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발자국 내딛지도 않아 사방에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무인들이 여운휘를 향
해 검을 겨누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자들도 그렇지만 앞을 막은 이들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여운휘보다 암황의 쌍장이 먼저 움직였다.
콰쾅!
일장을 내뻗는 순간 파도와도 같은 강기가 손에서 터져 나왔다. 물결처럼 일렁거리
는 강기를 마주 한 무인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각양각색의 인물들이다. 하지
만 결코 그 무리 안에서 무공이 약한 자는 없다.
더군다나 신원들 또한 완벽하여 이 일에 대해서 함구할 수 있는 자들. 여운휘를 제
거하는 것이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니 그만큼 신중하게 고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지만 암황의 일장은 아무리 고수라 해도 우습게 볼 그러한 것이 아니었
다.
여운휘는 어느 정도 견제를 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노인의 일장이었
기에 당혹감은 더했다.
그들이 급히 뒤로 물러나는 틈에 여운휘의 몸이 솟구쳤다. 그리고 동시에 뽑혀져 나
온 제왕검이 금색 빛을 토해냈다.
암황의 공격에 뒤로 물러섰던 그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여운휘의 검을 받아야만 했
다. 개중에서 여운휘는 뚫고 나가야 할 부분을 막고 있는 셋을 향해 검을 휘둘렀
다.
챙챙챙!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금속음. 용케 검을 들어 셋 모두 여운휘의 검을 막은 모양이
다. 막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운휘의 몸이 팽그르르 돌았다. 금색 긴 빛 무리가 연
신 검들을 두드렸다.
아름다운 검무가 여운휘의 손에서 펼쳐졌다. 삼 대 일의 대결이었거늘 뒤로 물러서
는 것은 그 세 명이었다.
용케 막아내고는 있지만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잠시 숨을 쉴까하
면 목 가까이 검이 다가온다. 간신히 엇비슷하게 싸우던 싸움은 한 명이 무너지면
서 급격히 변했다.
여운휘는 부담 없이 오행검법을 펼쳤다. 지금은 오행검법을 감춰야 할 이유가 없다.
강한 무인들이었지만 여운휘의 오행검법은 그들의 틈을 파헤쳤고, 기운들을 옆으로
흘리게끔 했다.
"컥!"
제왕검이 검신이 여덟 개로 변하는 순간 두 명의 가슴에 긴 검상이 생기며 그들도
무너졌다. 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이었다. 짧은 순간에 고수 세 명이 쓰러졌
지만 그렇게 쉽게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암황의 도움 탓이 컸다. 주변에서
여운휘를 향해 쇄도하려는 무인들을 제압하면서 동시에 유설린을 지켜냈다.
아마도 암황이 없었다면 이토록 싸움을 벌일 여유도 없었으리라.
길이 약간 나자 여운휘는 다시금 유설린을 들쳐업고 내달렸다.
창창!
여운휘는 급히 유설린을 안은 채로 몸을 뒤로 젖혔다. 어느새 날아온 두 명의 무인
의 검이 여운휘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여운휘가 몸을 젖히는 순간 나
무 사이에서 비침들이 터져 나왔다.
"후웁!"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은 암황이다. 그가 날아드는 비침을 향해 손을 들어 원을 그리
자 그것들은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운휘가 검을 날렸던 두 명의 검수를 베려고 하는 사이에 암황은 급히 주변을 살폈
다. 아직 전부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이 근방을 향해 수많은 무인들이 다가오고 있
다.
이렇게 싸운다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대략 봐도 지금 이 근방을 감싸고 있는 자
들의 수는 백여 명에 달한다. 일반 적인 무인들이라면 상대해 볼만도 하다. 지형지
물만 잘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승부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들은 고수다. 더군다나 아까 봤던 뇌수혈황은 강호십일객 중 하나일 정
도의 인물이다. 그만한 자가 또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때 하늘을 덮는 그물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여운휘!"
암황은 옆에 있는 자들을 향해 일장을 날리다가 급히 여운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
고 그 외침에 여운휘 또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물을 알아차렸다.
탁!
여운휘는 공중으로 몸을 띄우면서 바로 발을 내질렀다.
상대는 팔목을 들어올려 여운휘의 발을 막아냈고 기다렸다는 듯 반동을 이용해 뒤
로 몸을 날렸다. 그물은 여운휘의 발을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여운휘의 발
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물 끝에 암기들이 잔뜩 달려 있던 탓이다.
여운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암기 끝에 독이 발라져 있는 탓인지 몸 안의 진기들
이 마구 날뛰기 시작한 탓이다. 여운휘의 표정을 본 암황은 그의 상황이 어떻게 되
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큰일이로군. 독에 중독 된 모양이야!'
여운휘라면 어느 정도 버텨낼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진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쳤다고 하지만 쉴 틈은 없다. 여운휘는 그물이 날아온
쪽을 향해 검을 세웠다.
여운휘가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곳에서 노인 하나가 기어 나왔다.
"낄낄! 어린놈이 제법 반응이 빠르구나!"
사천당문의 장로 중 하나인 당문길이다. 그는 독보다는 암기술에 능통하고 손수 제
작한 암기를 쓰는 것을 즐기는 자다. 여운휘는 오행검법에서 목(木)의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과 동시에 당문길의 품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침 하나
가 여운휘를 향해 날아왔다.
