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7)

온통 하얗다. 세상도, 그리고 하늘도. 

새하얗게 흩뿌려지는 눈송이들이 여운휘의 상처에 닿았다. 입가에 여운휘 본인도 모 

르게 미소가 걸릴 뻔했다. 

[자세히 말해주시오.] 

[이곳에 있는 여섯 구의 시신 중 하나를 유설린으로 분장시키는 걸세. 그리고 내가 

진짜를 그리고 네가 가짜를 가지고 도망을 치는 거지. 무림맹은 자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게야. 아마도 대부분이 자네를 쫓겠지. 그렇게 되면 도망칠 수 있을 게 

야.] 

여운휘는 암황의 말을 듣고 유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눈송이까지 떨어진다. 유설린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손을 

비비고 있다. 춥기도 하고 마음도 아플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녀의 작지만 그래도 따스해 보였던 등이 지금은 한없 

이 초라하기만 하다. 

여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암황이 말한 외에 다른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다.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보면 잘해야 이 각 정도 버티면 용한 것이다. 

분명 암황이 제시한 방법은 지금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방책이다. 그리고 그러 

기 위해서는 여운휘는 필사(必死)다.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유설린을 바라보는 여운휘의 눈빛이 한없이 슬프기 

만 하다. 

'평생 지켜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때가 온 듯 하다. 평생 지켜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할 거짓말쟁이가 되 

어 버렸다. 그래도 좋다. 거짓말쟁이가 되도 좋고, 천하에 다시없을 악당이 되어도 

좋다. 

지킬 수만 있다면, 유설린이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오명도 

두렵지 않다. 

여운휘가 암황은 향해 전음을 보냈다. 

[…… 하겠소.] 

[미안하이. 내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림맹은 내가 아닌 자네를 쫓 

을 걸세.] 

암황의 말대로다. 무림맹은 여운휘를 쫓을 것이고 암황을 그저 이 같은 사실을 알리 

려는 자라고 생각할 게다. 물론 암황도 쉽사리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반 수 이상을 훨씬 웃도는 숫자가 여운휘 하나에게 달라붙을 것은 분명하다. 

시간, 그리고 인력이 빠져 버린다. 암황과 유설린이 도망치는 시간을 버는 것은 충 

분하다. 

암황은 자신이 날려버린 여섯 구의 시신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개중에 가장 체구가 

작은 사내를 고른 암황은 그의 옷을 벗겼다. 

힘이 없는 지 유설린은 그것을 보면서도 무엇을 하냐고 묻지 않았다. 여운휘는 묵묵 

히 유설린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유설린은 고개를 들어 여운휘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여운휘가 무슨 말 

을 하려는 지 알아차렸다. 그토록 항상 함께 했던 여운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쓸 

쓸한 눈빛을 하고 있던 것을 본 적은 없다. 

"왜……?" 

유설린의 목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고, 행복 하라는 되도 않는 말도 꺼 

내고 싶다. 자신이 죽는다면 유설린이 크게 슬퍼할 거라는 것을 알지만 방도가 없 

다. 

"겉옷을 벗고 저 사내의 옷을 입어." 

유설린은 우선 여운휘의 말대로 사내의 옷을 입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암황에게 건 

넸다. 암황은 유설린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의 몸에 그 옷을 입히기 시작 

했다. 

유설린은 사내의 옷을 다 입고 나서야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우리는 양쪽으로 도망친다. 넌 암황을 따라라. 난 인피면구를 쓰게 한 저 사내를 

가지고 움직인다." 

"싫어. 난 휘를 따라 갈 거야." 

그 말에 여운휘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어리광부리지마!" 

평소 이러한 모습을 전혀 보였던 적이 없는 여운휘기에 유설린은 놀라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고 여운휘는 큰 후회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상처를 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여운휘는 자그맣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 말을 따라 줘. 부탁이다." 

"하지만 무섭단 말이야. 휘가 없으면." 

