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死地)
호남에 피 향기가 짙은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긴 흑발에 차가워 보이지만 옥을 깎은 듯 흠이 없어 보이는 외모의 사내다. 그런데
그 사내에게서는 쉬이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옷은 넝마다. 거지에
게나 어울릴 듯한 옷을 사내는 입고 호남의 큰길을 걷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사내를 거지 나부랭이로 치부하지 못했다. 몸에서는 은연중에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근방으로 다가서기만 해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
이 다가온다.
여운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걷고 있었다.
방향을 바꾼 지 무려 십일이 지나서야 호남에 있는 악양에 도달했다.
한 숨도 자지 않았고, 물을 마시는 것을 제하고는 단 한 끼의 식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리조차 멈춘 적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니 아무리 여운휘라 한들 걷고 있
는 것이 용하다. 그토록 지쳤거늘 여운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 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악양유가는 이제 코앞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깝다. 당장에 눈꺼풀이 붙어 버릴 정
도로 피로가 온 몸을 엄습한다. 지금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것이
다. 쉬지도, 먹지도 않고 십일 이상을 달린다는 것을 보통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무
공을 익힌 무인들조차도 상상 못할 일이다.
하지만 했다. 유설린을 지키기 위해 여운휘는 그 힘든 여로를 흔들리지 않고 움직였
다. 마음 같아서는 서신을 보내 먼저 피하라고 말을 해 두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
다. 아무리 유가의 세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그러
한 상황에 유설린을 다른 누구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림맹 쪽에서는 아직 자신이 방향을 바꾸었다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라고
여운휘는 판단했던 것이다.
악양유가에 가까워 오면서 여운휘의 발은 더욱 급해져만 갔다. 악양에 들어선 지 얼
마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여운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여운휘를 보고 검을 겨누었지
만 곧 얼굴을 알아보고는 급히 검을 거두었다.
"비켜라."
여운휘는 그대로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다른 사람
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유설린이 머물고 있는 거처를 향해 발을 옮겼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단순히 움직인 것만이 아니다. 오는 도중
제왕검을 노리는 수많은 무인들을 벴다. 가뜩이나 쉬지 못한 탓에 제 상태가 아닌
몸이 더욱 망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오게 된 악양유가. 이제 목적지가 가까워 오자 점점 몸에서 힘이 빠지
기 시작했다.
단숨에 유설린의 거처에 간 그는 문을 열어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막 밖으로 나
와 있던 유설린과 우문학은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무나
낯익은 사내의 모습에 절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휘!"
여운휘는 주변을 살폈다. 아무런 흔적도 없다. 아마 아직은 유설린에게까지 손을 뻗
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곧 움직일 게 분명하다.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죽이
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여운휘는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설린에게 다가가 단숨에 손목을 낚아챘
다.
"가자."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이곳은 위험해. 무림맹의 놈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유설린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급작스럽게 나
타난 여운휘였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초조하고 피로해 보이는 모
습으로 와서 무림맹에 정체가 알려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의 정체가 밝혀졌다니?"
"무림맹에서 우리가 마교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말이다. 어떻게 된 일
인지 모르지만…… 모든 게 끝이다."
그제야 유설린은 여운휘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덩달아
서 있던 우문학 또한 그 말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가자."
"하지만……"
"어서!"
여운휘가 목청을 높였다. 유설린은 찔끔해 버리고야 말았다. 항상 차가웠지만 그래
도 그녀에게만은 은근히 다정했던 여운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운휘는 자신이 내지른 소리에 놀란 유설린을 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다……"
고개를 잘래잘래 흔드는 그녀였지만 은근히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우문학이 입을 열었다.
"진정하게. 그리고 지금 자네가 한 말 사실인가?"
"내 귀로 들었다. 우리 둘이 마교의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우문학은 최근 들어 주워 들었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대부분이 마교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탓에 무림맹에 대해서는 다소 감시의 끈을 놓았었다. 그게 화근이었던 모양
이다.
"큰일이로군. 자네와 소가주님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은 우리 유가에 대해서도 알아
냈다는 것일 테고."