목의 기운을 일으키니 그토록 얇은 침의 모습도 확연하게 보였다. 여운휘는 침을 피
함과 동시에 손목을 흔들었다.
귀면신황 풍운조에게 배웠던 비도술이다. 그에게 배웠던 비도술의 기본을 나름대로
변화시켜 만든 여운휘만의 비도술이다.
당문길은 여운휘가 비수를 날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탓에 허둥지둥 자신의 소매
에서 암기를 던져냈다.
그는 실수를 했다. 피해도 될만한 공격이었거늘 순간 당황해서 자신의 손을 움직여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그의 실수는 상대를 너무 우습게 봤다는 거다.
"컥!"
어느새 다가왔는지 어깨에 비수 하나가 박혔다. 여운휘는 비수를 던지면서 두 개를
하늘로 올렸다. 소매를 흔드는 바람에 하나는 피해 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가
어깨를 꿰뚫은 것이다. 고통의 찬 신음성을 토해내는 순간 여운휘의 검이 이미 당문
길의 단전을 쑤셨다.
입에 게거품을 문 당문길이 쓰러졌다. 분명 당문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지만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쓰러져 버렸다. 여운휘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사방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무인들이 감싸고 있다.
여운휘는 제왕검을 든 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괜한 피해를 만들지 말고 고이 항복하거라!"
노인 하나가 여운휘를 향해 말했다. 여운휘는 대답대신 들어올린 검에서 검기를 뽑
아내 뒤를 향해 뿜었다.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그 공격에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일격에 여운휘는 확신했다. 이들 중에서 결코 어중이떠중이는 없다는 사실을.
'완벽해. 결코 다른 곳까지 생각해 놓은 자들의 힘이 아니야. 이곳으로 우리가 온다
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그렇다. 지금 여운휘를 죽이러 온 무인들의 수는 백 명이 넘어섰다. 그들은 모두 고
수거나 절정고수들로 무림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지금
이 근방에 있는 무인들의 수는 오십 정도였지만 곧 나머지 무인들도 합류 할 것이
다.
지금 어떻게 버티고는 있지만 합공을 펼친다면 아무리 여운휘와 암황이라고 해도 당
해낼 수 없다.
지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다. 언제든지 틈을 보이면 공격
을 가해 올 것이다.
그때 뇌수혈황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여운휘를 바라보
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흐흐!"
어떻게 도주로를 잡을까 고민하던 여운휘는 갑자기 나타난 뇌수혈황을 곱지 않은 눈
으로 바라봤다. 가능하면 이자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
다. 일대일의 싸움이라면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다. 그러는 틈에 여운휘는 다른 무인들의 공격 목표가 된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유설린도 지킬 수 없다.
지금 유설린은 여운휘의 옷을 꼭 잡은 채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칼 그림자들을 보게 된 그녀로서는 당연스
러운 반응이다.
여운휘는 뇌수혈황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천천히
그가 여운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암황이 나섰다.
"오랜만이로군."
"뭐야? 이 초라한 노인네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미친놈. 너 따위 놈을 내가 알 리가 없잖느냐. 온 몸에서 구린내가 가득 나는 마
부 따위를……"
"허허! 언제부터 네가 내 앞에서 이리 당당했는지 궁금하구나."
"나이를 처먹은 노인네가 아주 침해 끼가……"
막 말을 하던 뇌수혈황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말을 멈추더니 암황을 향
해 눈을 부라렸다.
"네, 네 놈, 아니 당신은 설마!"
"오랜만이구나. 산동 옥함산(玉函山)에서 본 이후로 처음인 듯 하군."
"어,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뇌수혈황이 암황을 보고는 놀라 자지러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평생 중에
서 가장 처절한 패배를 가지게 했던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암황인 탓이다.
"아, 난 그 중간 중간 널 본 일이 있었지만 넌 나를 못 알아보더군. 잠시 검문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말이야."
말을 가볍게 마친 암황이 앞으로 발을 내딛자 뇌수혈황이 물러섰다. 그는 그러면서
주변을 힐끔 바라봤다. 사방에 많은 무인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더 인원이 오면 공격하려는 것이리라 암황은 추측했다.
무림맹으로서는 지금 마교와의 일전을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치열하게 마
교와 싸우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한 상황에 가뜩이나 적은 고수와 절정고수들을 이
곳에 보냈다.
최대한 적을 피해를 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 탓에 지금 이렇게 이들은 망설이면
서 상황만 바라보는 것이고.
도망을 치려면 저들을 끌어내야 한다.
이렇게 자리를 굳히고 있다면 도망을 치려고 해도 금방 뒤를 잡히게 된다. 그래서
지금 암황이 나선 것이다.
암황은 뒤로 물러서는 뇌수혈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뇌수혈황은 급히 고개를 숙였고, 대신해서 장을 맞은 거대한
고목이 마치 썩은 것처럼 쉽게 무너졌다.
쾅!
뇌수혈황의 얼굴에 공포감이 이는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 무리를 이끄는 듯
한 노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공격해라."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무인들은 명령을 받들기라도 하려는 듯이 싸움터를 향해 몸
을 날렸다. 그때 암황이 소리를 질렀다.
