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왕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측면 공격을 방비해 놓은 탓이다. 공격할 인원들을 무리를 두면서까지 측
면에 배치 시켜 놓은 것은 이와 같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오히려 측면 기습을 하지 않았다면 아쉬웠을 게다. 그만큼 야수왕은 자신이 있었다.
그의 부대의 대원들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을 맡고 있는 것은 야수왕의 유일한
제자다.
야수왕은 아무런 혈육(血肉)이 없다.
태상자체가 고아였고 혼인했던 아내도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아무런 혈육도 없
는 그이기에 이십 년 전 쯤 얻은 유일한 제자에 대한 정은 친부(親父)의 사랑이라 봐
도 될 정도로 지극하다.
더군다나 그의 제자는 야수왕의 그런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무골이고 지략 또한 빼어나다.
"크윽!"
냉죽생의 검을 피하며 야수왕은 여유롭게 일장을 뻗었다. 검을 회수하던 냉죽생은 급
히 몸을 틀었지만 부상을 당한 탓에 움직임이 처음만 못했다.
일련의 무리들이 기습을 한 이후로 둘은 거의 백여 합을 다퉜다.
냉죽생의 검은 매서웠다. 그의 검에서 만들어지는 매화는 아름다웠고 또한 그 위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부상당한 몸은 그를 점점 지치게 했다.
늘어지는 몸만큼 냉죽생의 검은 날카로움을 잃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야수왕은 냉죽생보다 한 수 위의 인물이다. 그는 구파일방으로 치자
면 거의 장문인급의 무공을 지닌 자다.
냉죽생은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 몸이 피에 젖었지만 야수왕은 자잘한
상처들이 전부였다.
냉죽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강해……'
숨을 쉬기조차 힘들다. 가슴에 생긴 상처 탓이다. 그의 손가락이 냉죽생의 앞가슴을
찢어버렸다. 조금만 대처가 늦었다면…… 심장까지도 움켜쥐었으리라.
주변에 있는 화산파의 무인들은 적을 베면서도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무리의 수장끼리의 일대일 대결. 비겁하게 야수왕에게 살수를 펼칠 수가 없었다.
그건 바로 정파인들의 자존심이니까.
냉죽생 정도 되는 자가 주변의 눈빛을 모를리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눈빛은 냉죽새을 더욱 패배감에 젖게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야수왕에 패했다.
하지만 냉죽생과 무림맹은 별계다.
'나는 패했다 하지만 무림맹까지 패한 건 아니다!'
광한검 누남천이라면 야수왕에게 부족하지 않은 상대다. 그만 온다면 상황은 급격하
게 변할 것이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군.'
이미 몸에 있는 힘이 다빠진 지 오래다. 그래도 검을 들어야 한다. 그게 그의 의무이
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냉죽생은 온 몸에 남아 있는 개옹르 모두 검에 끌어 모았다.
게획대로라면 지금쯤 단숨에 측면을 가르고 각개격파를 하고 있을 게다. 많은 시간
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교 쪽에서 나름대로
의 준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남천이 이곳에 올거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믿음도 없었다
면 지금 검을 들어올릴 수도 없었을 게다.
"오게."
냉죽생의 말투가 변했다. 야수왕에게 반존대를 사용한 것이다. 단순한 마교의 인물
이 아니라 빼어난 무인이라고 인정하게 된 탓이다.
야수왕은 냉죽생을 찬찬히 바라봤다. 말투에서 심경의 변화를 읽었다. 무엇인가를 기
다리는 눈치인데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냉죽생 정도의 무인이 기다리는 거라면 절정고수임이 분명하다.
'아무 일도 없겠지?'
야수왕은 자식과도 같은 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자라고는 하지만 삼십은 다 된
나이. 한 가정을 이루기에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지만 은연중에 걱정이 인다.
야수왕은 걱정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당장에 눈 앞에 있는
자를 쓰러트리고 제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걱정이 사라질 것 같다.