울먹이면서 말하는 유설린을 바라보는 여운휘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뭉클 하자 고 

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눈물이 솟구친다. 자 

신에게 눈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복받쳐 오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여운휘가 말했다. 

"항상…… 함께 일 수는 없잖아. 무서워도 혼자 걸을 수도 있어야지." 

"이상해. 평소 같지 않아." 

평소였다면 항상 함께 해 줄 거라고 말했을 게다. 걱정하지 말라고 항상 옆에서 지 

켜줄 거라고 말했을 게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의 말을 내뱉는다. 지금 상 

황이 이러하니 그러한 여운휘의 마음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뭐가 다르다는 거냐. 난 여운휘, 넌 내가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 영원히 지켜주겠 

다는 내 마음에 한줌의 변함이 없는데 너에겐 뭐가 달라 보이는 것이냐." 

"…… 모르겠어. 하지만……" 

[시간이 없네. 준비는 끝냈으니 움직이지.] 

여운휘는 전음을 듣고 고개를 돌려 암황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한 구의 시신을 유 

설린과 똑같이 만들어 낸 상태다. 시간이 없는 탓에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지금 

은 도망치는 상황이다. 자세히 관찰하는 게 불가능하니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큰 무 

리는 없다. 

암황이 시신을 든 채로 유설린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시신은 여운휘에게로 건 

네고 유설린에게 말했다. 

"어서 가자. 시간이 없다." 

암황이 손을 잡고 유설린을 잡아끌었지만 몇 발자국 걷지도 않고 그녀가 고개를 돌 

렸다.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 어리광쟁이라도 좋고 다 좋으니까 같이 가자. 응? 제발…… 지금 이대로 

가면 영영 보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유설린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여운휘는 시체를 들쳐업으려다가 내려놓고 

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울먹거리는 유설린의 앞에 선 여운휘가 그녀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약속을 지킨다. 지켜주겠다는 말도 그리고 이번에 광동에 가면서 바다도 보여주 

지. 어서 가. 늦을수록 위험해진다." 

여운휘는 유설린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그는 유설린의 등 뒤를 응시하다가 곧 누남 

천의 눈과 마주쳤다. 

[부탁하오. 시간이 다소 촉박하겠지만 광동에 이르면 바다도 보여주시오. 바다가 보 

는 게 꿈이었으니까. 마음이 여린 여인이오. 내가 죽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부탁하오.] 

[걱정 말거라. 너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녀는 중요한 아이니까. 만약…… 이곳 

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산동에 있는 복산(福山)으로 오도록 하게. 그곳에 녹포괴존 

의 거처가 있으니.] 

암황은 죽음을 향해 걸어갈 이 순간에도 유설린만을 걱정하는 여운휘를 보며 진정으 

로 우러나오는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운휘는 떨어지는 않는 몸을 획 돌려 시체를 들쳐 엎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유설 

린은 다시금 몸을 돌리고 고함을 질렀다. 

"휘! 다치지 마……" 

여운휘가 고개를 돌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제대로 여운휘의 미소를 

본 건 처음이기에 유설린은 이 와중에도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여운휘가 미소를 

지은 상태로 말했다. 

"잊었나? 난 말이야 너를 위해서라면…… 무적이다." 

짧은 말을 내뱉은 여운휘는 옆구리에 가짜 유설린을 들쳐 맨 채로 검을 들고 움직였 

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고함소리가 옆쪽에서 터져 나왔다. 

"여기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지막 모습을 머리 속에 박아두기라도 하려 

는 듯이.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여운휘를 바라보고 있는 그 표정, 그거 하나로 여운 

휘는 만족했다. 

그는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된 듯 암황과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암 

황은 급히 유설린의 몸을 드러나지 않게 하며 움직였고, 여운휘는 반대로 가짜 유설 

린을 보이며 나무 사이로 향했다. 

근방으로 몰려든 무인 중 하나가 여운휘를 가리키면서 외쳤다. 

