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對立)
쏴아아!
낙엽들을 휩쓸며 휘몰아치는 바람이 흡사 빗줄기와도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신강. 천산 마교가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가을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온 주변을 감쌌다. 신강에 도착한 무인들은 객잔에서 짐
을 풀었다. 워낙 인원도 많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열 개 정도로 조를 나누어 객잔
에 머무르게 됐다.
여운휘와 같이 객잔에 묶게 된 인원은 열 두 명.
그의 옆에 서있던 무인 중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식사는……”
“알아서들 해. 나는 나중에 따로 식사를 할 테니까.”
말을 마친 여운휘는 앞에 있는 점소이에게 말했다.
“방 남은 게 몇 개나 있지?”
“아, 대략 여섯 개 정도가 남았습니다.”
여운휘는 자신의 뒤를 쫓아온 무인들을 힐끔 바라봤다. 여자가 셋에 남자가 아홉이
다.
“방 네 개를 빌리지.”
여자들을 한 방에 넣고 남자들을 적당히 나눌 생각으로 여운휘는 네 개의 방을 잡았
다.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따라오라며 위로 올라섰다.
다른 자들은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 앉았지만 여운휘는 점소이를 따라 방으로 움직
였다.
편안히 쉬라는 점소이의 말을 뒤로하고 여운휘는 문을 닫았다.
꽤나 널찍한 방이다. 여운휘는 짐을 한 쪽에 풀어 두고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신강에 가까워지자 감회가 새롭다. 쫓겨나왔지만 지금은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그
들을 겨눌 칼을 가지고서.
싸움은 길어질 것이다. 마교와 무림맹의 힘은 그 누가 압도적이지 못하다. 물론 마
교의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장강수로십팔채를 등에 업은 무림맹의 힘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전술의 운용만 잘 한다면 무림맹이 마교를 이길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대부분
의 사람들은 마교와 무림맹이 백중지세를 이룰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운휘는 그렇지 않았다.
무림맹의 힘은 마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마교에는 흑색기마대가 있고, 무
림맹 쪽에서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강호십일객 중 최고 고수인 일마가 있다.
그에 반해 무림맹에는 무엇이 있는가. 척마신풍대? 빼어난 무인들의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흑색기마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더군다나 일마를 이길 만한 무인도 없는 지금 무림맹은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알면서도 이 길을 걷는 것은 이유가 있다. 분명 무림맹이 밀리겠지만 쉽사리 패하
지 않을 거라는 점은 여운휘도 동감한다.
암황, 그리고 유가.
잘 이용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다. 두 세력의 싸움이 길어질수록 기회는 생길
것이고 그 틈에 여운휘는 유가의 모든 세력을 이용해 마교의 뒤를 칠 것이다.
유설린은 마교 교주였던 유백명의 외동딸이다. 더군다나 지금 마교의 교주로 있는
엄백린의 행동에 수많은 무인들이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심지어는 그런 엄백린을
도와 전 교주였던 유백명을 죽음에 몰게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
또한 많다고 한다.
유가의 세력은 구파일방의 하나보다 약간 못 미치는 정도다. 더군다나 약육강식이라
고는 하나 마교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유설린.
무림맹과 싸우고 있는 마교의 무인들도 쉽게 뒤로 빠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등
을 보인다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동안 마교의 정리는 끝
난다.
잘만 된다면…… 일년 안에 이 모든 일이 해결 될 것이다.
끼익.
문이 열리며 낯이 익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문을 열고서도 안으로 들
어오지 못하고 쭈뼛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그게 아니라……”
말도 채 끝내지 못하는 사내를 보며 여운휘는 얼핏 알아차렸다.
그들에게 여운휘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위,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을 일게 만드는 강호십
일객과 손을 겨루고도 밀리지 않은 사내, 마교의 최고의 무력단체로 알려진 흑색기
마대 사이에서 단신으로 무인들을 구해낸 자.
자신들과 같아 보일 리가 없다.
같은 무림에 몸 담고 있어도 자신들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것이다.
“문을 열었으면 안으로 들어올 것이지 왜 거기 서 있나.”