막 냉죽생을 향해 검을 움직이려던 야수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싸움 중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곧 수많은 약
점들을 노출하게 된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야수왕이 고개를 돌린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 탓이다.
"대주!"
단숨에 야수왕의 옆까지 다가온 그는 피투성이였다. 야수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무슨 일이냐! 유곽 너는 왜 이런 모습이고!"
"흐윽! 소인 석대린님을 무사히 모시라는 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대
주!"
유곽은 머리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하지만 야수왕은 그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유곽
을 내려다 봤다. 석대린은 바로 야수왕의 자식과도 같은 제자의 이름이다.
"…… 무슨 말이냐. 그 녀석이 어찌 된 것이냐?"
"돌아가셨습니다. 으흐흑!"
"그 녀석이…… 죽었다고?"
멍청하게 중얼거리던 야수왕의 눈에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혈육의 정을 주었던 녀석이다. 야수왕에게는 친자식이 죽은 것과 다름없다.
"죽인 놈을 봤겠지?"
"물론입니다. 니 못난 두 눈에 똑똑히 박아놓았습니다."
"앞장서라! 내 반드시 이 두 손으로 그 놈을 죽여버리고 말겠다!"
"옙!"
머리를 조아리던 유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야수왕은 목석처럼 서 있는 냉죽생을 바
라봤다. 싸운다면 분명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친혈육을 잃은 것과
다름없는 야수왕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더군다나 측면을 지휘하던 석대린이 죽었다면 그곳은 지휘할 자 조차 없다.
야수왕은 옆에서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수하를 불렀다.
"이곳은 너에게 맡긴다. 이미 이 무리의 수뇌들이 저리 되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
다. 난 측면을 지휘하러 간다."
"알겠습니다."
야수왕이 고개를 돌려 유곽과 함께 몸을 날리는 순간 수하가 급히 그를 불렀다.
"대주!"
야수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수하를 봤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거라. 그리고 이곳을 부탁하마."
수하의 진심어린 표정에 야수왕은 석대린의 죽음과 어울러 감정이 격해져 한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못된 녀석, 못된 녀석…… 아비를 두고 죽는 못된 녀석……'
석대린을 생각하니 그토록 강인한 야수왕조차도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이십 년이라는 그와 같이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야수왕은 유곽의 뒤를 따르며 눈물을 닦았다. 더 이상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으리
라. 아비보다도 먼저 죽는 못된 녀석을 위해 더 이상은 울지 않으리라.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듯 싶구나. 아들아…… 사랑한다.'
감성적인 내면과 달리 야수왕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했다.
측면을 향해 달려온 야수왕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전반적으로 빼어난 무공을 지닌
자들이다. 어느 부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무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승무공들
을 펼친다. 더군다나 그게 한 둘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다는 게 문제다. 대원 하나
하나가 모두 빼어난 실력자들이다.
야수왕은 양손을 들어올리고 전장의 한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그의 양손이 붉게 물드
는 순간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비명도, 진득한 피도 야수왕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찾고 있
는 것이다. 자신의 제자를 죽인 그 의문의 인물을.
미친 듯 무림맹의 진열을 헤집고 다니던 야수왕의 눈에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본 야수왕은 미칠 듯한 광기를 접게 됐다.
대단한 실력자다. 그의 검은 야수왕이라고 해도 승리를 점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
다.
젊은 무인들과 대단한 실력의 노인을 보는 순간 은연중에 야수왕은 하나의 단체를 떠
올렸다.
'척마신풍대!'
그렇다면 저 노인의 정체는 뻔한 것이다. 척마신풍대에서 노인이라고 한다면 광한검
누남천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저 놈이었구나!'
야수왕의 눈이 다시 이글거렸다. 광한검이라면 그 조차도 어려운 상대. 석대린이 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야수왕은 거의 확신을 지녔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곽에게 물었다.
"저 노인이 석대린을 죽였느냐?"
