤를 잡히지 않으면 된다.
철비상은 여운휘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게.'
철비상은 근처에 있는 널찍한 돌 위에 엉덩이를 얹혔다. 마치 임무가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끼이익.
문고리가 너덜너덜하다.
그런 탓에 여운휘가 손을 대자 문은 기이한 음성을 토해냈다. 안에는 커다
란 침상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는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벽
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름이 오싹 돋게 할 정도로 메마르면서도 갈라진 목소리다.
"무슨 일이냐."
"……"
여운휘는 그 자리에 멈춘 채로 그저 뇌수혈황을 바라봤다. 그러자 벽을 바
라보고 누워 있던 뇌수혈황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감히 이 늦은 밤에 찾아와 노부의 잠을 깨
운 것도 모자라 짜증까지 치솟게 하다니!"
"…… 누워서 죽고 싶다면 그리 해 주지."
여운휘의 말에 뇌수혈황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
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죽립을 쓰고 있는 여운휘를 보자 뇌수혈황은 침
상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 잡배(雜輩)냐."
"누워서 죽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군."
"건방진 놈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뇌수혈황의 몸이 어느새 여운휘의 코앞까지 다가왔
다. 그의 손이 매섭게 여운휘의 백회혈을 내리쳤지만 이미 피한 후였다.
콰앙!
여운휘는 빙글 몸을 돌리면서 뇌수혈황과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저 홧김
에 일장을 내리쳤던 뇌수혈황은 죽립을 쓰고 있는 여운휘를 바라봤다.
"꽤 하는 구나. 노부의 공격을 이토록 피한 놈은 흔치 않은데……"
말을 하면서도 뇌수혈황은 어떻게든 죽립 안에 있는 여운휘의 얼굴을 보려
고 했다.
'분명 어디선가 만나 본 적이 있는 듯 한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
야? 끄응."
얼굴만 보면 기억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죽립 탓에 아무리 살펴봐도 얼굴
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침내 짜증을 참지 못하고 움직였다. 어떻게든 여운휘가 쓰고 있는
죽립을 벗기기 위해서였다.
슈욱!
가뜩이나 긴 손이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여운휘의 상반신이 기이하게 꺾였다. 순간 앞으로 몸을 날린 뇌수혈황은
무릎으로 여운휘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그렇지만 몸을 약간 띄운 여운휘는 오히려 뇌수혈황의 무릎을 밟고 뒤로
도약했다.
그 모습에 뇌수혈황은 화가 솟구쳤다.
"그 죽립을 벗어라! 네 놈은 분명 노부가 아는 자가 분명하다!"
여운휘는 대답대신 검을 꺼내들었다.
뇌수혈황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노부에게 검을 들이대려고 한단 말이냐.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계속해서 말을 하려던 뇌수혈황이 말을 멈춘 이유는 여운휘의 손에 들린
검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눈이 갔을 뿐이다. 꽤나 빼어나 보이는 명검이기
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탓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는 순간 알아
차렸다.
무림맹의 신물이라고 알려진 제왕검인 것이다.
그리고 제왕검은…… 여운휘와 함께 사라졌다.
뇌수혈황의 머리에 최악의 상상이 떠올라 버렸다. 그렇지만 곧 그는 고개
를 흔들었다.
그 절벽의 높이라면 결코 사람이 살 수 없다. 여운휘의 시신은 찾지 못했
지만 그 잔재로 보이는 옷자락 등은 찾지 않았는가.
"네 놈…… 그 검은 어디서 났느냐?"
"내 손에 쥐어준 것이 너희들이었지 않느냐."
이렇게 들으니 왠지 모르게 여운휘의 목소리를 닮은 것 같다. 그렇지만 뇌
수혈황은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다.
뇌수혈황은 주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여운휘냐?"
말을 하고 나서도 아니길 바랬다.
그리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죽립을 벗는
사내의 얼굴은 뇌수혈황의 바램을 철저하게 부수어 버렸다.
얼마 전 분명 절벽 아래로 떨어져 지금은 죽었다고 알려진 여운휘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뇌수혈황은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멍하니
여운휘를 바라봤다.
귀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죽었잖아…… 네 놈은 분명 내 손에 죽었잖아!"
"돌아왔지. 지킬게 있어서 말이야."
여운휘는 제왕검을 든 채로 뇌수혈황을 향해 다가갔다.
얼굴을 보인 이상 확실히 죽여야 한다. 애초부터 그럴 계획이었지만 이제
는 죽여야 할 이유가 더욱 많아졌다.
