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37)

암황은 숨이 가빠왔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완전 

히 넋이 나간 듯한 유설린을 데리고 암황은 가까스로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여운휘 덕분이다. 만약 그가 이토록 인원들을 몰아가지 않았다면 결코 이곳에 올 

수 없었다. 피로 젖어버린 옷. 암황은 유설린을 힐끔 본 후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 

다. 

'이곳만 지나면 드디어 악록산도 끝이다.'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리라. 막 긴장을 풀던 암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 

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 왔는지 앞에 장황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외에 꽤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 

인 몇 명이 그의 옆에 서서 암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이다. 암황은 침중한 모습을 지어 보이며 낮게 신음 소리 

를 흘렸다. 

"허어……" 

"기다렸소. 암황."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암황은 손을 들어올 

렸다가 곧 천천히 내려트렸다. 싸운다 해도 결코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후후, 우리 쪽도 더 이상 피해를 입고 싶지는 않소. 순순히 따르는 게 어떻겠소? 

싸운다 한들 당신에게 전혀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오." 

암황은 장황은 노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 싸운다는 건 개죽음에 불과하 

다. 장황 하나만 해도 벅찬 자이거늘 그 주변에 있는 자들까지 상대하려면…… 

암황은 유설린을 바라봤다. 상황이 이 같이 변했는데도 큰 동요가 없다. 암황은 서 

글픈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미안하이. 자네를 희생까지 시키며 도망쳤거늘…… 하늘이 우릴 버린 모양일세.' 

"끝까지 싸우려 한다면 둘 모두 죽이는 수밖에. 하지만 순순히 투항한다면 목숨을 

무사히 건질 수 있을 것이오." 

장황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암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었다. 

그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복하겠네. 순순히 투항하지." 

"잘 생각하셨소!" 

장황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회생(回生) 

창문 틈으로 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윗옷을 완전히 벗은 채로 누워있었는 

데 온 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침상 위에 있던 사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 

지도 않을 정도로 셀 수도 없는 상처투성이의 사내의 미약한 움직임에 옆에서 그 모 

습을 지키고 있던 여인이 급히 밖을 향해 그 사실을 알렸다. 

밖에 그 사실을 알린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와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급히 누워있는 사내의 맥을 잡아보더니 중년인 향해 고개를 돌렸 

다. 

"상태는 어떻소?" 

"한동안 운신은 힘들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으하하! 고맙소이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은 노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에게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내는 소중한 존재였다.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그럼 이만." 

"그러시오.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리다." 

노인이 물러나자 중년인은 침상 옆에 앉았다. 그의 눈이 사내의 손가락 끝으로 향했 

다.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있다. 중년인은 혹시나 해서 옆 

에 놓여 있는 황금색 검을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꿈틀거리던 사내의 손가락이 멈췄다. 

'천생이 무인이다!' 

정신을 차려서 꼼지락거린 게 아니다. 언제나 검과 함께 한 자이기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중년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 같이 조우할 지는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진군휘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본명이 무 

엇인지 안다. 

'여운휘……' 

그렇다. 상처투성이의 상태로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은 바로 여운휘였다. 그리고 그 

런 그를 바라보는 중년인은 바로 철사자 철비상이다. 

일전에 그는 여운휘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제 받았다.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고만 지내오던 그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혈교는 마교 

와 무림맹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결코 그 세력을 우습게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런 그들의 정보망은 마교는 물론이거니와 무림맹의 깊숙이 까지 파고들었다. 

퍼지는 것이 소문이다. 여운휘에 대한 소문을 무림맹에 심어둔 간자로부터 들어 버 

린 것이다. 

철비상은 눈에 불을 켰다. 다소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파 무인들에게 여 

운휘를 구하려는 게 발각된다면 그 화살이 혈교에로 돌아온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여운휘를 구해야 하냐고 주변에서 반발까지도 했 

다. 

하지만 철비상은 되려 그런 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은혜를 입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책임진다며 홀로 무 

림맹에 심어둔 간자와 연락을 하면서 악록산으로 향했었다. 간신히 여운휘를 찾았건 

만 웬 남궁세가의 무인이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가 이대로 잘 빠져나간다면 비록 은혜를 갚기 위해 

왔다는 생색은 낼 수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가 원한 것은 단순히 나도 은혜 

를 갚는 다는 모습을 보이려던 것이 아니라 진정 감탄했던 여운휘가 살아남기를 원 

하는 바램뿐이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려나갈 듯 싶었더니 그 남궁세가의 무인이 죽어 버렸다. 

철비상은 급히 절벽 쪽으로 움직여 매달린 곳을 찾아보았고 곧 여운휘에게 전음을 

보냈던 것이다. 

계획은 성공했다. 

무림맹 쪽에서 여운휘가 죽었다고 공포한 것이다. 

이제는 여운휘가 눈만 뜨면 된다. 