"저쪽이다!" 

"저쪽도 있소!" 

"우리의 목표는 여운휘. 더군다나 유가의 소가주도 저기에 있다. 최소한의 인원을 

옆으로 빼고 나머지는 여운휘를 쫓는다!" 

그 말에 무인 하나가 그 말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뒤쪽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 

때 숲을 가로지르며 두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모두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뇌수혈황과 장황이다. 그 둘이 모습을 드러내자 근방에 명령을 내리던 중년인이 급 

히 고개를 숙였다. 

"놈들은?"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중년인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했다. 

"양쪽으로 갈라져서 도주 중입니다. 여운휘가 유가의 소가주를 데리고 도주 중이고 

노인은 홀로 옆길로 빠졌습니다. 아마도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든 알리려고 한 모양 

입니다." 

"흐음." 

뇌수혈황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황은 그렇지 않다. 그는 무공뿐만이 아니라 

전술에도 능한 자다. 이런 곳에서 굳이 두 패로 갈라지면서 달려갔다는 것이 석연 

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황 또한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려 했다. 그는 주 

변을 둘러보면서 혀를 찼다. 

자신이 힘겹게 키웠던 여섯 수하들이 제대로 이름도 날려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다. 크게 정을 주지 않았던 탓에 마음이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쉽 

다. 이 정도의 무인이었다면 능히 중간쯤의 문파 한 두 개를 소유 한 것과 다름없었 

을 테니까. 

그렇게 수하들의 시신을 바라보던 장황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번쩍 떴다. 그 

는 급히 옆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근방을 수색해라! 이 자들과 같은 옷을 입은 자의 시체 한 구가 부족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어서!" 

뇌수혈황의 무시 어린 말투에도 장황은 무엇인가를 떠올린 탓에 고함을 질렀다. 그 

러자 옆에 있던 중년인은 급히 자신의 수하들에게 근방을 수색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게 잠시 뒤지던 수하들이 돌아와 부복했다. 

"다른 시체들은 몇 구 있지만 이와 같은 옷을 입은 자는……" 

장황은 이를 뿌드득 갈더니 중년인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병력을 빼라! 실제로 유가의 소가주를 데리고 있는 것은 여운휘가 아니라 바 

로 그 노인이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멍청한 놈! 그 노인은 결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강호십일객 중 일인인 암황이 

다!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분장에 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인피면구를 사용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느냐?" 

그제야 중년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대부분 

의 병력이 여운휘를 향해 움직였다. 아마도 이대로였다면 소가주를 놓치는 것은 거 

의 확실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장황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병력 중 일부를 움직여 입구를 막아라. 오히려 이 쪽으로 가게 되었다면 길은 뻔하 

지. 큭큭, 스스로 무덤에 들어간 꼴이로군." 

장황은 신이라도 난 듯이 마구 웃었다. 아쉽게도 여운휘와 암황의 작전은 채 일각 

도 되기 전에 발각되어 버렸다. 

여운휘는 검을 섞기보다는 몸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을 베 

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시간을 끎으로서 유설린이 도망칠 시간을 벌여주는 게 그 

의 목적인 것이다. 

손에 들린 가짜 유설린조차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힘이 빠져 버린 여운휘지만 그 

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일 수유(須臾)라도 좋으니 더욱 더 긴 시간을 그녀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운휘가 유설린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여운휘가 든 제왕검에 다시금 피가 번졌다. 

번쩍! 

앞을 가로막던 자가 마침내 여운휘의 검에 목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미 다리는 피투성이다. 도망치던 와중 누군가가 쏜 화살이 다리를 관통했다. 그 

뿐이랴. 방금 전 싸웠던 중년인의 검이 허리를 베어 버렸다. 

그런데 예상보다 몰려드는 적의 수가 많지 않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더 버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가 예상한 숫자에 비해 적의 수가 훨 

씬 못 미치는 탓이다. 