당황했던 뇌수혈황은 곧 진정했다.
비록 죽은 줄 알았던 자가 다시 살아서 눈앞에 나타난 거라고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인간이 바뀐 것은 아니다. 어차피 다시 죽이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뇌수혈황이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그때 내 손으로 제대로 끝내지 못해 아쉬웠는데 살아와 줘서 고맙군."
막 공격을 하려는 순간 여운휘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는 바람에 뇌수혈
황은 아쉽게도 손을 거둬야만 했다. 그 후에도 못내 그 사실이 아쉬웠는데
지금 다시 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방해 할 자도 없다.
"죽여주마. 애송이!"
뇌수혈황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림과 동시에 온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폭발
하듯이 터져 나왔다.
여운휘보다 뇌수혈황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몸이 껑충 뛰어 오르더니 여
운휘 근처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하얀빛이 일었다.
콰앙!
손날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바닥을 반으로 쪼갰다.
여운휘는 뒤로 몸을 날리면서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검은 뇌수혈황의 어
깻죽지를 노렸다.
"어딜!"
고함과 함께 휘두른 손에 의해 제왕검이 튕겨 나갔다. 뇌수혈황이라는 별
호답게 그의 손이 천천히 핏빛인 붉은 색을 머금기 시작했다. 마치 검날처
럼 세워진 뇌수혈황의 손에서 붉은 색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강이다.
붉은 빛을 머금은 수강은 사람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할 정도로 귀기가 넘
쳤다. 자신 있어 보이는 어투로 뇌수혈황이 소리쳤다.
"와봐라!"
여운휘가 들고 있던 제왕검도 금색 빛무리를 토해냈다.
이제야 제대로 상대해 볼만한 자를 만났다.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오행검
법을 제대로 펼칠 만한 상대는 여태까지 없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뇌수혈
황은 현 무림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절정고수다.
이만한 상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여운휘의 자세를 본 뇌수혈황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할 빈틈은
여러 군데 보였지만 왠지 모를 무인의 감이 그를 붙잡았다.
어느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던 뇌수혈황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길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서걱!
마치 칼날처럼 길어진 수강이 여운휘가 피해내자 뒤에 있던 벽을 잘라 버
렸다. 순간 건물이 흔들렸다. 여운휘와 뇌수혈황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밖
으로 튀어 나갔다. 아까 일장을 겨루면서 자리를 바꾼 탓에 먼저 나온 것
은 뇌수혈황이었다.
여운휘가 막 문을 벗어나는 찰나 기다리고 있던 뇌수혈황이 손을 내리그었
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그의 손이 여운휘의 몸을 반으로 가르기라도 할 듯이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여운휘는 제왕검을 들어올렸다.
카앙!
손과 검날이 부닥친 것인데 금속성이 일었다. 그리고 기회라고 생각한 뇌
수혈황의 다른 손이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다가왔다.
손을 막아낸 여운휘의 검이 미끄러졌다.
"헛!"
검이 뇌수혈황의 허벅지를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뇌수혈황은 뒤
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예상외로 무겁다고 생각했다. 딱히
무공 훈련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몸이 예상보다 늘어져 버렸다.
팍!
여운휘의 검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뇌수혈황은 급히 몸을
뒤틀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서울 정도로 회전하면서 뒤로 물러선 뇌수혈황은 자
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붉은 액체가 손에 묻었다.
얼마 전 여운휘를 죽이는데 일침을 가한 것이 바로 뇌수혈황이었다. 물론
제대로 싸운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무위를 눈으로 봤다. 그때는 이만큼 강
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공격은 없었다.
여운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대여섯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
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서 보냈어야 나을 정도
의 부상이었다. 어떠한 기연을 얻었다 해도 그 짧은 기간 안에 이 같은 도
약은 불가능하다.
쿠웅.
뇌수혈황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비록 아주 가까이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해도 이 정도의 소리라면 근방
에 있는 무인들이 올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운휘의 재차 움직이는 검을 피하기 위해 뇌수혈황은 땅 위를 굴렀다. 무
인이라면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펼치지 않는다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이다.
그런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뇌수혈황은 그러한 것을 의식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급해진 것이다.
여운휘의 검이 너무나 빨랐다. 그것도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지금 피해내고 있는 것도 눈으로 봐서가 아니라 손목이 움직이는 순간과
그 각도를 예상하고 몸을 날리는 것뿐이다.
