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程)
상의부터 하의까지 온통 검은 색 옷으로 입은 사내가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발걸음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사내는 녹포괴존을 만나기 위해 여정을 떠난 여운휘
다. 그는 혈교를 떠났다.
모든 준비를 하고 있겠다고 했다. 어떤 작전을 펼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되지 않
은 세력으로 아수라교를 규합해 혈교라는 단체를 만들어낸 혈무린이다. 분명 무인이
지만 그는 지략가이기도 하다.
한시가 급하기에 여운휘는 쉬지도 않고 녹포괴존을 만나기 위해 강서로 달렸다. 혈
교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여운휘로서는 상당히
벅찬 여정이다. 더군다나 무림맹과 마교의 전투가 근방에서 벌어지는 탓에 그들 또
한 조심해야만 했다.
여운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죽립(竹笠)을 쓴 상태다. 그는 한 손으로 죽립을 조심
스럽게 들어내면서 주변을 살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연신 그가 행한 행동이
다.
이상하게도 마을에 무인으로 보이는 자가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는다. 추적자가 붙은 것 같지도 않고 애초부터 그럴만
한 이유도 없다. 분명 여운휘는 죽은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길거리에 내놓은 노점상(露店商)으로 다가가자 주인이 신명 난 듯이 소리쳤다.
"어서 옵쇼! 무엇을 드릴까요?"
"만두 하나."
작은 주문이었는데도 주인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만두 하나를 여운휘에게 건넸다.
여운휘는 만두를 먹으면서 주인에게 묻기 시작했다.
"영수산(靈囚山)이 이곳이라고 하던데 맞나?"
"맞긴 맞습니다만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죽립을 쓴 채로 여운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질색을 하면서 노점상의 주인이
말했다.
"그곳은 귀신이 삽니다요! 괜히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
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서 아무도 그 산을 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틀 정도 더 걸리더라고 안전하게 옆길로 돌아가시는 게……"
"근방에 무슨 일이 있나?"
"무림맹과 마교의 싸우고 있다지 않습니까. 그 탓에 이곳에도 이토록 무인들이 많
은 것이고 말입니다."
그제야 여운휘는 작은 마을에 이 같이 많은 무인들이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다행
히 여운휘는 검을 숨기고 있고 또한 체형 또한 무인이라기 보다는 서생 같아 아무
도 주의 깊게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에구 에구, 말려도 산을 넘으실 모양입니다요."
과연 장사치다. 꽤나 오랜 시간 사람들을 보아온 탓인지 여운휘의 맘이 변하지 않
은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객잔을 가리켰다.
"저 객잔에 내일 산을 넘을 상단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무리에 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요. 그들도 최대한 많은 사람과 이동하려고 하니 말입지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던 여운휘는 곧 생각을 바꿨다.
아무래도 무인들이 많다보니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하지만 상단에 끼어서 움직인다
면 딱히 신분을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운휘는 동전 몇 문을 주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객잔은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아마도 이들이 내일 영수
산을 넘으려고 하는 일행인 모양이다. 여운휘는 그 중서 구석에 앉은 채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중년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운휘가 판단하기로 이 상단의 우두머리는 이 자다.
"내일 산을 넘으실 거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죽립을 쓴 여운휘가 그를 마주
봤다.
"그렇네만?"
"나 또한 일이 있어 저 산을 오르려 하는데 같이 이동해도 되겠소? 원한다면 사례
는 섭섭지 않게 하리다."
사례라는 말에 중년인은 웃었다. 행색을 보면 결코 돈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데 전혀 망설임도 없이 사례를 한다고 한다.
중년인은 영화표국(瑛華驃局)의 표두 중 하나인 우중검(雨重劍) 우국이다.
"아, 혹 내가 웃어서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겠네."
"되오 안 되오? 그것만 말하시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가능하네. 그런데……"
"언제 출발한 것이오?"
수락을 받게 되니 여운휘는 더 이상 관계하기 싫다는 듯이 말을 끊어버렸다.
"해가 뜬 후 반 시진 후에 출발 할 거네."
대답을 듣고 나서 여운휘는 옆에 있는 점소이에게 말해 방 하나를 잡고는 바로 들어
가 버렸다.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해 버리는 여운휘의 모습에 우중검 우국은 실소를
흘려 버렸다.
갑자기 나타나 우국에게 다가간 여운휘를 보고 있던 표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저 놈?"
"모르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니."
