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득 푸드득!
새의 날갯짓에 세수를 하고 있던 한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마교, 그리고 그곳에서
도 외곽에 위치한 곳이다. 초라한 집 한 채에 별반 빼어나 보이는 것도 없는, 어디
서나 볼 수 있는 노인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가 일마의 오른팔 격인 좌운이다.
"호오."
짧은 탄성을 내지른 그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된다면 창공
을 향해 날아 올라야 할 새지만 오히려 손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좌운은 새 다리에 묶인 종이를 펼쳤다. 단숨에 종이 안의 내용을 읽어 버린 그의 얼
굴에는 예상외의 표정이 지어졌다.
마교가 패했다고 하면 쓴웃음이라도 지어야 정상일 터인데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
다. 마치 패하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처럼.
"예상한 대로인가……"
스리슬쩍 미소지은 좌운은 고개를 들어 마교의 수뇌부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바라봤
다. 이곳에서 이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가 있을 것이다.
좌운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좌운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런 그가 나타난 것은 바로 진린의 거처에서였다.
자신의 검을 닦고 있던 진린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좌운을 보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
았다. 검에서 시선도 때지 않은 채 진린이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싸움이 끝난 듯 하이."
"승패는?"
"물론 우리의 계획대로 무림맹에서 승리했네."
"후후. 야수왕 또한 죽었겠군."
"죽었다고 하더군. 여운휘에게."
죽었다는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진린은 여운휘라는 이름을 듣자 표정을 굳
혔다. 무림맹에서는 예상대로 그를 맨 앞에 세우려고 들고 있다.
"검강을 썼다고 하더군. 그것도 엄청난 위력을 지닌."
"야수왕이 한 수로 싸움을 끝내자고 한 모양이군."
"아마도 그렇겠지."
진린은 싸움 장에 있지 않고서도 대충 상황을 유추해냈다. 검강은 내력의 소모가 극
심하다. 그러한 것을 썼다는 것은 그 뒤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수왕의 성격을 본다면 불 보듯 뻔하다.
"싸움을 살핀 자의 말로는 그 전까지도 일방적으로 야수왕이 밀렸다고 하더군."
"그래? 여운휘라고 해도 야수왕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인물은 인물인
모양이야."
진린은 여운휘와의 대면을 생각하고는 씨익 웃었다.
마교가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린이 웃을 수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야수왕과
그의 수하들은 진린에게 흡수되지 않은 세력이다. 거기다가 야수왕은 마교 내에서
도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
진정한 진린의 세력이 아닌 마교의 세력은 약해져도 상관없다. 아니, 마교를 잡아
삼켜야 하는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약할수록 좋다. 무림맹에게 밀리지만 않을 정도
면 마교의 힘은 충분하다.
그 탓에 진린이나 좌운은 마교가 패했음에도 오히려 즐거운 듯 웃을 수 있는 것이
다.
"아, 마교 소교주 유설린과 여운휘에 대한 소문은 언제쯤 풀 것인가. 내가 보기에
지금쯤은 풀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네."
"흐음……"
진린은 생각에 잠겼다. 좌운의 말대로 어차피 준비해 왔던 일이다. 무림맹과 마교
의 힘이 어느 정도 비등한 것을 원하지 무림맹 쪽이 월등히 강한 것은 두고 볼 생각
이 없다.
지금 이대로 둔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지만 여운휘에 대한 진린의 욕심은 그에게 결
정을 내리게끔 했다.
"좋아. 극적인 전투 하나를 만들지. 그리고 그 싸움에서 분명 그 놈은 활약을 할 것
이야. 마치 여운휘 때문에 승리를 하게 된 것처럼 각본을 짜야겠지. 무림맹에서 그
의 입지는 더욱 굳어질 것이고 바로 그때!"
진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나 하나의 계획이 끝나가고 시작되면서 진린은
희열을 느꼈다. 조만간 다가올 수많은 것들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오랜 숙원을 드디어 풀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무림맹 쪽에 이 정보를 흘러 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 쪽에서는 재빨리 내부 회의
를 시작하겠지. 그리고 결정을 내릴 것이야. 여운휘를 죽이자고. 그것도 조용하게."