"크으……" 

약한 신음소리지만 철비상은 고개를 돌렸다. 검을 손에 쥔 여운휘가 어떻게든 움직 

이려고 하고 있었다. 

아직도 싸움터에 있는 줄 아는 걸 게다. 손에 든 검을 놓으려 하지 않고 움직이지 

도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끄는 것을 보니. 

철비상이 여운휘에게 다가갔다. 

그가 오는지도 모르고 여운휘는 일어서려고 애쓰고 있었다. 

"싸움은 끝났네." 

"개…… 소리…… 내가 죽기 전에는…… 끝이란 없다." 

"정신차리게! 싸움은 끝났고 자네는 살았단 말일세." 

그제야 여운휘는 눈을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흐렸던 시야가 천천히 하나로 겹쳐지 

면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비상……" 

"잊지 않았군. 그나저나 자네는 역시 괴물이야. 다른 자 같으면 반 년 이상은 움직 

이지도 못할 정도의 부상을 입고도 이렇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걸 보니." 

"당신이었군. 그 전음……" 

그제야 그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떠 오른 것이다. 제 정신이 아니었었다. 마치 

꿈 인냥 멀리서만 들려오던 전음소리에 무턱대고 반응한 것은 제 정신이 아니었기 

에 가능했다. 

"절벽에서 대기하다가 떨어져 내리는 자네를 구해냈지." 

"은혜를 갚기 위해선 가?" 

"뭐 그것도 있지만 자네 같은 무인이 죽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말이 

지." 

말을 마친 철비상은 씨익 웃었다. 여운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말을 하기가 상당 

히 힘든 탓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이곳은 분명 혈교 안이겠지?" 

"물론. 자네를 비밀리에 감추는 것에 혈교 만한 곳은 없지." 

"날 구해낼 정도라면 나름대로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럼 한 가지 묻지. 설린 

이는 어떻게 되었지?" 

그 말에 웃고 있던 철비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미 그것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탓 

이다.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본 여운휘는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듯 철비상을 

응시했다. 

머리를 긁적이던 철비상이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무림맹에 잡혔네." 

"뭐, 뭐라고!" 

고함을 내지른 여운휘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미칠 듯 기침을 하던 여운휘는 침상 

에서 굴러 떨어져 내렸다. 그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던 탓이다. 

너무나 급작스러웠기에 철비상은 그를 급히 일으켜 세워 침상에 다시금 올리려 했 

다. 그러자 여운휘가 목청을 높였다. 

"놔라! 난 간다. 설린이를 구하러 무림맹으로 간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자네는 지금 환자일세. 자네의 몸을 먼저 생각하고……" 

"웃기는 소리…… 난 그 아이를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앞으로 

도 그럴 것이다." 

침상에 간신히 기댄 채로 말을 내뱉는 여운휘의 말이 그토록 슬퍼 보일 수가 없었 

다. 입가로는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드러난 상반신은 땀 때문에 번쩍거렸다. 

철비상은 안타깝다는 듯 여운휘를 바라봤다. 이 사내라면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질 남자다. 

"무림맹에게 자네는 죽은 걸로 되어 있네. 이대로 혈교에 있거나 아니면 좀 멀리로 

떠난다면 무림맹의 손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지금 다시 검 

을 들면 자네는…… 반드시 죽네."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은 실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헉헉, 하지만 날 살려줬기에 난 

당신에게 감사한 게 아니야. 다시 설린이를 지킬 기회를 주었기에 당신에게 고마운 

것이다. 어차피 죽었을 목숨. 다시금 그녀를 위해 내던진다 해서 그 무엇이 아쉽겠 

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악에 차 있고,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철비상은 도저히 여운휘 

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숨어살게 하고 싶었지만 결코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철비상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좋아. 자네가 다시금 죽으러 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안 되네. 적 

어도 지금 자네는 반 년 이상 움직이기도 힘든 부상을 입었어. 우선은 좀 쉬게. 괜 

히 가서 그 여인도 구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개죽음에 불가하지 않는가." 

여운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철비상은 조심스레 그를 들어올려 침상에 올려놓았 

다. 그때까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자 철비상은 여운휘가 자신의 말을 따르기로 마 

음먹었다고 직감했다. 

여운휘가 조용히 누워 있자 철비상은 시녀를 부르고 방밖으로 나갔다. 

혈교의 교주이자 형님인 혈무린을 만나기 위해서다. 

'후후, 형님에게도 소개를 시켜줘야겠군.' 

일전에 혈무린에게 말한 적이 있다. 여운휘라는 사내와의 만남을. 그리고 은혜를 입 

었다는 말에 혈무린 또한 반드시 만나봐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아마도 반가워하리라. 

철비상은 셋의 만남을 생각하며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무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여운휘는 무림의 영웅이 되었다. 

