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37)

혼돈(混沌)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 탓에 무인들은 바짝 긴장해 있지만 그것도 상인들에 

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다. 그들에게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은 그저 장사에 

영향을 주는 것뿐이지 크게 마음에 와 닿는 일이 아니다. 

악양도 그렇다. 커다란 시장은 오늘도 활기로 가득했다. 물건을 팔려는 사 

람과 사려는 사람들의 입씨름이 오갔다. 팔려는 사람은 최대한 가격을 높 

이길 원했고 사려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물건을 구하기를 바랬 

다. 

결코 특별해 보이지 않는 광경들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장소에 

검은 옷에 죽립을 쓴 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몸의 굴곡으로 추측컨대 사내다. 

사내는 봇짐 하나를 메고 있었다.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근처에 있는 객잔에 들어갔다. 

점소이가 달려왔다. 

"식사하시려고요?" 

"방 하나." 

차가운 목소리에 나이 어린 점소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방으로 안내 

했다. 악양의 외곽에 있는 작은 객잔이다. 그렇기에 이 객잔에 들르는 손님 

들은 대부분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비록 조금 싸다고는 하지만 얼마만 더 

들어가면 이보다 훨씬 좋은 객잔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점소이는 방에 사내를 안내하고는 문을 닫기 전에 물었다. 

"저 식사는……" 

"필요 없다." 

죽립도 벗지 않은 채로 사내가 말했다. 점소이는 찔끔하면서 문을 닫았다. 

점소이가 나가자 그제야 사내는 죽립을 벗었다. 한동안 벗지 않았던 죽립 

을 벗으면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날카로워 보이긴 하지만 그 누가 본 

다 한들 감탄성이 나올만한 외모다. 

죽립의 사내는 여운휘였다. 

그는 침상 위에 죽립과 봇짐을 던져놨다. 봇짐 안에는 별반 것이 들어있지 

않다. 제왕검과 몇 가지 간단한 것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봇짐은 상인들 

이 물건을 넣고 다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건 여운휘가 일부로 그렇게 꾸민 것이기도 했다. 

악양에 도착은 했지만 유가에 가기보다는 먼저 근방 객잔에 머물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유가 쪽이라면 분명 여운휘의 얼굴 

을 아는 자들도 적지 않다. 가까운 곳을 가는 거라도 죽립은 필수다. 

그리고 행동 하나 하나에 조심해야 한다. 눈에 드러나는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 

여운휘는 침상에 몸을 눕혔다. 제대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악양유가에 가 보고 싶지만 상황의 여의치 않다. 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다. 차라리 밤이 된 후에나 움직이는 게 낫다. 

차후의 일은 우선 악양유가의 주변을 살핀 후에 정할 일이다. 

여운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틈이 날 때마다 그가 하는 행동이다. 오행 

검법을 대성하기 위해서 여운휘는 목숨을 걸었다. 일각이라도, 아니 단 일 

수유도 오행검법을 익힐 수 있다면 여운휘는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은 여운휘의 머리 속으로 오행의 상리가 쉬지 않고 흘렀다. 

오행에는 상생이 있고 상극이 있다. 

수생목(水生木), 물에서 나무가 난다는 말로 상생이다. 

수극화(水克火), 물은 불을 이긴다는 말로 상극이다. 

오행을 이루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는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것이 상생과 상극. 

다섯 가지의 오행을 잘만 이용하면 그 위력이 배가되고 잘못하면 오히려 

위력이 절감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문둔갑이나 진법, 풍수 등과 연관이 된다. 

또 오행은 오방(五方:동서남북과 중앙)과도 연관이 되면 다시금 신묘한 변 

화를 보인다. 

오행검법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 

다. 여운휘는 지금 그런 오행검법의 끝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정리 

를 하는 것뿐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게 세 시진 가량을 골머리 썩히던 여운휘가 눈을 떴다. 

창 밖을 보니 이미 밖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여운휘는 봇짐에서 제왕검을 

꺼내 옷 속으로 숨기고는 죽립을 눌러썼다. 

악양유가의 주변을 둘러 봐야 할 시간이다. 

문을 열고 여운휘는 객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점소이와 잠시 눈이 마주 

쳤지만 여운휘는 내색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여운휘는 죽립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어둠 속에 몸을 동화시키 

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운휘가 있던 자리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 

다. 