"여운휘! 움직여!"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여운휘는 한 손에는 유설린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검을
뽑아든 채로 뒤를 향해 몸을 던졌다.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이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여운휘를 향해 수많은 자들이 몸
을 움직였다.
팟!
검들이 사방을 에워싸며 여운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이 미끄러지듯이 여운휘의 손
목을 타고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긴 나선형을 그린 제왕검이 날아드는 검들을 오히
려 옆으로 흘려 버렸다.
차차창!
검이 오히려 자신의 동료들을 노리자 그들은 급히 검을 거두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
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여운휘가 아니었다. 앞쪽에 있는 상대를 향해 그는 검
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검은 막혔지만 여운휘는 그대로 상대를 밀어 붙였다.
파파팍!
상대는 여운휘가 미는 힘에 따라 그대로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달리다 시
피 뒷걸음질치던 그는 결국은 버텨내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그때 넘어지는 상
대의 등뒤에서 빠르게 검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번만큼은 여운휘조차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큭!"
쓰러지는 자의 고개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검이 여운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로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어깨를 뚫어 버렸을 게다. 그는 급
히 고개를 돌려 유설린을 바라봤다.
유설린 또한 위험했을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 어깨를 스치고 뻗어져 나갔다면
유설린에게도 상처가 있었어야 했다. 그 탓에 화들짝 놀라 유설린의 상태를 본 것이
다. 그런데 유설린에게는 자그마한 상처조차 없다. 그리고 이미 유설린을 향해 고개
를 돌리면서 느낀 것이 있다.
검을 뻗었던 자는 유설린에게 닿으려는 찰나 손을 뒤로 거두었다.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인가?'
우문학이 말했었다. 아마 유설린은 죽이지 않고 산채로 잡으려고 할거라고. 그녀는
유가의 소가주라는 이름이 있기에 오히려 이용하려고 들 거라고 말이다. 확실하지
않았기에 망설였거늘 지금 보니 우문학의 말 대로인 듯 했다.
이들은 아까부터 유설린을 향해서는 살검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 그 예다.
파팍!
앞에 있는 자는 노인이었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노인이지만 뻗어져 나오는 검기
가 사뭇 날카롭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노인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뜩이나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아까운 순간이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앞에 있는 노인은 처음 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수다.
"어딜."
옆으로 몸을 비트는 여운휘를 향해 노인이 몸을 날렸다. 그의 발이 환영을 만들어내
는가 싶더니 여운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여운휘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도망치려
고 했던 퇴로를 노인의 발이 완벽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여운휘는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노인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인데
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여운휘의 검을 막아냈다.
노인을 젖히려는 사이에 이미 여운휘의 주변에 몇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손에 낀 조를 휘두르며 여운휘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럼과 동시에 노인 또
한 움직였다.
조를 막아내는 사이 노인의 가볍게 말아 쥔 노인의 주먹이 여운휘의 단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들고 있는 검은 조에 낀 상태고, 나머지 한 손에는 유설린을 안고 있다. 그 탓에 여
운휘는 속절없이 당할 상황이었다. 여운휘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피할 방도
가 없었던 탓이다.
그때였다.
쒜엑!
어느새 다가온 암황이 노인을 향해 마찬가지로 권을 뻗었다. 팔꿈치가 기이하게 비
틀리며 노인은 단발마의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허윽!"
암황의 주먹에서 대단한 권풍이 몰아닥치며 조를 들고 있는 무인 또한 뒤로 물러서
야 했다. 순간적으로 주변을 몇 명의 무인들이 에워쌌지만 바로 이어지는 암황의 공
격에 그들을 성큼 뒤로 물러났다.
여운휘는 틈이 빈 사이를 이용해 다시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암황은 그런 여운휘의
뒤에 바짝 붙은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그 위력
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그는 일부로 나무를 부러트리면서 길을 막기 시작했다.
우지끈!
장정 사내의 허리보다도 두꺼운 나무들이 장난감처럼 쓰러졌다. 강호십일객의 팔황
중 제일이라는 암황의 위명이 절로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상대들은 이러한 나무들에 잠시 멈칫 했을 뿐 쉽게 넘으면서 뒤를 쫓았
다. 그리고 앞쪽도 이미 무인들이 막고 있는 상태다.
쏟아지는 검을 향해 여운휘는 오히려 몸을 날렸다. 무사히 도망치기를 바란다면 그
건 사치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자들을 밀쳐내면서 어떻게든 퇴로를 만들려고 했
다. 다섯 명의 무인이 각자의 위치에 서서 검을 휘둘렀다.
오행검진(五行劍陣)임이 분명하다.
오행을 이용한 도가 계열 합벽검진으로 무당파의 진법이다.
휘몰아치는 검진 사이에 들어간 여운휘는 안락함 느낌을 가졌다. 오행검진의 오행
과 오행검법의 오행. 두 개의 기운은 마치 물처럼 하나가 되어 흘렀다. 그러자 자
신 있게 오행검진을 펼친 다섯 명의 중년인들은 당황했다.
평소 자신들이 펼치던 오행검진이 아니었다. 분명 오행의 방위를 점하고 각자가 역
할들을 잘 해내고 있다. 그런데 검진이 오히려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자 당황
해 버린 것이다.
타타탕!