물론 여운휘라는 이름이 아닌 진군휘라는 가명으로. 무림맹 쪽에서는 여운휘의 죽음 

을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널리 알렸다. 무림맹의 신물을 훔쳐서 도망간 자들을 잡기 

위해 홀로 싸우다가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신물을 훔쳤던 자들은 바로 마교의 시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소문을 흘렸 

다. 

수많은 무림의 젊은 기재들이 분노했다. 무림맹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은 여 

운휘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검을 치켜세우게 했다. 

더군다나 그와 언제나 함께 했던 유가의 소가주도 분을 참지 못하고 자진하려고까 

지 했다니 혈기가 넘치는 젊은 무인들에게는 검을 들게 하기 충분한 이유였다. 

물론 전부 거짓이다. 어차피 죽은 자, 이용해 먹을 만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여 

운휘의 최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자신들이 아는 일에 대해서 함구했다. 무림맹의 미 

래가 걸린 일이다. 그들로서는 결코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소문과는 달리 유설린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같이 잡혀왔 

던 암황도, 그리고 언제나 함께 했던 여운휘도……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감시의 눈길이 사방에서 유설린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가 

만히 앉아 있던 유설린은 삐거덕 하는 소리에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무인 두 명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말라 보이는 무인이 말했다. 

"나오시게." 

유설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일어나 가볍게 걸어갔다. 두 명의 무인은 그녀 

의 양옆에 서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했다. 어딘 가로 걸어가는 두 무인을 따 

라 걷고 있었지만 지금 향하는 곳이 어딘지 유설린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할 말도 없고 그 어떠한 말도 꺼내서는 안 된다. 섣부른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이들 

은 유설린에게 어떠한 행동을 할지 모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겉은 강철같다 해도 속은 한없이 착한 여인이 아닌가. 

평소였다면 무섭지 않았을 게다. 여운휘가 옆에 있으면 그 무엇이라도 두려울 게 없 

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곁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독방에 갇혀 있던 탓에 아직 무림에 떠도는 여운휘의 소문을 모르는 상태다. 

'휘, 어디 있는 거야. 나 무서워……' 

살아 있다면 반드시 구하러 올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그리고 유설린은 여운휘가 

살아 있을 거라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긴 길을 걷던 두 무인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무림맹의 군사인 종리회연의 거처로 쓰는 곳이지만 지금은 다른 자가 그곳 

에 있다. 종리회연의 조카인 종리문이다. 

종이를 훑어보고 있던 종리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유설린을 보고 싱긋 웃었다. 

서른 살이 갓 넘은 자였지만 지금 자리를 비운 종리회연을 대신 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자다. 오히려 자식들보다 더 종리회연을 닮아 무림맹의 대소사(大小事)를 대 

신 할 때도 있을 정도다. 

"뵙게 돼서 반갑소. 저기 앉으시오. 소교주." 

소교주라는 말에도 유설린은 태연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종이를 보고 있던 종 

리문은 그것을 내려놓고 유설린의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차라도 한 잔 하시겠소?" 

"됐어요. 서로 얼굴을 보고 있기도 편치 않을 텐데 차를 마신다 해서 뭐가 달라지나 

요?" 

"영특하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과연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구려. 그렇다 

면 우리가 왜 당신을 죽이지 않은지는 아시겠소?"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 이미 일전에 우문학 

과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유가의 힘, 그리고 마교의 소교주라는 위치." 

"하하! 바로 맞추셨소." 

종리문이 재미있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잠시 웃어젖히던 그의 얼 

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럼 그것도 아시겠구려. 당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 

"표정을 보니 대충 아는 듯 하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이제부터 당신에게 자유란 

없소.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으며 다른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소. 당신은 

그저 우리들이 정해지는 장소, 그리고 준비해 준 말만 하면 그만이오. 그 외에 섣부 

른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소교주도 잘 아실 게요." 

"꼭두각시 인형이 되라는 건가요?" 

"꼭 집어 말한다면 그렇소." 

"승낙하죠." 

승낙한다는 말에 종리문은 즐겁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하지만 유설린은 알고 있었 

다. 그것은 결코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눈 한 구석에 가득 

히 담겨 있는 경멸의 눈빛을 유설린을 알고 있다. 

승낙한다는 말이 우스운 걸 게다. 이 상황에서 하라면 하는 것이지 승낙하고 말 것 

이 무엇이 있냐고 비웃는 거다. 

알면서도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이 지금 그 

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물어도 좋소이다." 

"제 밑에 있던 수하들을 돌려주세요. 그들이 없으면 유가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요." 

"흠 그건 좀 곤란한데……" 

"그럼 유가의 힘을 당신들은 반도 쓰지 못할 걸요." 

잠시 고민하던 종리문이 곧 대답했다.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 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들 또한 마찬가지요. 모두가 자유를 빼앗길 것이 

고, 또한 당신의 옆에는 유가가 아닌 우리 쪽에서 지정한 인물들을 놔둘 것이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짜져있다. 곁에는 둘 수 있지만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을 것이고 같이 자리를 오래 하는 것도 힘들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수밖에 없다 

는 것을 유설린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 그런데 우문학이라는 자는 좀 힘들 것이오." 