"우리와 같이 저 산을 넘자고 한 것 같은데요?"
"그렇네. 그리고 나 또한 수락했고."
표사가 이해 할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코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분위
기를 풍기는 자였다. 신분이 확신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의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전혀 알 수도 없는 자를 왜 그리 쉽게 받아들였는지 의문이
든 탓이다.
"걱정 말게. 날카로워 보이는 사내였지만 우리 표행에 도움이 되었으면 됐지 결코
해가 될 사람은 아닌 듯 하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한 우국이다. 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국은 창문 밖을 살피며 멀리 서 있는 산을 바라봤다.
영수산.
귀신이 살고 있다는 말이 나도는 산이다. 물론 그 소문은 이 근방에서나 떠돌고 있
지 조금만 더 나간다면 영수산이라는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산이다.
그렇지만 몇 번 이 산을 넘어본 우국은 잘 알고 있다.
산세가 험하지도 않고 경관 또한 빼어나지만 다소 위험한 맹수들이 많은 것이다.
아마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맹수들에게 당했을 게다. 다행인 것은 지
금은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지만 아직은 날씨가
찬 탓에 뱀과 같은 생물들은 잠에 빠진 상태다.
'이번에도 별 일 없겠지.'
표두 하나에 표사 셋, 쟁장수 몇 명이 전부인 작은 표행이었지만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표국의 신용과도 관계가 있으니까.
우국은 걱정 없다는 듯이 술잔을 다시금 기울였다.
이른 아침의 찬 바람을 맞으며 짐을 정리하던 우국은 객잔 문을 열고 나오는 사내
를 발견했다. 어제 봤던 사내임이 분명하다. 헌데 죽립을 벗고 있던 탓에 우국은 사
내의 얼굴을 완전히 볼 수 있었다.
여운휘는 자신을 쳐다보는 우국을 뒤로하면서 죽립을 뒤집어썼다. 비록 죽었다고 알
려졌다고는 하나 얼굴을 대놓고 활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국은 예상했던 것보다 여운휘의 외모가 훨씬 어려 보이자 이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 짐을 정리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늦지 않았군."
"약속이니까."
"예상보다 젊어서 조금 놀랐네."
"별로."
말을 마친 여운휘는 조용히 짐 옆에 섰다. 그는 그곳에 선 채로 고개를 돌려 우국
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서 마음을 읽은 우국이 맨 앞에 가서 섰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탄 채로 말 배를 가볍게 찼다.
"이랴."
따각 따각.
말이 한 걸음씩 내뻗으면서 표물이 가야 할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운
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죽립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그 옆을 따랐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무림인으로 보이는 몇이 이 일행을 향해 눈을 돌렸다. 하지
만 곧 영화표국이라는 깃발을 보고는 다가오려던 걸음을 멈췄다. 여운휘는 스리슬
쩍 숨겨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찬찬히 손을 내려트렸다.
애초에 계획대로 무인들은 이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여운휘는 영화표국의 표두 표사들과 함께 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와중에 사
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체 인적이 적은 곳이기도 하고 요즘 주변이 흉흉하
다 보니 그나마 있던 사람도 발걸음을 하지 않는 탓이다.
"어디 출신이오?"
옆에서 따라 걷던 표사 하나가 물었다. 여운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사천."
"사천에서 강서는 꽤나 먼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오?"
여운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굳이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헤어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뭔가 수상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산에 오른 후에는 헤어져야 한다. 길어봤자 두, 세 시진 같이 할
인연이라는 거다.
여운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표사는 입맛을 다셨다. 묻기는 했지만 대답을 들
을 거라고 생각하고 했던 질문이 아니다. 무림에서는 많은 것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
이 허다하다. 그리고 이 사내도 그러하리라고 표사는 생각했던 것이다.
산에 이르자 걸음걸이는 더욱 느려졌다. 말이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만약에 있을지
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건 여운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혹여나 있을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여운휘는
녹포괴존을 찾기 위해서였다. 영수산, 이곳에는 녹포괴존의 거처가 있다. 아는 건
그게 전부다. 영수산에 그녀의 거처가 있다는 암황의 말 하나만 듣고 이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비록 영수산이 그리 큰 산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람 하나를 아무런 정보
도 없이 찾는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녹포괴존의 거처는 아무에게도 밝
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으리라.