여운휘는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다리는 마치 썩어 버린 냥 질질 끌리기만 한 

다. 옆구리에 끼어 놓은 가짜 유설린이 떨어지려고 하자 여운휘는 다시금 그를 추켜 

올렸다.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돌조차 넘는 게 버겁다. 지금 이만한 상처를 입은 상태로 

움직인다는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렇게 버거운 걸음걸음을 때던 여운휘는 자그마한 소리를 들었다. 뒤쪽에서 몇 명 

의 무인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는 몸을 돌리고 제왕검을 뽑아들었다. 이대로 도망 

을 친다 해도 몇 걸음 가지도 못해서 잡히고야 말 것이다. 차라리 좋은 위치를 점하 

고 있다가 나타나는 순간 일검을 휘두르는 것이 낫다. 

"이제 끝인가……"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 분명 짧은 인생이었다.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도 

아니고, 죽는다 해도 울어줄 사람도 없다. 한 여인을 제한다면.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 피 때문에 손에 들고 있던 제왕검을 놓칠 뻔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마지막 무인 

의 혼만은 남아 있다. 

후회는 없는 삶이다. 채 반도 살지 못한 삶이라고 하지만 평생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사람도 만났으니까. 

그녀를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려 버렸다. 죽을게 분명한 상황인 

데도 불구하고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짙어진다. 

죽을 때가 되면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 들었 

다. 그런데 우습다. 머릿속에서 천천히 흘러가는 모든 순간들이 항상 유설린의 옆에 

서만 맴돈다. 그녀가 없는 여운휘 본인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행복해라." 

나무 둥지에 간신히 몸을 기댄 채로 버티고 서 있던 여운휘는 앞에서 무인들의 모습 

이 보이자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쥐새끼! 이곳에 숨어있었구나!" 

숫자는 셋. 한 명은 노인이고 두 명은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다. 세 

명 모두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혼신의 힘을 실은 일격이 

었지만 검은 노인의 도에 맞아 튕겨 나왔다. 평소였다면 분명 상대를 벨 수 있었을 

터인데 이제는 무리인 듯 싶다. 

여운휘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는 순간 노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끝이다 이놈!" 

노인의 도가 매서운 변화를 보이면서 여운휘의 정수리 부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도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날아드는데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비틀거리기만 할 뿐 방비 

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그때. 

쒜엑!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이 노인의 목을 날려버렸고, 그 후 아차 하는 사이에 채 방비 

도 못한 두 중년인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여운휘는 비틀거리다가 겨우 나무를 손으로 집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건 검 

정 색 긴 머리카락 뿐. 부드럽게 흔들리던 머리카락의 주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여운휘를 응시했다. 오뚝한 콧날에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입술. 앵두 마냥 붉은 입술이 열렸다. 

"오랜만이죠?" 

"…… 거의 십 년 만이군." 

"절 기억해요?" 

"사무린." 

사무린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 항상 주변에는 관심 

이 없다는 듯이 지냈던 그이니까. 더군다나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자신을 아직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마교 교주이신 엄백린 어르신이 제 목숨을 구하셨죠. 그리고 그 후로는 죽은 듯이 

지냈죠."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부교주였던 엄백린이라면 능히 그럴 능력을 가진 자였다. 무엇보다 사무린 

이 지금 눈앞에 있는 데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용건은?"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무뚝뚝하군요." 

"할 말이 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할 말이나 해 

봐." 

여운휘는 말하는 것조차 버거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사무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왠 

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가 항상 바라보면서 달려왔던 하늘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렇게 베고 싶어했던 

사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고 달려왔 

던 목표가 눈앞에서 이토록 상처투성이인 채로 버티고 서 있자 사무린은 알 수 없 

는 감정에 흔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답게 겉으로는 결코 그러한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사무린은 여 

운휘에게 자신이 온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말하죠. 우리는 당신을 원해요." 

"…… 무슨 말이지." 