“아, 예. 죄송합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꽤나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자로 그의 주무
기는 봉이다. 서문필이라고 알려진 그는 구파, 일방, 오대세가 같은 곳의 무인이 아
니라 가전의 봉술을 익힌 자다.
서문필은 사내로 보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 봉술만큼은
깊이를 알 수 없다.
여운휘가 보기에 그는 뛰어난 무골이다. 만약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무공을 익
혔다면 능히 십대후기지수에 손꼽힐 만한 자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사내 둘은 명문정파의 무인이다.
매화검(梅花劍) 죽생과 무적십수(無敵十手) 우화립이다.
죽생은 화산파의 무인이고 우화립은 산동에서 이름을 떨치는 우가의 인물이다. 둘
모두 무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자들로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셋 모두 실력이 빼어난 자들이지만 여운휘의 앞에 서자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죽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진 소협, 식사는 어찌하시겠소?”
“별로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식사 정도는 하는 게 어떻습니까?”
무적십수 우화립이 경외감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손은 매섭기로 유명
하다. 특히 산동에서는 우화립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외지인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고 할 정도다.
십수 안에 모든 적들을 쓰러트렸기에 생긴 별호 무적십수.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명상에 잠기고 싶군.”
“이런. 저희가 괜한 방해가 된 것 같습니다.”
여운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었다. 모두의 눈이 여운휘에게로 쏠
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자 곧 그들은 시들시들해지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지
루하게만 생각하던 죽생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미, 미친. 도대체……’
네 시진 이상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움직임이 없다. 그 긴 시간 동안 심법에
만 열중하고 있다는 소리다. 지쳐서 조금 쉴 만도 하련만 여운휘에게서 그러한 것
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둔다면 네 시진이 문제가 아니고 하루 이틀은 꼴딱 새고도 남을 것만 같다.
엄청난 집중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
죽생이 감탄을 하고 있는데 돌처럼 굳어 있던 여운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여운휘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죽생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가까스로 몸
의 균형을 잡은 그는 급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여운휘를 바라봤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군.”
여운휘의 말에 모두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개인행동을 잘 하지 않던 그다. 그
런 여운휘가 갑자기 어딘가를 나갔다 온다고 하자 의문이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여운휘는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객잔
아래에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거렸다.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운휘의 얼굴에는 나름대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명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의 전음이 귓가를 때렸다.
두리번거리던 여운휘의 눈이 멈추었다. 객잔 구석에서 한 병의 술을 앞에 두고 있
는 중년의 사내를 발견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인데 술잔은 두개다.
‘저자군.’
두말할 것도 없다. 여운휘는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중년의 사내는 의자 옆까지 다가온 여운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에 차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마신 사내가 소매로 입가에 뭍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있지 말고 앉지 그러나.”
“……”
여운휘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앞에 있는 중년의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략
오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고 몸은 잘 단련 되어 있었다. 중년의 사내 또한 여운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자 받게.”
여운휘는 잔을 들어 중년 사내의 앞으로 내밀었고, 그는 천천히 술병을 기울였다.
술이 술잔으로 들어가는 순간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누구요.”
“술이나 받고……”
“누구냐고 물었소.”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여운휘를 바라봤다.
콸콸.
술이 잔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해서 넘쳤다. 떨어진 술을 상과 여운휘의 손목을 적셨
다. 피식 웃은 중년의 사내가 병을 세웠다.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던 술도 멈췄다.
“…… 후후. 아까운 술 다 버렸군.”
중년의 사내는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
다.
여운휘는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에게 전음을 보낸 당신은…… 누구요.”
“내가 누구냐? 후후.”
중년의 사내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반면 여운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술
을 마시는 모습 하나 하나, 그리고 웃는 행동 하나 하나에서도 왠지 모를 위압감이
터져 나온다.
‘이 자는…… 고수야. 그것도 초고수.’
중년의 사내는 앞에 앉아 있는 여운휘의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보라는 듯 잔을 코
앞으로 들이밀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잔 속에 있는 술이 미친 듯 휘돌기 시작한 것이다.
단 한 방울의 술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여운휘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
운 감정이 담겼다.
쾅!
잔을 내려치자 미칠 듯 돌던 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생전 처음 여운휘는 허리춤에 검이 있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만큼 소름 돋는
광경이다.