슉슉! 

여운휘의 몸이 악양의 밤거리를 누볐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여운휘의 움 

직임은 빠르고 은밀했다. 

너무나 익숙한 길이다. 몇 년을 누볐던 길이 여운휘의 눈앞에 펼쳐졌다. 

악양유가에 다가갈수록 여운휘의 걸음은 더뎌졌다. 악양유가 근처에 가득 

한 무인들 탓이다. 미리 듣기는 했지만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다. 악양유 

가 주변을 빠질 틈 없이 무인들이 감싸고 있는 것이다. 

파고들려면 가능한 일이지만 여운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오 장 간격으로 한 명씩.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체를 보는 자들도 

있다.' 

오면서 몇 명을 가로질러서 왔다. 그곳에서는 따돌리기 쉬웠지만 악양유가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가장 거치적거리는 자들이다. 멀리 있다보니 어디 

를 감시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유설린을 구하러 온 거라면 오히려 간단하다. 밖에 쪽부터 은밀하게 죽이 

면서 들어가는 게 여운휘에게는 오히려 편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유설린을 

구하러 온 게 아니다.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온 길. 

하지만 이런 감시가 있다면 유설린의 곁으로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 

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을 지키는 자들이 있을 게 분명하다. 

알지만 여운휘는 보고 싶은 거다. 안전하게 있는 유설린의 모습이. 

애초부터 바로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유가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사실을 유설린 

에게 전해달라고만 하면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믿을 만한 인물이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자신의 정체를 보여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여운휘 

는 죽은 걸로 있어야 한다. 그게 활동을 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면 

으로 편리하니까. 

'내일 다시?' 

감시가 예상을 훨씬 웃돌 정도로 촘촘해 여운휘는 내일 다시 발걸음을 옮 

길까 생각해 봤다. 하지만 곧 도리질 쳤다. 여유 있게 빈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여력이 없다. 유설린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살아있 

다는 사실을 알릴만한 자도 찾아내야 한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 차라리 속전속결로 이 일을 해결하고 혈교 

로 돌아가는 게 낫다. 오행검법도 보다 차분하게 익혀야 할 것 같고, 혈교 

의 거사에 여운휘 또한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파고들어야겠군.' 

우선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고. 여운휘는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악양의 구석구석을 잘 안다. 개중에 거지 

들이 머무는 곳도 알고 있다. 

여운휘가 향하는 곳은 바로 그 거지들의 거처다. 개방 소속이 아닌 정말로 

구걸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화려한 다리 아래에 대조적으로 움막 같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비바람 

이 불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단숨에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볼품 없는 

집이었다. 

늦은 밤이라 아무의 발걸음도 닿지 않는 그곳에 여운휘가 다가갔다. 

걸레라고 착각 될 정도의 천을 손으로 밀면서 안으로 들어간 여운휘는 지 

독한 악취를 맡아야만 했다. 열 명의 거지들이 그곳에서 누운 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여운휘는 개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를 발로 툭툭 쳤다. 

거지는 목덜미를 벅벅 긁으면서 짜증스럽다는 듯 몸을 돌렸다. 여운휘는 

다시금 거지 사내의 몸을 발로 건드렸다. 

참다 참다 화가 솟구쳤는지 거지 사내가 일어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놈의 새끼가 잠버릇 한 번 고약……" 

말을 하던 거지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앞에서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운휘를 발견한 것이다. 죽립은 쓴 정체불명의 사내를 보자 거지 사내는 

바짝 긴장한 채로 말했다. 

"누, 누구요?" 

여운휘는 대답 없이 품안에 있는 돈을 던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거지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만큼 여운휘가 던 

진 돈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다른 놈들도 깨워." 

사내는 돈과 여운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곧 옆에 있는 거지를 손으로 마 

구 흔들었다. 옆에 있던 거지 또한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여운 

휘를 보고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돈을 본 그 거지 또한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 돈이라 

면 몇 년은 구걸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이다. 

열 명이나 되는 거지가 모두 일어났다. 

그들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여운휘의 몸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기도와 이 정도 돈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 거지들의 욕망을 억눌렀다. 

