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37)

대나무 숲을 벗어난 일마 진린의 옆에 어느새 노인 하나가 붙어 있었다. 

"어쩔 생각인가." 

"좌운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대단한 자야. 자네가 깨달은 심득은 결코 쉬운 게 아니지. 적어도 그 정도 나이의 

무인이 깨닫기에는 턱없이 높은 경지야. 더군다나 자네의 용혈장(龍血掌)에 가슴을 

격타 당하고도 바로 움직였다는 건 그만큼 대처도 빨랐다는 것. 분명 마교로 데리 

고 가면 재목이 될 걸세." 

"후후. 자네도 그러한가." 

진린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인재다. 저만한 인물을 예전에 찾지 

못한 자신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든 건 생전 처음이다. 

죽여도 되는 자였지만 굳이 죽이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저 놈을 가지고 싶다." 

"그게 자네의 본심인가? 하지만 심지가 굳은 자네. 소교주를 버리고 절대 오지 않 

을 게야." 

"방법이 있지. 조만간 무림맹 쪽에서 소교주를 잡으려고 하고 여운휘를 죽이러 할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지. 여운휘에게 말이야. 자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쪽으로 넘어 올 수도 있을 게야. 그 기회를 버린다면 어쩔 수 없 

지. 아무리 인재라 해도 기회도 보지 못하는 놈은 쓸데도 없다." 

진린의 말에 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너무 곧기만 해서는 쓸데가 없다. 대나무도 너무나 꼿꼿 

하기에 구부러지지 않고 부러지지 않던가. 

좌운과 함께 걷던 진린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여운휘가 무림맹에서 쫓길 때 그를 섭외하기 보낼 사자 말일세." 

"그 사자가 왜?" 

"사무린은 어떠한가? 안면도 있다고 했고 또 그녀라면 화술(話術)에도 능하지." 

"크크! 허기야 그 계집의 화술은 대단하지. 자네조차도 넘어간 화술이 아닌가. 그녀 

라면 성공할 걸세." 

좌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진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버린다면 더 이상 미련은 없다. 

'네 놈 스스로의 운명은 네 놈 손에 달렸다. 거절하면 죽음 뿐이야.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여운휘……' 

집결(集結) 

부상당한 몸은 마치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다.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버거웠지 

만 그래도 여운휘는 움직였다. 

발이 무거운 탓에 객잔에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 

만…… 단순히 패기만 앞서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든다. 여운휘가 그토록 큰 패배감 

에 젖어들지 않은 것은 오행검법이 남아서다. 하지만 자신 할 수도 없다. 

오행검법의 후반부를 익힌다 해도 일마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손을 섞어본 

여운휘로서는 일마의 실력을 몸으로 느꼈다. 

여운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싸움에 패배감에 젖어 무엇 한단 

말인가. 

간신히 객잔까지 다가온 여운휘는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에 젖은 여운휘를 보고 놀란 듯 고함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여운휘는 급히 

손을 들었다. 

"조용. 조용히 해라." 

"하, 하지만……" 

"됐다. 내가 됐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보다 남는 여벌의 옷이 있느냐? 돈을 줄 테 

니 옷 한 벌과 피를 닦을 것 좀 가지고 와라." 

피를 보고 놀랐는지 점소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점소이가 옷과 피를 닦을 수건을 가지러 가고 나서 여운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 

다. 피를 상당히 토한 탓에 눈앞이 흐릿하다. 여운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내공을 움직이던 여운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옆으로 고개 

를 돌렸다. 방금 전 보냈던 점소이가 옷 한 벌과 수건을 들고 그곳에서 서 있다. 

점소이는 여운휘가 바라보자 그것들을 건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여운휘는 

상의부터 벗으면서 피를 닦아냈다. 외상을 입지 않은 탓에 피한 토를 닦아내면 다였 

다. 

"받아라." 

옷을 다 갈아입은 여운휘는 점소이에게 돈을 주었다. 어린 점소이 소년의 입이 귓가 

에 닿을 정도로 찢어졌다. 아마 이 정도 돈이면 어린 점소이가 받는 한달 급료(給 

料)보다 몇 배는 많으리라. 

신나하는 점소이를 보며 여운휘가 말했다. 

"오늘 본 것을 발설하지 마라. 알겠느냐?" 

"예."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 위층으로 움직였다. 

최상의 상태는 아니지만 여운휘는 최대한 태연한 척 걸었다. 방문을 여니 같은 방 

을 쓰는 세 명 모두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진 소협. 어디를 갔다 오신 겁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주변을 살피고 왔다." 

짧게 말을 끊고 여운휘는 침상 위에 앉았다. 매화검 죽생이 얼굴빛이 파리한 여운휘 

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아무런 것도 캐묻지 못했다. 

옆에 있던 무적십수 우화립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는 언제 움직이게 됩니까?" 

