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휘의 일행들이 머문 객잔은 조용했다.
모두가 잠이 들 시간인 축시인 탓이다. 여운휘 또한 침상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그때 새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찌르르.
여운휘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못들은 척 주변을 살폈다. 다른 자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다. 이들이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새소리고 생각했을 게다. 그리고 그건 그 누
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사전에 들었던 게 있는 여운휘는 그렇지 않았다.
밀마다. 사전에 약속 된.
여운휘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눈에 띄는 사
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여운휘는 고개를 치켜들어 나무를 바라봤고 그곳에서
사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광한검 어르신이 오셨습니다. 진 소협에게 이리로 오라고."
고개를 꾸벅하며 내미는 종이를 받아든 여운휘는 내용을 살피고는 품안에 서찰을 집
어넣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갯짓했다.
"물러가라."
"예."
사내는 모습을 감췄고 여운휘는 서찰에 그려져 있던 그림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
다.
눈앞에 모이라고 했던 건물이 있었지만 여운휘는 그곳을 스쳐지나갔다.
깊은 밤인 탓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종종 몇몇의 사람들이 보였지만 주
정뱅이, 또는 파락호로 보이는 자들의 대부분이다.
여운휘는 그들을 힐끔 바라보며 걸었다. 혹시나 있을 미행을 대비해서다.
만약을 위한 확인까지 한 후에야 여운휘는 확신했다.
'미행은 없군.'
건물 근처에 정체를 숨긴 몇 몇의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정파 쪽의 무인
일 것이다. 여운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일반 가정집처럼 되어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안의 구조 또한 전혀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구성원만은 다르다.
"왔군."
누남천과 백산, 하을지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여운휘는 고개를 꾸벅했다.
그리고 여운휘의 뒤를 따라 바로 표향천투 운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하! 제가 가장 늦었군요."
"우선 자리에 앉게. 이야기를 할 게 많으니."
누남천의 말에 운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운빈이 입을 다물자 방 안은 조용한 정적에 잠겼다. 누남천은 모두의 얼굴을 뚫어져
라 바라봤다. 모두가 뛰어난 자지만 내일도 이 자리에서 모일 거라고는 자신 할 수
없다.
그만큼 마교와의 전면전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본진이 출발했네. 청해까지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달려 올 수 있을 게
야. 문제는 신강에 들어서면서부터겠지.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 오일 안에
는 신강에 다다를 게 분명해. 그리고 그때부터는 무림맹과 마교의 전면전이지."
"마교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백산의 질문에 누남천은 준비해둔 지도를 펼쳤다. 장정 두셋이 드러누울 수 있을 정
도의 상이 지도 한 장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 정도로 지도는 세밀했고 또한 거대했
다.
"마교의 본진의 일부가 앞으로 달려나온 모양이야. 그들의 숫자보다는 무림맹이 많
지만 쉽사리 볼 수 없는 게 마교의 원군이 오기 쉬운 위치에 있다는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교의 힘도 하나로 집결 될 것일세. 그 전에 최대한 그들의 힘을 줄
여 놓는 게 좋지."
"그럼 저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우선 지금 일차적으로 파견 된 마교의 무인들을 꺾어야겠지. 우리는 정면이 아닌
측면을 칠 걸세."
누남천의 손에 들린 막대기가 지도 위를 종횡무진 움직였다.
마교의 병력들과 현 무림맹 무인들의 움직임까지 지도하나만 봄으로 모두 한 눈에
들어왔다.
여운휘는 지도 위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빨간색은 마교, 푸른색은 무림맹의 표식. 아직 시작 된 것은 아니지만 진한 피 향기
가 풍긴다. 시작되지 않았다 해도 피로 가득할 무림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단순히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이 아니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겠지만 또 다른 하나가
있다.
유가.
그 세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회의가 끝나자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급히 일어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가지 그러느냐."
"됐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오."
누남천의 청을 거절 한 여운휘는 밖으로 걸어나왔다.
해야 할 일 하나가 떠오른 탓이다.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에 유가를 넣고 머리를 쓰던 여운휘가 하나의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일마가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 그렇기에 유설린의 정체도 알고 있을 거라
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유설린이 세가를 만들어 낸 배경을 파들어 갈 것은 당연한
순례다.