'쓸데없는 짓.'
검을 겨누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격이 다르면 검
은 무용지물이다. 들어봤자 쓸모 없는 검은 이미 무거운 짐에 불과하다.
"나가지."
중년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운휘는 망설였지만 곧 그 뒤를 따랐
다. 이 만한 자가 죽이려고 든다면 아무리 여운휘라고 해도 살아남기 힘들다.
객잔 밖은 꽤나 쌀쌀하다. 겨울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을 밤의 바람도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충분하다.
반 시진 정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의 사내는 앞장서
서 걸었고 여운휘는 그 뒤를 쫓기만 했다. 중년의 사내가 마침내 움직이던 발을 멈
췄다.
사방의 공간이 대나무로 가득하다. 주변에는 인가조차 보이지 않고 사람의 흔적도
전혀 없다.
적막하다. 그저 가을의 쓸쓸한 바람만이 대나무 숲을 흔들었다.
중년의 사내는 여운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운휘…… 라고 했던가."
"……!"
여운휘는 놀란 듯 상대를 바라봤다. 여운휘는 중년의 사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눈
치를 챈 상태다. 비록 생긴 것이 예상보다 훨씬 젊지만 녹포괴존은 어떠한가. 나이
에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미부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앞에 있는 이 사내가 예상한 그 자가 맞다면…… 이 정도로 어려 보이는 것도 불가
능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안다는 것이
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유설린을 안다는 말.
아무리 여운휘라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에게 그런 약점
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태연하려 했다.
"별로 놀라지 않는 군. 예상외야. 아니면…… 놀라면서도 아닌 척 하는 건가?"
여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중년의 사내는 여운휘가 대답할 의사
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말을 이었다.
"물었지? 내 정체가 뭐냐고."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지만 확인을 하고 싶었다. 이 자가 만
약 예상했던 그 자라면 상황은 최악이다.
"호사가(好事家)들은 나를 가리켜 일마라고 하지. 아마 자네도 내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걸세."
"당신이 일마군.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그런데 당신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여운휘는 일마가 마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마교에 유가의 세력이 깊게 깔려 있다는 것을 공공
연히 말해주는 것이니까.
그 탓에 마치 무슨 일이냐는 듯 자연스러운 반응을 내비친 것이다.
"내 이름을 듣고 이렇게 태연한 놈은 네가 처음이다."
실로 감탄한 듯한 얼굴이다. 그만큼 일마는 본연의 별호에 자신이 있었던 게다.
다시금 세찬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들었고 귀기(鬼氣)어린 소리가 온 주변을 채웠
다. 일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음산하게 다가왔다.
"귀운필진(歸澐必振)이라는 내 말을 이해하느냐."
생각해봤던 말이다. 심법인 무상회천진결을 배우고 나서 여러 가지 심득을 깨우쳤
다. 그리고 개중에 하나가 귀운필진과 비슷한 의미를 지녔다.
여운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단하군. 나조차도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든 후에야 깨달은 것이거늘."
천하의 기재였던 일마 조차도 사십 대에 들어서서야 깨우친 심득이거늘 아직 어린
사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했다. 심득의 의미를 묻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
다.
거짓을 말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 챈지 오래다.
왜 백무량이 이토록 여운휘라는 사내에게 신경을 썼는지도 알 것 같다. 이만한 상대
라면 백무량과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호적수가 있다는 건 분명 피가 끓는
일이다. 그만큼 무공의 진전도 빨라지고 목표가 생긴다.
이곳에 오면서 여운휘를 죽일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쏙 사라졌다. 대
신 일마는 손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가볍게 손을 겨루어 보고 싶은데,"
"……"
여운휘는 내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곳까지 일마가 왔기에 자신을 죽이러 왔거나
유설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무공의 심득을 묻고
는 가벼이 손을 겨루어 보고 싶다고 한다.
'무슨 꿍꿍이냐.'
당장에 캐묻고 싶다. 도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하냐고. 하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여운휘는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으로 있어야 한다.
"좋소. 나 또한 천하제일이라는 일마와 손을 겨룬다면 얻을 게 있겠지."
"네 놈은 건방진 건지 아니면 용감한 건지 모르겠군."