별반 충격도 없었거늘 검들이 튕겨 올랐다. 폭발이라도 한 듯 검들이 부서졌고 그것
이 바로 암기가 되어 뒤쪽에 있는 무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주변으로 터져 나간 검을 피하지 못한 무인들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여운휘는 오
행검진을 깨자마자 기회라는 듯 유설린을 안은 손에 힘을 준 채로 나무 위로 솟구쳤
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떻게든 악록산을 벗어난다면 도주할 가망이 보인다.
이 무리를 이끄는 것은 긴 흰 수염의 노인이다. 하지만 그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붉은 장포는 어디서 본다 한들 한 눈에 확 보일 정도로 화려했다. 그리고 노
인의 두터운 팔은 결코 그가 세월에 무뎌지거나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악록산 정상에 서서 그는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장황(掌皇)이다.
강호십일객의 하나로 팔황 중 하나에 속한 자다. 전형적인 정도인이고, 협과 의를
중시한다. 대부분의 강호십일객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모호하다. 하지만 장황
은 아니다. 그는 무림맹에서 지내고 또한 무림맹을 위해 손을 휘두른다.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보니 대강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
는데 시간이 꽤나 길어진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놈을 죽이는 데 뭐가 이리 오래……'
장황은 옆에 있는 수하들을 바라봤다. 개중 하나가 막 날아든 서찰을 내밀었다.
장황은 서찰에 적혀 있는 내용을 살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겨우 세 놈에게 이러한 피해를 입었단 말인가?"
사망(死亡)이 11명, 중상(重傷)이 13명, 경상(輕傷)이 7명.
경상은 뺀다고 해도 스물 다섯에 달하는 자들이 당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아직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의 피해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포위망까지 완벽하게 구
축했다는 보고도 받은 직후에는 끝났다고 확신까지 했었다.
"뇌수혈황은 무엇을 하는 건가?"
장황은 뇌수혈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뇌수혈황은 정보다는 사에 어울린
다. 뭔가 껄끄러운 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력만큼은 장황도 뇌수혈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황과 뇌수혈황이 겨룬다면 동수(同數). 하지만 경험은 뇌수혈황이 앞선다. 체력
은 장황이 앞선다고 하지만 경험을 우습게 볼 수는 없다.
싸움이 길어지자 장황은 장포를 펄럭이면서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에
서 보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눈을 감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뻔하다.
"이곳은 너에게 맡긴다. 그리고 육살대(六殺隊)는 나를 따라라."
육살대는 장황이 만든 여섯 명의 무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두가 말수가 없고 오로
지 장법만을 쓰는 무인들이다.
강호십일객 중 뇌수혈황뿐만이 아니라 장황까지 싸움에 끼여들기로 마음먹은 것이
다. 시간이 길어지면 피해는 속출 할 것이라는 생각 탓에 장황은 옮기기 싫은 발걸
음을 움직였다.
애초부터 겨우 그런 놈 하나를 잡는 데 이만한 인원을 동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
았다. 하지만 무림맹의 입장에서 여운휘는 반드시 죽여야 할 자다. 그것을 알기에
장황 또한 이 일의 지휘를 맡아달라는 것을 수긍한 것이고.
선두로 선 장황은 붉은 장포를 펄럭이면서 산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다.
목표는 정해져있다. 여운휘의 죽음, 그리고 유설린의 생포.
'감히 마교의 잔챙이 주제에 무림맹 안에서 설치고 다니다니! 내가 네 놈을 씹어먹
고야 말리라!'
장황은 내심 불쾌한 마음을 안으로 갈무리 하며 발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무인들과 격돌한지 반 시진 이상이 흘렀거늘 여운휘는 용케 버텨내고 있었
다. 그는 유설린 암황과 함께 나무 옆에 움푹 파인 공간을 이용해서 잠시 숨을 돌리
고 있는 처지였다.
여운휘는 상처 투성이였다. 자잘한 상처들이 온 몸에 가득했고, 몇 군데는 다소 심
한 부상들이 눈에 드러났다.
여운휘는 옷을 찢어서 큰 상처 부분을 동여맸다. 역시 가장 큰 상처는 사천당가의
당문길에게 당한 상처다. 상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스며든 독 때문에 점점 몸
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 외에도 어깨와 허리 부근에 꽤나 깊은 검상이 생겼다.
운이 좋았다.
그냥 싸웠다면 지금 이 정도의 상처 정도로 그치지 못했을 것이다. 완벽한 포위에
실력자들이다. 원래대로라면 죽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들 중에서는 강기를
마구 뿌려댈 수 있는 절정고수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검을 휘두르거나 권, 또는
장으로만 여운휘를 제압하려 했다.
모두 유설린 탓이다. 그녀가 혹시 큰 부상을 입지는 않을까 해서 그들은 손에 자비
를 두었다.
"괜찮은가?"
"……"
여운휘는 지혈을 하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운휘에게 걱정스럽게 물은 암
황 또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유설린을 안고 있는 그의 몫까지 홀로 고군분투한
암황이기에 그 부상은 여운휘 못지 않다.
그의 오른쪽 어깻죽지는 크게 베어 옷조차 피로 흥건하게 젖은 상태다.
암황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곧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급히 전음을 보
냈다.
[무리야. 이곳에서는 도망칠 수 없네. 방비가 너무 완벽해. 우리가 움직일 모든 퇴
로를 짐작하고 적절하게 무인들을 배치해 놨어.]