"일마를 아실 거예요. 그 분은 당신을 필요로 해요. 만약 그 분을 돕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살 수 있어요. 어때요? 제가 보기에 이곳에서 이렇게 죽을 바에는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여운휘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사무린을 바라봤다. 방금 전 본 사무린의 무공은 실 

로 대단했다. 세 명을 일순간에 베어버리는 검법은 여운휘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솜 

씨였다. 여운휘처럼 그녀 또한 검을 갈고 닦았다는 증거다. 

더군다나 일마의 명령으로 온 거라면 나름대로 준비 된 것도 있을 터. 이곳에서 손 

만 내민다면 분명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난다면 다시금 유설린을 만날 수 있다. 다시 그녀를 만나 또 다시 옆에 

서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절한다." 

"왜…… 죠?" 

"이유까지 굳이 말해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분명 끌리는 제안이었지만 여운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살게 된다면 분명 유설린 

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일마를 만나보지 않았다면 그 제안을 수 

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나 본 일마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모습을 드러낸 사무린을 보고 나서야 왜 일마가 처음 만났을 때 여운휘 

를 죽이지 않은지도 알아 버린 것이다. 다 오늘을 위해서다. 여운휘를 자신의 밑으 

로 데려가기 위해서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아마도 일마는 유설린을 죽이려고 할 게다. 여운휘가 살아 있다는 것을 유설린에게 

알린다면 분명 그녀가 어떻게 할 지는 불 보듯 뻔하다. 

유설린이라면 비록 호랑이가 사는 동굴이라고 해도 여운휘가 있다면 찾아 올 여인이 

다. 살아서 그녀를 유인할 술책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도저히 당신은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왜 살길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지." 

"너는 평생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운휘의 의미심장한 말에 사무린은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나 위에 선 듯한 

저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사무린은 몸을 돌렸다. 그를 베는 것은 자신이기를 바 

랬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힘들 듯 하다. 

지금 베려고 한다면 벨 수는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자신이 온 흔적 또한 무림 

맹에 남기고 싶지 않았고. 

사무린은 일마의 명대로 여운휘를 포기했다. 설득을 해 보고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면 그대로 죽게 내버려두라던 일마의 명대로. 

사무린은 몸을 돌린 채로 말했다. 

"그 고지식한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의 반을 함 

께 한 당신을 만나 기뻤어요. 편히 가세요." 

"너 또한 그 웃음으로 감추어진 거짓은 변한 게 없군. 일마라면 네 눈빛이 거짓으 

로 가득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 말대로 평생의 반을 같이 한 나의 

충고다."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죠." 

사무린은 힐끔 여운휘를 바라보고는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를 느끼 

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나무 위로 올라서서 여운휘를 내려다 봤다.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이생에 

서 여운휘를 보는 것은. 

"멍청한 사람."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사무린은 몸을 감추었다. 

여운휘는 사무린이 사라지는 기척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가짜 유 

설린은 이미 버린 상태다. 더 이상은 들 여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 

다. 

산을 위해 몇 발자국 올라서던 여운휘는 앞쪽에 모습을 드러낸 몇몇의 무인을 보고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는 가까이 다가온 자조차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낯익은 자가 보인다. 

그 낯익은 사내가 여운휘를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오늘은 무슨 날인지 모르겠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는 걸 보 

니." 

"많이 힘들어 보이는 군." 

"너도 날 죽이러 왔나? 남궁진." 

여운휘는 간신히 검을 땅에 꼽아 넣은 상태로 허리를 쭉 폈다. 이 검도 없다면 여운 

휘는 서 있을 여력조차 없다. 흘러내린 피 탓에 온 몸이 피범벅이지만 그 모습만큼 

은 평소처럼 당당하다. 

남궁진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남천 어르신에게 자네에 대해서 듣고 바로 달려왔다네.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 

겠지 하고 산 위쪽에서 자네를 기다렸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 

만…… 만났군 그래." 