이 거지들의 우두머리인 삼십 대 후반 정도의 거지가 나섰다. 

"이 정도 돈이라면 분명 우리에게 부탁할 일이 쉽지는 않을 터…… 우리에 

게 시킬 일이 뭐요?"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돈도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여운휘가 말했다. 

"너희는 그저 악양유가 근처에 가서 두 패로 나뉘어져 싸움만 하면 된다." 

"고작 그거요?" 

"그래. 하지만 결코 장난처럼 보여서는 안 될 거야. 서로 피투성이가 될 때 

까지 싸우다가 물러서."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우라는 것도 칼부림이 아닌 

그저 주먹다짐일 터인데 그 것으로 이만한 돈을 얻는다면 몇 번이고 해 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의심이 간다. 겨우 그 정도로 이만한 돈을 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가 않는다. 

"정말 그거면 다 되는 거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하지 마라. 너희가 아니라도 이 일을 할 사람들 

은 많으니까." 

"아, 아니오! 하겠소." 

여운휘의 말에 거지들의 두목이 급히 나섰다. 위험한 일이 아니다. 어렵지 

도 않은 일에 이 같은 보수를 준다는데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럼 모두 따라나와." 

여운휘가 먼저 말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거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돈이라면 군침이 돌 

고도 남는다. 그들은 지기 싫다는 듯 먼저 나가기 위해 우르르 몰려 나갔 

다. 

밖에 있던 여운휘는 거지들이 모두 나오자 입을 열었다. 

"두 패로 나눠." 

쭈뼛거리던 그들은 곧 다섯 명씩 두 패로 나누었다. 

여운휘는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악양유가를 향해 걷기 시 

작했다. 거지들은 미적거리면서 여운휘의 뒤를 따랐다. 악양유가를 향하던 

여운휘가 멈췄다. 

"이제 너희 두 패는 양쪽으로 갈라져라. 그리고 악양유가의 담을 타고 걸 

어. 그러다가 만나는 부근에서 싸우면 된다. 싸우는 과정까지는 너희들이 

미리 이야기 해둬." 

여운휘의 말에 열 명의 거지는 머리를 맞대고 수근 거렸다. 그러다가 곧 

대충 계획을 짰는지 다시금 두 패로 갈라졌다. 

"너희는 포목점(布木店) 앞에서부터, 그리고 너희는 거부 금추상(錦追上) 

집의 북문에서부터 움직여라." 

거지들의 우두머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라." 

말을 마친 여운휘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거지들의 눈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하지만 들어서 알고 있다. 무림의 고수들은 하늘을 날고, 산을 가른다고. 

지금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자 또한 그런 부류의 인물일 것이 

다. 하지만 그런 것이 거지들에게 중요할 턱이 없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나타난 어마어마한 돈에 그저 시킨 일을 할 뿐이다. 

"가자." 

우두머리는 자신이 이끌 네 명을 데리고 포목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리고 나머지 패거리는 거부 금추상의 집 북문 쪽으로 움직였다. 

여운휘는 그 두 패거리가 만날 부분에서 몸을 감춘 상태로 정면을 응시했 

다. 사방에 무인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운휘가 근처에 다가와 

있음을 알지 못했다. 

예정대로 축시에 움직였다면 곧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걸리면 바로 검을 나누어야 

한다. 

떳떳하게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오히려 모습을 감춰야 하는 

여운휘다. 하지만 여운휘는 전혀 떨지 않았다. 

너무나 태연하기에 그저 밤하늘을 보기 위해 나온 유랑객으로 오해가 가기 

도 할 정도다. 

그렇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전혀 그럴 상황은 아니다. 여운휘는 바짝 칼을 

세운 채로 만약의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전방을 주시하던 여운휘의 눈에 두 패의 거지 무리가 동시에 잡혔다. 약속 

한 대로 잘 움직인 모양이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오던 두 패거리는 서로의 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그 

때 거지의 우두머리의 옆에 있던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혀, 형님! 저 놈들입니다!" 

"뭐가?" 

"유삼이를 두들겨 팬 그 놈들 말입니다!" 

"뭐! 저 개자식들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우두머리였던 사내는 몸을 붕하고 날렸다. 