재밌다는 듯이 슬쩍 웃으며 일마가 말했다. 가벼이 손을 겨루자고 했지만 상대도 상
대 나름이다. 일마의 가볍다는 의미가 어떤지는 모르지 않을 터. 그런데도 저토록
대꾸하니 일마 본인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린 것이다.
여운휘는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 숲이라 움직임이 용이치 않다. 조금만 잘못 움직인다면 대나무에 걸려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바로 패배에 이르게 된다. 단순히 손을 나눠보자고 했지만 일마
의 정체를 아는 여운휘로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죽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인 탓이다.
"네가 먼저 덤벼라. 3 초를 양보하지."
여운휘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날리면서 여운휘는 검을 꺼냈다. 처음 일격
은 일마의 머리를 스쳤다. 일마가 고개를 숙였던 탓에 검은 뒤에 있던 대나무들을
벴고 그 순간 검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일마는 슬쩍 검을 피했다.
'어려!'
양보했던 3초 중 2초를 낭비했다. 그것도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이는 단순한 쾌검으
로. 그리고 약조했던 마지막 3초가 터져 나오는 순간 일마는 눈을 찌푸렸다. 여태까
지와 다를 바가 없는 탓이다.
그런데……
"엇?"
일마는 움직이려는 순간 다리를 막고 있는 대나무를 느꼈다. 여태까지의 2초를 헛되
게 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다.
타앙!
일마는 다리에 걸린 대나무를 오히려 차 올렸다. 그리고는 대나무에 내공을 주입하
며 검을 맞댔다. 방금 전만 해도 그토록 수월하게 잘리던 대나무였거늘 지금은 오히
려 철보다 단단하다.
"3초를 모두 양보했으니 이제 가지."
맞대고 있던 대나무의 힘이 느슨해지는 찰나 일마의 몸이 어느새 여운휘의 위에서
나타났다. 발이 여운휘의 백회혈을 내려쳤다. 간신히 막아냈지만 그 묵중한 무게에
여운휘는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채 반응도 하기 전 어느새 일마의 몸이 여운휘의 가슴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칫!'
여운휘는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내공을 가슴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타격음
과 함께 여운휘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났다. 그토록 질긴 대나무들이 단숨에 박살났
다. 그렇게 삼 장을 날아간 여운휘는 땅을 뒹굴었다.
여운휘의 가슴에 일마의 쌍장이 작렬한 것이다. 일마는 얼굴에 뭍은 피를 닦아냈
다.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 여운휘의 입에서 피분수처럼 터져 나왔던 피가 얼굴에 묻
은 것이다.
하지만 일마의 표정은 한층 진지해져 있었다.
그렇게 쓰러져 있는 여운휘를 바라보던 일마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라."
부스스.
여운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박산 난 대나무의 파편들이 땅으
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소매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일마는 쌍장이 가슴을 격타하는 순간 느꼈다. 분명 정확하게 가격했지만 그 때 밀
려 든 반탄력에 일마조차도 주춤 물러서 버린 것이다.
"쿨럭!"
기침을 하던 여운휘의 입에서 다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분명 죽을 만큼의 내
상은 아니었다. 일마는 그런 여운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죽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 있지만 아직도 눈만큼은 생기를 잃지 않고 있다.
"네 놈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그 반탄력도 그렇고 이토록 압도적인 상대에게도 쉽게 꺾이지 않는 패기.
일마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대나무 숲을 유유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몸 조리 잘하거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게다. 그리고 그때는…… 적이거나 아군
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구나. 푸하하!"
신나게 웃으며 사라지는 일마를 끝까지 바라보던 여운휘도 떨어져 버린 검을 주워
들고 몸을 돌렸다.
몸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의 내상을 입었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일마의 실력이 이 정도란 말인가.'
녹포괴존이 둘 있다고 해도 이길 수 없다.
팔황과 쌍존의 하나였던 녹포괴존의 수준이 달랐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다. 녹포
괴존과 일마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문제다.
'지금처럼 무공을 익혀서 이길 수 있을까?'
여운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비록 실력은 한참 아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할 상대다. 어떻게든 이기고야 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 살려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객잔을 향해 돌아가는 여운휘의 발이 무거운 것은 비단 내상뿐만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