우국은 비록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크게 긴장한 상태는 아니었다. 여태까지 여러
번 이 산을 넘은 경험도 있다. 더군다나 표두로 있을 만큼 이 중에서 그는 가장 빼
어난 실력자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설령 맹수가 나타난다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
다.
산의 경관은 빼어났다.
아직 덜 녹은 눈이 푸른 초목을 덮었다. 그리고 흰 눈 사이로 완연히 드러나는 초록
빛은 절로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지."
우국이 앞에서 말을 멈추면서 말했다. 모두가 멈추고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쟁
자수들은 표물을 확인했고 표사 셋은 무엇인가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제 자리에 앉
아서 숨을 돌리고 있는 것은 여운휘와 우국이 전부였다.
우국은 여운휘를 살폈다.
'호흡이 흐트러졌어. 비록 두 시진 가량을 걸었다 하지만 빼어난 무인은 아닌 모양
이군.'
손에 있는 굳은 살 정도는 이미 예전에 봤다. 하지만 나이로 보나 외향으로 보나 결
코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숨이 가빠진 것을 보고 확신했다. 이 자는
대단한 실력의 무인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떠났던 세 명의 표사가 돌아왔다. 그들은 검은 물체 하
나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을 잡은 모양이네?"
"예, 곰 새끼가 있어서 잡아왔습니다."
"뭐야? 곰의 새끼?"
우국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하필이면 잡아와도 곰의 새끼란 말인가. 우국
은 피를 흘리는 채로 들려 있는 곰의 새끼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걸리지 않은 듯 하네만 앞으로 결코 이런 일을 벌여서는 안 되네."
"예? 무슨 일을 말입니까?"
"맹수의 새끼는 잡아오면 안 되네. 특히 지금은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굳이 맹수의 새끼를 건드려서 좋은 꼴 보지 못하네. 다행히 어미 곰이 보지 못한 모
양이야. 만약 봤다면 울부짖으면 달려들었을 테니."
그때였다.
"으흐흐, 이 놈들!"
모두가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여운휘만
이 그 자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 탓에 여운휘는 태연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험상궂은 외모의 소유자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국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무슨 일이오? 우리는 영화표국의 표사들이오."
"낄낄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영화표국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표국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라는 게냐?"
찢어진 눈을 가진 사내였다. 손에는 날카롭게 휘어진 겸이 들려 있었다. 결코 좋은
의사를 지닌 자가 아니다.
우국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사람이 자주 오고가는 산이 아니기에 산
적들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수산에는 산채 같은 것은 존재하
지 않았다.
"우리는 청마사괴(請魔四怪)라고 한다. 무림맹과 마교와 싸움이 있다기에 한 몫 하
려고 왔다가 이렇게 맨 손으로 돌아가게 됐지. 아쉬웠던 찰나에 먹이 감이 걸리는
구나."
우국은 네 명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각각 괴기한 모습이다. 결코 우국 혼자서 넷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더군다나 그들 한 명과 대결을 벌인다 해도 우국은 승리를 장
담할 수 없었다.
비록 영화표국 내에서는 빼어난 실력으로 표두가 된 인물이지만 무림으로 나간다면
이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무사인 그다. 그리고 표사들이라고 있는 자들은 사람 한
번 죽여보지 못한 인물들로 지금만 해도 상대를 앞에 두고 벌벌 떨고 있다.
이런 자들을 데리고 싸워봤자 결과는 뻔하다.
우국이 나섰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내 어느 정도 돈을 줄 마음은 있소."
"네 놈은 우리가 그깟 몇 푼 돈 때문에 강도질이나 일삼는 산적의 무리로 보인다는
것이냐? 키키, 우리 청마사괴를 우습게 보는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네 놈들
의 목숨이니라! 우리들은 한동안 무기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녹이 슬어 버려서 말이
야."
우국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돈을 노리거나 표물을 노린
게 아니다.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토록 다가온 것이다.
광인이다. 이유도 없이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에서만 쾌락을 얻는 자들임이 분명하
다.
그런데 분한 것은 그런 자들을 막을 힘이 우국에게는 없다는 거다.
우국은 청마사괴가 앞으로 다가서자 검을 뽑아들었다. 청마사괴 중 하나가 삐죽거리
며 웃었다. 그 네 명의 마귀의 얼굴에는 곧 있을 살육의 기쁨 때문인지 흥분이 감돌
았다. 우국을 비롯해 표사들과 쟁자수 모두 공포에 젖고야 말았다.