유곽의 입에서는 기다렸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아닙니다. 석대린님을 죽인 것은 동년배로 보이는 젊은 무인이었습니다."
"그 녀석이 동년배의 무인에게 당했다고?"
"예, 그것도 실력의 차가 월등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석대린님으로서는 상대 할 수조
차 없는 고수였습니다."
유곽의 말에 야수왕은 현 무림에서 그런 자가 누가 있을 지 곰곰히 고민했다. 설령
무림맹에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십대후기지수들이 온다 해도 석대린을 그리 쉽게 패하
게 하지는 못할 게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저, 저 놈입니다! 대주!"
생각에 잠겨 있던 야수왕은 고개를 들어 유곽이 가리키는 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유곽이 가리킨 상대를 보는 순간 야수왕은 덜컥 심장이 내려 앉는 듯 했다.
이 같은 전장에서 저 같이 태연한 모습을 지닌 자를 본 적이 없다. 싸움에 이골이
난 야수왕도 전장에서는 일말의 흥분감에 젖는다. 그렇지만 유곽이 가리킨 사내는 그
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중요하지 않다.
저 사내가 바로 야수왕의 제자인 석대린을 죽인 자라는 것만이 그에게는 전부다.
야수왕은 마교의 무인들을 베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
가 가까워지자 검을 휘두르던 사내가 오히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서로를 잠
시 그렇게 바라보던 중 야수왕이 몇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강하게 발로 땅을 내려쳤다.
쿵!
발은 땅에 박혔다. 깊은 발자국을 남긴 야수왕은 다리를 빼며 입을 열었다.
"네 놈이냐 석대린을 죽인 놈이?"
그러자 야수왕을 바라보던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누구냐."
"네 이 놈!"
그 한 마디에 야수왕의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승전(勝戰)
고함을 내지른 야수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식과도 같은 제자의 죽음. 그리고 제자인 석대린을 죽인 자가 바로 지금 눈앞에 있
다. 더군다나 석대린이 누구냐고 묻는 모습에 그는 끝없이 깊은 분노를 느꼈다.
"오냐, 석대린이 누구인지 내가 기억나게 해 주마."
야수왕은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옷소매를 잡아뜯었다. 드러난 그의 팔뚝은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했고, 수많은 싸움을 해봤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검상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근육. 위압감을 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다.
그렇지만 반대편에 있는 여운휘는 결코 위축됨이 없었다.
"죽이기 전에 물어보마. 내 제자를 죽인 네 녀석의 이름은 무엇이냐."
"진군휘다."
짧게 말을 마친 여운휘를 보던 야수왕의 눈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진군휘라는 이름
을 야수왕이 모를 리가 없다.
'저 놈이 흑색 기마대의 대주와 싸우고도 살아남았다는 진군휘란 말인가!'
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 상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사기를 올리려
는 정파 무림의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을 일부로 크게 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
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자신의 제자인 석대린은 서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실력만큼은 야수왕 조차
도 인정한다. 어렸을 적 제자로 받았을 때부터 혹독하게 다뤘고, 또한 재능도 뛰어났
다. 그런 석대린을 상처 하나 없이 이겼다.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소문이 전부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야수왕의 어깨에서부터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자랑하는 삼대장법 중 하나인 염라
장(炎羅掌)을 쓰려는 속셈이다.
야수왕의 삼대장법은 제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다. 하지만 그 세 가지의 공통점이라
면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는 것.
여운휘는 검을 든 채로 야수왕의 손을 노려봤다. 아무리 여운휘라고 해도 야수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언뜻 보기에도 한 지역을 호령할 패자로 부족할 게 없는 모습이
다. 더군다나 그의 양손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녹포괴존을 떠올렸다.
그녀 이후로는 이만한 장법을 쓰는 자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웅크린 채로 기회를 엿보던 야수왕의 몸이 마치 용수철(龍鬚鐵)처럼 튕겨 올랐다. 그
의 손에서 일순 붉은 기운이 증폭되었고 그러기가 무섭게 야수왕의 손이 뻗어진 곳
이 불이 남과 동시에 터져 나갔다.