우문학이라는 말에 유설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여운휘만큼은 아니지만 유가를 세우 

면서부터 함께 한 그다. 마지막에 자신들을 보내면서 홀로 남아 유가를 지키려 했 

던 자. 몇 안 되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다. 

그런데 그런 그가 힘들다니. 

"무슨 소리죠? 분명 약속은 그게 아닐텐데요." 

"그자가 워낙 독종이라서 말이오. 아직까지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소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 어떠한 짓을 해도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는다고 하 

더이다." 

"어떠한 짓을 해도라고요? 그 말은 설마 고문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뭐, 굳이 말한다면 그렇소." 

쾅! 

유설린이 양손으로 탁자를 내려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내 수하를 함부로 할 권리는 없어요!" 

"권리라…… 솔직히 우습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 거요." 

"알아요. 하지만 잘 들어요. 이미 당신은 저를 잡았어요. 그렇다면 다 아닌가요? 저 

를 잡았으면 다 끝난 건데 또 무엇을 안다고 그를 잡아두겠다는 말이죠? 원한다면 

제가 다 대답해드리죠! 어서 그를 풀어서 제 앞에 데려다줘요!" 

유설린이 강하게 나오자 종리문은 쓴 입맛을 다셨다. 

유설린은 계륵이다. 먹자니 뭐하고, 버리자니 아쉬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버리는 

것보다는 취하는 것이 이득이다. 종리문은 조건을 내걸었다. 

"좋소. 그렇다면 우문학도 풀어주지. 하지만 조건이 있소. 암황을 움직여주시오." 

"그 말은……" 

"그렇소. 우리에게는 지금 절대고수 하나 하나가 필요할 때요. 우리는 암황이 진군 

휘와 절친한 사이였고, 그가 죽게되자 화가 나서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것이 

오. 하지만 암황이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니…… 만약 당신이 설득할 수 있다면 우 

문학이라는 자를 풀어주지." 

"하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당장 제 눈앞에 데려다 줘요." 

유설린은 암황에게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말이라면 승낙할 거라 

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문학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암황이라면 분 

명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리문은 옆에 있는 두 명의 무인 중 하나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 무인 

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둘 사이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데 그 사이에서 좋은 말 

들이 오갈 리 없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흐르자 문을 열고 아까 사라졌던 무인이 모 

습을 드러냈다. 

"준비가 끝나셨습니까?" 

"그렇네. 지금 바로 유가로 가면 되겠는가?" 

"예. 이틀 정도만 그곳에 계시면 선발 된 무인들을 보내겠습니다. 소교주, 아니 소 

가주를 지켜 줄 무인들을 말이지요." 

말이 지켜준다는 것이지 그것은 감시를 하기 위해 놔두는 것이다. 알면서도 유설린 

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종리문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가시는 길은 저희 무림맹의 무인들이 안내해 줄 것입니다. 그 

리고 우문학은 나가시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전 일이 많아서 이만." 

말을 마친 종리문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설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두 무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는 와중에 유설린은 이상한 두건을 써야만 했다. 무림맹에서 대놓고 그녀가 행보 

해서는 안 되는 탓이다. 눈을 가리자 이상한 기관진식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마 

도 비밀통로를 움직이는 것이리라. 

예상대로 눈을 가렸던 두건을 벗는 순간 눈앞에 모습을 보인 풍경은 무림맹 내부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하통로를 이용해 이곳으로 빠져 나온 모양이다. 

유설린은 앞쪽에 있는 일련의 무리들을 발견했다. 그 숫자도 적지 않고, 하나 같이 

나름대로 무공의 일가를 이룬 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자가 하나 있었다. 

몸이 축 늘어진 채로 무인에게 기댄 채로 서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유설린은 단숨 

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우문학!" 

그녀의 고함소리에 고개를 든 사내는 비록 형태를 알 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부어버렸지만 우문학임은 틀림없었다. 

"소…… 교주님." 

아! 저게 사람이란 말인가. 

손가락에 있어야 할 손톱들은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옷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 

난 상처들로 보아서는 살점들을 칼로 베어낸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온 몸에 가득 

한 화상자국까지…… 

무인은 우문학에게서 손을 땠다. 그러자 우문학이 절뚝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 

다. 유설린은 급히 우문학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유설린의 부축 탓에 간신히 몸을 지탱한 그가 힘겹게 말했다. 어떻게든 웃으려고 하 

고 있지만 피투성이의 얼굴은 흉측함을 넘어서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설린 

은 그 모습을 보며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쉴 새도 없이 큰 눈물 방울들을 연신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문학이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감이 잡힌 탓이다. 

"다리는 왜 그래요?" 

"하하, 좀 다쳤습니다. 하지만 걷는데는 무리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설마……" 

"아무 이상 없습니다." 