그렇다면 유가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지금은 안 돼.'
유가는 숨겨져야 한다. 설령 드러난다고 해도 그 힘의 반 이상이 드러나서는 안 된
다.
마을에 전서를 보낼 새를 파는 곳에 없었던 탓에 여운휘는 다른 수를 쓰기로 마음먹
었다. 유가의 정보망이 바로 그것이다.
여운휘는 종이에 간단하게 사정에 대해 설명하고 미리 약조되었던 무늬를 서찰에 새
겼다. 그리고는 그 서찰을 고민도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구간에 던졌다.
그는 서찰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분명 찾아낼 것이다. 무슨 일이 있다면 마구간에 서찰을 넣으라는 이야기를 했던 적
이 있는 탓이다. 다른 사람이 본다해도 걱정은 없다. 종이 자체가 특수한 탓에 숨겨
진 글씨를 나오게 하는 액체가 없는 이상 본 내용은 볼 수 없으니까.
만약 서찰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전서구를 파는 곳까지 가서 구해 날리면 그만이다.
'일마가 우릴 알고 있다.'
변수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또 이용할 수도 있다. 일마는 자신들이 그가 마교의
진짜 힘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여운휘는 공터에서 검을 빼들었다. 일마를 생각하자 가슴 구석에서 울컥 하는 무엇
인가가 솟아오른 탓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투지라는 것을 여운휘는 모르지 않았
다.
미칠 듯 춤을 추는 긴 검무.
차가운 가을의 바람이 여운휘의 칼끝에 스몄다.
사내의 긴 연초 끝에서 하얀 연기가 일었다.
작은 막사 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그곳에는 그를 제하고도 다섯 명 정도의 무인
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이미 십수 년을 함께 생
활한 자들. 그 정도는 이제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후우."
사내는 입안에 든 연기를 뱉어냈다.
목안이 상당히 칼칼하다. 술이라도 한 잔 들이키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한다. 해야
할 일이 있는 탓이다.
"무림맹과의 거리는?"
"지금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내일 오전쯤에 부닥칠 듯 합니다."
"지형은?"
"저희 쪽이 유리합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의 수도 마교가 앞선다. 현재 부닥칠 두 세력의 숫자
는 마교가 천여 명 정도에 달했고, 무림맹 쪽은 약간 못 미치는 팔백 정도다.
"열에 아홉, 저희가 이깁니다."
확신이 시린 목소리. 지형도, 숫자도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더군다나 무림맹의 무인
들이 부닥쳐야 할 자들이 마교에서도 유명한 세력 중 하나인 패력적화대(覇力赤火隊)
라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천 명에 달하는 자 중 패력적화대의 숫자는 이백 정도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마교의 다른 세력들의 무인들이다. 그렇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패력적화대의 수장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우람한 덩치다. 그가 걸친 의
복은 평범하지 않았다. 노란 옷에 검은 줄이 가득 가 있다. 호피 무늬다. 아니, 애초
에 호랑이의 호피로 옷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야수왕(野獸王)이라고 불렀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그저 호랑
이와 같은 기상과 무력을 지녔기에 야수왕이라는 별호로 부를 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왕(王)이라는 글자는 쉽게 붙지 않는다. 그만큼 어느 부분에 대한 일
가를 이룬 사람에게야 가능한 것이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무림맹의 군사는 종리회연. 영특한 자다. 결코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자가 아니
지. 지금 이 상태라면 우리가 이기는 게 거의 확실하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군.”
야수왕은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긴 여정 때문에 상당한 피로가 몰려왔지만
지금은 쉴 때가 아니다.
야수들의 왕이 뭐냐고 묻는다면 일반적으로 호랑이를 꼽는다. 그리고 야수왕 또한 호
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자다. 강하지만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는 호랑이처럼 그 또
한 그렇다.
“옆구리.”
“예?”
얼굴을 감쌌던 손에 들렸던 연초를 비비며 야수왕이 말을 이었다.