"별 같지도 않은 놈들이 설쳐대는 군."
청마사괴의 눈에 일던 살기가 갑작스럽게 거두어지면서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여태까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채로 쉬고 있던 여운휘였다.
청마사괴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성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마도 공
포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마사괴는 몸을 돌려 여운휘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건방진 애송이에게는 쓴
맛을 보여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국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여운휘의 손에 검이 들렸다. 그 검을 보는 순간 청마
사괴의 눈에 탐욕의 빛이 번뜩였다. 한 눈에 봐도 대단한 명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네 이놈! 그 검을 내놓아라!"
"죽이고 가져가 봐."
"오냐, 네 놈이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말을 마친 청마사괴 중 하나가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우국이 소리쳤다.
"위험하네 피하게! 자네의 상대가 아……"
쉬릭.
부드럽게 여운휘의 몸이 아래로 파고들면서 달려든 상대의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
다. 그리고 이윽고.
퍽!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우국은 전혀 예상치 못했
던 상황에 채 말을 잇지 못했고 남은 세 명의 청마사괴 중 하나가 목청을 높였다.
"이, 이 육시랄 놈! 죽여버리겠다!"
그와 동시에 세 명의 몸이 여운휘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날아들었다.
비록 부상을 입은 여운휘였지만 청마사괴라고 자신을 일컫는 그들은 결코 여운휘의
상대가 아니었다. 제왕검이 금색 빛을 발하면서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금색의 검이 세 명의 허리를 단숨에 두 동강을 내 버렸다. 여운휘의 발이 땅에 닿
는 순간 이미 세 명의 몸은 여섯 개로 나뉘어진 상태였다.
"허억!"
우국은 단숨에 셋을 베어버리는 여운휘의 무위에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
다. 분명 젊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펼친 일검은 여태까지 우국이 보아왔던 최고
수인 자신의 사부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이, 이럴 수가……'
별 볼일 없는 무사라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오고도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 그리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해다, 그것도 너무나 큰 오
해.
"내 볼일은 끝난 듯 하군. 난 이만 여기서 떨어지지."
"생명의 은인인데 이토록 보낼 수는 없소! 내 소협에게 큰 실례를 한 듯 하오. 그러
니 식사라도 하고……"
여운휘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처음에는 식사를 하고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
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아니오, 난 따로 일이 있으니 이만 헤어지는 게 낫겠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여운휘는 우국이 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그는 내공을 용
천혈로 모으면서 경공을 펼쳤다.
그렇게 달리던 여운휘는 물이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그는 웅크린 손으로 물을
떠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빨이 시리도록 차다.
여운휘는 옷소매로 입 부근을 흠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나오시오.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 진정 네 놈이로구나."
나무 뒤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미부(美婦)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미 여운휘보다 갑절 이상을 산 노인.
녹포괴존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녹포괴존 또한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여운휘
가 죽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 분명 죽었다고 알려
진 여운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두 눈앞에 있으니까.
"오랜만이오."
"…… 할 이야기가 많을 듯 싶군."
녹포괴존의 거처는 강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변에 공터가 약간
있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나 살법한 초라한 집 한 채가 녹포괴존의 거처였다.
삐그덕 거리는 문을 열고 녹포괴존이 먼저 올라섰다.
여운휘가 안으로 들어오자 대충 발로 아래에 널려 있는 책들을 치우면서 말했다.
"자리는 별로 없지만 우선 앉지."
여운휘는 물건들이 없는 곳에 대충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녹포괴존은 자신의 상
징과도 같은 녹색 장포를 흔들면서 여운휘의 앞에 마주했다.
여전히 육십이 넘은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다. 입가에 약간 미소를 지은 채
로 녹포괴존은 여운휘를 응시했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죽지 않았소. 지금 당신 앞에 있으니까."
"그래. 소문보다야 내 눈이 믿을 만하지."
혹 누군가가 인피면구를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녹포괴존은 하지 않는 듯 싶었
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는 여운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를 읽었다. 예전에 봤
던 여운휘가 틀림없다고 녹포괴존은 확신을 내린 것이다.
아마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아까 강가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게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나?"
여운휘는 그 날 철비상에게 목숨을 구제 받은 것부터 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끝냈
다. 이야기가 다 끝나자 녹포괴존은 침묵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그녀가 말을 내
뱉었다.