여운휘는 힐끔 암황을 바라봤다. 전음이었기에 유설린은 듣지 못했다.
[무리라도 해야 하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야 말겠소.]
암황도 알고 있다. 그 또한 유설린을 지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싸우고 있
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도저히 퇴로가 없다. 완벽하게 악록산의 지리를 알아 비
밀스러운 샛길이라도 알기 전에는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도 잠시 몸을 숨긴 것 뿐 곧 발각 될 게다.
그리고 그런 암황의 생각은 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이쪽이다!"
고함소리는 바로 근방에서 터져 나왔다. 암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길!'
언제 그가 이토록 궁지에 몰린 적이 있던가.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
긴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만큼 궁지에 몰렸던 적은 없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암황은 그저 반사적으로 손을 휘두르면서 여운휘와 유설린이 움직일 수 있게끔 도왔
다.
막 날아들던 무인 하나가 암황의 손에 맞아 그대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뒤로 날아갔
다. 결코 무인이 약한 것이 아니다. 단 일수에 당한 무인이라고 하지만 점창파 내에
서는 손꼽히는 고수 중 하나인 자다.
하지만 암황의 얼굴도 서서히 피로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내공
의 소모가 너무나 극심하다. 쉬지 않고 내공을 사용하니 강호십일객의 팔황 중 하나
인 그라 해도 피로한 건 당연하다.
암황은 급히 몸을 돌려 다시금 여운휘의 뒤를 쫓았다. 그는 여운휘의 뒷모습을 보면
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유설린을 어떻게든 뺄 방법을 떠올리긴 했지만 차마 암황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
고 그것은 바로 여운휘여야 한다.
'안 돼. 그건 못할 짓이다.'
암황은 자신이 떠올렸던 것을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앞에서
몇 명의 무인들이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쏟아지는 검.
여운휘는 마구 마구 갈라지는 검날을 보면서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점창파!'
분명 그가 걷는 보보(步步)는 점창파의 신법인 천룡환허보(天龍幻虛步)요, 펼치는
검법은 변화로 유명한 백족검법(百足劍法)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검을 날리는 것이
그 뿐이 아니라는 거다.
옆쪽에서 달려든 자는 도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허리에 찬 채로
몸을 날리고 있었는데 양손을 앞으로 쭉 내민 것을 보니 장법을 쓰려는 듯 했다. 무
당파의 무인이라면 십단금(十段錦)을 쓸 게다.
백족검법의 무한한 변화가 눈 앞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이미 변화에는 익숙한 여운
휘 또한 오행검법으로 맞섰다. 그리고 동시에 옆으로 파고든 무당파의 무인으로 보
이는 자를 견제했다.
예상 대로였다. 부드러운 춤을 추듯이 움직이던 손이 급히 뻗어져 나왔다.
무당의 십단금은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파괴력인 장법이다.
이미 견제하고 있었던 탓에 여운휘는 십단금을 피해냈다. 그리고 그때를 이용해 이
번에는 화산파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가 달려들었다. 매화검법(梅花劍法)을 펼쳤지
만 이번 공격은 여운휘가 아닌 암황이 막아냈다. 그대로 달려든 암황의 다리를 치켜
들어 화산파의 무인을 향해 내리 찍은 것이다.
급히 매화검법을 거둔 화산파의 무인이었지만 방비가 너무 늦었다.
뻑!
머리통이 단숨에 깨지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암황은 피가 온 몸을 젖신 것에 아랑
곳하지 않고 여운휘와 검을 겨루는 점창파의 무인을 향해 다시금 발을 날렸다.
점창파의 무인은 이미 화산파의 무인이 당하는 것을 본 탓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
탓에 그는 암황의 공격을 읽고 막아냈고, 그가 몸을 비트는 순간 여운휘의 오행검법
이 십단금을 펼치던 무당파의 무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흐억!"
비명을 내지른 것은 무당파의 무인이 아니고 오히려 점창파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
신과 함께 있던 모두가 죽자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른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한 것
이다. 그리고 때맞추어 여운휘와 암황의 합공이 이어졌다.
챙챙!
용케 막아내면서 뒤로 물러서던 그였지만 산의 경사 탓에 결국은 넘어지고야 말았
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로 뒷걸음질 쳤지만 암황의 수도가 그의 백회혈을 내
려쳤다.
즉사다.
"헉헉!"
여운휘의 숨이 거칠다. 오행검법을 계속해서 펼쳤고, 독기를 억누르고 있던 것도 서
서히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증거로 여운휘의 몸의 일부가 푸르게 변해 버렸다.
암황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간다가 죽음은 불 보듯 뻔하다. 하지
만 누남천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여운휘에게 말했다.
"어서 가지."
끄덕.
여운휘는 자신의 손에 매달려 있는 유설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로 앞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뜨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기 싫은 모양이다.
'설린아……'
"큭!"
여운휘는 마침내 피를 토해냈다. 독기와 상처들 때문에 이미 몸 상태가 엉망이다.
그는 피를 토해낸 후 입가를 쓰윽 닦아냈다. 그리고는 묵묵히 다시금 사람의 흔적
이 보이지 않는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온 몸이 부서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래도 상관없다. 온 몸이 부셔져도, 혹은 검으로 난자를 당해 살점이 하나 하나 잘려
나간다고 해도 유설린을 위해서라면 웃으면서 감수할 수도 있다.