“측면 공격을 조심해라. 아무래도 놈들이 노리는 것은 우리를 이등분 하는 것 같으
니. 더군다나 그 같이 이등분을 하는 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자들이어야
가능할 테지. 양쪽 날개에 평소보다 많은 힘을 실어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면 쪽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될 터인데……”
“만약 우리를 반으로 나누려고 하는 거라면 그들의 움직임은 더딜 것이다. 지금은
이보다 더한 방법이 없으니 내 말에 따라라.”
“예!”
야수왕의 수하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야수왕의 명을 그토록 따르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여서가 아
니다. 우람한 덩치에 야수왕이라는 별호.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상당히 꺼림직 했던
게 사실이다. 저런 자라면 으레 성깔이 있어 조금만 잘못 보이면 화를 당하기 십상
인 탓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왕이라는 글자에 어울리게 그는 아랫사람을 다스릴 줄을 알았다.
그리고 생긴 것과는 달리 머리도 뛰어나 부하들을 함부로 사지로 몰지도 않았다.
진정한 사내. 부하들과 목숨을 함께 하고 웃음도 함께 한다.
그러한 모습에 야수왕의 수하들은 진정으로 탄복하고 그를 따랐다. 야수왕의 수하라
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야수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로 묵묵부답으로 자리를 지켰다.
야수왕은 그런 그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막사를 벗어났다.
때맞추어 불어온 바람이 그의 긴 장포를 흔들었다. 야수왕은 자신의 긴 머리를 조용
히 뒤로 넘겼다. 바람을 따라 피의 향기가 콧속에 스며들었다.
‘드디어 내일이군.’
무림맹과 마교의 만남은 곧 격전을 의미한다. 내일 그곳에 서서 웃을 수 있는 사람
은 둘 중 하나일 게다.
‘술이 마시고 싶군.’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전투에서 승리만 한다면.
목이 미칠 듯이 답답하다. 왠지 모르게 술이 너무나 당기는 밤이다. 그런 욕망을 꾹
누르며 야수왕은 품속에서 연초 하나를 더 꺼내 물었다.
그가 내뱉는 하얀 연기가 어두운 밤을 하얗게 물들였다.
무림맹과 마교의 본진이 만난 것은 예상을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삼백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그들
은 제각기 걸음을 멈추고 진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무림맹에서 이번 선발대를 이끌고 온 자는 화산 장문인의 동생인 매화십이검(梅花十
二劍) 냉죽생이다. 육십이 넘는 무인으로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한 자다.
그는 자신의 흰 수염을 매만지며 옆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누 대협에게 연락을 왔느냐?”
“예. 지금 준비 중이라고 하십니다. 신호를 보내면 바로 마교의 잔당들을 두 쪽으
로 나누겠다고 합니다.”
“쉽지는 않을 게야. 상대가 야수왕이라면 그 정도쯤은 대비하겠지.”
“그래도 광한검 어르신이라면 어떻게라도 해내실 겁니다. 더군다나 진 소협도 계시
니……”
“허허, 네 녀석도 진군휘라는 소협에게 반한 모양이구나.”
“솔직히 말해 진군휘라는 분에게 관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 뿐만
이 아니라 화산파의 모든 젊은 사람들이 그리 할 겁니다.”
냉죽생과 대화를 하던 삼십대 정도의 사내는 그가 말년에 얻은 유일한 제자였다. 품
행이 곧고, 기질도 뛰어나 냉죽생이 단숨에 제자로 삼은 인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화
산파의 다음대 장문인 후보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래. 분명 그 소협은 대단한 자지. 본적은 없지만 소문만으로도 내 위명을 가볍
게 넘을 정도니. 허허.”
“아닙니다! 아무리 진 소협이라고 해도 사부님과 비교를 하다니요.”
“이 녀석. 말이라도 고맙구나.”
냉죽생은 자신의 제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어도 이러한 자들이 있
는 무림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탓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전투에서 패해서는 아니 되겠지.’
무림맹이 마교에게 완벽하게 패하게 된다면 그 날로 온 무림은 마도인(魔道人)들의
천하가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이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져서는 안 돼.’
냉죽생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가득 찼다. 그때 수하 중 하나가 냉죽생이 있는 막사
에 들어오며 외쳤다.