양발이 맨 앞에 오던 다른 패의 사내의 가슴을 때렸다. 맨 앞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을 가격 당한 거지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 새끼들아! 감히 내 아우를 건드렸단 말이지? 오늘 네 놈들 줄초상날 

줄 알아라!" 

우두머리 거지가 다시금 몸을 날렸지만 상대편에 있던 거지 중 가장 덩치 

가 좋은 자가 앞으로 나섰다. 팔뚝을 들어올려 발차기를 막아내자 우두머 

리 거지는 땅을 나뒹굴었다. 

"어쭈? 한 가닥 하는 놈이 있다 이거지? 오냐 받아라!" 

그 순간 우격다짐에 가까운 주먹질이 시작됐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 

지들 모두 싸움에 끼여들었고 곧 개싸움처럼 마구 땅을 뒹굴고 다녔다. 

'지금이다!' 

기회라고 느끼는 순간 여운휘는 벽 가까이까지 순식간에 기듯이 다가갔다. 

슉! 

벽이 가까워지자 여운휘의 발이 나무를 박차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여운휘의 몸이 담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거지들 

의 싸움에 시선을 돌린 탓에 눈을 뜨고 있었다고 해도 보기 힘들었을 여운 

휘의 움직임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년간을 살아온 악양유가의 지리를 여운휘가 모를 리 없다. 그는 조심스 

럽게 몸을 감춘 채로 유설린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악양유가 내부 또한 외곽에 비할 정도로 감시가 철저했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신형을 발견할 정도의 고수는 이 안에 없었다. 

그토록 격하고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엄청난 

신법이다. 

스륵. 

여운휘의 몸이 유설린의 머무는 건물의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평소 이 시간이라면 유설린은 여운휘와 함께 거처 안에 있는 작은 연못 주 

변을 돌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운휘는 조심스럽게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며 건물 지붕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안타깝다. 이 작은 돌들만 치운다면 그녀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여운휘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돌이 여운휘의 귀를 간질였다. 

달빛 아래에서 한 사내가 지붕 위에 귀를 가져다 대고 눈을 감고 있는 모 

습은 그 어떠한 걸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쓸쓸해 보이고, 슬퍼 보 

인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거냐……'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항상 혼자 

서라도 즐겁게 떠들곤 하던 유설린이었는데 이제는 그 목소리조차도 귓가 

를 맴돌 뿐이다. 

'아무 말이라도 해 봐. 네가 건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보지 못한다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건강하다는 것만 안다면 홀가분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혈교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웃음소리는커녕 목소리조차도. 

곁에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 여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 

쥐었다. 아프다, 가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있다보면 발각될 

지도 모른다. 

애초 이곳에 온 목적이 유설린의 건강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여운휘 

는 내공을 손가락 하나에 집중했다. 

다소 힘든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다. 

지붕 위에 구멍을 뚫어 보려는 속셈이다. 

단순히 부술 수는 없었다. 손가락으로 지긋이 누르되 부서진 가루들이 아 

래로 떨어지면 안 된다.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걸릴 위험이 있다. 완전하게 

먼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운휘는 내공이 모인 검지로 지긋이 지붕을 눌러 내렸다. 

수욱. 

마치 물컹물컹한 무엇인가에 손가락이 파고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돌들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여운휘의 손가락이 마침내 공기와 닿았다. 

지붕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여운휘는 검지를 슬그머니 빼냈다. 그는 그 구멍을 향해 눈을 가져다 댔다. 

있다! 그녀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있었다! 

숨을 쉬고 있고 눈을 뜨고 있다. 살아 있는 게 분명하다. 

'많이 말랐구나. 밥은 제대로 먹는 거냐.'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뱉어낼 수 없었다. 

완전히 힘이 빠짐 모습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눈에 있던 그 총기도 보이 

지 않는다. 혼이 빠진 듯 한 모습이다. 

여운휘는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무엇에 정신을 차렸다. 유설린의 앞을 누 

군가가 가로막은 것이다. 뒷모습을 보아하니 여인이다. 보폭이 가지런하다. 

그리고 은근히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고수임이 분명하다. 

'무림맹에서 붙인 감시자로군.' 

그런데 이상하다. 