"나에게 유가는 신경 밖이다. 난 유설린 하나만 지키면 그만. 난 유설린을 데리고
도망칠 테니 유가는 우문학 당신이 알아서 해."
말을 마친 여운휘는 꽉 잡고 있는 유설린의 손을 잡고 그대로 발을 옮기려 했다. 그
때 우문학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 건가?"
여운휘는 일순 말이 막혔지만 곧 대답했다.
"천하는 넓다. 우리 둘이 갈 곳이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 넓은 곳 중에 무림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얼마나 있느냐에 생각해 본
적 있나? 거지가 없는 곳은 없네. 그리고 그 거지들은 곧 개방의 눈과 귀일 확률이
크지. 사람이 완전히 없는 곳에 산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절대 모습을 감출 수 없
네."
여운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우문학은 고개를 으쓱 하고는 말했다.
"그 예로 자네가 무턱대고 도망쳐서 몸을 감춘다면 난 자네를 찾는 데……"
우문학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여운휘의 눈이 우문학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
했다.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다.
"세 달. 세 달이면 난 자네를 찾아낼 수 있어. 만약 개방이라면? 아마도 한 달 안
에 자네와 소가주님이 있는 곳이 걸리겠지. 그때는? 또 도망칠 생각인가? 완벽한 계
획 없이 움직인다면 오히려 계속해서 쫓겨야 할 게야."
"어쩌라는 거냐."
"조금 쉬게. 자네 너무 피곤해 보여. 적어도 도망을 치려면 사람의 눈에 띠지 않는
밤이 낫지 않겠는가? 그 정도는 자네도 생각할 줄 알텐데?"
여운휘는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의 말 대로다. 이런 대낮에 움직인다면 이미 방
향은 적에게 알려주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 방향만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쉽
다. 도망칠 곳은 뻔하니까.
"자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 쉬도록 하지."
말을 마친 여운휘는 유설린, 우문학과 함께 우선 거처로 들어왔다. 아직 무림맹의
무인들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급히 지금 움직여 꼬리를 잡히는 것 보다 반나절
의 시간이 소비되기는 하겠지만 확실한 밤에 움직이는 게 낫다.
여운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후들거리던 몸이 이제야 긴장이 쭉 풀려 버렸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형산(荊山)."
"형산을 넘어 광동으로 빠질 모양이군. 좋은 판단이야. 그곳은 배를 탈 수도 있으니
까. 하지만 해남도로 갈 생각은 말게. 그곳으로 도망치면 죽으려고 가는 거나 다름
없는 짓이니 말일세."
해남도는 남쪽에 있는 섬이다. 그곳에는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으로 유명한 해
남파(海南派)가 있다. 큰 섬이긴 하지만 섬이다 보니 사람들끼리 안면이 익은 곳이
다. 그곳으로 외지인이 들어선다면 소문이 날 것은 분명하다.
해남파는 구파일방의 하나. 섬에서만 있는 자라고 해서 얕본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된
다. 그들의 무공은 다른 구파일방에 견주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해남도
의 지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여운휘가 혹여 그곳으로 도망친다면 필사(必死)다.
"유가도 몸을 감추지. 소가주님 아니, 소교주님.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마교를 수복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소가주라는 호칭이 소교주로 변했다. 유설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지
금 상황이 어떠한지 잘 아는 탓이다. 무림맹에서는 그들을 죽이려 들거나 인질로 잡
으려 할 게 분명하다.
"훗날을 도모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교주님이 무사히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리
고 인원은 최대한으로 적은 게 좋으니 여운휘와 소교주님, 그리고 암황 이렇게 셋이
서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을 듯 싶습니다. 악양유가의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어요."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닌데 그리 말하시면 섭합니다. 소교주님."
말을 마친 우문학은 씨익 웃었다. 위험한 일을 우문학은 도맡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
다.
악양유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증거들을 없애야 하고 유가와의 관계점도 끊
어야 한다. 그리고 유가에 연락도 취해 진정한 힘들은 몸을 감추게 해야 한다.