“야수왕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냉죽생의 눈이 번뜩였다. 육십이 넘는 고령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강인한 의지가 그
의 눈에서 터져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냉죽생이 목청을 높였다.
“모두에게 알려라! 우리도 출전한다!”
말을 마친 그는 오랜 시간 함께 한 그의 애병(愛兵)인 노룡검(怒龍劍)을 허리에 차
고 막사를 벗어났다.
그는 단상 높은 곳에 올라 정돈 되어가는 진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
어 멀리를 내다봤다. 야수왕이 이끄는 마교의 무리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수도 그렇고 지형도 그들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무림맹에는 척마신풍대의 기습이라
는 비장의 한 수가 있기 때문이다.
노룡검을 뽑아 든 그가 자신 앞에 쭉 나열한 수하들을 보면서 외쳤다.
“오늘 우리는 마교를 향해 첫 검을 내 뻗는다! 우리의 뒤를 이을 자들을 생각하면
결코 패해서는 안 될 싸움! 모두가 이 싸움에 목숨을 걸 것이라고 믿는다!”
대답대신 무인들은 함성으로 대신했다. 각각의 병장기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그들은
큰 고함으로 냉죽생의 말에 화답했다.
냉죽생은 노룡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외쳤다.
“전군 출전하라!”
와아!
대지를 울리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무림맹의 무인들은 마교의 무인들을 향해 달리
기 시작했다.
무림맹 무인들과 마교의 패거리들이 격돌했다.
노룡검이 기이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번뜩!
휘둘러지는 검이 마교의 무인을 양단해 버렸고, 그 뒤를 이어 따라오는 자를 향해
그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렇지만 처음 일검에 당한 자와는 달리 그는 간신히
노룡검을 막아냈다.
그 순간 냉죽생의 노룡검이 아름다운 매화를 만들어 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단숨에
주변을 매화로 가득 채운 검이 검을 막았던 무인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급히 검을
들어 막아내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냉죽생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이다.
마교의 평범한 무인에 불과한 그로서는 막아낼 재간이 없다.
검은 단숨에 사내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무인들까지 휩쓸었다. 단숨에 몇 명
의 목숨이 사라졌다.
냉죽생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야수왕! 어디 있는가! 나 화산의 매화십이검 냉죽생이 여기 있다!"
그는 외치면서도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을 받아내느라 분주했다.
그의 정체를 안 마교의 무인들은 어떻게든 그를 제압하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냉죽생은 화산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더군다나 그의 옆에 있는 자들 또
한 화산에서도 빼어난 자들로 마교의 무인들에게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냉죽생의 손에 마교의 무인들이 하나씩 목숨을 잃어 가고 있을 때 멀리서 거대한 덩
치의 사내가 주변을 휩쓸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드러났다.
냉죽생은 단숨에 그가 야수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달려오면서 휘두른 일장
에 몇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단숨에 사지가 터져 나갔다.
"네 놈이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냉죽생의 검이 옆에 있는 자들을 향해 손바닥을 휘두르는 야수
왕에게 날아들었다. 야수왕은 시야에 가득 찬 매화를 보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
다. 그는 침착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손의 방향을 틀었다.
매화들이 야수왕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붉은 강기에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크크! 화산의 애송이!"
야수왕은 조무래기들은 상관없다는 듯 밀쳐버리며 냉죽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옆으로 두 명의 무인이 몸을 붙였지만 냉죽생은 호통을 쳤다.
"물러서라!"
찔끔한 두 명의 무인은 엉거주춤 물러섰고 그 순간 야수왕의 손에서 뻗어 나온 장력
이 냉죽생을 감쌌다.
콰앙!
검으로 장력을 갈라냈지만 그 위력이 워낙 강했던 탓에 냉죽생은 눈을 찌푸렸다.
이 만한 내력이라면 구파일방의 장문인과도 거의 비등한 수준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이라는 막이 솟구쳐 나온다. 결코 소문만 무성한 잔챙이가 아니다. 앞에 있는
야수왕은 실로 대단한 무인인 것이다.
'하지만 질 수는 없는 일.'
들어 올려진 냉죽생의 검이 하얀 검기가 일었다. 아지랑이처럼 이는 하얀 검기를 보
며 야수왕 또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로가 서로를 만만치 않다고 느낀 것이다.