"운이 좋은 놈이야, 네 놈은. 분명 죽었을 자린데 살아났군. 내 거처는 암황이 말해
줬을 테고, 그렇다면 물어 볼 것은 이곳에 온 목적인데……"
녹포괴존은 단숨에 알아차린 듯 했다. 여운휘와 그녀가 딱히 만날만한 사이가 아닌
탓이다.
여운휘 또한 이래저래 말을 돌리는 인물이 아닌지라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부탁이 있어 왔소. 오행검법의 후반부를 주시오."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내 기억으로는 날 꺾으면 준다고 했던 것 같은
데?"
이길 수 없다. 몸 상태가 멀쩡하다고 해도 결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록 녹포괴존
과 헤어진 후 조금 더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리라. 아직 여운
휘는 녹포괴존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이길 수 없소. 그건 내가 잘 알고 있고."
"아는 군. 그런데 알면서도 오행검법을 달라?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게
지?"
"부끄럽지만 그냥 주었으면 한다는 거요."
"…… 너 같은 놈과 손을 겨루었던 내가 부끄럽군."
여운휘와 헤어질 당시 여운휘는 오행검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일순 실망감
을 느꼈지만 곧 했던 여운휘의 말에 감탄을 했었다.
그냥 받으러 오는 게 아니고 실력을 키워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겼던
말에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때를 쓰는 것만 같다. 그때의 패기는 어디 가고 이 같
이 무턱대고 찾아와 가르쳐 달라는 것인가.
"분명 날 이겨야만 오행검법의 후반부를 가르쳐 준다고 했을 텐데?"
녹포괴존의 마음은 단단하다. 결코 그녀를 꺾지 않고는 오행검법의 후반부를 가르
쳐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여운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포괴존은 그런 그를 올려다봤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밖
으로 걸어 나갔다.
'포기 한 모양이군.'
녹포괴존은 여운휘를 잘 알고 있다. 이 정도의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구걸을 할 사
내는 아니다.
그런데,
털썩.
"음!"
밖으로 나간 여운휘가 문 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저 같은 사내가 누군가를 향해 무릎을 꿇는다는 것
은. 설령 황제가 온다해도 무릎을 꿇지 않을 것만 같은 사내가…… 그토록 자신에
게 두들겨 맞고도 의연하게 서 있던 사내가 지금은 무릎을 꿇었다.
"……"
녹포괴존은 너무나 당혹스러운 그 모습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릎을 꿇은 여운휘가 고개를 숙인 채로 녹포괴존을 향해 말했다.
"나에게 남은 건…… 오행검법 뿐이오. 못난 놈이라고 욕해도 좋고, 무릎을 꿇은 굴
욕스러운 사내라고 말해도 좋소. 나에게 힘을 주시오. 유일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
버린 설린이를 구할 힘이 나에게는 필요하오. 제발…… 부탁이오."
"네 놈……"
한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결코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사내가.
마음에 와 닿는 무게가 상식을 넘어선다. 얼마나 급했으면 저 같은 사내가 무릎을
꿇을까.
"원한다면…… 평생 당신의 하인이 되도 좋소."
"갈(喝)!"
녹포괴존이 고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일마와 싸우려 한다. 녹포괴존으
로서도 일마는 상대할 수 없는 자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운휘에게 희망을 거는 것
이 낫다. 어차피 익힐 수도 없는 검법이다. 준다 해도 크게 상관이 없다.
그저 아직까지 욕심이 남았던 게다.
평생을 바쳤지만 익힐 수 없었던 무공. 할아버지인 검귀 천일혼을 뛰어넘는 무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연이 아닌 게다. 오행검법과 자신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운휘를 내려다보던 녹포괴존의 눈이 한없이 자비로워졌
다.
녹포괴존은 탁자의 모서리를 팍하고 쳤다. 모서리가 부서지면서 그 안에 있는 책
한 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 책을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운휘의 앞으로 던졌다.
턱.
무엇인가가 자신의 앞에 떨어지자 여운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올렸다. 앞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낯이 익다. 분명 처음 잡아보는 책이거늘 어디선
가 본 듯 하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오행검법의 후반부다. 예전 여운휘가 집었던 오행검법의 전반부와 똑같이 생
긴 한 쌍의 책이다. 다른 책이지만 겉이 같으니 눈에 익을 수밖에 없다.
여운휘는 검붉은 책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나에게 어차피 쓸모 없는 물건. 네 놈이 가져라. 그리고…… 네 놈이 무릎 꿇고 있
는 모습은 썩 보기 싫군. 어서 일어나게."