"전 그럼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아마 얼마간은 쉴 새도 없이 바쁠 테니까요. 암황
에게 대충 사정을 말해 이곳으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풍운조 대협에게도 대충 이야
기는 드려놔야 할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우리를 위해 일을 해 주신 분인데 피해를
입게 하지는 말아야지요."
"고마워요. 만약 우문학이 없었다면 이토록 빨리 크지 못했을 거예요."
말을 하는 유설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닙니다. 제가 소교주님을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살아서 봅시다. 소교주님. 그
동안 강녕하십시오."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끝낸 우문학이 몸을 돌렸다.
소교주 앞에서는 자신 있게 웃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문학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은 그리 쉽게 했지만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가와의 관계를 흐
지부지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세력도 숨겨야 한다.
살아서 만나자는 말은 했지만 불가능 할 거라고 우문학은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아마도 살아서 다시금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소교주의 거처를 완전하게 벗어난 우문학은 씨익 웃었다. 아마도 죽을 것이다. 무림
맹에서 그들을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소교주라면 몰라도 우문학까지 굳이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웃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그는 뒤를 힐끔 바라봤다. 닫혀 버린 문. 저 안에 유설린이 있다.
'행복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마교를 되찾으십시오. 죽어서 지옥에 간다 한들 소교
주님이 마교를 수복하는 그 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요.'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걷는 우문학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 할 이야기도 많건만 아무런 말
도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우문학은…… 죽을 거다."
"알아. 하지만 보낼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운이 좋다면 살 수도 있어."
"나도 그러길 바란다. 적어도 우문학은 믿을 수 있는 사내니까."
"언제쯤 출발 할 거야?"
여운휘는 힐끔 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 시진은 남아 있다. 조금만 있으
면 우문학에게 말을 들은 암황이 찾아올 것이다. 암황이 온 후에 간단히 짐을 꾸리
고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 전까지 여운휘는 최대한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장사로 간 후 바로 형산으로 갈 거다. 형산에 숨어든다면 광동성으로 도망치는 건
수월할 거고."
유설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이 없다. 여태까지 해왔던 일이 순식간에 물
거품으로 돌아갔다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최대한 무표정하게 있으려고 하지만 눈물이 자꾸 눈앞을 가린다. 모든 것이 무너지
는 것을 제하고도 그녀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 탓이다.
"몇 명이나 죽을까?"
"……"
"아마도 많이 죽을 거야? 그렇지? 어제까지 웃는 얼굴로 봤던 사람들인데 보지 못하
게 될 거고. 괜히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을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내가 자진해
서 무림맹에 간다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여운휘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설린
의 양어깨를 잡았다.
"약한 소리하지 마. 모두가 널 위해 죽으려고 하는 거다. 누가 죽으라고 한 것도 아
니고 모두 자진해서!"
"알아 하지만……"
"잘 들어라.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네가 죽는다면 나도 함께 한다. 널 지키
는 것이 삶의 목적인 나니까. 그러니 네 스스로를 아껴라."
유설린은 입술을 꼭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지
만 억지로 삼켰다. 여운휘의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대충 말이 끝나자 급한 발자국 소리가 건물을 향해 다가왔다. 예상했던 대로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암황이다.
그는 여운휘를 힐끔 본 후 고개를 돌려 유설린에게 물었다.
"우문학에게 들은 게 사실이냐?"
"예."
"허어!"
암황은 탄식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모
를 리가 없는 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
"형산을 넘어서 광동으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육로나 해로를 택해 위쪽으로 움직여
야겠죠."
"가장 현명한 방법이군. 하지만 그만큼 읽히기도 쉽지."
"겉으로 나는 무림맹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 있소. 무림맹 쪽에서도 아직 내 움직임
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니 위험하지는 않을 거요."
여운휘의 말에 암황은 수긍했다. 무림맹 쪽에서 사전에 준비를 해 두었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인원은 들었는지 모르겠소만 우리 셋 뿐이오. 나머지는 우문학이 알아서 할 것이
고. 지금부터 한 시진 반 후 우리를 움직일 거요."
"이거야 원 늘그막에 쉴만한 곳 좀 찾았나 싶었더니 금새 떠나게 되는 구만."
