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37)

무현은 다가오는 사내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시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무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무현은 숨을 

들이켰다. 

'헙!'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공포가 온 몸을 엄습했다. 방금 전까지도 그렇지만 적이 

었다 해도 싸울 투지를 가지지 못했을 게다. 사내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끼리의 싸움은 금한다. 어기는 자는 어느 출신이던 간에 척마신풍대에 

서 나갈 각오를 해야 할거다." 

사내는 말을 마치고 힐끔 옆을 바라봤다. 

독기 가득한 눈. 무현은 이미 싸울 투지를 잃었지만 쓰러진 형을 위하여 검을 든 구 

문지는 이를 악 다물고 있었다. 사내는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척마신풍대 소속이냐." 

"아니다!" 

사내가 손을 뻗었다. 

"검을 내놔라." 

"우, 웃기는 소리! 난 반드시 저 놈의 목을 따버리고 말겠다!" 

한 눈에 봐도 오기라는 것을 알 정도다. 더군다나 방금 전 무현과 구문지의 대결을 

봤다면 더더욱 그렇다. 구문지는 무골이 아니다. 구문지 또한 나름대로 무공을 배우 

긴 했으나 그의 형인 구궁현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런 그가 무현과 싸워 이길 턱 

이 없다. 

구문지 또한 손을 뻗어 검을 내놓으라며 서 있는 자가 엄청난 고수라는 건 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내주지 않았다. 

검을 건네주는 대신 구문지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단숨에 무현을 

향해 검을 날리려고 했다. 뭔가 투지를 잃은 듯 서 있는 무현은 빈틈 투성이였다. 

'운이 좋다면!' 

성공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늘 채 몇 발자국 때지도 못하고 뒤로 넘어져 버렸 

다. 어느새 다가온 사내가 옷깃을 잡고 잡아당긴 것이다. 구문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내를 향해 독기 가득한 눈을 돌렸다. 

절호의 기회를 저 사내 때문에 날려 버린 것이다. 

"왜 막은 거야! 네가 막지 않았다면 벨 수도 있……" 

"불가(不可)." 

"뭐, 뭐라고! 어째서 불가하다는 거냐!" 

"너의 검이 분광검법(分光劍法)보다 빠른가?" 

"……" 

구문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점창파의 분광검법은 엄청난 쾌검이다. 점창파 

를 대표하는 검법 중 하나로 그 속도는 눈으로 쫓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가문의 무공을 대성했다 해도 반보는 족히 뒤진다. 

가만히 서 있던 구문지는 천천히 검을 내려트렸다. 

탕! 

검이 땅에 떨어지면서 묵은 마음을 씻기는 듯한 청명한 검명을 토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모습을 드러낸 사내로 쏟아졌다. 특별히 무공을 펼쳐 보이지도 않 

았지만 왠지 모를 무게감이 사내 주변에 가득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사내의 정체 

를 아는 자의 수도 적지 않았다. 

처음부터 척마신풍대에 있었던 무인이라면 사내의 정체를 모를 수가 없다. 

"말했듯이 싸움을 벌이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척마신풍대의 지객인 진군휘라면 이 

정도 명령을 내리는 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사내의 정체를 모르던 자들의 눈에 

는 이채가 일었다. 혹시나 했던 자도 있었지만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자들도 수두 

룩했다. 

무림맹 내부다 보니 수많은 고수가 있을 테고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지금 나타난 사내의 정체가 척마신풍대의 지객인 진군 

휘라는 사실을. 

척마신풍대는 패배했지만 단 한 명의 사내 탓에 오히려 무림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것이 바로 진군휘다. 

어떻게 보면 무림의 신화라고 까지 볼 수 있는 사내가 아니던가. 

여운휘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눈은 경외감이 가득했다. 나이는 그다지 차이가 나 보 

이지 않는데 그만큼 대단한 무위를 가졌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광한검 누 대협과 대충 이야기를 끝냈다. 우리는 내일 모래 무림맹을 떠난다. 천객 

인 백산이 다시 이곳에 합류하면 그때 조를 편성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마 

교지 옆에 있는 자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부의 다툼은 엄중히 처벌한다. 이 

상." 

무림맹의 내부 회의가 열렸다. 

출전을 하기 전 모든 수뇌부들이 모이는 마지막 회의였다. 그에 따라 모인 무인들 

의 숫자는 거의 오십 명에 육박했다. 

종리회연이 입을 열었다. 

"내일 움직일 부대는 세 개입니다. 그리고 내일 모래 척마신풍대가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본진을 그로부터 이틀 후에 무림맹을 벗어날 예정입니다." 