'지킨다! 지키고야 말겠다!'
이미 몸을 침범한 독기 따위는 여운휘의 머리 속에서 없다. 이제는 지키겠다는 일
념 하나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이기도 하다.
거의 비몽사몽으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움직이고,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으면 베면
서 여운휘는 달렸다. 그런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암황의 눈가가 씰룩였다.
"피해!"
그 말에 정신이 풀어져 있던 여운휘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콰쾅!
뒤로 물러서기가 무섭게 나무 위에서 한 노인의 떨어져 내렸다. 붉은 장포를 펄럭이
면서 떨어지는 노인의 모습은 가히 죽음을 부르는 신과도 같았다. 그자는 일격을 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내리면서 재차 손을 휘둘렀다.
여운휘가 검을 들어올려 방어를 하려는 순간 암황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둥
글게 휘둘렀다.
퍼엉!
막강한 장력이었거늘 암황이 휘두른 손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튕겨져 나갔다.
암황은 상대가 누구인지 보는 순간 감을 잡았다. 이만한 장법과 붉은 옷을 입고 다
니는 노인이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는 하나밖에 없다.
'장황! 도대체 여운휘 하나를 죽이기 위해 이만한 자들이 모두 모였단 말인가!'
장황이라면 녹포괴존보다는 훨씬 하수라지만 팔황 중에서는 상위에 속하는 자다. 지
쳐버린 암황으로서는 승부를 자신 할 수 없는 상대다.
"호오! 늙은이 대단하군. 뭐 하는 자냐?"
"너와 같은 팔황 중 하나인 암황이라 한다."
암황의 말에 이번에는 장황의 은근히 놀란 눈빛을 지었다. 암황이라면 장황인 그보
다도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가 아니던가.
순간 긴장했지만 얼굴 표정과 너덜너덜해진 옷,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드러나 보이
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게 되자 장황은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황은 반존대로 올리며 말했다.
"이런 곳에서 암황을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나 또한 장황을 이리 만날 줄은 몰랐지."
"상처가 크신 듯 한데 물러섬이 어떻겠소. 비록 적이라고 하나 같은 강호십일객 중
하나인 암황을 죽이고 싶지는 않소."
"흐흐! 이 놈! 쥐가 고양이를 걱정해 주는 꼴이로구나. 내가 다쳤다 하지만 네 놈
이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해 보이더냐?"
"살 기회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육살대(六殺隊)!"
장황이 고함을 지르자 인근 나무에서 여섯 명의 사내들이 뛰어내렸다. 이미 알고 있
었던 탓에 암황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이 꽤나 훈련을 받은 자들인 듯 하다. 나이는 전부 사십 대
중반 정도. 아마도 장황이 손수 키운 그만의 수하인 듯 했다.
장황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여섯이 어르신을 모셔라. 섭섭지 않게, 그리고 편히 보내드려."
"존명!"
여섯 명의 목소리가 하나라도 된 냥 울려 퍼졌다. 그리고 외치자마자 그들은 암황
의 주변을 포위하듯 에워쌌다. 암황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평소였다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몸 상태도 그
렇거니와 부상을 당한 여운휘가 장황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 탓이
다.
장황이 여운휘를 쓰러트리고 싸움에 개입한다면 승부는 단숨에 기울게 된다.
'제발 내가 이들을 쓰러트릴 때까지만 버텨다오!'
그런 암황의 마음을 아는 지 여운휘는 흐릿한 눈으로 장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장황은 여운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쌍수를 들어올렸다.
'쉽게 끝나겠어.'
상대방의 눈에서는 전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녹색으로 변해 버린 피부를 보아하
니 독에 중독 된 듯 하다. 아마도 오기로 버텼을 것이다.
'산송장을 쓰러트리는 거라면 일도 아니지.'
가볍게 쓰러트리겠다는 듯 여운휘를 향해 다가가던 장황이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섰
다. 그토록 흐릿하던 눈동자가 검을 잡는 순간 갑작스럽게 번쩍였다. 그리고 그 일
순간의 기세에 놀라 버린 탓에 뒤로 물러선 것이고.
장황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했다. 이 정도의 부상을 입은 자의 기세에 일순 놀라 뒤로 물러섰다는 사실이.
여운휘가 들어올린 황금색 검을 보면서 장황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수황과 일전을
겨루었고 흑색기마대의 대주와 싸웠다고는 들었지만 그 싸움 중에서 승리했다고 알
려진 것은 없다. 한 마디로 어떻게 운이 좋아서 손을 겨루고 고만고만하게 싸우다
가 그만 두었을 거라고 장황은 지레짐작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하니 그건 아니었다.
'만약 멀쩡한 상태였다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그만큼 여운휘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장황은 애써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의 상태가 멀쩡했다 한들 젊은 무인이다. 분명 그의 적수는 아닐
것이다.
"편히 보내주마."