농담처럼 말을 하는 암황이지만 이 사안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잠시 지쳐있
는 여운휘와 힘이 빠진 듯 쳐져 있는 유설린을 바라보던 암황이 말했다.
"한 시진 후에 돌아오지. 필요한 것을 챙기고 말이야."
암황이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은 정적이 돌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진 반 후 악양유가에서는 몸을 감춘 세 개의 인영(人影)이 달
빛과 어울러 빠져나갔다.
악록산(岳麓山).
경치가 꽤나 좋은 산으로 유형이 기이하고 독특하며 울창한 숲과 많은 봉우리를 갖
고 있다. 악록산에는 찾아볼 명승고적이 많기로 유명하다. 더군다나 장사(長沙)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심지어는 천연병풍이 되고 있는 산이라고까지 칭해진다.
그리고 그 산을 세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 셋은 제각기 달랐다. 남자, 여
자, 그리고 노인.
악양유가에서 도망쳐 나온 세 명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장사로 해서 도망치려고 하다가 급히 방향을 바꿨다. 아무래도 장사가 큰 도
시인 탓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탓이다. 장사의 입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기웃거린다는 소문이었다.
계획은 급선회되었고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악록산을 가로지르자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유설린 일행은 밤이나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때만 움직였다. 시간이 낭비되기
는 하지만 확실한 도주를 하기 위해서다. 그 탓에 다소 늦게 전진하고 있지만 아직
까지는 아무런 위험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사 부근에 있는 수상한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자 은근히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그 수상한 자들이 무림맹의 자들이라면 벌써 꼬리를 잡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잠시 쉬었다 감세."
암황의 말에 여운휘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쓸만한 장소다. 근방에서 이만큼 평평한 곳도 없었고, 사람들이 나타나도 몸
을 숨길만한 장소도 많다. 마침 쉬어야 할 때 이 정도로 좋은 장소가 나타난 것은
천운(天運)이 따랐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여운휘와 암황은 괜찮았지만 유설린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쉬자는 말에 유설린은 나무 기둥에 몸을 대고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었
다.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아직 이류 수준 밖에 되지 못하는 그녀에게 너무나 강행
군이었던 모양이다.
추운 날씨 탓에 그녀의 얼굴이 붉었지만 여운휘는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불을 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이 어떠한 상황인가. 지금 같을 때 멀
리서도 볼 수 있는 불을 피운다는 것은 죽여달라는 말과 진배없다.
대신 그는 격려의 말을 유설린에게 던졌다.
"조금만 버텨.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응……"
대답하기도 힘든 지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파묻었다. 악록산은 사람의 왕
래가 잦은 산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피하기 위해 가장 험난한 지형으로 움직이고 있
는 것이다. 사람을 만날 확률은 적어지지만 쌓이는 피로는 이루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다.
"눈 좀 붙여. 그 동안 먹을 것은 구해오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여운휘를 암황이 제지했다.
"설린이 뿐만이 아니라 너도 많이 피곤해 보여. 너 또한 제대로 쉬지 못한 피로감
이 몸에 남아있는 듯 하니 쉬고 있거라. 내가 갔다오지."
"고맙소."
가볍게 고개를 꾸벅한 여운휘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유설린은 아무런 대답도 없
이 고개만 파묻은 상태로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암황은 피식 웃더
니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감췄다.
여운휘는 암황이 사라지자 나무에 몸을 기댄 채로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그 또한
너무나도 심한 피로감이 온 몸을 엄습했던 탓이다.
흑색 옷을 감싼 자 하나가 땅을 살폈다.
천천히 땅을 살피던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자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주변에 퍼
져 있던 몇 명의 무인들이 그곳을 향해 달려왔다.
"작은 발자국 하나. 유가의 소가주다."
땅에는 약하게 여인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오르
지 않는 험한 길이다.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서는 결코 오를 수 없는 곳.
"예상 한 지점 중 한 곳에 있겠군."
"서찰을 날릴까요?"
"그래."
그들은 추적술의 달인들로 추적술만큼은 무림에서 최고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
물들이다. 발자국을 발견한 사내가 보폭을 바라보는 사이 뒤에 있던 누군가가 하늘
을 향해 새 한 마리를 날렸다.