뒷모습뿐이지만 낯이 익다. 그가 무림맹과 관련해서 아는 여인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이만한 기도를 뿜어내는 여인은 없었다. 

그가 무림에서 본 여인 중 가장 강했던 여인은 척마신풍대의 지객이었던 

하을지였다. 하지만 그녀도 저 정도의 실력자는 아니었다. 

여운휘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뒷모습만 보이지만 분명 아는 사람임이 분 

명하다. 

'하을지는 아닌데…… 무림에서 그녀를 능가하는 여인은 녹포괴존을 제하 

고는 본 적이 없……' 

말을 하던 여운휘는 문득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포괴존만이 아니다. 

하을지보다 강했던 여인 한 명이 있었다. 잠시 멈칫했지만 생각이 나 버렸 

다. 

'사무…… 린?' 

한 여인의 모습이 생각남과 동시에 유설린의 옆에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 

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무림맹의 감시가 철저한 이곳에 사무린이 있다. 

마교의 인물인 사무린이 말이다. 

몰래 침투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녀가 유설린을 이렇게 은밀하게 찾아 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 

약 유설린을 사무린이 찾아온 거라면 지금쯤 죽이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 

인가를 했어야 옳다. 

지금 사무린은 유설린에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놀랐지만 곧 생각은 정리됐다. 

일마의 손길이 이곳까지 뻗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유설린의 옆에 

사무린을 놓아두는 것으로 완벽하게 유가를 감시하려는 계책인 게 분명했 

다. 

'사무린이 설린이의 옆에 있다……?' 

위험하다. 사무린은 뱀 같은 여인이다. 

유설린이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사무린은 그녀보다 몇 수 위다. 사람을 

이용할 줄 아는 사무린에게 유설린은 그저 가지고 놀기 쉬운 장난감일 뿐 

이다. 

더군다나 지금 유설린은 제 상태도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는 그녀 

의 옆에 사무린이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여운휘는 눈을 돌렸다. 여전히 의자에 몸을 실은 채로 유설린은 벽을 응시 

했다. 

어린 새와도 같은 모습에 여운휘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구멍에서 눈을 

땠다. 

마음은 아프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한다. 더군다나 사무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곧 일마의 세력 또한 이곳에 손을 뻗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림맹과 일마에게 혈교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유설린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릴 자에게 또 다른 사실하나를 말해야 한 

다. 그녀의 옆에 있는 사무린이라는 여인은 실제로는 마교의 무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일마의 세력이 유가에 뻗쳐 있다는 것도 말이다. 

여운휘는 옆에 있는 기왓장을 조금 당기면서 구멍을 막았다. 만약 구멍이 

그대로 있으면 해가 뜨면서 그 틈으로 빛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 

가가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여운휘는 구멍을 막은 후 그곳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유설린의 체온이 느 

껴지는 듯 하다. 

한동안 지붕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중얼거렸다. 

'곧 올게.' 

미련이 남지만 여운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유설린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거처를 벗어나서 다시금 몸을 감췄다. 

유설린의 거처만큼 감시가 심한 건 아니지만 결코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 

다. 

여운휘는 우선 우문학이 머물던 거처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설린이보다 감시가 더 심해.' 

우문학에게 향하는 감시의 눈길이 오히려 유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유 

설린보다도 더하다. 아마도 그에게서 뭔가를 잡아내려는 듯 했다. 

'안 돼. 우문학은.' 

유가 내에서 가장 믿을 만한 자였다. 유일하게 유설린의 호위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었던 사내다. 하지만 지금은 다가갈 수 없다. 

막막했다. 우문학이 아니라면 딱히 누구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떠오 

르지 않았다. 

그때 우문학의 방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능려운?' 

처음 유가를 세울 때 뽑았던 낭인 중 가장 강했던 자로 지금은 우문학의 

제자인 사내다. 

여운휘의 눈이 빛났다. 

능려운의 거처라면 여운휘 또한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또한 나름대로의 

위치인 지라 독방을 사용하고 있다. 여운휘는 능려운을 오히려 앞질러 달 

리기 시작했다. 

능려운의 거처 근방에는 딱히 감시를 하고 있는 자가 없었다. 여운휘는 능 

려운의 거처 안에 들어가 몸을 감췄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나 

자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천장 위 쪽에 붙어 있던 여운휘로서는 그게 누군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후우." 