사람 수는 많지만 그에 반해 안은 너무나 조용하다. 작게 소곤거리기만 해도 이 정 

도 인원이라면 시끄러울 법도 한데 이토록 조용한 것을 보니 한 마디 말도 없는 모 

양이다. 

이 일의 중대성 때문이다. 무림맹은 지금 목숨을 건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사대전(正邪大戰). 

말로만 들었지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할아버지뻘이나 경험해 봤을 만한 

일들. 이곳에 모인 자들의 나이가 대다수가 육십을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 

한 시간차다. 

마교 또한 무림맹과 충돌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탓 

에 자잘한 싸움은 몰라도 이처럼 정사 대 격돌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칼을 뽑아 들어야 할 때. 

마교에서 엄청난 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이빨을 들이민 것을 보면 무엇 

인가 승리를 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없이 무턱대고 싸움을 

걸어왔을 리가 없다.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가 이 싸움의 판세를 크게 좌지우지 할 위력 

을 지녔을 것이다. 

"내부에 문제는 없는가?" 

공동파 장문인의 말에 종리회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내부에 자잘한 싸움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가 진정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교와 

전면전이 벌어지면 더욱 내부의 결속이 강화 될 것입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 

다." 

"다른 건 몰라도 척마신풍대가 저번과도 같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오. 

군사."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보다 치밀한 작전을 토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종리회연에게 일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은 무당파의 장로로 양의검법 

(兩儀劍法)의 달인이다. 그는 도인답게 너그러운 자지만 검을 들면 자비조차 없다 

고 불린다. 

척마신풍대의 이름이 나오자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가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의 몸에서는 꽤나 지독한 악취가 풍겼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 

지 못했다. 

그 누가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정보망과 문도수를 가진 개방의 방주에 

게 함부로 말을 하겠는가. 

"진군휘라는 자는 왔나?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야." 

"예, 아까 전 도착했습니다. 광한검 어르신의 말대로라면 싸움이 잦았던 척마신풍대 

의 소란도 잠잠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클클!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의 반 정도만 되는 자라 해도 인재야 인재. 그런 자가 

개방에 있었더라면 더욱이 좋았을 것을." 

개방 방주는 자신의 더러워진 옷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소매를 가져다 대고 코를 훌 

쩍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무림에서 지닌 비중이 적지 않은 자들이다. 

비록 이렇게 모여 있지만 이들 하나가 무림 어디에 모습을 드러내면 당장에 주변으 

로 소문이 퍼질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러한 그들도 오늘만큼은 긴장할 수 밖에 없 

다. 

마교와의 전면전이 벌어질 테니까. 

종리회연은 그밖에도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회의가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수고하셔야 할 겁니다. 패배하면 정도 

무림의 판도가 바뀝니다." 

"그 따위 놈들에게 패할 우리가 아니지. 두고보게. 내 이 타구봉으로 그 놈들을 혼 

쭐 내주지." 

개방 방주가 씨익 웃었다. 

준동(蠢動) 

무림맹의 전쟁선포는 마교의 무인들을 바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있을 큰 전투에 마교의 무인들은 눈을 빛냈다. 무를 숭상하는 그들로서는 

자신의 무공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이 

미 뒷전이다.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걸었으니, 이제는 그 목숨을 던져보려고 한다. 

마교를 움직이는 것은 진린이다. 이제는 거의 대놓다 시피 진린이 마교의 세력들에 

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물론 지금 마교의 교주는 엄백린이다. 그리고 진린이 그에 

게 칼을 겨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있는 자들이라면 실제로 마교의 실세가 누구인지 안다. 

이미 마교의 교주인 엄백린은 사람의 구실도 하지 못하는 폐인에 불과했다. 

마교 교주 엄백린의 거처의 공기가 무겁다. 한창 무림맹과의 전쟁 탓에 수하들이 바 

삐 들락날락 해야 하는 곳이거늘 오히려 너무 적막하다. 아무도 없다. 오로지 엄백 

린만이 침상에 누운 채로 가늘게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흐으, 흐으!" 

살이 많았던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근육에 보기 좋은 몸을 하고 있던 그다. 

볼품 없었던 외모의 소유자였던 만큼 몸에 더 신경을 쏟아 부었던 탓이다. 

추레했던 외모만큼 당당하려 했고, 강해지려고 했다. 그토록 강인하려 했던 엄백린 

의 지금 모습은 그 누가 봐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였다.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침상에 누운 그의 눈에서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드문드문 눈에는 새파란 독기가 일었다. 

"진…… 린!" 

엄백린이 비록 대단히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 

다. 지금 이 상황을 분석하지 못할 정도의 머리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 

다. 