쾅! 콰앙!
여운휘는 피해냈지만 뒤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의 몸이 터져 버렸
다. 단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 장 정도 안에 있는 땅들에 자잘한 균형이 생겨
버렸다. 여운휘가 채 그 모습을 살피기도 전에 야수왕의 몸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푸르게 물든 손. 염라장처럼 사방을 박살내는 힘은 없지만 근접한 적에게
날리기에는 최고의 무공이다.
'독장!'
여운휘조차도 이번만큼은 표정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야수왕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독살장(毒殺掌)이라는 독장이었던 것이다. 독장에 당한
다면 만독불침이 아닌 여운휘에게는 치명적이다. 차라리 염라장은 호신강기를 이용해
서 충격을 완화라도 시키겠지만 독살장은 그렇지 않다.
다급하게 발을 놀렸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독살장이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닿은 부
분의 옷이 썩은 내를 풍기며 타 들어갔다.
아무도 두 사람의 싸움에 끼여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거리를 벌려 야수왕의 간
격에서 벗어났다. 염라장 정도는 아니었지만 독살장 또한 주변에 있는 풀들을 누렇
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여운휘는 야수왕이 재차 공격을 하기 전에 먼저 검을 휘둘렀다.
진군악의 쾌검이다.
탕!
검과 손이 부닥쳤는데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피육(皮肉)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손
과 철로 된 검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금강불괴(金剛不壞)?'
말로만 들어보던 금강불괴의 경지인가 문득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여운
휘는 이미 야수왕에 대해 누남천에게 들었다. 강한 무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금강
불괴의 수준까지 이른 무인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손을 그토록 단련했다는 말인데……
솔직히 말해 치가 떨린다. 살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손이 쇠처럼 단단해 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겠는가.
여운휘는 판단이 끝나자마자 검의 방향을 틀었다. 아무리 단련을 했다해도 피육으로
된 손과 검은 다르다. 수차래 내려친다면 아무리 야수왕이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 것
이다. 하지만 굳이 여운휘는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그 공격을 할 기회를 다른 곳에
쏟으려는 것이다.
팔이 안 된다면 다른 곳을 노리면 된다.
촤악!
미끄러지듯 다가간 여운휘의 검이 미간을 노렸다. 그렇지만 굳게 주먹이 쥐어진 손
은 검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시금 밀려난 검이 제자리를 찾는 것은 찰나의 순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빠른 움
직임에 이번에는 야수왕이 움찔 해 버렸다. 아무리 단련이 되었다 해도 인간의 손.
연신 검과 부닥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야수왕은 조금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손을 들
어올렸다.
"흠!"
아직은 견딜만 하다고 생각했던 야수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겨우 세 번 뿐이거늘 그토록 단단한 그의 손이 흔들렸다. 야수왕은 뒤로 성큼 물러서
며 자신의 팔을 내려다 봤다. 피에 젖었다. 그토록 단단한 야수왕의 손이 겨우 세 번
의 검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야수왕은 여운휘를 힐끔 바라봤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검이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던 야수왕이지만 이토록 쉽게
그의 기공을 부수어 버린 것은 여운휘가 처음이다.
야수왕은 눈살을 지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쉽게 기공이 깨질 정도의 상대라면
손으로 검을 계속해서 받아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검을 피해야만 한다는 소리인데
그것도 그리 수월치 않다. 피하기 위해서는 공격을 할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그만
큼 승기를 잡을 확률은 줄게 될 것이고.
상대가 만만한 자라면 문제도 아니다. 얼마든지 피하면서 안으로 다가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숨을 끊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다. 지금 상대해야 할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피하면서 파고드는 것도 좋지만 그랬다가는 이길 수 없다.'
서른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사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수왕은 상대의 실력이 결
코 자신에게 부족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이 두 손이 몇 번이나 버텨 줄 지는 모르지만…… 정면승부를 벌이는 수밖에!'