여운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숙여진 고개만큼은 여전했다. 고맙다
는 여운휘의 마음이 담겼기에 녹포괴존은 그저 웃기만 했다.
"반드시 보답을……"
"필요 없다. 오행검법을 다 익힌 후에 나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돼. 그것으로 내 모
든 집착은 사라질 테니까."
"고맙소."
"됐다 이 놈. 오행검법을 다 익힐 때까지는 이곳에 오지 말거라."
덜컥.
문이 닫혔다. 그 누구도 그 문을 열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여운휘가 다시금 문 쪽
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행검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그 전까지는 녹포괴존을 찾지 않으리라.
시간이 부족하다. 혈교가 모든 준비와 사전 작업을 끝낼 때까지는 길어야 반년이
다. 그 안에 오행검법의 후반부를 익혀야 한다.
쉽지 않은 거야 당연지사다. 하지만 여운휘는 손에 들린 책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쉽던 말던 할 것이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울지 말고 기다려 줘. 내가 갈 테니까.'
여운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을 위해 울고 있을 한 여인의 모습을 머리에 그렸
다.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이 심해지면서 제삼세력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일마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상당히 바빴다. 일마의 목표는 마교를 먹는 것이 아니다. 천
하일통이 바로 일마의 꿈이다. 예전에 하려고 했던 꿈이었다. 강호의 주인이 되고 싶었
다.
그런데 그 꿈이 무너졌다. 바로 이곳 마교에서.
너무 안일했다. 상대를 얕봤던 것이 실수였다. 제대로 상대했다면 다섯 합 정도면 완벽
하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교의 교주를 얕보았고 마침내 마지막 일장이 실패한 것
을 안 순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일마는 기다
렸다. 은밀히 세력을 키우면서 그냥 기다렸다. 그 날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갔고,
어느 정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일마가 움직였다.
차라리 일마가 대놓고 앞에서 활동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그가 맨 앞에
서서 활동한다면 오히려 더 쉽게 무림을 흔들어 댈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일을 기
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굴욕스러웠던 날을!
뿌득!
일마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아 버렸다. 그때 자신이 내뱉었던 말 때문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아왔었던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일마의 뒤에 누군가
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자네가 부탁했던 준비는 모두 끝났네."
"수고했군."
좌운은 일마의 모습을 바라봤다.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일
그러진 표정을 보니 대충 예상이 간다.
"자네의 오랜 숙원(宿願)이 이루어지겠군."
"많이 늦었지. 원래 대로라면 몇 십 년 전에 이뤘을 꿈."
"이번엔…… 그 누구도 자네를 막을 수 없네."
좌운의 말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옛날 너무 자만했던 일마는 자신의 꿈을 꺾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하는
이미 일마의 손에 들어온 것과 다름없다.
이젠 그 누구도 일마를 막아낼 수 없다.
"사무린은?"
"무림맹에 있는 간자를 통해 신분을 보장시킨 후 완벽하게 소교주의 옆에 붙였네. 어차
피 얼마 동안만 그 자리를 지키면 될 일. 소교주는 이미 우리 손아귀에 있네."
유설린의 일거수 일투족이 이미 마교로 새어 들어온다. 조금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도
이미 그것은 마교에 보고된다. 상대방이 이미 알게 된 작전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계
책이라고 해도 깨지기 마련이다.
유설린의 세력은 이미 일마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은 어떻게 되어가지?"
"자네의 계획대로 양쪽 모두 조금씩 피해를 입고 있네. 서로에게 치명타를 주지 않게 우
리 쪽에서 잘 조율중이고."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은 단순히 일마의 장난질에 불과했다. 양쪽에서 서로의 힘을 적당
히 조율하면서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니 어느 한 쪽에 기세가 쉽사리 기울지
않고 단순히 소모전만 일삼을 뿐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나?"
"소교주는 지금 완전한 폐인 상태, 무림맹은 마교와 싸우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입장이
네. 그리고 마교야 자네가 더 잘 알 테고."
"그렇군."
"아!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고수가 무림맹에 나타났네. 그가 지금 죽은 여운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더군."
"예상치 못한 고수?"
여운휘가 떠난 자리를 대신한다는 고수라는 말에 일마는 궁금증이 치솟는 듯 했다. 적어
도 좌운이 고수라고 평가했다는 것은 결코 보기 쉬운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체는?"