서찰에는 놀랍게도 지금 세 명이 쉬고 있는 장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악록산을 잘 알고, 추적술에 대해 능한 그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 밤 안에 끝나겠군요."
"그래. 이 악록산을 벗어난다면 형산까지 또 움직여야 한다. 악록산에서 끝내야지."
말을 마친 그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악양유가의 자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추적을 당하고 있다.
원한은 없지만 명령인 이상 그들로서는 행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죽을 것이오.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가 나선 이상 결코 도망
칠 수 없으니까.'
새가 목적지로 날아갈수록 사내의 입에 걸린 차가운 냉소가 짙어졌다.
아직까지 꿈인 것만 같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건과 일련의 도주. 유설린은 정신
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로가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조여댔지만 겉으로 내색
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철부지 아이가 아니다.
나이도 스물이 다 되었고, 수많은 일도 겪었다. 힘들다고 때를 써도 상황이 좋아지
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오히려 다부지게 걸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무리인 듯 싶다. 잠시 청했던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여운휘
가 건네는 음식을 멍하니 들고만 있었다. 암황이 어떻게 겨울잠을 자고 있는 토끼
를 잡아 온 모양이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먹기 좋게 썰려 있는 것이 암황과 여운휘과 그녀가 먹기 편하라고 다듬어 두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피곤해서인지 입에 들어가지가 않는다. 간신히 버티
고 있는 눈꺼풀은 천근이라도 된냥 자꾸 주저앉으려고만 한다.
"괜찮느냐?"
"괜찮아요."
암황의 말에 유설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토끼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암황은 고기
를 먹고 있는 유설린을 보면서 말했다.
"어서 먹거라. 냄새가 주변에 풍긴단다."
다소 위험하기는 하지만 누남천이 토끼를 잡은 장소 부근에서 고기를 구웠던 것이
다. 이곳과는 꽤나 거리차도 있고 악록산으로 올라갔을 거라고 그들이 예측 못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졸린 모양이구나."
유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황이 여운휘를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자꾸나. 아직 무림맹에서 이 근처로 손을 쓰려면 이
삼일은 더 걸릴 터. 아마 그쯤이면 우리는 형산을 넘고 있겠지."
형산만 넘는다면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다.
배를 탄다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고 육로로도 몸을 숨길만한 곳도 많다. 고비는
지금부터 형산까지 가는 길이다. 그 안에만 잡히지 않는다면 도주는 성공이다. 그리
고 마교를 되찾는 등의 것들은 그 후에 고민하면 될 일이다.
자도 된다는 말에 유설린은 급히 토끼 고기를 다 먹고는 자리에 누웠다.
그녀는 누워서 잠에 빠졌지만 암황과 여운휘는 눈을 뜬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유설
린의 가는 숨소리를 듣던 암황이 말했다.
"허망하겠군."
"……"
"몇 년 동안 쌓은 것인데 너무나 쉽게 무너졌어. 그나저나 정체가 드러날 정도의 일
을 벌인 적이 있나?"
여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무림맹에서 그들의 정체를 알만한 이유
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여운휘는 문득 어떠한 사실 하나를 상기해냈다.
"일마."
"일마라…… 그자가 무림맹에 손이라도 썼다는 건가?"
"우리의 정체를 무림맹 자체에서 알아낼 확률은 극히 적소. 우리의 얼굴 자체를 모
르기 때문이오. 혹 안다 하면 그건 마교에서 뻗어져 나왔을 확률이 크지. 그리고 마
교에서 우리의 정체를 아는 자 중 하나가 일마. 물론 마교에서 그 사실을 아는 게
일마를 제하고 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정체를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일마 그자 뿐."
"악양유가가 무림맹에 힘을 실어주니 마교 쪽에서는 눈에 가시였겠지…… 정체를 은
연 중에 알리기에는 충분하군."
암황의 말이 끝나자 여운휘는 일전 일마와 만났던 일을 기억해 냈다. 만약 이렇게
자신들을 죽일 거였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상한 게 하나 있소."