야수왕은 도박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피하기만 한다면 분명 손에 부상을 입을 일은
없겠지만 잘해봐야 양패구상의 처지에 직면하게 될 게다. 차라리 목숨을 건 도박이
야수왕에게는 어울렸다.
야수왕이 입을 열었다.
"진군휘라 했던가?"
"……"
"난 피하지 않고 정면격돌을 할 것이다."
여운휘는 야수왕의 말투가 사뭇부드러워진 것을 깨달았다.
여운휘의 의아해 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난 자네를 내 제자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 무인으로 볼 거라는 소리다. 그
런 것은 다 떠나버리고 무인 대 무인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보자."
야수왕의 호탕한 말에 여운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러한 말은 여운휘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왠지 진짜 싸움을 하는 듯한 기분
이 드는 탓이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듯한 진정한 무인이 눈 앞에 있다.
'하지만 적.'
적이라면 답은 단 하나.
'벤다.'
그 순간 야수왕의 손에 있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사라지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야수왕의 삼대장법 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라는 흑석장(黑石掌)을 펼
치려는 것이다.
"내 최고의 절기를 보여주마. 그리고 말한 대로 정면격돌을 할 생각이지. 피하면서
기회를 엿볼 생각은 없다."
여운휘 또한 은연 중에 지금 야수왕이 펼치려는 장법이 여태까지와 사뭇 다르다고 생
각하던 터다. 그리고 야수왕의 말이 끝나자 검을 들어올려 싸움을 준비했다는 뜻을
알렸다.
"간다!"
호탕하게 외친 야수왕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여운휘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몸이 날아드는 순간 주변에서 찢어지는 듯
한 굉음이 울린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야수왕의 손에 맺힌 검은 기운과 연관되어
있음은 불 보듯 뻔했다.
흑석장!
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집채만한 바위조차도 단숨에 박살 낼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파괴력은 사방 오 장 이상으로 퍼져 나간다. 마치 파
도처럼 몰아치는 그 위력은 무림에서도 분명 보기 힘든 장법임이 분명하다.
'위험하다!'
여운휘는 급히 검막을 펼쳤다. 뒤에서 싸우고 있는 무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만큼 여운휘는 그 장법의 위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검막에 묵직한 충격이 일었고 여운휘의 몸이 사정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컥!"
여운휘의 예상 대로였다. 단지 허공을 날아 올랐을 뿐인데도 손에서 그토록 괴이한
기운이 뻗어져 나왔다. 그런 것이 쏘아져 나온다면 사방에 충격이 일 것은 당연한
일.
검막을 펼치지 않았다면 여운휘 또한 저 검은 장력의 파도에 휩쓸려 버렸을 게다.
손이 저릿저릿하다.
주변에 있던 스무 명 이상의 무인들이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듯 사방에서 모습을 감
췄다.
여운휘는 야수왕을 바라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분명 위력적인 장법이다. 하지만 강하다면 그만큼 걸어야 하는 것도 있다.
야수왕은 태연한 척 서 있었지만 아까 와는 조금 달랐다. 여운휘는 지금 그가 펼친
흑석장이 내공의 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개방의 강룡십팔장이 그러하듯이 야수왕의 흑석장 또한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장법
이다.
'잘해야 두 번.'
야수왕 또한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비록 자신보다 하수였다고는 하지만 화산
파의 냉죽생과의 싸움에서도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다. 그리고 내공의 소모가 극
심한 흑석장도 펼쳤다.
야수왕이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데도 불구하고 흑석장을 펼친 것은 자신이 있어서였
다. 그 일장이면 여운휘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죽어 나자빠졌지만 정작 중요한 여운휘는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했다.
파앗!
여운휘는 멈칫 한 채 서 있는 야수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막아냈지만 다시금
그만한 위력의 장법을 펼치게 할 마음은 없었던 탓이다.
탕탕!