유설린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우문학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설린이 뚫어져라 응시 

하자 우문학은 마침내 진실을 말했다. 

"평생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기 힘들 겁니다." 

슬쩍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는 우문학의 얼굴에는 한 줌의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말이 간단하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절름발이가 된다면 그 상실 

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물며 무인에랴! 

무인에게 다리라는 것은 곧 생명과 다름없다. 절름발이가 되었다면 앞으로 경공이 

나 신법, 보법을 사용하는 것이 수월치 않을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우문학은 이제 죽어버렸다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영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다시금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화라도 낸다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왜 바보 같이 저런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냔 말 

이다. 

그때 우문학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까짓 거 절름발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다시 소교주님을 

뵌 것으로 저는 다리 하나가 아니라 두 개 모두를 잃는다 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운휘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설린이 이곳에 잡혔다는 말은 곧 발각되었다는 말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여운휘는 반드시 죽여야 할 자다. 만약 죽었다면 유설린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안겨주는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다. 언젠가 해야 될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알아버리는 게 나을 듯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유설린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살아 있을 거라고 믿어요. 결코 죽을 사람이 아니니까." 

유설린은 장담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우문학으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만은 없었 

다. 아무리 여운휘라고 해도 무림맹이 손을 썼다면 죽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한 거 

다. 

그때 유설린을 데리고 온 두 무인 중 하나가 유설린을 향해 말했다. 

"큭큭, 아직도 모르는 구나. 그 녀석은 죽었다." 

"……!" 

"놀라는 눈하고는. 그럼 그 많은 무인들 사이에서 살아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 

았느냐? 그것도 무림맹에서 선발한 무인들이었거늘!" 

"주, 죽었다고? 휘가?" 

그 말을 꺼낸 중년의 무인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독백과도 같은 말. 스스로 믿을 

수 없었기에 유설린은 중얼거린 것이었다.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천길 낭떠러지기에서 떨어져 내렸지. 아마 시체도 조각 조각 

이 나 버렸을 게야. 그것이 바로 무림맹을 우롱한 놈의 최후지!" 

"그만하게." 

동료의 심한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유설린은 그쪽의 대화 

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상황이 비록 그랬지만 언제나 같이 있어주겠다고 약속을 

한 여운휘가 아니었던가.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 위 

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항상 함께 있어준다고 약속하고서……' 

그때 그토록 여운휘가 화를 냈던 이유도 알 것 같다. 

따라가겠다고 하자 화를 내면서 혼자의 힘으로도 일어설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여운휘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알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 

면서까지 유설린을 살리려 했던 것이고. 

우문학도 그렇고 여운휘도 그랬다. 모두 그녀를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했 

다. 

왜 복수를 하려고 했을까? 아버지를 죽인 엄백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 같은 길 

을 걸어왔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복수는커녕 곁에 있던 수하는 반병신이 되어버렸고, 가장 믿고 유일한 친구인 여운 

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만 먹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휘.' 

너무나 놀랐기에 멈추었던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숨이 막혀왔다. 지독 

한 슬픔이 온 몸을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소교주님!"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유설린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서 혼절(昏絶)하고야 말았다. 

하늘도 땅도 온통 샛노랗다. 

무려 보름이다. 보름을 침상에서 꿈적도 하지 못하고 보냈다. 그토록 오랜 기간 동 

안 침상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또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여운휘는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까지 움직였다. 

이제는 혼자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정도다. 너무나도 빠른 회복 속도에 의원이 놀 

라 혀를 찼다고 하지만 이 같은 몸 상태가 여운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 

서는 단숨에 유설린을 구하러 달려가고 싶은데 지금 이런 몸을 가지고는 짐이 될 뿐 

이다. 

하지만 보름 동안 침상에 있으면서 멍청히 시간만 보낸 게 다는 아니다. 검을 들고 

무공을 수련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는 무림의 판도를 생각했다. 

현재 무림은 복잡하다. 무림맹과 마교의 전쟁도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일마라는 존재 

가 있다. 그가 마교를 휘어잡은 듯 하다. 

유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문학이라면 어떻게든 

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막연한 믿음일 뿐이다. 그가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다시금 유가라는 세력들을 어둠 속에 감추었을 거 

라는. 

하지만 유가의 힘을 아무리 높게 친다 해도 무림맹과 마교의 전쟁에 끼여들 세력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구파 일방의 하나 정도의 힘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이상은 무 

리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만한 인원이 움직인다면 눈에 띌 것은 자명하다. 

아무런 일도 벌이기 전에 몰살당하기 십상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여운휘는 이번 전쟁의 승자를 예감하고 있다. 

마교다. 마교만의 힘으로도 무림맹보다 위이거늘 일마의 개인 세력까지 있다면 싸움 

은 기울고도 남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양측 모두 피해가 막심할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때가 기회다. 