"뭐가 이상하다는 것인가?"
"죽이려고 했다면 차라리 나와 만났던 그때가 더 적시(適時)였는데 왜 지금까지 이
렇게 끈 건지 모르겠다는 거요."
"흐음."
일리가 있는 말에 암황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딱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몇
가지 것들이 생각이 나긴 하지만 그 어느 하나를 딱히 집을 수 없는 탓이다. 확신
할 수 없는 정보는 없느니 못하다.
"딱히 갈 곳은 있느냐?"
"없소. 우선 피하기로 마음먹은 것 뿐. 광동성으로 간다면 어디로든지 움직일 수 있
으니까."
"광동성으로 간다면 우선 도주는 성공하겠지. 하지만 완벽하게 숨는 건 어려울 게
야. 무림맹에서 혈안이 되어 너희를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숨는 게 쉽지 않지. 아
마 일 년이면 그 어디에 몸을 감추던 걸리고야 말 게야."
암황의 말에 여운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우문학도 그리 말했으니까."
"그래. 그 친구는 정보를 담당했으니 더욱 잘 알겠지. 그 자는 얼마라고 말하던가?"
"한 달. 한 달이면 개방에게 꼬리가 잡힐 거라고 했었소."
"한 달이라…… 그저 무턱대고 도망친다면 분명 한 달을 버티기도 어렵겠지. 하지
만 마음만 먹는다면 오 년 가량은 숨을 수 있는 곳이 있지."
누남천의 말에 여운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 듯한
여운휘의 눈빛에 암황은 찬찬히 말했다.
"녹포괴존 그녀가 있는 곳이지."
"칫."
녹포괴존이라는 말에 여운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싫다거나 그래서가 아니
다. 녹포괴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패해서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 하나,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녀보다 강
해진 후이기로 마음먹었던 탓이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가?"
여운휘는 암황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설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추운
지 몸을 웅크린 채로 정신도 못 차리고 잠에 빠져 있다. 너무나 애처로운 모습에 여
운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정녕 그토록 오랜 시간 몸을 감출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소."
여운휘는 자신의 신념을 접었다. 반드시 그러고자 하기로 했던 자신만의 약속을 기
억에서 지웠다. 유설린을 위해서다.
"광동으로 가서 이동을 하면 녹포괴존의 거처로 도망칠 수 있을 게야. 그곳에서 대
세를 보면서 힘을 키우도록 하지. 아마 녹포괴존도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도와줄 게
야. 그녀 또한 일마라면 이를 가는 사람 중 하나니까."
든든한 아군이 생길 거라는 말에도 여운휘는 아무런 흥도 일지 않았다.
여운휘를 지긋이 바라보는 암황은 그의 마음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패한 사실을
마음에 담고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한 이유 하나로 이 같
이 사람을 피할 자는 분명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인의 혼과도 같은 무엇인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암황은 여운휘의 어깨를 두드리려고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여운휘도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고개
를 끄덕였다. 몇 명의 발자국이 들린 것이다.
바짝 긴장했던 여운휘와 암황이었지만 곧 긴장이 풀렸다. 시끌벅적한 소리 탓이다.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하는 걸음걸이도 아니고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도 너무나 크
다.
더군다나 그 대화의 내용들은 결코 무인의 거라고 보기 힘들었다. 날씨와 특산물에
대해 이야기였다. 긴장은 풀었지만 여운휘와 암황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당장이라
도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옆쪽으로 피해가기를 바랬건만 장사치로 보이는 자들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
왔다.
"이곳에서 냄새가 나는데…… 어?"
무슨 냄새가 난다며 다가오던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여운휘를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여운휘 또한 스리슬쩍 손을 내려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곧 그 중년인
은 뒤에 따르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고는 넉살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기 냄새가 미약하게 풍겨 혹시나 했거늘 사람이 계셨군요. 혹 방해가 된 게 아닌
지……"
여운휘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암황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상인으로 보이는데 무슨 일이요?"
"아, 저희가 길을 잘못 들어서 말입니다. 혹시 내려갈 길을 아신다면 가르쳐 주십
사 해서 말입니다."