야수왕의 손가락이 구부려졌다. 그의 장기인 조공(爪功)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팍!
검이 먼저 움직였고 야수왕의 몸이 퉁기듯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길어졌다는 착각
이 들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 틈에 옆으로 파고든 야수왕이
양손을 휘둘렀다.
냉죽생의 민첩한 반응 탓에 손가락은 옷을 찢는 게 다였다.
야수왕은 빗나갔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다. 단숨에 목덜
미를 움켜쥐려는 속셈이다.
아쉽게 손가락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실패하자 야수왕은 뒤로 물러났다.
공세라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허점이 드러났다. 조금만 늦었다면 검이 무릎이
나 옆구리를 노렸을 게다.
야수왕의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사방이 온통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앞
에 있는 냉죽생을 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냉죽생 또한 야수왕을 견제하면서 천천히 돌았다. 하얀 수염으로 가득한 턱이 은연
중에 떨린다. 상대의 강함에 감탄을 하기도 했고 방금 전 아슬아슬했던 상황들이 뇌
리에 남은 탓이다.
그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싸움은 아직 백중지세다. 크게 한 쪽이 밀리지도, 밀고
있지도 않다.
'지금인가?'
지금 척마신풍대가 옆쪽을 기습하면 단숨에 승기가 넘어 올 것이다.
냉죽생은 슬쩍 뒤를 향해 신호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몇 명의 무인이 전장을
이탈해서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싸움이 치열했고, 또한 적
은 수였기에 그것은 결코 눈에 띄지 않았다.
"오너라."
냉죽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앞까지 다가온 야수왕의 주먹이 좌우로 연신 움직
였다.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매서운 위력까지 담겼다. 주먹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인 경
풍에 냉죽생은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헉!"
휘둘러진 검이 야수왕의 손가락에 잡혔다. 조공을 익히는 탓에 단련 된 그의 손은
검날을 움직이지 못하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다.
검을 놓자니 문제가 생기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완전히 가슴을 내 준 꼴이라 냉
죽생은 일순 망설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절정고수에게 그것은 천금과도 같다.
꽈득!
"큭!"
다른 한 손이 냉죽생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호랑이의 손처럼 굽혀진 손가락이 냉죽
생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단숨에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네 놈이 졌다."
야수왕은 확신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어깨에 파고 든 손가락은 완벽하다. 다른 손
하나가 검을 잡고 있느라 자유롭지 않지만 분명 지금은 그에게 유리하다. 그 탓에
냉죽생 또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대로 싸운다면 네 놈의 필패(必敗)! 이래도 덤빌 것이냐?"
냉죽생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어깨를 관통한 손가락이 그의 온 몸에 경련
이 일게끔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비장의 한 수
가 있는 탓이다.
"아직. 아직 나는 패하지 않았다."
뭔가 모를 확신이 있는 듯한 어조에 야수왕은 비장의 한 수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
리고 그런 그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지 옆쪽에서 함성소리가 터
져 나왔다.
"합!"
함성소리를 듣자마자 냉죽생은 검에 검기를 불어넣으며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불
에 덴 듯 화끈거렸고 야수왕은 손을 놓으며 바로 일장을 내려쳤다.
퍽!
냉죽생은 양손을 들어올려 막아냈다. 그리고 바로 검을 들어 어깻죽지를 파고 든 손
을 향해 내려쳤다.
야수왕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빼야만 했다. 그는 손을 빼고 뒤로 물러서며 옆
을 살폈다. 백여 명이 넘는 무인들이 옆쪽을 노리고 기습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
다.
야수왕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냉죽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 웃음을 흘릴 거라고는 상상
도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분명 위급한 상황이거늘 야수왕의 눈에는 결코 당황스러
워하는 기색이 없다.
'역시 측면공격을 예상했던 것인가! 하지만 예상했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척마신풍대는 비록 젊다고 하나 빼어난 고수들로 구성 된 부대.'
냉죽생은 검을 들어 올려 야수왕을 가리켰다.
"다시 오너라. 이번엔 방금처럼 쉽사리 당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