능려운은 피곤하다는 듯이 겉에 입고 있던 옷을 침상에 던졌다. 

그리고 때맞추어 여운휘 또한 아래로 뛰어 내렸다. 

막 고개를 돌리던 능려운은 여운휘의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여운휘가 검지를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용." 

"다, 당신……" 

"네가 알던 진군휘가 내가 맞으니 조용히 해라." 

"…… 살아 있었소?"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려운으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던 모양이다. 그는 여운휘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혹시나 인피면구를 쓴 전혀 다른 사람이 다가온 건지도 모 

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능려운의 마음을 알아차린 여운휘가 차갑게 말했다. 

"네가 그리 본다면 인피면구를 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있나?" 

"…… 믿을 수 없으니까." 

비록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얼마 후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게 

무림이라 하지만 이건 아니다. 

능려운은 여운휘가 처했던 상황에 대해 대충 들었다. 무림맹의 무인들의 

완벽한 포위. 그리고 그 안에서 여운휘는 죽었다. 

전혀 틈이 없다. 여운휘가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나타나 있으니 이 일을 믿어야 할지 말아 

야 할지 능려운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운휘는 능려운에게 말했다. 

"네가 익히고 있는 검법의 이름은 혈풍구룡검법. 우문학에게 배우고 있지." 

"맞군, 당신이.' 

능려운이 우문학의 밑에서 혈풍구룡검법을 배우는지 아는 사람은 몇 없다. 

여운휘와 유설린 정도? 그 사실을 아는 자라면 여운휘임이 틀림없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산 거요?" 

귀신을 보는 느낌이다.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사내가 이토록 눈앞에 있 

으니. 

"자세한 것을 말할 처지가 아니고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다." 

말을 마친 여운휘는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결코 이 일은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이다. 여운휘의 행동에서 능려운 

은 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가주에게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줬으면 하는 군. 물론 다른 사람 모르게 

말이야. 전음을 사용하던지 아니면 우문학에게 알려줘. 그럼 그가 어떻게든 

설린이에게 알려줄 테니까." 

순간 능려운의 얼굴이 굳었다. 그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 

고 여운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사무린이라고 지금 설린이 옆에 있는 여자." 

"……?" 

"마교의 무인이다. 일마의 심복이지. 이것도 우문학에게 알려줬으면 하는 

군." 

"사무린이라는 그 여자는 무림맹에서 보낸 여자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니오?" 

"내가 그 여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나? 알다시피 난 마교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사무린과 함께 무공을 익혔지. 내 눈은 틀 

림없다." 

여운휘의 말대로다. 아무도 말하지 않은 사무린의 이름을 아는 것도 그렇 

고, 마교에서 같이 있었다면 결코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일마에 대해 잘 모르는 능려운으로서는 지금 상황을 쉽게 믿기가 

어려웠다. 

"우문학에게 말만 해 놔. 그럼 그가 알아서 할 테니." 

굳이 그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여운휘는 말을 잘랐 

다. 그리고 여운휘는 창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여운휘나 능려운 모두에게 좋지 않다. 

"조만간 다시 찾아오지." 

"잠깐!" 

창문을 통해 막 나가려는 여운휘의 소매를 능려운이 잡았다. 

그는 잠시 멈칫 했지만 곧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언제쯤 올 생각이오?" 

"빠르면 두 달 정도 후에." 

"…… 알겠소." 

능려운은 여운휘의 소매를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여운휘는 그를 힐 

끔 바라본 후 곧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나무 위로 우선 몸을 감춘 뒤 주변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행적을 들 

키지 않았다. 이제는 잘 벗어나서 혈교로 돌아만 가면 되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려웠지만 나가는 것은 쉽다. 굳이 눈을 어딘 가로 

쏠리게 할 이유도 없다. 

비밀통로가 있는 것이다. 들어올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가능한 통로가 말이다. 물론 아는 것은 유가의 핵심 인물이었던 몇 명뿐이다. 

여운휘는 통로가 감춰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능려운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지는 여운휘의 뒷모습을 환영처럼 

잠시 봤을 뿐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는다. 