"암황이라더군."
"호오, 암황 그 늙은이가 아직도 살아있었나?"
재미있다는 얼굴이다. 예상외의 변수인 암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일마로서는 웃
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일이다. 제 아무리 암황이 팔황 중에서 최고라고 손꼽힌다고 해도
일마인 그와는 격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좌운만 해도 암황을 꺾을 수 있는 실력자다.
좌운이 바로 강호십일객 중 쌍존의 하나인 독패지존(獨覇至尊)이니까.
독패지존 좌운의 이름이 강호에서 사라진지는 어언 삼십 년. 하지만 아직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독패지존이라는 별호만 들어도 두 가지의 반응을 한다.
이를 부득부득 갈거나 아니면 사시나무 떨 듯이 떨어댄다. 좌운은 수많은 악행을 자행했
다.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중간 크기의 문파를 완벽하게 뭉개버린 일은 아직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그때 죽을 무인들의 숫자만 해도 얼핏 백 오십 명. 비록 큰 문파는 아니라고 하지만 산동
부근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던 집단이었다. 백 년 이상이나 된 역사까지 있는 문파
가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한 시진. 그 한 시진 동안 백 년의 역사가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단 한 사내의 손에서.
"죽일까? 원한다면 내가 가서 죽여주지."
"됐네. 굳이 자네가 지금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 어차피 팔황은 강호십일객이라 해
도 변변치 않은 놈들. 녹포괴존의 행방은?"
좌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녹포괴존만큼은 쉽게 발견하지는 못하는 모
양이다.
"반년 전 잠시 사천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소식은 전혀 없네. 그때 뒤쫓았던 놈들
도 연락이 끊겼고."
"흠…… 녹포괴존이 싸움에 끼여들게 되면 일이 요상하게 변해. 결코 그녀만큼은 이 일
에 개입하지 않게 해야 돼."
녹포괴존이 개입한다 해도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난다면 그만큼
일이 힘들어 질 것은 자명하다.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일로 갈 생각은 없다.
일마 자신의 세력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함이다. 무림을 정복한 후에는…… 황궁이
다.
그는 바로 천하의 제왕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내가 패했지만 이제는 아니네. 녹포괴존이 나타난다면 내가 꺾지."
독패지존 좌운의 두 번의 패배.
일마에게 패했고, 녹포괴존에게 패했다. 일마와 싸울 생각은 없다. 그의 절대적인 무력
에는 도전할 마음조차 일지 않는다. 하지만 녹포괴존은 다르다. 그녀와 독패지존 좌운은
엇비슷한 실력자들이다. 그러나 패한 것 독패지존.
그 놈의 장법 때문에 기혈이 뒤틀린 탓이다.
"녹포괴존을 발견했다고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고 무모하게 달려들지 말게."
"후후, 자네는 날 알지 않는가. 겨우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려 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을
게야."
일마는 독패지존을 믿는다.
그는 능력이 있다. 적어도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질 정도로 쓸모 없는 자는 아니다.
무공도 그렇거니와 좌운이 지니고 있는 정보망도 그렇다. 지력 또한 빼어나 일마의 참모
노릇도 하고 있다.
일마가 천하의 제왕이 되면 무림은 바로 좌운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원했기
에 좌운은 일마의 밑으로 들어온 것이고.
일마는 앞에 놓여져 있던 잔에 술을 따라 좌운에게로 건넸다. 여태까지 오랜 시간을 달
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조그마한 끝을 보기 바로 직전인 것이다.
술잔을 받아든 좌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새로운 황제(皇帝)를 위하여."
말을 마친 좌운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설혹 일마와 좌운의 정체가 걸린다 해도 상관없다. 그 누
가 자신들을 막을 것인가!
'무림은…… 내 것이야. 흐흐흐!'
혈교의 숨은 세력들이 움직였다. 혈무린은 마교에서 자신을 따라온 몇 명에게만 거사를
알렸고 나머지는 비밀에 붙인 채로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움직이는 세력 또한 혈
무린이 따로 키운 비밀무력 단체였다.
숫자는 사십 명 밖에 되지 않지만 모두 혈교 내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 그들
은 고도의 살수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기 위해 혈무린이 따로 그
들은 자신의 수하 중 하나에게 맡겨 키운 것이다.
혈교에 오자마자 키운 자들로 고도의 살수의 기술들을 연마한자.