중년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암황에게 물었다. 암황은 가볍게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내려가면 좀 덜 험한 길로 내려갈 수 있을 거요. 일행에 여인이 있어서
그러니 물러가 주셨으면 하외다."
"아, 그러십니까? 저 때문에 괜히 방해나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길을 가르쳐주
셨으니 감사를 표하며 이만 물러가지요."
말을 마친 중년인은 뒤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옆으로 걸어 산 아래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조용히 그자들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들의 모습이 완벽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그 중년인 무인이다."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뒤에 있던 자들은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지. 표국의 인물인
모양이야."
죽이려고 들었다면 분명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자신들을 본 사람도 없
어 완벽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멍청한 생각이다. 살인을 하는 것
만큼 큰 흔적도 찾기 힘들다. 차라리 조용히 보내면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지면 그만
인 자들일지도 모르는 탓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보냈거늘 느낌이 뭔가 껄끄럽다.
"느낌이 좋지 않군……"
암황 또한 그런 모양이다. 여운휘는 암황을 바라보면서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그 순간 아래쪽과 위쪽 동시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여운휘와 암황은 이번에는
주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맞댔다.
아까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기척을 알아차렸다.
고수들이다.
"당했군."
"…… 몇 명이나 되는 것 같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만…… 이 정도라면 우리 둘을 죽이는 것에 무리는 없겠지."
강호십일객이나 되는 그가 이러한 말을 할 정도다. 여운휘 또한 그의 생각에 아무
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기척을 숨긴 자들이라는 것은 곧 엄청난 고수들이라
는 거다. 그런 고수가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로 주변을 둘러쌌다.
여운휘는 반쯤 몸을 굽혀 유설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
"으응?"
막 잠에서 깬 그녀는 굳어 있는 여운휘와 암황의 표정을 보고서야 무엇인가를 알아
차렸는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로 서 있는 둘을 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당했어. 지금 우리는 포위 당해 있다."
"포위? 이 넓은 산을 말이야?"
"제길."
여운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가. 자신들이 이렇게 악록
산으로 움직일 것을.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풍기는 살기가 느껴진다.
'정보라는 것을 너무 우습게 봤어. 칫, 우문학만 있었다면 이처럼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여운휘는 정보력이라는 것의 힘을 제대로 알게 됐다. 상대는 정보를 제대로 이용했
다. 아마 자신들의 뒤를 바짝 쫓은 모양이다. 그에 반해 여운휘는 아무런 정보도 구
하지 못했다. 객잔에서 이래저래 주워 들은 이야기가 전부다.
아니, 어쩌면 그 정보들 자체가 무림맹에서 일부로 흘린 헛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운휘는 제왕검을 쳐다봤다. 무림맹의 신물인데 지금은 여운휘의 손에 들려 있다.
검이 필요해서 들고 온 것뿐인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코 쉽
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청강검이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부셔졌을 게다.
여운휘는 유설린을 등뒤에 놓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여운휘가 물러나
는 뒤쪽도 이미 다른 자들이 점하고 있는 상태다. 암황은 낮게 숨을 몰아쉬면서 주
변을 살폈다. 이곳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한 군데를 정해놓고 뚫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여운휘와 암황은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는 서로의 의견을 보려는 듯 얼굴을
쳐다봤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고 움직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끌끌!"
웃음소리와 함께 나무 건너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 한 순간 여운휘는 짜한 전율을 느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고수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노인의 등뒤에서 나타난 자는 낯이 익은 자다. 모습
을 드러낸 노인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렸다.
쫙 찢어진 눈에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큰 손.
검문에서 만났던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뇌수혈황(雷手血皇)이다.
"죽여버리고 싶었거늘 이렇게 만나는 구나! 흐흐!"
뇌수혈황의 목소리에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의 혐오스러
우면서도 독기 넘치는 모습에 유설린은 뒷걸음질치고야 말았다.
예전에는 나름대로 동등한 위치였기에 당당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운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여운휘의 허리를 안은 채로 뒤쪽을 향해 신형을 날
렸다. 그리고 그 뒤를 암황이 바짝 쫓았다.
맨 앞에 있던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