창턱을 잡고 있던 능려운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여운휘가 우문학이나 유설린에게 말해 주라고 했던 말…… 

능려운은 방금 전 우문학과의 만남을 생각했다. 

평소대로 우문학에게 무공을 배우러 갔다. 

그리고 우문학은 언제나처럼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해줬 

다. 그저 혈풍구룡검법에 집중하고 있던 능려운의 귀에 전음이 날아든 것 

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표정 바꾸지 말고 내 말 잘 듣게.] 

"제 사 초에서 오 초까지는 부드러움이 가장 중요하네. 검 끝에 주시하면 

서 다시 펼쳐보게." 

전음을 보내자마자 우문학은 능려운에게 말했다. 

우문학이 뭔가 자신에게 전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능려운은 알아차렸다. 

능려운은 전음에 내색하지 않고 우문학이 시킨 대로 그저 검법을 펼쳤다. 

검법을 펼치는 능려운에게 다시금 우문학이 전음을 보냈다. 

[소가주님을 도망치게 할 생각이야. 자네가 도와줘야겠어.] 

"다시!" 

검초가 끝나자마자 우문학이 고함을 쳤다. 능려운은 재차 검초를 펼쳤고 

계속해서 우문학은 점음을 날렸다. 

[유가에는 비밀통로가 있네. 그 길을 이용해 자네가 소가주님을 모시고 도 

망가주었으면 하네. 그 길은 내가 만들 걸세.] 

우문학은 이렇게 있어봤자 유설린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 

다. 

이제 마교를 되찾을 거라는 꿈은 우문학 또한 포기한지 오래다. 유가의 힘 

을 아무리 잘 이용한다 해도 마교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꿈에 불과하다. 아직도 꿈을 꿀 정도로 우문학은 어리지 않다. 

이제 우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소교주 유설린에게 자유를 찾아주는 것이 

다. 비록 밖으로 나간다 한들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그래도 우문학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유가의 모든 세력은 유설린 

의 뒤를 봐줄 것이다. 

[자네가 소가주님을 보필해 주게. 그나마 측근 중에 자네의 감시가 가장 

적지 않은가? 부탁이네. 해 줄 수 있는가?] 

"슬슬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단점이 보이는가?" 

"…… 예." 

대답을 했으나 그것은 전음에 대한 것이다. 

[평생을 옆에서 모셔야 할거네. 그래도 괜찮은가?] 

"오늘은 대충 이것으로 수업은 마치도록 하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능려운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유설린을 사모한다. 요즘 힘이 빠진 유설린을 보면서 항상 가슴이 아 

팠던 그다. 비록 여운휘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에 그는 쉽게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맙군. 조만간 연락을 주겠네.] 

"그럼 다음에 찾아오게." 

"수고하셨습니다." 

능려운은 고개를 숙였다. 비록 현재 유가의 사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 

지만 지금 우문학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지 잘 아는 탓이다. 

우문학은 죽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문학만큼은 분명 죽는다. 

지금도 이미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 그다. 그래도 항상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한 이 계획을 위해서인 듯 싶다. 

건물을 벗어난 능려운은 마음이 심란했다. 이미 이 주변에 이상한 자들이 

유가의 인물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다. 

우문학을 비롯한 모두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유설린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은 행복하기만 하다. 

그렇게 평소대로 거처에 온 능려운은 결코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 버린 

것이다. 

여운휘. 

그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사실은 분명 중요한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던 능려운이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미안하오. 나는, 나는…… 당신에게 들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기에 물었다. 언제쯤 돌아올 것이냐고. 두 달이라면 아마 우문학의 계 

획이 펼쳐진 이후일 것이다. 

잘못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능려운은 악한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 여인을 위해 그는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 마음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녀가. 그리고 여운 

휘와 함께라면 분명 유설린은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 우문학은 생각했다. 

비록 혼이 빠져 버린 인형이라도 좋았다. 

그녀가 곁에만 있어준다면. 

능려운은 고개를 떨군 채로 중얼거렸다. 

'하늘이여 나에게 벌을 내리소서. 그렇지만 이 생에서 내가 그녀와 함께 하 

는 것만큼은 허락해 주십시오……' 

만약 신이라는 게 있다면 벌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유설린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다. 

설령 그녀가 끝끝내 자신을 봐 주지 않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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