비틀거리며 서 있는 여운휘를 향해 장황이 자신 있게 일장을 내리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황은 다가가기보다는 장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가볍게 내리그
어지는 여운휘의 일검. 그다지 내력이 실은 것 같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장력이 갈
라져 버렸다. 장황은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장력을 갈라낸 여운휘 또한 멀쩡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하고 쉬운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내상이 너무 큰 탓에 이만한 공격이라 해
도 우습게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장황은 장력이 갈리는 것을 보는 순간 몸을 날려 여운휘를 향해 쇄도했다. 쏟아지
는 양손을 보며 여운휘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휘둘렀다. 서로 한 치의
양보다 없이 몇십 합을 겨루었다.
슈욱!
여운휘는 유설린을 뒤로 잡아 빼면서 그대로 앞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아
슬아슬하게 장황의 옷깃을 스쳤다.
장황이 뒤로 물러서자 여운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이제는 유설린의 무게조차도 버겁다. 여운휘는 힘이 빠지려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
다. 고개를 돌리자 유설린이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여운휘는 옆쪽에서 미칠 듯 움직이는 암황의 모습을 확인했다. 여섯 명의 무인들과
겨루고 있음에도 밀리거나 하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암황이 그 여섯을 몰
아 붙이고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균형이 깨질 것
이다.
문제는 그 전까지다. 몸이 멀쩡했다면 승부를 겨뤄봐도 크게 무리가 없는 상대. 하
지만 지금 여운휘의 몸은 최악을 향해 치닫는 상태였다.
수많은 무인들에게 당한 검상, 그리고 당문의 노인에게 당했던 독. 아무리 여운휘라
고 해도 그만한 상처를 입고 강호십일객의 하나와 겨루기는 버거웠다.
장황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툭치면 쓰러질 것만도 같은 사내였다. 그런
데 막상 손을 겨루어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검이 매섭다.
장황은 손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장포와 같이 붉게 변한 손은 그의 독문무공인 적화
혈령장(赤火血靈掌)이다. 마주하는 여운휘는 유설린을 옆에 내려놨다. 여태까지와
는 어떻게든 막아왔지만 지금 이 일격이 보통을 넘어설 거라고 예감했던 탓이다.
녹포괴존의 장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장황의 장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쫓기
기 시작한 이후로 유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만 지켰다. 지금 또한 마
찬가지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모양인데 입이 열리지 않는 듯 묵묵부답이다.
여운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곧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반드시 지켜주마. 그러니까 걱
정할 필요 없다."
말을 마친 여운휘는 바로 몸을 돌렸다. 시야가 흐릿해 져 버렸다. 장황의 모습이 두
어 개로 갈라져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내색하지 않고 검을 곧추 세웠다.
다른 잡스러운 건 필요 없다. 오직 최고의 무공으로 상대할 뿐이다.
장황의 적화혈령장은 사람의 뼈까지 녹여 버릴 정도의 극양의 장법. 제대로 몸에 적
중된다면 여운휘는 제대로 버티기도 힘들 것이다.
'극쾌, 그리고 극환.'
최고의 빠르기에 이은 최대의 변화로 상대할 것이다. 여운휘의 발이 기기묘묘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동시에 둘이 몸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놈!"
장황의 붉은 손바닥이 하늘을 덮었다.
마치 혈우(血雨)가 내리는 듯한 장관이 여운휘의 눈앞에 펼쳐졌다. 물러서야 한다
는 걸 알지만 여운휘 또한 검을 내밀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미 장
황의 등장으로 꽤나 많은 시간을 버려야만 했다. 더 이상 버틴다면 다른 무림맹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여운휘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왕검을 휘둘렀다.
장황은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과도 같은 여운휘의 모습에 승리를 직감했다. 아
무리 빗맞는다고 해도 적화혈령장이 몸에 닿는다면 지옥의 불꽃 속에 떨어진 듯한
고통이 온 몸을 엄습하게 된다.
'이겼다!'
막 여운휘의 몸에 닿으려는 손을 보면서 장황은 자신도 모르게 광소(狂笑)를 터트
릴 뻔했다. 그런데 몸을 비튼 여운휘가 그대로 검을 내지른 것이다. 나름대로 예상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빠르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쾌검에 장황은 놀라 그대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검이 물러서는
장황의 허벅지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고통을 호소도 하기 전 그토록 빠르게 날아든 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동시에 수많
은 변화를 보였다.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장황조차도 처음 볼 정도의 많은 변화를 내
포한 변검이었다.
장황은 실수를 했다. 첫째는 자신의 무공을 너무 믿었던 것이다. 적화혈령장의 빗맞
는다고 해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손조차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이 온 몸을 감싼다. 여운휘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여운휘를 너무 얕봤다. 설령 그 고통을 견뎌내고 검을 휘두른다 해도 그게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장황은 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비어버린 등쪽을 향해 여운휘의 검이 매섭게 내리 꼽
혔다.
"큭!"
등에 여운휘의 검이 박혔다. 그렇지만 장황은 강호십일객의 하나다. 이 정도의 고통
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뒤를 향해 내력을 집중한 손을 휘둘렀다.
퍼엉!
장황의 손은 정확하게 여운휘의 앞가슴에 닿았다. 여운휘의 몸이 공중을 훨훨 날았
고, 장황의 몸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끼요오!"