진린은 무림맹의 인물들을 하나 하나씩 생각해냈다. 아무도 그러한 것에 대해 반론
하지 못할 것이다. 여운휘의 정체가 밝혀짐에 따라서 무림맹에 알려질 파장은 적지
않을 테니.
"누남천이 있긴 하지만 그 혼자 어떻게 말을 한다 해도 여운휘의 죽음은 변하지 않
을 것이고. 그때 우리 쪽에서는 사무린과 그를 만나게 한다. 물론 무림맹의 포위 권
에서 그가 살아날 수 있게 도와야 할 테고."
진린의 계획은 엇나감이 없이 치밀하다. 만약 이만한 안배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
고 도망치지 못하거나 손을 잡지 않겠다고 하면 그걸로 끝인 인연인 것이다.
"그럼 그 극적인 전투에 대한 각본을 짜 볼까?"
진린의 말에 좌운은 묵묵히 답했다.
그의 각본 위에서 수천에 달하는 생명들이 사라질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여운휘라
는 자 하나를 얻기 위해 진린은 그러한 일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탓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양쪽 모두 약해져야 하는 처지.
"좋아, 좋아. 이번에는 어떤 말들을 불구덩이 속에 던져야 하나……"
마교의 세력들이 정리 되어 있는 커다란 종이를 보며 진린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
었다.
꽤나 많은 무인들이 모였다. 또한 그 자리에 있는 무인 중 허접해 보이는 무인은 결
코 보이지 않았다. 젊은 무인이건, 이미 희게 새어 버린 긴 수염을 끌고 다니는 노인
에 이르기까지 한 부분에 대해 일가를 이룬 자들이다.
"승리를 축하하네!"
당문의 문주인 당리혁이다. 그의 암기술은 가히 일절이라 불리고 무림에서 당리혁과
손속을 겨누고자 하는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그만큼 빈틈이 없고, 손속이
잔인하다.
실제로 그와 싸우고 나서 몸 성히 돌아온 자는 별로 많지 않다.
술잔을 높이 든 당리혁을 보며 다른 자들 또한 잔을 들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자 중
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그다.
지금 이곳은 무림맹의 무인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승리를 자축하
기 위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 한 것이다.
앞에는 수많은 요리들과 술이 놓여져 있었다.
"자자 모두들 마시게!"
당리혁의 호탕한 외침에 이곳에 모인 삼십 명 정도의 무인들은 시끌벅적하게 이야기
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자들이었지만 종종 사이사이에 약간 젊어 보이는 무인들이 모
습을 보였다. 그리고 한 구석을 자리하고 있는 자 중에 여운휘도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다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그의 앞과 옆에는 척마신풍대를 이끄는 백산과 운빈 하
을지가 함께 했다.
누남천은 멀리 당리혁의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입장이었다.
"한잔 받지."
백산은 술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둘 모두 과묵한 성격인 탓에 별 말 없이 한 잔 주
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다시 대화가 단절되자 보다 못한 하을지가 나섰다.
"두 분 모두 말을 아끼시는 건 잘 알겠는데 지금 정도는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생사
대적을 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뭐예요?"
하을지의 따끔한 한 마디에도 두 사람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백산이 그저 가볍게 웃
은 것 그게 다였다.
여운휘로서는 이 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같은 싸움을 하고 나서 승리를 했
다고 해서 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여운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할 때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시간을 버릴 만큼 여운휘는 한
가하지 않다.
더군다나 마음을 터 놓을 상대도 없는 술자리는 그에게 별로 달갑지 않다.
여운휘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런 여운휘의 빈 잔을 백산은 채워주기만 할 뿐 별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포기라도 한 듯 하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마주만 보고 있던 중 백산이 입을 열었다.
"말을 못한 듯 하오. 그 날 수고했소."
"수고라고 할 것까지 한 기억은 없군."
"아니오. 그때 당신은 우리 무림맹의 사기를 극도로 높여 주었소. 실제로 나 또한 검
강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여운휘와 야수왕의 대결.