그들이 비밀스럽게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혈무린은 마교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자마자 바로 일마의 세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
교에 깔려 있는 수많은 눈과 귀 탓에 일마의 정체는 쉽게 알아냈다. 귀검사영 진린이라
고 불리는 자.
혈무린은 귀검사영 진린이라는 자의 행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숨은 세력
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놀랄 정도로 큰 세력도 있었고 소규모의 자잘한
문파들도 있었다.
걸린 시기는 두 달. 그리고 혈무린은 거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키운 비밀 세력들을 특파
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일마의 발들을 자르기 위해 움직였다.
지금 혈교비적사(血敎飛寂死)라고 불리는 그들이 움직이는 곳은 일마의 수족 중 하나인
우문가(優文家)였다.
겉으로 보면 문에 심취하는 가문이다. 수많은 장원 급제한 문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
가문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마의 수족으로 정보를 규합하는 곳이다.
혈무린은 가장 먼저 그들의 눈과 귀를 잘라내기로 한 것이다. 혹 혈교비적사의 움직임을
잡힐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인 그들은 위로 올라간 한 사내를 바라봤다. 온통 검은 색 옷으로 휘감
은 그들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안을 살피던 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몸을 감추고 있던 나머지들이 비조처럼 날아올랐다.
슉슉슉!
지붕을 밟고 도약하는 그들은 약속한 대로 나누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교비적사의 수장은 다섯 명의 수하를 데리고 우문가의 가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늦
은 밤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안에서는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이 귀에 거슬린다.
혈교비적사의 수장은 단순히 비적이라고 불리운다. 비적이라고 불리는 그가 문을 박차
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핏!
작은 비도 하나가 정확하게 비적의 이마 정 중앙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책을 읽는 척 하
면서 재빠르게 비도를 준비한 모양이다. 하지만 비적은 가볍게 비도를 피해내면서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우문가를 맡고 있는 자 또한 녹록치 않은 자였다. 그는 몸을 날리면서 재빠르게
창문을 통해 몸을 날리려 했다.
"컥!"
어느 틈인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얇은 실이 잡아 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실. 하지만 날
카롭다.
"이, 이건!"
"죽어라."
파악!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면서 우문가 가주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기회를 노치지
않고 비적이 정확하게 그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는 가주를 베고는 급히 손짓했다.
이 근방을 모두 뒤지라는 듯.
그리고 마침내 수하 중 하나가 가주의 거처에서 비밀통로를 발견해냈다.
"내려가지."
비적이 앞장섰고 그 뒤를 수하들이 따랐다.
우문가가 불타기 시작했다. 단 하루아침에 아무런 단서도 없이 한 가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산 자도 없고 모두가 불에 타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았다.
누가 범인일까? 누가 그들을 죽인 걸까? 이유는?
아무런 것도 알 수 없다. 그 당사자들만을 제한다면.
불타는 우문가를 바라보던 비적을 향해 수하 하나가 다가왔다.
"다음에는 어디로……"
"청해성에 있는 청해주가(靑海主家)."
아직 혈겁은 끝나지 않았다.
책을 들고 있던 여운휘의 손이 떨렸다.
막연히 오행검법의 후반부까지 익히면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행검법의 후
반부까지 모두 읽게 되자 놀라버린 것이다.
오행검법은 단순한 검법이 아니었다.
오행검법은 검법이되 검법이 아니다. 비급을 다 읽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다. 이 무공을 완벽하게 익힌다 해도 일마의 상대가 될까 하고 고민하던 것이 사라져 버
렸다. 이 검법은 이미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오행검법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행의 기운을 이용해서인지 알았거늘 그게 아니었다.
검법의 이름이 오행검법인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진정한 오행검법의 묘미는 바로 후반부에 있었다. 물론 전반부를 익히지 않았다면 후반
부를 익히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다.
오행검법을 모두 익히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믿기 힘들지만 검법과 진법이 하나
다. 검법을 펼치는데 진법을 펼친 것처럼 사방이 여운휘만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그리
고 실제로 진법이 펼쳐지는 것이다.
왜 검귀가 천하제일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뒤를 여운휘가 이어야 할 차례다.
단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하여 사내는 고독하고 힘든 길을 걸으려 한다.
'되고야 만다.'
그 누구나 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쉽사리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
천하에 그 누구라 해도 적수가 될 수 없고, 그 무엇이라도 앞을 가로막을 수 없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