괴이한 고함소리를 토해내면서 장황은 자신 있게 발로 여운휘의 앞가슴을 재차 걷어
찼다. 공중에 뜬 상태로 여운휘가 피를 뿜어냈다. 그리고 장황은 그 피를 뒤집어썼
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장황은 두 손을 휘두르면서 가볍게 기수식을 취했다. 이미 싸움
은 끝난 것이다. 그의 적화혈령장을 정확하게 맞아 버렸다. 천하의 그 누가 온다 한
들 버텨 낼 수 없을 거라 그는 자신했다.
등뒤의 상처가 꽤 큰지 장황은 옷 뒤가 축축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상처를 돌보려던 장황은 곧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다.
'일어나?'
말도 안 된다. 여운휘가 적화혈령장을 제대로 적중 당하고도 일어나 버린 것이다.
지옥의 불꽃이라고 비교 될 정도의 고통을 주는 장법이다. 제대로 적중만 당한다면
검을 들 힘은 물론이거니와 근육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준다.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한 탓인지 여운휘의 앞 옷도 피로 물들어 버렸다. 그리고 얼굴
자체가 아예 피로 젖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후들거리고는
있지만 분명 자신의 힘만으로 일어나 버린 것이다.
근성 하나는 대단하다. 분명 고통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여운휘도 같은 사람인 이
상 고통의 양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인 건 당연하다.
여운휘의 이빨이 입술을 파고들고 있다.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갑자기 검으로 어깨
를 푹 찔렀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점점 정신을 놓자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
다. 그 모습에 장황은 놀란 듯 말했다.
"허허! 놈! 근성 하나는 쓸만하구나! 그런 놈이 사도의 길이나 걷다니!"
"…… 웃기는 군. 정도니, 사도니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 그러한 것을 검을 휘두른 적이 있었던가? 여운휘에게 정도, 사도 같은 것은 중
요하지 않다.
장황으로서는 이해 할 수도 없겠지만 여운휘에게 그러한 것은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
만큼이나 쓸모 없는 것이었다.
"네 놈을 죽여버린다."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놈이 멀쩡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장황의 말대로 여운휘의 몸은 이미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늘어진 상태다. 그때였
다.
콰콰쾅!
미친 듯한 폭음과 함께 사방에 있던 돌멩이들조차 모두 날아가 버렸다. 엄청난 위력
의 무공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섯 구의 시체가 사방으로 날아갔
다. 상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즉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운휘 하나라면 모를까 노부까지 낀다면 달라질 것이다."
암황의 얼굴에서 무서울 정도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장황으로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암황이 투덜거리는 듯 말했다.
"내가 겨우 저까짓 놈들에게 최근 익히고 있던 절기를 처음 선 보일 줄은 몰랐군."
장황은 사방을 훑어보면서 놀란 눈을 감출 수 없었다. 수강을 펼쳐내서 싸운다 해
도 이만한 파괴력은 낼 수 없다. 도대체 어떠한 무공이기에 반경 삼 장 가량이 날아
가 버린단 말인가.
"빨리 끝내지. 곧 이 폭음을 들은 놈들이 몰아 닥칠 테니까."
"끙!"
장황은 주변을 급히 둘러보다가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등에 입은 상처도 있고 여운
휘와 암황 둘 모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차라리 도망
친 후 이 근방으로 다른 무인들과 오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암황은 장황이 몸을 감추는데도 뒤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태연히 서 있던 암황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우웩!"
검정 피가 암황의 입에서 한 사발 터져 나왔다. 방금 전 펼쳤던 무공은 아직 완성되
지 못했다. 그래서 암황 또한 사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상황이 긴박해지자 목숨을 걸
고 사용했던 것이다.
여섯 명의 무인을 일격에 모두 쓰러트렸지만 암황이 입은 내상 또한 엄청났다. 하지
만 장황에게 의연하게 보이기 위해 애썼고 그가 도망치기를 바랬다.
도망칠 확률이 반, 아닐 확률이 반. 다행히 도박이 성공했다.
암황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여운휘를 바라봤다.
근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곧 발각 될 듯 하다.
암황은 여운휘의 상태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가 잡혀간다면 그것도 끝이다. 암황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
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설린을 뺄 수 있는 마지막 도박이 생각나 버린 것이다.
성공할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이 상태로는 셋 다 죽을 수밖에 없다. 암황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고민을 한 그지만 마침내 방도가 없음을 느낀 암황이 여운휘에게 전
음을 보냈다.
[설린이를 도망치게 할 방도 하나가 있네.]
미친 듯 숨을 몰아쉬던 여운휘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미친 듯이 타올랐
다. 그 모습을 보자 암황은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나, 시간이 없다. 암황
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계속해서 전음을 보냈다.
[물론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네. 하지만 삼분지 이 이상의 수를 떨어트릴
수 있는 방도지.]
[그게 무엇이오!]
[가짜 유설린을 만들어서 도망치는 것이지. 내게는 설린이의 얼굴을 그대로 만든 인
피면구가 있네. 알다시피 난 수많은 인피면구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만약을 위해
설린이 것도 만들어놨네. 하지만 문제가 있네. 가짜 유설린을 만든다고 해도 진짜
가 도망치기 위해 가짜가 움직여야 한다는 걸세. 그러기 위해서는……]
여운휘는 그제야 왜 일순 암황이 망설였는지 알아차렸다. 여운휘는 암황의 뒷말을
어렴풋이 눈치챘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자네가 희생해야 한다네.]
여운휘는 눈을 감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