유가는 그때 움직여야 한다. 양쪽 모두 힘을 잃었을 바로 그때! 

하지만 유가 하나로는 무리다. 유가의 힘을 총동원한다 한들 약해진 마교와 무림맹 

조차도 흔들 수는 없다. 

그랬기에 한 가지를 생각했다. 

혈교, 그리고 혈무린. 마교의 부교주였으며 어릴 적 여운휘가 마교에 있는 사곡에 

들어갔을 때 만났던 인물이다. 만약을 위해 전혀 접근을 하지 않았었다. 조금 더 마 

교의 교주였던 유백명과 갈라선 이유를 알아 본 후에 편이 되어 줄 거라는 확신이 

섰을 때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애초에 짜두었던 모든 계획들이 모두 무너져 버 

린 지금 여운휘가 도박을 할 만한 패는 혈교밖에 없다. 비록 그들이 두 세력에 비해 

서는 못하다 하지만 약해진 마교를 뒤흔드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유가 혼자서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몇 배나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혈무린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거늘 기 

회는 저절로 굴러왔다. 철비상이 그와의 만남을 스스로 주선한 것이다. 그 셋이 만 

나기로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창 밖을 바라보던 여운휘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낯익은 모습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서 시 

중을 드는 시녀로 이름은 취희라고 했던가? 열 여섯 살로 고아인 여아다. 여운휘가 

조용히 응시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급히 말했다. 

"철 대협께서 모셔오라고……" 

"가자." 

여운휘는 검을 허리에 찬 채로 시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상당히 

느렸다. 원한다면 장정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도 갈 수 있었지만 여운휘는 그러지 않 

았다. 그렇게 해서는 더욱 홀로 일어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 탓이 

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온 정신이 발로 쏠리고 몸은 땀으로 젖어 버렸다. 추운 겨울 

인데도 불구하고 몸에서 흐르는 땀 탓에 옷과 몸이 착 달라붙어 버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취희조차도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굳이 편한 것을 놔두고 이렇게 안쓰럽게 행동하 

는 여운휘의 모습을 말이다. 만약 취희가 여운휘의 입장이었다면 가마라도 대령해 

서 편히 그것을 타고 이동했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거리거늘 이 각이나 걸린 후에야 여운휘는 목적지 

에 도착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방은 아무나 출입 할 

수 없다. 허락되지 않은 자가 이 방에 들어서게 되면 엄벌에 처해진다. 

"이 방입니다. 들어가시면 바로 계실 겁니다." 

"그래. 돌아가는 건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 있거라." 

"예. 혹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운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앞에는 단출해 보이는 상과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둘 모두 중년에 접어든 인물들 

이었고 개중 한 명은 어제도 보았던 철비상이었다. 그리고 나이는 들었지만 결코 세 

월에 굴하지 않은 패기와 눈빛을 가진 중년인이…… 

"이 사내인가?" 

"예, 형님! 제가 그토록 말했던 사내입니다." 

"잘생겼군. 그리고 눈빛이 살아 있어. 자네의 말대로 진짜 무인이로군." 

"하하! 자네 어서 와 앉게나. 형님도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일세!" 

혈무린은 걷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힘겹게 걷는 여운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운휘를 바라보던 혈무린이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러한 눈빛은 여운휘가 가까이 다가와 앉기까지 계속 됐다. 

그가 간신히 자리에 앉아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던 혈무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나와 본 적이 있는가?" 

"형님도. 지금 막 혈교에 온 친구가 어찌……" 

"본 적이 있소." 

여운휘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린 것은 철비상이다. 반면 혈무린은 고개를 끄 

덕일 뿐 크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붉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등뒤에 

는 꿈틀거리는 용이 그려져 있었고, 그것이 마치 혈무린을 표현하는 듯 했다. 

단 한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혈무린을 기억하고 있다. 늙었지만 분명 예전 

에 봤던 그이다. 

조사한 바로는 마교 교주였던 유백명의 아내이자 유설린의 어머니였던 엄여홍을 혈 

무린이 보낸 수하가 겁탈하려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 탓에 유백명과의 사이가 벌어졌고 둘은 생사대전을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둘은 

절친한 벗이었고, 그 탓에 결국 혈무린은 분쟁을 접고 물러났다는 것이 여운휘가 예 

전부터 조사한 그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기에도 혈무린은 호탕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기백 

을 잃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다. 

"역시였군. 왠지 모르게 자네를 본 듯 하이. 그게 언제였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는 

가? 기억 못하는 것이 미안하긴 하네만 아무래도 모르고 넘어가기는 조금 그래서 말 

일세." 

"기억 못하는 것이 당연하오. 대략 이십 년 전쯤이오. 그때 나는 작은 아이였지. 그 

리고 마교의 사곡에서 난 당신을 만났소.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반드시 살아 남으라 

고 했었지. 살아만 나온다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혈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운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는 한참동안 여운휘의 눈 

을 응시했다. 매서운 눈동자였지만 여운휘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렇게 서로 

를 응시하다가 먼저 눈을 돌린 것은 혈무린이었다.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잊고 있었다. 죽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어. 살아 

있었구나. 혹시나 했거늘 정말로 말이야!" 