손으로 막아내거나 몸을 비틀면서 검을 피하던 야수왕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재
빠르게 양강의 힘을 지닌 염라장을 펼쳤지만 또 허공을 격했을 뿐 아쉽게도 빗나가
고야 말았다.
물러서는 야수왕의 발도 빨랐지만 그를 쫓는 검은 더욱 빨랐다.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상체를 흔들었지만 검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간 후다.
고통에 뒤로 물러서려던 야수왕은 마음을 바꾸고 그대로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양손
을 내려쳤다.
이번엔 여운휘가 뒤로 물러섰다.
퍼엉!
"퉤!"
여운휘는 입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회심의 일격이 여운휘의 가슴에 적중 당했다.
내공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한 상태에서 펼친 일격이었기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
만 여운휘는 한층 진지해졌다.
야수왕은 허리를 감싸 쥔 채로 여운휘를 견제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꾸역꾸역 쉬
지 않고 밀려나오는 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피는 그 정도로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내장까지도 다친 모양이다.
둘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그 누가 봐도 손해를 본 것은 야수왕이다. 그는 허리춤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때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
그 웃음소리에는 내공이 가득 실려 사방에 있던 모든 무인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그가 여운휘를 향해 눈을 고정시켰다.
설마 설마 했다. 살아 생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야수왕
이라는 별호를 지닌 자신이 이제 갓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후기지수에게 이토록 부
상을 입을 것이라고는……
싸움은 그에게 불리했다. 부상을 입은 몸에 내공 또한 원활치 않다.
야수왕은 허리에서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피를 알면서도 지혈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운휘를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절기로 한 판 붙어보지. 난 흑살장을 펼칠 것이다. 검막으로 막는 것이 아닌 절기
대 절기로 붙어보자는 말이야."
"……"
여운휘는 야수왕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여운휘가 검을 들어올리며 짧게 말했다.
"그러지."
누군가가 본다면 여운휘를 어리석게 볼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여운휘의 필
승(必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야수왕의 제안을 들어
줄 필요가 있을까?
여운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무인인 야수왕의 청을 여운휘는 받아 들였
다.
'쾌검으로는 상대 할 수 없다.'
이미 몸으로 겪어보지 않았던가. 흑살장은 단순히 한 명만을 노리지 않는다. 사방
을 초토화시키면서도 그 위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검막을 쓰거나
할 수도 없는 상태. 호신강기로 버텨 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피하면서 쾌검을 쓴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다.
여운휘는 검을 곧추세웠다. 야수왕의 장법을 베기 위해서는 한 가지 수밖에 없다.
여운휘의 검에서 천천히 흰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야수왕
으로서는 고개를 갸웃 했다.
'검기? 겨우 검기로……'
야수왕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검기처럼 천천히 일어나던
흰 기운이 어느새 검을 휘감아 싸고 오히려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한 탓이다.
저것은 검기가 아니다. 검기가 저토록 유형화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미칠 듯 타오르는 하얀 빛.
두 자 이상 길어지는 검을 보며 야수왕은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검강…… 이라. 하, 하하!"
야수왕은 투지를 불태우며 손에 내공을 모두 모았다. 두 번째 공격은 생각 할 필요
도 없다. 단 한 번으로 모든 것이 결정 될 테니까.
실제로 검강을 본 것도 야수왕으로서는 처음이다. 마교 내에서도 검강을 펼칠 만한
고수는 다섯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마교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대외적으로 마교에서 그만한 경지에 올라선 것은 금천멸문대의 수장인
사욱천뿐이다.
그리고 흑색기마대의 대주 또한 그 정도의 무위는 지녔을 거라고 판단되고 있다.
그런데 그만한 무위를 앞에 있는 젊은 사내가 보이고 있다.
'검강이라면 부족함이 없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야수왕의 머리에 가득 찼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불구하고 야
수왕은 신이 난 듯 했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검강은 사방에 있는 무인들의 눈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가
뜩이나 내공이 실린 야수왕의 웃음소리에 집중 된 이곳에서 이야기로만 들어보던 검
강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수많은 무인들의 눈이 향할 만도 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은 검을 멈추고 여운휘와 야수왕을 바라봤
다.