뇌수혈황 정도나 되니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검의 움직임
도 보지 못하고 바로 죽음을 맞이했을 게다.
뇌수혈황에게 최악의 승부를 묻는다면 암황과의 결전을 이야기했었다. 그
승부는 뇌수혈황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같은 팔황이었지만 암황의 실력은 다른 자들과는 극을 달리했다. 그런데
지금 뇌수혈황은 그때보다 더욱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손을 들어 간간이 공격을 막거나 땅을 뒹굴 뿐 여운휘가 검을 든 이후로
제대로 된 공격은 하지도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상하게 몸도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
도 최상의 몸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싸움을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
한 것이다.
연신 뒤로 물러서면서 뇌수혈황은 식은땀을 흘렸다.
'마, 말도 안 돼! 이 애송이가 이토록 강했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 정도 나이 밖에 되지 않은 자가 강호십일객이
라고까지 불리는 자신을 웃도는 무공을 지니고 있냐는 말이다.
아마 이 후로 누군가에게 최악의 승부가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이 날을 택하리라. 그렇지만 그것도 우선은 살아야 가능한 일이다. 예전의
암황은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지만 여운휘는 아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죽
이러 온 것이다.
샥샥! 쒜엑!
뇌수혈황은 연신 뒤로 물러서면서 쉬지도 못하고 손을 움직였다.
쇠보다 단단하다던 손이 아려올 정도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는 뇌수혈
황은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럼과 동시에 그는 혈적수(血赤手)를 날렸다. 마
치 검기처럼 그의 손에서 날카로운 힘이 뻗어져 나왔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집채만한 바위도 단숨에 두 쪽을 낼만한 위력이다.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을 가했거늘 여운휘는 너무나 쉽게 그 공격을 피해냈
다.
여운휘로서는 애초부터 뇌수혈황을 적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행검법의
전반부만 익혔을 당시에도 뇌수혈황과 싸운다면 힘들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지금 여운휘의 무공은 쌍존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한 수 위일 정도다.
아무리 뇌수혈황이라고 해도 여운휘에게는 결코 위력적이지 못했다.
간단한 싸움으로 여운휘는 자신의 실력을 알아버렸다. 강해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적수와 겨루어 보고 싶었다.
뇌수혈황과의 대결에서 여운휘는 알았다. 이미 지금 자신의 실력이 예전과
는 비교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취월장했다는 사실을.
"이만 끝내지."
볼 것도 봤다. 그리고 이 시끄러운 소란으로 인해 근처에 있을 검문의 무
인들도 다가올 것이다. 귀찮게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여운휘는 시야를
가리는 죽립을 오히려 눌러썼다.
"거, 건방진……"
뇌수혈황이 푸들푸들 떨었다. 입가에 잔 경련까지 인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모욕을 받은 것은 처음인 듯 하다.
그렇지만 분하게도 뇌수혈황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얕봤던 여운
휘가 자신보다 고수라는 것을.
우선은 살아야 한다. 살아야 이 분한 마음도 어떻게 할 수 있다. 죽는다면
그 순간 모든 게 끝이니까……
그렇지만 여운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죽인다, 반드시.'
뇌수혈황은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여운휘는 검을 상단까지 들어올렸다. 아래쪽이 허점으로 가득했지만 뇌수
혈황은 공격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대신 눈을 굴렸다. 어
떻게든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서다.
어떻게 시간만 끌면 검문의 무인들이 올 것이고 그들을 이용해서 도망치는
것을 제하고는 방도가 없다. 물론 검문의 무인 몇 명이 온다 해서 이 싸움
의 승패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방패로 이용하려는 거다.
그 몇 명이 방패가 되어 죽어주는 사이 멀리 도망칠 생각이다. 가능하면
무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갈 생각이다.
천산이든, 아니면 동방에 있는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된다.
여운휘가 검을 치켜 든 채로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뇌수혈황은 손에 모든
내공을 쏟아 부었다. 붉은 손이 이제는 오히려 새빨갛게 변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손 하나 뿐이다. 어떻게든 막으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팍!
여운휘의 발이 땅을 박차면서 동시에 검은 뇌수혈황의 정수리를 노리며 떨
어져 내렸다. 뇌수혈황은 수강으로 뒤덮인 손을 들어올렸다. 묵직한 충격이
온 몸을 비틀거리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뇌수혈황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손을 믿었다.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손이기에 이런 급박한 순간에 끝까지 믿을 것은 이것밖에 없다.