말을 하면서 점점 혈무린의 어투가 격해졌다. 

예전 마교의 부교주였을 때의 일들이 떠오른 것이다. 행복했던 때였다. 비록 그 끝 

은 좋지 않았고, 마교의 이인자인 부교주라는 위치에 있었던 때지만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고 의욕에 넘치던 것이 바로 그 때다. 

"즐겁구나. 마치 오래된 벗을 만난 기분이야." 

말을 마친 혈무린은 자리에 앉아서 술병을 들어올렸다. 그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 

이며 여운휘에게 말했다. 

"한 잔 따라주고 싶군. 환자라 자제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이 한 잔은 받게." 

여운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잔이 채어지자 혈무린 

은 곧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인연을 위해. 한 잔 하지." 

세 사내의 잔이 부닥쳤고 곧 모두가 입안으로 술을 쏟아 부었다. 독한 술이거늘 셋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술자리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여운휘는 환자인 탓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버렸다. 

혈무린이 마시는 술에는 과거가 담겼다.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여운휘를 보면서 떠올라 버린 것이다. 참으로 재미 

있는 인연이다. 그때는 그저 작은 아이였을 뿐이다. 혈무린이 가벼이 손 한 번 휘두 

르면 죽어 버릴 정도로 연약했던.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비록 부상을 입고는 있다 하지만 여운휘에 대해 익히 들어왔 

다. 

강호십일객들과도 검을 겨루는 사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 

가…… 

'후후, 거물이 되어 버렸어. 거물이.' 

셋 모두 말이 많은 사내들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끈이 그들을 묶고 있었다. 그렇 

게 두 시진 이상이 흐른 후에야 여운휘는 알았다. 

혈무린이라는 사내의 됨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그랬기에 여운휘는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할 말이 있소." 

"나에게? 그래, 무슨 말인가?"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살아 나온다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잖소. 그 소 

원을 지금 말하고 싶어서 그러오." 

여운휘의 말이 끝나자 철비상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웃음을 흘리면서 짐짓 장난 

스레 혈무린에게 말했다. 

"형님 무서우시겠습니다. 형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쩝니까! 형님은 사내시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실 수도 없으실 테고 말이오. 흐흐!" 

"예끼, 자네는 내가 물러나기라도 바라는 겐가? 그나저나 그 소원이 뭔지 들어보 

지. 정말 내 아우가 했던 것 같은 것을 말하면 안 되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혈무린을 보면서 여운휘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 

냈다. 

"마교를 뒤집어엎으려 하오. 힘을 빌려주시오. 혈교의 힘을. 그것이 내가 이십 년 

간 간직해 온 소원이오." 

"…… 마교를 뒤집어엎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혈교의 힘이 필요하다 이건가?" 

장난기 있던 혈무린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분위기 또한 급 

속하게 식어 버렸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혈무린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 

쳤다. 

"불가(不可)!" 

거절했다. 그것도 일말의 생각하는 여지도 없이 바로 말이다. 여운휘가 판단한 혈무 

린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킬 사내였다. 그런데 왜! 

"마교는…… 안 돼." 

"어째서요." 

"차라리 혈교의 교주 자리를 달라고 하지 그랬느냐…… 차라리 그랬다면 줄 수도 있 

었을 것을."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여운휘는 혈무린의 눈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느껴 버린 

것이다. 혈교 교주의 자리를 줄 수는 있어도 마교에 손을 뻗칠 수는 없다는 거다. 

"마교와 나의 인연은 내가 떠나는 그 날로 끝났네. 더 이상 마교와 관련하고는 싶 

지 않아." 

"혈교가 없이는 힘드오. 우리의 세력만으로는 마교를 흔들 수 없소. 아무리 무림맹 

과 싸우고 있는 그들이라고 하나 그래도 역부족이란 말이오." 

"내 다른 부탁은 다 들어줘도 그 부탁은 못 들어주겠네. 미안하구먼. 사내가 되어 

어떠한 소원도 들어준다 약조를 해 놓고…… 창피하기까지 하네."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혈무린의 마음은 확고해 보였다. 결코 혈교의 힘을 마교를 흔드는 데 사용할 생각 

이 없는 듯 했다. 

"유설린을 아시오?" 

"물론이네. 귀여운 아이였지. 친 혈육이 없었던 탓에 내 딸같이 항상 옆에서 지켜봤 

네. 물론 마지막으로 본 게 여섯 살 때인가 일곱 살 때가 다인지라 그 이상은 모르 

겠지만.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 아이를 구해야 하오." 

"뭐? 유설린이 너와 함께 있었단 말이냐!" 