"흑살장!"
무공명을 외침으로 공격할 것을 알린 그가 단숨에 온 몸에 있는 내공을 토해내면서
장력을 발출했다. 이미 그것은 장력이라고 보기에도 힘든 엄청난 것이었다.
여운휘는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장력을 향해 몸을 던졌다. 길어진 검은 여운휘
의 명에 따라 장력을 향해 날아들었다.
승패는 여기서 갈라질 것이다. 벤다면 여운휘의 승리, 베지 못한다면 패배.
여운휘는 손에 묵직한 충격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물러설 마음은 추호도 없
다. 이만한 장력에 그대로 몸을 내준다면 아무리 여운휘라고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한
다.
"흐압!"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은 장력을 갈라냄과 동시에 가만히 서 있는 야수왕의 가슴을
쪼갰다.
장력은 빗나갔고 여운휘는 천천히 검에 넣었던 내공을 거뒀다. 하얗게 빛나던 검강
도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그는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야수왕의 눈을 바라봤다.
"대단한 놈이구나."
"칭찬이라면 고맙다."
"진심이다. 네 놈은 실로 대단한 놈이야.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말을 마치는 순간 야수왕의 가슴이 쩍 열리면서 피와 함께 내장들이 쏟아져 나왔
다. 그리고 검강에 당하고도 서 있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쓰러져 버렸다.
억지로 버텼던 게다. 그 한 마디 말을 전하기 위해서.
아마도 남은 생명을 쥐어짜면서 고통과 싸우며 그 한 마디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여운휘는 묵묵히 쓰러져 버린 야수왕을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 무인이었지만 벨 수
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여운휘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리를 잃은 마교의 무인들은 갈팡질팡했고 그 기회를 누남천은 놓치지 않았다.
"공격!"
그의 고함소리와 함께 사기가 오른 무림맹의 무인들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운휘는 전장에 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처참히 쓰러져 있는 한 사내를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아.'
여운휘는 석대린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꽤나 빼어난 자였다. 여운휘의 상대는 분
명 아니었지만 그 정도 나이에서는 쉽게 찾아보지 못할 실력자였다. 그 또한 죽으면
서 까지 처음 달려들 때의 모습을 버리지 않았다.
야수왕과 비슷한 장법을 썼던 것도 이제야 생각났다. 아마도 제자이거나 자식이었
던 듯 싶다.
여운휘는 야수왕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제자에 그 스승이었소."
무림맹의 무인들은 머리를 잃은 마교를 향해 일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림
맹 쪽에서는 꽤나 쟁쟁한 고수들이 남아 있었지만 마교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수
뇌부를 잃은 탓에 그저 휩쓸려 다니던 마교의 무인들로서는 패배는 당연지사다.
그렇게 한 시진 반 정도가 계속 된 싸움이 지나고 혈전의 장소는 고요함에 잠겼다.
다친 사람을 보살피랴, 시체들을 치우랴 무림맹의 무인들은 바빴다. 그렇지만 대부
분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핀 상태다. 마교와 무림맹의 첫 싸움에서 이쪽이 승기
를 잡은 탓이다.
"서둘러라! 조만간 후속 부대들이 도착할 것이다!"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부하들을 재촉을 하고는 있었지
만 그의 얼굴 또한 과히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무림맹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가 몸을 감추고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외향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자다. 검은 옷과 복면을 하고 한 자루 칼을 찬 게 다
다. 아, 그의 손목에는 한 마리의 새가 매달려 있다.
복면인은 새의 다리에 종이를 달기 시작했다. 새는 사람의 손길에 익숙한지 꿈쩍도
하지 않고 복면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할 일을 마치자 복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올렸다.
"가라."
손목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순간 새는 허공을 갈랐다.
새가 향하는 곳은 마교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