"곧 광한검 어르신이 올 게다. 그때 작전에 대해 듣는다. 지금 당장은 힘든 일에 투 

입되지 않으니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럼 광한검 어르신은 언제쯤에나……" 

"모른다." 

너무나 쉽게 모른다는 말을 내뱉자 우화립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가다듬던 여운휘가 우화립에게 말했다. 

"무턱대고 기다리는 건 아니다. 내일, 아니면 모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양일 중 

광한검 어르신이 도착하실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 움직이면 되는 거고." 

말을 마친 여운휘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가 침묵하자 다른 셋 또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발자국 속에 무한한 변화가 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칼끝에도 수많은 검로 

가 꿈틀거린다. 

일마의 제자가 된 후 사무린의 검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원래부터 망설임이 없 

던 그녀에게 일마의 검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망설이지 않는 검. 그것이 바로 일마 

의 검의 특징이다. 

누가 검을 휘두르면서 망설이지 않겠냐 하지만 글쎄…… 

대부분의 사람은 검을 휘두르기 전에 은연중에 몸을 움츠리곤 한다. 죽여야 할 상대 

에 대한 측은지심, 알 수 없는 공포감들이 온 몸을 엄습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 

지만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지만 사무린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일마의 검법 또한 그렇다. 

검법과 검을 쓰는 주인이 너무나 잘 만났다. 그 탓에 사무린은 일취월장이라는 말 

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발전을 보인 것이다. 

검귀 천일혼에게는 패했지만 그를 제하고는 천하제일의 무인이었던 구취향의 혈루검 

법은 사무린만의 비밀이다. 그녀는 그것에 관해서는 일마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 

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은 엄백린과 사무린이 전부다. 

긴 검무가 끝나자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무린은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서는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진린의 머리라고까지 하는 좌운이라는 자다. 

"멋진 검식이야. 진린이 제대로 가르친 모양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스승님께서는 돌아오셨나요?" 

"진린이야 지금 돌아와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지." 

"어떻던가요. 여운휘를 만난 소감이." 

사무린은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좌운의 눈이 사무린을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땠다. 

"내가 보기엔 굉장한 놈이더군." 

"그럼 스승님께서는요? 스승님은 그를 어떻게 하기로 했죠?" 

"진린 또한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곁에 두고 싶은 눈치더군. 아마도 우리편으로 끌 

어들이려고 할 게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되는 것 또 

한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다. 여운휘가 있다면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밑 

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런 모양이다. 어딜 가나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사내. 

"쉽지 않을 걸요. 그 남자 생긴 것과는 달리 한 가지를 정하면 끝까지 밀어 붙이는 

우직함이 있어서요." 

"아아, 아마도 힘들 거라고 나도 말했지. 하지만 진린 또한 바보는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순간이라면 아무리 여운휘라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게야. 그리고 안 된다 해 

도 큰 문제는 없어. 우리 거사에 반드시 필요한 자가 아닌 이상 죽어도 상관 없으니 

까."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저를 찾아오셨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요." 

사무린은 깊이까지는 모르지만 좌운을 안다. 겨우 이런 이야기를 해주려고 이곳까 

지 발걸음을 할 리가 없다. 그녀가 아는 좌운은 그리 시간이 남는 위인이 아니다. 

"눈치 하나는 빠르군. 좋아 말하지. 여운휘에게 나중에 보낼 사자를 찾고 있는데 너 

를 보낼 생각이야. 나름대로 안면도 있고 하니 너만한 인물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 

야." 

"저를 말인가요?" 

"그래." 

"호호, 전 그 사내를 증오해요. 그리고 만난다면 여운휘 그 자를 죽일지도 몰라요." 

사무린의 말에 좌운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사무린의 화를 

돋구었다. 

"그를 죽이겠다? 네가? 우스운 소리! 비록 네년이 강해졌다고 하지만 너는 아직 여 

운휘의 상대가 아니다!" 

"……" 

"너는 영리한 계집이야. 질 것 같으면 싸우지 않지. 아마 만나보면 알 게야. 네년 

은 여운휘를 향해 검을 뽑을 수 없다. 그럼 이만 할 말은 전했으니 물러가지. 조만 

간 움직여야 할 테니 준비 해 두도록." 

말을 마친 좌운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사무린의 눈은 좌운이 사라진 그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정도의 차이란 말야?' 

그토록 미치게 강해지려 했거늘 아직도 그만한 괴리가 있는 모양이다. 여운휘는 마 

교와 싸울 힘을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였을 게다. 그리고 사무린 본인 

은 무공에만 열중했고. 그런데도 좌운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실력 차가 눈에 보 

일 정도라는 건데…… 

'싸움은 무공이 다가 아니야. 좌운 당신 정도라면 알 텐데. 머리, 머리만 쓴다면 나 

보다 몇 수 위의 고수라고 해도 죽일 수 있어. 여운휘도…… 예외는 아냐.' 

사무린은 독기 어린 눈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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