혈무린의 예상외의 반문에 여운휘는 철비상을 바라봤다.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혈교 교주인 혈무린은 오히려 그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철비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마교의 일인지라 형님에게 선뜻 알리기가 뭐했습니다. 더군다나 

종종 형님께서 유설린이라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소를 지었던 탓에 우선 여운 

휘를 완벽하게 회복을 시킨 후에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혈교의 교주인 내가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앞으로 다시금 이런 

일이 있다면 내 아무리 아우인 자네라 해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걸세!" 

"죄송합니다." 

철비상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고 혈무린은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유설린의 어릴적 모습을 떠올리던 혈무린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유가의 일을 꾸민 게 모두 그 아이란 말이지. 세월이 많이 흐른 모양이야. 순 

진한 아이였는데……" 

"아직도 그대로요. 겉은 강해졌지만 속은 예전 그대로인 여인이오. 아직도 피를 보 

면 덜컥 놀라고 가까운 사람이 다치면 눈물을 글썽이오." 

"그래! 그 아이는 그럴 아이였지. 그 큰 눈망울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가득하네. 쉽 

게 눈물도 글썽거려서 울보라고 놀리기도 했었고 말이야. 하하!"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친딸과도 같은 아이다. 그 자그마한 아이를 품안에 처음 안아 

보고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느냔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 같지만 그 당 

시에는 이런 아이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었다. 

그렇기에 자식에게 줄 애정을 전부 유설린에게 쏟았었다. 

허나, 모두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 

"당신이 나에게 약속을 했듯이 나 또한 그녀에게 약속을 했소. 마교를 품안에 넣어 

주겠다고." 

"멍청한 약속이야…… 마교를 어떻게 상대하겠다고 그러한 약속을 했는가." 

다시금 술을 마셨지만 아까 와는 다르다. 분명 같은 술이거늘 방금 전에는 목을 개 

운하게 하던 것이 지금은 오히려 텁텁하기만 한다. 

"함께 해 주었으면 하지만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나 또한 강요만은 할 수 없는 일." 

여운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온 몸의 부상이 쩌릿쩌릿하게 그를 휩 

쌌다. 여운휘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만 물러나겠소. 그리고 몸을 운신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빨리 이곳을 떠날 생각 

이오. 그때 인사드리리다." 

"어딜 가겠다는 겐가?" 

"유설린을 구하러 갈 것이오." 

"힘들 게야. 무림맹 쪽에서는 적지 않은 방비를 했을 테지. 완전하게 몸이 나은 후 

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 하네." 

"한 시라도 빨리 가고 싶소. 날 기다리면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혈무린은 얼굴을 감쌌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 해도 마교와의 접촉만은 불가한 일이 

다. 더군다나 마교의 자체를 흔들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줄 수 없다. 

"유설린을 구하는 것은 도와주지. 원한다면 말하게. 내 그것에 관해서는 아낌없이 

후원해 줄 테니." 

"고맙소.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여운휘는 문을 열고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두 명 

의 사내는 그러한 여운휘의 등을 바라봤다. 그토록 당당해 보였던 사내의 등이라고 

보기에는 한없이 쓸쓸하다. 

참지 못하고 철비상이 입을 열었다. 

"형님." 

"잔말하지 말게. 나라고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있네. 나에겐 그것이 바로 마교와 관련된 일이고." 

"형님답지 않으십니다. 항상 마교를 그리워하시면 서도 왜 마교로 돌아가시려고 하 

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 아우 답답합니다." 

혈무린은 술을 들이킨 후 눈을 감았다. 

마교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그건 마음 뿐 결코 현실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백명…… 자네는 지금 날 보고 있는가?' 

마교의 전대 교주이고, 유설린의 아버지인 유백명은 혈무린의 절친했던 벗이기도 하 

다. 같은 스승아래에서 무공을 익혔고 어렸을 적부터 언제나 함께 했던 세상에 둘 

도 없는 죽마고우였다. 

그들은 속까지 터놓는 진정한 벗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둘의 사이는 유백명의 아내 

인 엄여홍을 혈무린이 옆에 두게끔 했던 무사가 겁탈하려고 했을 때부터 벌어져 버 

렸다. 엄여홍은 겁탈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했고 분노한 유백명은 혈무린에게 

화살을 돌렸었다. 

절친한 벗과의 싸움은 혈무린의 마음을 아프게만 했다. 둘의 실력은 크게 차이가 나 

지 않아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결코 승부가 갈라지지 않을 상태였다. 

그런데 오히려 무공 면에서는 조금 위라는 혈무린이 물러났다. 절친한 벗의 아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서였다. 

마교를 떠나면서 유백명에게 약조를 했다. 

앞으로 다시 마교의 땅을 밟지 않겠다고. 

눈을 감고 있던 혈무린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는 여운휘가 열고 나간 문을 통 

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하늘을 나는 새를 타 

고 마교의 하늘을 날고 있다. 

유백명과 함께 마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바로 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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