"……"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남궁진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진은 하고자 했던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나는 무엇이었나? 그저 필요했기에 함께 한 사이였던가? 솔직히 말해주 

게." 

여운휘는 그저 남궁진만 바라봤다. 그의 눈은 결코 장난기가 없고 진실만으로 가득 

했다. 여운휘가 피맺힌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생전 처음…… 지기(知己)가 되고픈 사내였다." 

"하, 하하! 최고로 기분 좋군. 자네 정도 되는 사내에게 지기가 되고픈 자였다니 말 

이야." 

광소를 터트리던 남궁진이 미소를 거두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비장미만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 신이라도 난 듯이 웃던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되었네. 그거 하나면. 어서 가게." 

"뭐?" 

"뒤는 내가 맡을 테니 어서 가라는 말일세." 

"무슨 소리냐! 넌 남궁세가의 뒤를……!" 

"마지막일세. 자네의 친구의 부탁이야. 제발 들어주게." 

여운휘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남궁진을 바라봤다. 그에게 특별히 해 준 것이라고는 

없다. 그저 한동안 같이했고 몇 번 술잔을 한 게 다였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보다 

는 호감을 베푼 그이지만 목숨을 걸만큼 진실 된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남궁진에 대한 여운휘의 마음도 꽤나 진실 되었던 것 같다. 예 

전 남궁세가에 변괴(變怪)가 일어났다는 말에 바로 말고삐를 돌린 적도 있지 않았던 

가. 

"남궁문! 자네가 저 친구를 업고 내가 말한 곳으로 도주하게. 그곳으로 가면 배 하 

나가 준비되어 있으니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게야. 뒤는 우리가 맞지." 

"알겠습니다." 

남궁문이라고 불린 사내가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여운휘를 향해 다가가 말했다. 

"업히십시오." 

"…… 멍청한 놈. 나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겠다는 거냐?" 

"후후, 애초부터 내 것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게지. 내 행동에 한줌의 후회도 없 

네. 서둘러 도망치게. 무림맹의 무인들도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게야. 그래도 남궁세 

가의 직계 중 하나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살아 남아 추후에 반드시 다시 만나세. 

그 날을 위해 난 모든 걸 버릴 테니. 그때 다시 만나면…… 자네가 한 잔 크게 사 

야 할걸세." 

한 잔 뿐이랴. 그 많은 것을 버리는 남궁진에게 여운휘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 

도 없었다. 

여운휘는 남궁문이라고 불린 사내의 등뒤에 업혔다. 그리고 남궁진을 바라보면서 말 

했다. 

"고맙다." 

"됐네.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그리 말하지 말게. 그럼 남궁문 부탁하네." 

남궁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 가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궁진은 그 

러한 여운휘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남궁진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전부 남궁진을 따르는 자들도 이런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해 준 

자들이다. 

아마도 이들 모두 앞으로 남궁세가라는 이름을 버려야 할 게다. 

"다들 고맙군. 모든 걸 버리면서 까지 같이 와줘서. 결코 살검을 휘둘러서는 아니 

되네. 힘들겠지만 제압을 하는 쪽으로 싸워야 할 게야. 물론 우리보다 위의 배분 분 

들이 대부분이니 버티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남궁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몇의 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갑작스 

럽게 앞을 막고 있는 남궁진 일행을 보고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노인 중 하나가 남궁진을 알아보고 말문을 텄다. 

"너는 남궁진이 아니더냐." 

"오랜만이십니다 어르신." 

"왜 네가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느냐?" 

"죄송하지만 어르신이 베려고 하는 것이 제 친우입니다. 그래서 건방지지만 제가 잠 

시 시간을 벌어주고자 합니다." 

"네 이노옴! 그런 사파의 놈을 위해 지금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직계 

인 네가 길을 막는단 말이냐! 네 놈은 결코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다! 오 

늘 부로 네 놈은 가주 자격을 박탈당하게 됨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에서 제명 당할 것 

이다!" 