그런데,
휘청.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검과 마주 댄 손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악!"
툭!
손이 떨어져 내렸다. 팔뚝에서부터 완벽하게 잘라져서 땅위를 나뒹군 것이
다. 그 어떠한 무기와 부딪쳐도 상처조차 나지 않던 손이 잘라져 버렸다.
뇌수혈황은 급히 손을 휘둘렀다. 다가오려는 여운휘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서다. 그렇지만 짧아진 손은 여운휘에게 닿지 않았고 피만 허공을 향해 터
져 나왔다.
"이 놈! 이 노옴! 죽여버리고 말 테다!"
뇌수혈황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러한 공격이 여운
휘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로 무작정 휘두르는 그런
주먹질에 당할 정도로 여운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흐으! 흐으!"
미칠 듯이 숨을 몰아쉬던 뇌수혈황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슬슬 제 정신
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돌아오니 더욱 막막하다. 이 손으로 무
엇을 한단 말인가.
승부는 이미 기울어졌다. 여운휘는 검을 치켜들었다.
"내가…… 강호십일객의 하나로 무림을 풍미했던 이 내가…… 고작 저런
어린놈에게 죽게 될 줄이야."
뇌수혈황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여운휘의 검이 바람처럼 뇌수혈황
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의 목이 땅을 굴렀다.
여운휘는 검을 가볍게 털었다.
그는 제왕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근처에서 조금씩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소란을 듣고 검문의 무인이 움직이는 것이리라.
여운휘는 아래쪽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서는 철비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는 애초부터 싸움이 벌여지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철비상은
여운휘가 오자 급히 말했다.
"어서 뜨지."
여운휘는 죽립을 한 손으로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의 몸이 검문
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외곽이기도 하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
지 않는 것보다 서둘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비적이 임무를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지금 알 방법은 없다.
그저 믿을 뿐이다. 잘 해냈을 것이라고.
검문의 담을 넘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알아차린 모
양이다. 그러나 둘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았다.
슉슉!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재차 도약을 하며 둘은 선착장을 향해 달렸다.
계획대로라면 비적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선착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청을 때렸다.
"여깁니다! 어서!"
비적이 여운휘와 철비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둘은 비적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달렸다.
철비상이 고함을 질렀다.
"출발시켜!"
아직 배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음에도 철비상은 배를 출발시키라고 명했
다. 비적은 그저 옆에 있는 젊은 사내에게 말했다.
"어서 몰게!"
"하지만 아직……"
"어서!"
사내는 찔끔하고 서둘러 배를 나루에서 출발시켰다. 선착장에서 배는 떠나
가기 시작했고 철비상과 여운휘는 그 배를 향해 계속해서 달렸다. 철비상
이 달리는 와중에 여운휘를 향해 말했다.
"저 배에 착륙하지 못하면 그대로 강에 빠지게 될 거야! 흐흐! 아마도 꼴
사납겠지?"
"난 그럴 일 없으니 당신이나 조심해."
퉁명스럽게 여운휘는 대꾸하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여운휘의 몸과 철비상
이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둘의 몸이 마치 그림처럼 배 위로 착지했다.
엄청난 높이에서 두 사내가 떨어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흔들리지 않
았다.
배를 몰고 있던 젊은 사내는 감탄한 듯이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여운휘와 철비상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배 위에 걸터 앉았
다.
완벽하게 성공했다. 검문의 문주인 엽강청을 죽였고, 강호십일객 중 하나인
뇌수혈황을 벴다. 애초의 목적의 반 이상은 성공한 셈이다.
잠시 숨을 돌린 철비상이 바로 비적에게 물었다.
"계획은?"
"성공입니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벴습니다."
"수고했네! 하하! 이제 그는 눈과 귀, 그리고 식량에 이어 무력까지 잃은
것이군."
"두 분은 어찌 되셨습니까?"
"걱정 말게. 엽강청과 뇌수혈황 모두 이 친구 손에서 박살이 났으니 말일
세."
"그렇군요."
비적은 여운휘를 힐끔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는 뱃전에 앉아 그저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미칠 듯
이 불어오는 강바람에 휘날렸다. 여운휘는 바람을 마주보면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생겼고 또 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설린이 앞에 떳떳하게 서게 될 날만 남은 것이다.
'설린이도 이제는 알았겠지. 내가 살아 있음을. 기다려. 모든 일을 해결하고
갈 테니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 거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여운휘는 모른다.
능려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랬기에 유설린이 자신이 살
아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