백산은 관전자였다. 그렇지만 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 된 마냥 흥분감에
젖어들었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검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여운휘가 보여준 무
위 탓이다.
야수왕이라는 인물은 가히 왕이라는 글자가 부끄럽지 않은 자였다. 그의 장법은 무림
맹의 무인들을 한 줌의 핏물로 만들었고, 검들조차도 박살냈다.
그런 그를 향해 여운휘가 펼쳤던 검강은 침체되었던 무림맹 무인들의 사기를 높였다.
"전율이 일더군."
"……"
"어떻게 하면 그리 강해 질 수 있는 거요?"
백산은 하지 않으려던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것을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주변에 있던 운빈과 하을지도 귀를 쫑긋 새웠다. 그들 또한 여운휘
의 믿기지 않을 강함이 부러웠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강해졌냐 듣는다면 너도 강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
"간단해. 난 다른 사람보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을 뿐이지. 그리고 잠을 잘 때조차
도 검을 생각했다. 그게 내가 강해진 이유다."
말은 쉽다. 무인 중에서 잘 때를 제하고 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 자들은 허다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만한 경지에 오른 자는 많지 않다.
"생과 사라……"
중얼거리는 백산을 무시한 채로 여운휘는 술을 들이켰다.
그가 보기에 백산은 뛰어난 자다. 비록 상대는 되지 않는 자라고는 하지만 분명 훗
날 무림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 오히려 실전 경험은 백산보다 운빈
이 앞선다. 백산이 실전 경험만 보다 많이 쌓는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
아주는 꼴이리라.
그렇게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여운휘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하고 앉았다.
그제야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젊은 무인이다. 붉어진 얼굴을 보아하니 꽤나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눈동자 또한 흔들리는 것이 술 때문에 정신도 풀어진 듯 했다.
"네가 진군휘냐?"
대뜸 내뱉는 반말.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무인을 향해 여운휘는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당적이라 한다."
이곳에서 당씨라면 뻔하다. 암기의 명가인 사천당문.
그는 술을 과하게 마신 탓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말했다.
"네가 그토록 강하다면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군. 딸꾹."
급기야는 딸꾹질까지 하는 그를 보고 여운휘가 중얼거렸다.
"꼴사납군. 술에 취해서 해롱거리는 꼴이라."
"뭐, 뭐야!"
원래 단순한 건지, 아니면 술이 그리 만들었지 그 한 마디에 당적은 바로 흥분했다.
여운휘는 당적을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안전할 때라고 해도 무인이 저게 뭔가. 무인은 술에 취해서는 안 된다. 어느
때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무인이다. 그런데 저토록 술에 취해서는 제대
로 된 대응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당적이라는 자는 당문의 문주인 당리혁을 보고 이 같이 안하무인의 행동을
취하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산이 소리쳤다.
"당 소협! 지금 그 모습이 무엇이오! 진 소협의 실력이 보고 싶다면 술이 깬 후에 정
식으로 하시오. 가히 모습이 보기 좋지 않소!"
"네 놈이 감히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냐?"
당적은 당리혁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당리혁의 조카로 꽤나 그의 총애를 받는 편
이다.
여운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놀림을 당한 느낌이다.
당적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비수들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만하게."
이어지는 누남천의 말, 그리고 사방에서 나이 많은 무인들의 질책 어린 시선에 당적
은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렸다.
여운휘는 그러한 당적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몇 명이 여운휘를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간 여운휘
는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쌀쌀한 밤이다.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내키지 않았던 술자리에서 별 무인 같지 않은 자를 만났다.
야수왕은 달랐다. 비록 적이었지만 그자였다면 술자리가 이토록 재미없지는 않았으리
라.
'무인 같지도 않은 놈들.'
당적이라는 자 여운휘에게는 삼초지적도 되지 않는다.
명문정파라는 허위허식에 젖어있는 그런 자들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은 내던지는 마교
의 야수왕이 여운휘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적이라는 자를 당장에 베어버렸을 게다.
참은 이유는 단 하나다. 당적을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유설린을 위해서다. 그녀 하
나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