가주 자격을 박탈당하고, 남궁세가에서 쫓겨 날거라는 말에도 남궁진은 흔들림이 없 

었다. 그는 대신 검을 세운 채로 말했다. 

"오시지요. 한 수 달게 받겠습니다." 

젊은 사내거늘 경공만큼은 결코 그 깊이가 얕지 않다. 여운휘는 남궁문이라는 사내 

의 등뒤에 업혀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뛰어난 경공을 펼 

치고 있었다. 

남궁문은 남궁진이 데리고 온 자 중 경공이 가장 빼어난 자다. 무공은 중간 정도지 

만 경공만큼은 개중에 군계일학이다. 

휙휙! 

그의 등뒤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여운휘는 그저 바람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기만 했 

다. 이미 걸을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왕검만 

은 손에 꼭 쥐고 있다. 

이 검까지 놓친다면 질기게 붙어 있는 생명의 등불마저도 꺼질 듯 한 기분 탓이다. 

남궁문은 이미 퇴로를 생각해뒀다. 이대로 이동하면 절벽이 나타나고 그 선을 따라 

움직이면 몸을 감출 곳도 많고 그 거리도 짧다. 조사해 본 바로 퇴로로 가장 적합 

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비호처럼 달리던 남궁문이 다리를 멈추며 주변을 살폈다. 지도가 맞다면 이쯤에 절 

벽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남궁문은 앞쪽에 절벽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금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남궁문은 발을 멈춰야만 했다. 

어느 틈인가? 언제 이렇게 많은 수가 그의 주변을 둘러싸 버린 것인가! 

남궁문이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라 해도 나름대로 무공을 익힌 자다. 그런 그가 십 

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주변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이 

자들 전부가 남궁문을 훨씬 웃도는 고수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궁문은 여운휘를 업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절벽 쪽을 이용해 눈에 안 보이게 

해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실수였다. 절벽이 오히려 뒤를 막아 버리는 바람 

에 도망 갈 곳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절벽이 아니었다면 이들 또한 그에 맞게 대응했겠지만. 

남궁문은 결코 도망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여운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남궁진에게 부탁을 받았다. 여운휘는 무사히 도망치게 해 달라는. 

"그 놈을 내려놓지 않으면 죽는다." 

노인의 눈가가 진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갈라진 목소리, 퀭한 눈과 기이할 정도로 

큰 손바닥.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뇌수혈황이다. 그가 직접 남궁문의 뒤를 쫓아 여운 

휘를 잡으려고 온 것이다. 

"하압!" 

남궁문은 뇌수혈황의 눈을 피해 재빠르게 공중으로 도약했다. 어떻게든 이 포위망 

만 빠져나간다면 그래도 살 가능성이 보일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퍼엉! 

"억!" 

뇌수혈황의 손이 가벼이 움직이는 순간 남궁문의 왼쪽 다리가 터져 나가 버렸다. 

단 일장이었거늘 그 공격에 남궁문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등뒤에 업혀 있던 여운휘는 땅을 데구루루 굴렀고 남궁문은 그 상태로 다리를 감싸 

안았다. 무릎 아래부터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통 어린 신음소리를 뱉은 

남궁문을 향해 다가간 뇌수혈황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고, 그러자 그는 갑자기 쥐 죽 

은 듯 조용해졌다. 

몸 속에 있는 내장들이 그 일수에 모두 터져 버린 것이다. 

뇌수혈황은 고개를 돌려 여운휘를 바라봤다. 

원래부터 찢겨져 피범벅이었던 옷은 땅을 구르면서 더욱 초라해졌다. 완전히 너덜거 

리는 옷을 입은 채로 여운휘는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뇌수혈황의 모습을 확인했다. 

"흐흐! 어떻게 이곳까지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네 운이 다한 모양이구나!" 