알았지만 너무 늦은 후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어떻게든 해 봤겠지만 지금은 늦어 

도 너무 늦었다. 이미 되돌리기 힘든 시간. 옆에 있던 수하들의 모습이 하나씩 사라 

질 때 알았어야 한다. 

후회는 언제나 늦은 후에 찾아온다. 

"흐흐흐!" 

낮은 조소가 방 안을 울린다. 

지금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마교의 수뇌부들이 모였다. 

상석에는 진린이 앉아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수많은 자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개중에서 유독 눈에 뛰는 사내가 있었다. 

흑색기마대와 견주어 지는 마교 최강의 부대인 금천멸문대의 수장인 무패도(無敗 

刀) 사욱천이다.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도는 변화무쌍하다. 강력한 힘 

도 실렸지만 또한 수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도법을 사용한다. 

무패도. 

패한 적이 없는 도라는 소리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만한 무인인지 짐작케 했다. 

진린이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교주님께서 몸이 편찮으신 지라 내가 모든 일을 전담하고 있소이다. 무림 

맹이 건방지게 우리 마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우리도 모든 준비를 끝냈소이다. 

남은 건 전진 뿐이 남았소. 궁금한 것이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분 계시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마교를 휘어잡은 자다. 함부로 그의 앞에서 입을 놀리다가는 죽 

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마교는 약육강식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엄백린은 아무런 인 

맥도 없었다. 

그 누구도 지금 밀려나고 있는 엄백린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럼 세부사항을 전하도록 하겠소. 그럼 혈랑대." 

"옙!" 

진린은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의 사내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때부터 약 반 시진 

정도 진린의 명령이 계속 됐다. 이야기가 대충 끝나자 모두가 자리를 뜨기 위해 일 

어섰다. 

진린 또한 몸을 돌려나가려고 하는데 금천멸문대의 수장인 사욱천이 그를 불렀다. 

"귀검사영." 

"음? 무슨 일인가?" 

진린은 자신의 별호를 부르는 사욱천을 바라봤다. 

진린 또한 다른 자들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했지만 유독 사욱천에게만은 나 

름대로 대우를 해주는 처지였다. 금천멸문대의 수장이기도 했고, 또한 그 개인의 세 

력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군." 

"일이 바쁘긴 하지만 간단한 이야기라면." 

"그리 길지 않을 걸세." 

말을 마친 사욱천은 자리에 앉았고 진린은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쪽을 바라보 

던 몇몇의 인물들이 화들짝 놀라며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진린은 모두가 나간 것 

을 확인하고 사욱천 건너편에 앉았다. 

사욱천은 진린을 뚫어져라 봤다. 사람의 폐부까지 훑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눈빛이 

다. 진린이 입을 때려는 순간 사욱천이 먼저 말문을 텄다. 

"자네의 속셈이 뭔지 모르겠군."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나의 속셈이라니?" 

"돌리지 않고 말하지.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겨우 마교의 교주가 되려는 것 

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엇을 꿈꾸는 겐가 자네는." 

진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난 그저 교주님을 충실히 보좌하는……" 

쾅! 

사욱천은 주먹으로 상을 내려쳤다. 주먹으로 내리친 것뿐인데 그 커다란 상에 금이 

쩌적 가더니 천천히 양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진린은 그 같은 상황에서도 입가에 지 

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네가 뭘 해도 상관없네. 하지만 말이야 그 일이 우리 금천멸문대에 피해가 온다 

면 내 용서치 않겠네. 일전에도 자네의 부탁에 소교주를 잡기 위해 우리 금천멸문대 

에서 열 명 이상을 보냈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네의 불확실한 정보 

탓에 내 소중한 수하들이 모두 죽어 버렸네. 그것도 단 한 놈에게!" 

사욱천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진린을 노려보았다. 입가에 아직도 지어진 미소 

가 밉살스럽다. 당장에 주먹으로 그 비틀어진 입술을 짓뭉개버리고 싶다. 하지만 사 

욱천은 참아야만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렸다. 

사욱천의 모습이 방 안에서 사라지자 진린의 옆으로 그림자 같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린의 옆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좌운이다.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진린이 입을 열었다. 

"저 놈은 골칫거리야." 

"죽여야 한다면 죽여주지." 

"후후. 자네도 알지 않는가. 죽이려 한다면 어렵지 않지. 하지만 지금 죽여서는 안 

될 놈이야. 적어도 이번 정사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지." 

사욱천이 대단한 무인이기는 하나 진린이 죽이려 한다면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자다. 그가 누구인가? 천하 무림에 적수가 없다는 일마가 아니던가. 

'무패도. 패배를 모르는 도. 큭큭, 네 놈의 도는 꺾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이 네 제삿날이 되겠지. 네 놈의 살을 발라줄 것은 바로 나일 것이다.' 

진린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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