"……" 

여운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있지만 다리에 

힘이 없는 탓에 비틀거리고 있다. 지금도 간신히 눈을 뜨고 있을 뿐이고, 상대의 말 

도 가물가물하다. 왜 갑자기 자신이 남궁세가의 무인이었던 남궁문의 등에 업혀 있 

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조차 여운휘는 판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웩!" 

여운휘는 다시금 피를 토해내면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뇌수혈황의 눈 

가에는 즐거운 듯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네 놈은 죽는다. 바로 노부에게!" 

여운휘는 비틀거리면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뇌수혈황을 바라봤다.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독기가 온 몸을 흔들어놨고, 너무나 많은 출혈이 있었다. 그 누구라 해도 지금까지 

버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단순히 오기였다. 유설린에게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어주기 위한. 

이제는 만족한다.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만족할 만큼의 시간도 벌어주었다. 

죽는다 해도 이젠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여운휘는 감기려는 눈을 치켜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궁진이 도움을 주었기에 혹시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무림맹의 

그물은 녹록치 않았다. 

'설린이를 부탁하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유설린을 부탁한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 

린 여운휘는 땅에 박아 둔 검을 뽑아냈다. 적에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깔끔하게 스 

스로의 배를 가르려고 한 것이다. 

[우(右)로 십 보(十步)! 그 후에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알 수 없는 전음이 여운휘의 귓가로 파고 든 것은 배를 가르려고 마음먹은 찰나였 

다. 전음이 왔겄만 그것을 보낸 상대의 정체조차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미 혼미해져 가는 정신에 여운휘는 본능적으로 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다지 빠른 걸음은 아니었지만 여운휘는 남아 있는 모든 내력을 끌어냈다. 오른쪽 

으로 열 번을 움직이는 여운휘를 보면서도 뇌수혈황은 잔혹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저토록 심한 상처를 입은 놈이 움직여 봤자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른쪽으 

로 열 걺음 움직인 여운휘가 갑자기 뒤를 향해 몸을 날리자 뇌수혈황은 자신도 모르 

게 비명을 토해냈다. 

"엇!" 

뇌수혈황은 그제야 급히 발을 놀렸다. 

'저 놈은 내가 죽이고야 말겠다! 자살 따위를 하게 해서는 안 돼!' 

여운휘의 발은 분명 느렸다. 있는 내력이 모두 짜냈다 하지만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뇌수혈황이 보기에는 그 움직임은 분명 우습게 보였다. 하지만 절벽과 여운휘의 거 

리가 너무나 가까웠고, 뇌수혈황 또한 방심하고 있었다. 

팍! 

여운휘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버렸다. 

뇌수혈황은 급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여운휘의 찢겨진 옷을 붙잡았다. 하지 

만…… 

찌이익! 

그대로 옷은 찢겨졌고 여운휘의 몸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뇌수혈황은 땅을 

쳤다. 

"제길! 그 놈은 내가 씹어 죽였어야 했거늘!" 

이를 부드득 가는 뇌수혈황을 뒤로하고 이 무리를 이끄는 노인에게 중년인으로 보이 

는 무인이 다가와 말했다. 

"시체를 찾아볼까요?" 

"이 정도 높이라면 이미 시신이라고 부르기도 뭐할 것이다. 아마 사지가 걸레 조각 

이 되었을 게지. 시체보다 제왕검을 찾는 데 주목해라. 제왕검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말을 마친 노인은 절벽 아래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까운 자였다. 하지만 죽 

었어야 하는 자이기도 했다.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시신도 결코 온전하지 못할 터. 내생(來生)에는 반드시 좋 

은 사람으로 태어나거라.' 

가볍게 양손을 마주 한 채로 그는 합장을 했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자이지만 아까 

웠던 무인임은 분명하기에.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이 같이 쟁쟁한 무인들 중 그 누구도 절벽 중간쯤에서 떨어 

지는 여운휘를 받아들며 비조(飛鳥)처럼 날아간 무인 하나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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